〈 152화 〉 148 안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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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안느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우르거는 안느 자신도 상대해본 적이 있다. 그보다 더 강한 이형종과도 싸워본 경험 또한 존재한다.
특히 7급 미궁인 유리병의 쌍맹독??? 31층에서 마주쳤던 희귀 이형종, 거대 쌍두사는 길이만 9m에 달했던데다 아룡으로 진화하기 직전인 것처럼 앞발 두 개까지 있던,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왼쪽 머리는 독 술법을 쓰고 오른쪽 머리는 술법 봉쇄의 마력운?力雲을 퍼트려 힘을 반감시키는 주제에 육체 능력만으로 사람을 찢어버리는 괴물 중의 괴물.
당시 자신과 비견되는 직업자 넷에 자신보다 더 강한 둘, 거기에 자신까지 총 일곱 명의 파티를 결성한 덕에 겨우 죽이긴 했지만 결국 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전투였다.
그랬던 괴물과 싸우기 직전만큼이나 긴장하고 있다니.
성불행이 끝나고 영혼이 사라지자 부부가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입에 담는다.
=정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영혼사님.=
=아버님을 성불시켜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방황하는 죄 없는 영혼을 성불시키는 것은 영혼사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감사 말씀은 그분을 향해 올리시기를 바랍니다.”
=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드리자면, 오늘 있었던 일을 다른 분께 알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네? 어, 어째서입니까? 영혼사님처럼 훌륭한 분은 좀 더 널리 알려야…….=
=당신도 참 눈치 없게!=
아내는 눈치 없이 되묻는 남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콱 찍은 뒤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을 두고 환인에게 허리를 깊게 숙였다.
=영혼사님의 말씀대로 오늘 있었던 일은 절대 남에게 밝히지 않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아앗, 잠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영혼사님!=
옆구리를 부여잡고 허덕이면서도 돌아가려는 환인을 붙잡은 쿼카 머리의 남자는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더니 주머니 하나를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영혼사님의 성불행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마련했습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부디 받아주세요, 영혼사님.=
환인은 잠시 부부를 응시하다가 두 손으로 주머니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두 분의 성의를 보아 사정이 어려운 분들을 돕는 데 사용하겠습니다.”
가정집을 나온 환인 일행은 골목 안쪽 구석진 곳으로 이동해 후드 로브를 벗고 다시 번화가로 나왔다.
밤 10시가 넘어가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인도에는 일정 간격으로 세워진 가로등이 하얀빛을 내뿜어 거리를 밝히고 있었고 부유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오가며 시끌시끌한 소리를 만들고 있다.
그런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하겔 드리온츠 호텔로 향하던 환인이 중얼거렸다.
“성도쯤 되는 곳이라서 방황하는 영혼이 많을 줄 알았는데 상상 이상으로 적은 편이군.”
=도시 정도가 되면 주기적으로 영혼사를 초청해서 정화제를 치르니까. 방황혼이 비상하게 쌓일 일은 없지.=
“……그 주기적이라는 건 보통 얼마 간격이지?”
환인의 질문에 안느는 자기 얼굴을 뒤덮을 정도의 커다란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린다.
=도시민을 많이 생각하는 영주라면 한 해에 한 번 정도? 3년이면 평범한 수준이고 악덕 영주 정도면 윤년의 승령천제 때나 할 거야. 이곳 파르히스트 성주는 돈도 많고 시민들을 많이 생각하는 편이니까 1년마다 부르겠지.=
“음.”
승령천제, 시두르에게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단어다. 윤년이면 4년에 한 번 돌아온다는 해인데 이 세상에도 존재하는 풍습이었나.
최소 4년마다 영혼사를 초빙해 성불행을 한다면 혼재가 발생할 일은 많이 줄긴 하겠군.
‘혼재를 두려워하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는 놈들도 그걸 믿는 건가.’
그때 안느가 큰 한숨을 내쉬는 소리에 환인과 이실리테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던 안느는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널 보고 있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복잡한 생각은 안 할래.=
“……?”
=대련하러 가자. 결과에 따라서 널 따라갈지 말지 결정하겠어.=
“그러지.”
환인의 성불행을 목격한 안느는 환인의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큰 고민이 생겼다.
환인 같은 남자는 자기 편의에 맞게끔 상황을 조율하는 데에 천부적인 타입이다.
계획하고 의도해서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꺼내는 말에 맞춰 자신의 마음마저 조절하는 부류라고 할까.
그 때문에 환인 같은 사람에게서는 진정성을 쉽게 느낄 수 있고 상대는 그 사람에게 쉽게 신뢰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안느는 이런 사람을 여럿 봐왔었다.
종족 재능 탓에 플뢰 중에서 야망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이런 타입이었던 것.
환인은 처음부터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자신과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입에 담는 말은 전부 사실이었고 하는 말도 진심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종족 재능인 진실의 주시자로 들었을 때는 그랬다.
사기꾼으로 대성하는 사람은 보통 이런 사람들이며, 플뢰들은 자신이 개방한 종족 재능에 굳센 믿음을 가지기에 한 번 믿은 사람은 재차 의심하는 법이 없어서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환인은 분명 그들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데 그들과 다르게 느껴진다.
이 차이는 뭐지?
파고들면 들수록 머리가 아팠기에 안느는 생각하길 포기했다.
일단 그의 언행은 일치했으니 만약 환인의 무술 실력이 이실리테의 말대로 대단하다면 일단 그를 따라 가볼 생각이다.
‘어째서 그 정치 괴물들하고 다르게 느껴지는지…… 같이 다니면서 지켜봐야지.’
중간에 그 차이를 알게 되고, 그게 자신의 가치관과 맞지 않으면 그때 가서 작별해도 된다.
그렇게 호텔 도착한 안느는 환인이 끌고 오는 쿠에 두 마리중 약간 작은 녹색 쿠에를 보며 작게 탄성을 질렀다.
=오호. 그 녀석이 비상식량이야? 과연 멋지게 생겼네.=
크흥?
이 사람은 누구야?
호감을 듬뿍 담은 시선으로 자신을 살펴보는 안느의 행동에 비상식량이 환인을 돌아본다.
“동료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안느다.”
쿠엣. 쿠우.
비상식량이 잘 부탁해 하며 부리 끝으로 안느의 뺨을 툭툭 건드리자 안느가 놀라며 환인에게 물었다.
=엇? 뭐야. 이 녀석 사람 말도 알아들어?=
“그래. 12살 정도 어린아이 수준은 된다. 완전한 성체가 되면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쿠흥.
뻐기듯이 턱을 들고 흥흥거리는 비상식량을 안느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을 때 비상식량의 등에 올라탄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손짓하면서 말했다.
“비상식량, 돌아가는 길에는 이실리테도 같이 태워다오.”
쿠응? 쿠엑.
“안느. 넌 쿠르티를 타고 따라와라. 장비는 가지고 있겠지?”
=어. 늘 들고 다니지.=
체중은 부담되지 않는지 안느를 태운 쿠르티도, 환인과 이실리테를 태운 비상식량도 무거워하는 기색은 없다.
한밤중의 번화가를 벗어나 빠르게 소장원으로 돌아온 환인은 안느에게 뒤뜰 정원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2층으로 올라가 창을 챙겼다.
“…….”
2층 방 창문에서는 뒤뜰을 내려다볼 수 있는데, 뒤뜰에 나가 있던 안느가 허리춤의 작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종이를 몇 장 꺼내 허공에 뿌리는 게 보였다.
화아악
종이가 정원의 허공에 고정되더니 눈이 부시지 않은 밝은 빛을 널리 퍼트리기 시작한다.
‘마도구인가.’
저것이야말로 마도구처럼 느껴지는 환인이었다. 그동안 그가 본 마도구는 전기로 작동하겠다 싶은 것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아공간 주머니나 가방 등은 겉으로 보기에는 티가 나지 않았고 말이다.
흑창을 챙긴 환인이 뒤뜰 정원으로 나가자 안느와 이실리테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거든. 혼자 다니면 다른 건 다 마음 편한데 미궁 들어가는 거 하고 도시 밖에서 먹는 거 챙기는 게 가장 힘들어.=
=플뢰 분들은 주식이 채소라면서요. 들풀이나 산나물을 채취해서 먹으면 안 되나요?=
=뭐가 뭔지 알아야 먹지…….=
=아…….=
=진짜 풀이라는 게 이게 저거 같고 요게 그거 같은데 한 번은 내가 독초를 먹어서—.=
둘의 대화를 들으며 빛 부적이 뿌리는 빛을 살펴본다.
빛 막대도 그랬지만, 저 부적도 빛을 똑바로 바라봐도 눈이 아리거나 부시지 않다는 게 신기하다. 무슨 효과인 걸까.
=아, 음. 사람마다 잘하는 건 다르니까요. 그런데 미궁 들어가는 게 어렵다는 건 조금 이해가 안 가네요. 행정관에서 파티 구인이나 구직 공고 내면 금방이지 않나요?=
=행정관에 등록한 놈들이라고 해서 다들 멀쩡하다는 보장은 없어. 기억해둬. 재물을 모으기 위해 모여있는 놈 중에서 정상은 반도 안 된다는 거.=
=정말요? 행정관은 호족님들 직속이잖아요. 행정관에 이름을 등록한 직업자나 행정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호족님이 무서워서라도…….=
“호족은 무섭지만, 도시 인접 미궁 정도가 아니면 그런 호족의 눈도 닿지 않겠지. 그리고 빛이 닿지 않는 미궁의 출입 관리병이 한 경고, 생각나지 않나.”
=미궁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파티 리더의 책임…….=
“높으신 분들이 구태여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책임을 현장에 밀어버린 거다. 그런 어른들의 사정에 개인의 사정이 겹치면 어마어마한 일이 간혹 벌어지기도 하지.”
=맞아. 으리으리한 일이 벌어지기도 해. 재물 욕심에 파티를 일부러 전멸로 몰아간다던가?=
안느가 킥킥 웃으면서 맞장구치자 이실리테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사람의 욕심하고 미궁의 익명성을 생각해봐. 대충 견적이 나오잖아. 아니면…… 이슬이 너는 미궁 경험이 별로 없나봐?=
=네……. 얼마 전에 웨이포드의 빛이 닿지 않는 미궁만 한 번 들어가 봤어요. 그런데 이슬이는 뭐에요?=
=이실리테라는 이름은 길어. 애칭으로 이슬이라고 하자고. 인, 넌 어떻게 생각해?=
“본인이 괜찮다면 상관없겠지.”
가볍게 대꾸한 환인은 정원에서 어둠이 물러간 것을 살펴본 뒤 빛 부적의 빛에 그림자가 진 안느에게 시선을 돌렸다.
워해머. 한쪽은 뭉툭한 망치 모양이고 반대쪽은 뾰족한 갈고리 모양의 무기를 어깨에 짊어지고 다른 한 손은 대방패를 세우고 있는 모습.
특이사항이라면 전투 망치, 워해머는 양손 둔기였고 타워 실드 형태의 대방패도 집의 문짝을 뜯어낸 듯한 사이즈다.
그런 무기와 방패를 안느가 들자 적당한 중급보병의 무기와 방패처럼 보인다는 게 무서운 점이다.
“준비는 끝났나.”
=어. 넌 방어구 안 입어?=
“너와 대결이라면 방어구는 무의미하겠지. 내 신체 방어력은 일반인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나은 수준이니까.”
그렇게 대답한 환인은 평범한 회색 튜닉에 바지 차림의 안느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세하게 살폈다.
키가 2.2m 정도에 몸무게는 대략 140kg 남짓해 보인다.
플뢰의 체급으로는 대단하지만, 체급뿐이라면 안느보다 더 나가는 종족은 꽤 많다.
인마족(일반인)의 경우에는 사람 쪽의 키까지 합쳐 2.5m에 가까운데다 몸무게는 400kg이 넘어가며, 고릴라 계통의 루크랑 족 남자들 근육은 지금 이실리테보다 더 두껍고 몸무게도 200kg에 가깝다.
그러한 체급 싸움(루크랑 족 한정)의 최종 보스는 인상족人??.
그 코끼리 인간들은 작은 쪽의 키도 2.5m가 넘어간다. 몸무게는 600kg이 평균이고 통뼈에 통가죽에 근육 밀도도 어마무시한, 타고난 전투의 종족이다.
특히 양손에 무기를 들고 코로 방패를 다루는 전투 스타일은 인상족만의 싸움법이라고.
아무튼, 환인은 서서히 투기를 내뿜는 안느의 시선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끼며 훗 웃었다.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군.’
우르거 이후로 이런 흥분은 처음인가. 아쉬운 것은 생명을 놓고 사투를 벌이는 게 아니라는 점이지만…….
‘아쉬움을 드러낼 일이 아니지.’
모자람을 떨쳐내듯 흑창을 한차례 붕 휘두른 환인은 최하급 영혼 구슬로 강령을 펼쳤다.
심장이 10%가량 빠르게 뛰기 시작하며 온몸에 열기가 번져가는 것을 환인이 느끼고 있을 무렵, 안느는 모골이 송연함을 느끼고 있었다.
‘저자식 뭐야?’
창을 한차례 휘두른 순간 좀 전까지 보여주던 냉철한 사기꾼 같은 면모는 사라지고 한 마리의 야수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서로 죽고 죽이자고, 피를 보며 춤을 추자고 유혹하는 피와 싸움에 미친 짐승.
만약 만족할만한 싸움을 하지 못한다면 짜증을 드러내며 이빨로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은 모습에 안느는 절로 하이가드 스탠스high guard stance를 취했다.
방패를 상단으로 들어 상체를 가리고 무기를 머리 위로 젖혀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하는 검방의 기본 자세.
기본은 라운드 실드로 펼치기에 다리와 하단이 훤히 드러나게 되지만 안느의 방패는 타워실드. 환인의 눈에는 눈 위쪽 머리 일부와 치켜든 오른손 일부밖에 보이지 않는다.
무슨 짓을 해도 무너지지 않을듯한 2m짜리 강철 벽을 마주한 느낌이지만…… 환인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시작하지.”
=이 미친 자식!=
안느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여태까지 사람과 싸워본 적은 많았지만, 환인처럼 거머리같이 방패에 달라붙는 놈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타워실드의 장점은 막강한 방어력과 가드 범위다. 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일단은 무게.
안느가 쓰는 타워 실드는 일반 타워 실드보다 2배는 더 크고 두껍다. 방패 무게만 성인 여성 몸무게는 될 정도다.
그러나 타고난 체격과 각성 직업 덕분에 타워 실드를 버클러처럼 가볍게 휘두를 수 있는 안느에게는 단점이 되지 않는다.
유일한 단점은 그 크기 때문에 안느의 시야도 대폭 잡아먹는다는 점. 하지만 그것도 큰 문제 되지 않았다.
방패에 들러붙으면 방패 째로 내려찍어버리거나 쳐날려버리면 해결 되었으니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떨어져!=
위우웅!
위상력을 머금은 특수 타워실드가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휘둘러졌지만, 환인은 그새 모습을 감추었다.
‘또 어디로 숨은 거야?!’
뭐 다람쥐의 피를 물려받기라도 했는지 방패를 휘두를 때마다 그 방패의 뒤에 숨어 사라지는데 환장할 지경이다.
뭐만 하면 시야에서 사라지기 일쑤. 안 보이니 공격을 못 하고 찾다 보면 몸 이곳저곳을 쿡쿡 찔리고 만다.
이미 그렇게 3번을 연속으로 패했다. 털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더 패배하는 건 죽어도 사양이다!
약이 바짝 오른 안느는 투핸디드 워 해머와 그레이터 타워 실드를 시야 좌우의 사각으로 휘두르며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이 망할 놈이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쿠궁!
악에 받친 소리와 함께 대리석 색상의 타워 실드가 땅을 찍자 쿠궁, 굉음과 함께 옅은 빛무리가 주변 3m 범위를 뒤덮으며 땅이 들썩거렸다.
그 충격에 흙과 자갈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지만, 보이라는 놈은 안 보이고 옆구리에 둔탁한 충격이 가해졌다.
하지만 고통과 충격을 피지컬로 씹어먹은 안느는 척추반사급으로 타워 실드를 눕혀 공격이 들어온 방향으로 칼처럼 휘둘렀다.
공격 목적이 아니다. 환인을 포착하기 위한 견제.
그리고 왼쪽 시야 가장자리에 사람 그림자를 포착한 순간.
=먹어랏!=
방패에 위상력을 가득 담아 부채처럼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바우우웅!!
시속 수십 킬로미터의 강풍이 잔디를, 땅을, 돌조각을 파편처럼 뿌리는 가운데 허벅지, 옆구리, 등과 목덜미에 연이어 쏟아진 보이지 않는 타격을 느낀 안느는 큭, 잇소리를 내며 워 해머와 타워 실드를 쿵! 땅에 찍었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옆으로 돌아갔는지 환인이 거기에 서있었다.
=또 졌다! 빌어먹을, 방패 선정부터가 틀려먹었어!=
작고 선한 플뢰 족의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씩씩거리며 분노를 토해낸다.
패배 선언에 환인이 후, 작게 숨을 내쉬며 흑창을 어깨에 걸쳤다.
“명불허전이군. 힘이 강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 이상이었어.”
이마에 땀 한 방울만 났을 뿐, 흙먼지조차 묻지 않은 멀쩡한 모습으로 후, 웃는 환인의 모습에 안느가 포효를 질렀다.
=으아악 짜증나! 야! 한 판 더 해!=
타워 실드를 근처에 팽개치려다 곱게 눕혀둔 안느는 씩씩거리면서 주머니에서 은색 카이트 실드, 연 모양 방패를 꺼내 들었다.
그 카이트 실드도 일반적인 것들보다 2배는 더 컸지만, 그 크기 탓에 안느의 체격 비율과 맞아떨어진다.
환인은 피식 웃으며 창을 내리고 대답했다.
“네가 수긍할 정도는 해야겠지.”
=와라!=
=잠시만요. 안느 씨 잠깐 앉아보실래요?=
=어? 응?=
그때 갑자기 끼어든 이실리테가 안느를 억지로 앉히더니 치렁치렁한 은빛 머리카락을 자신처럼 틀어 올려 묶어준다.
=됐어요. 아까 대련하실 때 보니까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라 하는 게 보이더라구요. 납득할만큼 뜨겁게 싸우려면 방해가 되는 요소는 정리해야죠.=
=어…… 고, 고마워?=
=그리고 조언 하나 드리자면 흥분하지 마세요. 흥분한 상태로 싸우면 주인님한테 죽어도 못 이겨요.=
=…….=
이실리테의 조언을 복잡한 얼굴로 받아들인 안느는 후, 짧게 한숨을 토해내고 미들 스탠스middle stance의 정석 자세를 잡는다.
그리고 분노를 털어내듯 피식 웃으며 말을 던졌다.
=인. 너 이슬이한테 미움받는 거 아냐? 아무리 봐도 너한테 불리한 조언을 해주는데?=
“그럴지도 모르지. 매일같이 대련을 명목으로 구타당하고 있으니.”
환인도 적당한 자세로 창을 내밀며 대답하자 이실리테가 하왓, 기묘한 소릴 내면서 부정했다.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귀여운 반응이네. 속으로 생각하며 씩 웃은 안느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환인을 응시하며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고…….
30분 후.
=아, 이거 사기야! 너 이 사기꾼 자식! 네가 무슨 영혼사라고! 솔직히 말해! 전투계열 특수 직업 각성했지?! 내 말 맞지?!=
“다친 건 나인데 성질은 네가 부리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의자에 앉아 이실리테가 가져온 범용 중급 회복제를 마시던 환인이 묻자 안느가 튜닉을 확 벗어 던지며 소리쳤다.
=넌 한 대밖에 안 맞았잖아! 그것도 방패로 스치듯이! 근데 난 100대는 맞았다고! 이거 봐!=
그리고 드러난 속살.
탱크탑 같은 것을 걸친 그 몸에 조각 같은 근육이 들어차지 않은 구석이 없다.
지방 비율은 2% 남짓.
유방을 구성하는 지방마저도 근육으로 변해버린 듯한 모습이지만, 보디빌딩 대회의 우승자처럼 핏줄과 힘줄이 뒤덮은 몸이 아니라 매끈하고 깨끗하기 그지없는 조각 같은 근육질이었다
흔히 슬림한 근육이라는 놈이다. 단지 두께가 비정상적일 뿐.
이실리테가 눈을 크게 뜨는 가운데 근육질의 복부와 옆구리, 어깨 등의 울긋불긋한 자국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7전 6패 1무승부. 안느의 성적이다.
1무승부는 마지막 대결의 승패로, 환인의 창 자루 끝이 안느의 목을 정확하게 찔러 승부가 난 순간 안느가 반사적으로 방패를 휘두르는 바람에 환인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옆구리로 스치듯 흘려보낸 까닭이었다.
그걸 환인은 사자死者의 일격이라고 하면서 무승부를 선언한 것.
‘역시 6급쯤 되니 공격 하나하나가 무시못할 수준이군.’
6급 직업자가 반사적으로 휘두른 방패였다.
자세도 정확하지 않아 힘도 제대로 안 실렸고 맞지도 않았다. 그저 살짝 스치고 지나갔을 뿐인데도 갈비뼈가 모두 부러졌다.
만약 정통으로 맞았다면 빈사 상태가 되지 않았을까.
=하…… 나 진짜 뭐 하는 년이야……. 기술의 차이가 아무리 심하다고 해도 일곱 번 싸워서 전부 지기나 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 부정과 분노, 타협을 넘어 우울 단계에 이른 안느를 보던 환인은 어느 정도 뼈가 붙은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옆구리가 욱신거린다. 목뼈에 금이 가다시피 했던 이실리테를 금방 치료했던 범용 중급 회복제라고 볼 수 없는 효과다.
‘역시 신전에서 제조한 회복제는 내게 효과가 별로 없군.’
그렇다고 해도 부러진 뼈를 아물게 했으니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급하면 따지지 않고 복용할 정도.
잘 때 핏빛 위상석을 쥐고 자야겠다고 생각한 환인은 엉망진창이 된 잔디밭에 힘없이 주저앉아있는 안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도 네가 지금까지 만난 무인 중 실력이 가장 뛰어났다. 그리고 강함이라는 건 기술만으로 결정 나는 것은 아니지.”
=…….=
“너도 네 능력을 전부 발휘하지 않았을 것 아니냐.”
=그건 그렇지…….=
죽상이던 안느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오늘 대결은 서로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지 알아보는 단계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7번 대결을 이어가며 나는 널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 네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군.”
=…….=
하, 짧은 한숨을 내쉰 안느가 죽을상을 치우고 일어서서 엉덩이를 툭툭 털며 말했다.
=한 가지 조건만 받아주면 네 일행에 합류하겠어.=
“가능한 한 참작하지.”
=네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내 가치관과 다를 경우 언제라도 파티를 이탈할 권한을 줘.=
“그 부분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야겠군. 야식, 괜찮나?”
=물론. 지금이라면 4인분도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그럼 야식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눠보지. 이실리테, 낮에 먹었던 수쯔 부탁한다.”
=네. 바로 준비할게요. 30분 정도 걸릴 거예요.=
재빨리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이실리테를 보며 환인은 기대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느낌상 80%는 넘어온 것 같다. 여기에 이실리테의 요리 솜씨를 보여주며 먹이를 흔들면…….
환인은 미소를 숨기며 안느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