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146 성도 파르히스트
* * *
=환인 님! 저 왔어요!=
주방에서 점심을 준비 중인 이실리테 대신 문을 열어준 환인은 점심 햇살에 반짝이는 금발 강아지 귀 소녀의 힘찬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십시오. 예상보다 일찍 왔군요.”
=네! 오전에 모은 미궁 자료하구 안 님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려고 왔어요!=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있는 데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먼 곳에서 쉬지 않고 달려온 듯한 모습이다.
그 목적이 분명해 환인은 드러나지 않게 웃으며 아루루를 집안으로 들였다.
“플뢰 분의 이름이 안 인가 보군요”
=네! 먼저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안 님은 환인 님의 제안에 호기심을 보이면서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오늘 저녁이 좋겠다고 하셨는데 뭐라고 전해드리면 될까요?=
“저도 좋습니다. 저녁에 안 씨가 머무르는 곳으로 찾아가겠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럼 그렇게 전할게요. 참고로 안 님은 북쪽 익스퍼트 토너먼트 경기장 근처의 하겔 드리온츠 호텔에서 머무르고 계세요. 그리고 다음은 미궁에 대한 건데요.=
이후 아루루가 늘어놓은 미궁에 대한 정보는 절반 정도는 귀부인 점주에게 들은 것이었다.
미궁은 총 19층 규모이지만 19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막혀있으며 그 위에 파르히스트 정규군이 주둔하며 미궁의 심장을 지키고 있기에 결과적으로 18층이 한계층이라는 것.
등장하는 이형종은 전부 해골 아니면 시체라는 것.
시체의 체액에 피부가 닿으면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커지기에 시체를 처단한 뒤에는 무기를 불에 지지거나 성수를 뿌려서 소독할 것.
불로 소독이 가능하기에 가죽 갑옷보다 철갑옷 쪽을 챙겨입는 것을 추천. 특히 해골, 뼈 괴물들의 손톱, 발톱 등이 날카로우므로 촘촘한 사슬 갑옷 위에 철판 갑옷을 덧댄 방어구 강력 추천.
질병 치료제를 여유 있게 가지고 갈 것.
등장하는 이형종 대부분이 불을 꺼려하기에 야영을 염두에 둔다면 오랜 시간 불을 지필 재료를 필히 챙겨갈 것.
“음.”
=그리고 지금은 병사님들이 엄청 날카로우시대요. 입장할 때 무지 시비 걸릴 수도 있다고 했어요.=
“마도구점의 점주분께도 들었습니다. 강도 같은 자들이 미궁 안에서 활개 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병사분들의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더군요.”
=그 이유가요. 실은 감옥 미궁이 곧 성장할지도 몰라서 그런대요.=
“……그렇습니까.”
=이곳저곳에 미궁의 성장 징후 같은 게 발견되고 있대요. 이건 병사님을 아빠로 둔 애한테서 들은 거라…… 다른 사람한테 말씀하시면 안 돼요? 비밀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그 이상은 별것 없었다.
해골은 주로 짐승의 뼈다귀고 시체는 사람 형태를 띠고 있으며 시체 같은 경우에는 간혹 미궁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가 생전의 장비와 소지품을 가지고 나타나기도 한다고.
‘질병 감염만 조심하면 크게 문제 될 일은 없겠군.’
30ℓ 보존 주머니에는 식량을 가득 채우고 정화 주머니에는 물을 채운 뒤 장작은 아공간 주머니에 가득 채워 가면 될 것이다.
1㎥의 아공간 주머니인 만큼 많은 양을 챙기지 못할 테지만, 며칠 밤에 사용할 정도는 되겠지.
나머지 야영에 필요한 짐은 일반 가방에 챙겨서 자신과 이실리테가 나눠 들고…….
‘주문한 아공간 가방이 4일 뒤에 완성되는 게 아쉽군.’
환인은 3m*3m*2m의 가방과 같은 사이즈의 보존 가방을 생각하며 주방 쪽을 힐끔거리는 아루루에게 말했다.
“조사하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아직 점심을 들지 않았다면 먹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냉큼 대답한 아루루는 뒤뜰 우물가에서 손을 씻고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아루루 왔구나.=
=네, 언니.=
=마침 잘됐네. 음식은 다 됐으니까 거실로 옮기는 걸 도와줄래?=
=넷!=
환인도 손을 씻으러 뒤뜰로 걸어가며 안이라는 플뢰에게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실리테가 점심으로 준비한 음식은 고기산적, 그리고 양배추, 파와 소고기가 들어간 볶음우동이었다.
“…….”
요리명은 달라서 볶음우동이 아니라 ‘수쯔’라는 이름이었지만, 환인은 보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보아왔던 지구산 레시피의 음식 이름은 대부분 직설적이었다. ‘새 이름’ 구이라던가 소스 발라 구운 ‘고기 이름’ 구이라던가 속을 채워 오븐에 구운 ‘핵심 재료 이름’ 요리라던가.
그런데 ‘수쯔’라니, 요리가 전파된 게 아니라 파르히스트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요리인가?
한 입 먹어보자 맛이나 냄새, 모양은 영락없는 볶음우동이었다.
“잘 먹지.”
=많이 드세요, 주인님. 아루루하고 비상식량도 많이 먹어.=
=우와아. 엄청 맛있어 보여요…. 잘 먹겠습니다!=
쿠엣!
밀가루 음식이라서 비상식량이 싫어할까봐 고기산적도 많이 구워낸 이실리테였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비상식량은 산적보다 볶음 우동을 더 좋아했다.
새콤짭짤한 갈색 소스를 잔뜩 머금은 굵고 탱글탱글한 면발이 후루룩 소리와 함께 진공청소기처럼 비상식량의 부리로 빨려 들어간다.
=음! 으음. 으흐흥.=
=으음? 흐으응.=
아루루도, 볶음우동을 만든 이실리테도 연신 콧소리를 내면서 쉴 새 없이 볶음우동을 흡입했다.
환인도 채소와 함께 면을 먹어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나이프로 고기산적을 세로로 자르고 고기로 면을 감아 한 입 크게 먹었다.
‘맛이 뛰어나군.’
아루루와 이실리테도 환인의 먹는 방식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흉내 내서 먹어봤다가 눈을 크게 뜨고 고기 산적과 함께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덕분에 7인분의 볶음우동과 4인분의 고기산적이 전부 사라지는 데는 10분이면 충분했다.
‘조금 신경 쓰면 지구와 비슷한 편의를 갖출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접시를 바닥까지 핥고 있는 비상식량을 보며 잠시 생각해보았다.
일단 TV나 컴퓨터 같은 전자기기를 제외한 전자제품의 역할은 마도구로 대신할 수 있다.
상하수 시스템도 마도구와 마도기를 응용하면 충분히 구현할 수 있고 냉방과 난방도 당연히 적용할 수 있다.
이 세상, 니오네브레스의 음식 수준도 지구와 근접했고 유흥은 초능력이라는 평생 즐길 거리가 준비되어있다. 문화도 마찬가지로…….
‘어제 도시를 돌아볼 때 극장과 공연 시설도 보였었지.’
음식은 입에 맞고 술을 빚는 수준도 흡족하다. 커피도 존재하고 고족과 하급 호족 거리에 도서관도 크게 지어져 있는 것을 봤다.
한곳에 정착한다는 가정하에 생활 수준을 지구와 흡사하게 끌어올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이자 한순간이지만 ‘이 세상에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환인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직 이른 생각이지.’
지금은 힘을 쌓는 게 우선.
배가 뽈록 튀어나올 정도로 점심을 배부르게 먹은 아루루는 식사 뒷정리를 도와주며 먹은 것을 조금 소화했고.
=안 님한테 저녁에 찾아뵙는다고 전하면 되죠?=
“예. 부탁합니다.”
=특별한 답변이 없으면 미궁 정보를 좀 더 조사하고 저녁에 오겠습니다!=
안에게 환인의 전언을 전하러 집을 뛰쳐나갔다.
달음박질하며 금색 꼬리가 살랑이는 뒷모습이 신난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던 환인도 이실리테를 불러 뒤뜰로 나갔다.
“우리는 훈련을 시작하지.”
=네!=
오후 훈련도 오전 훈련과 다르지 않았다.
1시간 간격으로 공격과 방어를 번갈아 하는 훈련.
그래도 2시간씩 훈련을 번갈아 했다고 그 잠깐 사이 실력이 소폭 늘어난 게 느껴진다.
실력 늘었다고 해도 환인에게 유효타를 먹이는 것은 까마득하게 먼 일이었지만.
=흐아압!=
어떻게든 한 대만이라도 맞추겠다는 집념이 느껴지는 공격을 피하거나 걷어내면서 이실리테를 차분히 관찰한다.
눈에 확 띄는 천재성은 없지만, 꾸준히 실력이 늘고 있는 것을 보니 이실리테의 노력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지는 것 같은 환인이었다.
=주인님. 가죽 갑옷을 수선해야 할 것 같아요.=
두 번째 방어술 훈련을 끝낸 이실리테는 젖가슴 형태로 가슴을 보호하게끔 덧대놓은 경화 가죽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것을 보여주며 눈썹 끝을 늘어트렸다.
=죄송해요. 조금 더 조심해서 썼어야 했는데…….=
“훈련에 쓰는 장비의 내구도가 빠르게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귀퉁이가 너덜너덜해진 가죽을 잡고 당겨보자 땀에 젖은 옷이 커다란 젖가슴에 착 달라붙어 젖꼭지의 흔적을 드러내는 게 눈에 들어온다.
슬쩍 손을 놓은 환인이 말했다.
“근처에 가죽 방어구 상점을 봤으니 거기에 수리를 맡기지.”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나도 간다. 가는 김에 그 가죽 갑옷은 대련용으로 쓰고 사슬 갑옷을 새로 장만하지.”
=어, 그러면 갑옷이 세 겹이 될 텐데 조금 둔하지 않을까요?=
안쪽에 얇은 누비 갑옷을 입고 사슬 갑옷을 걸치고 철판 갑옷을 덧입는 식. 말 그대로 풀아머다.
“파르히스트의 감옥 미궁은 가죽 갑옷보다 사슬 철판 갑옷을 추천한다더군. 일단 가서 시착해보고 결정할까.”
=네.=
그렇게 찾아간 가죽 방어구점에 이실리테의 가죽 방어구 수리를 맡기고(3은화), 철제 방어구 상점을 방문해서 현재 누비 갑옷 및 판금 갑옷에 맞는 사슬 갑옷을 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저희 가게 상품은 튜닉 형태의 사슬 갑옷이 아니라 옆구리를 틔우고 벨트로 고정하는 방식이라 활동성 및 방어력을 극대화한 물건입니다. 여기에 지니신 판금 갑옷을 걸치면 매듭 부분도 가려져 공격에 끊어질 염려도 없어지지요.=
방어구점의 여자 점주가 이실리테에게 입혀주고 해주는 설명에 이실리테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헐렁하고 치렁치렁한 것은 별로인데 이건 몸에 붙어서 움직이기 편하네요. 고리도 작고 촘촘하면서 두꺼워 방어력도 높아 보이고요.=
=손님처럼 근력 계통의 전사시면 착용 갑옷의 무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죠. 얼마나 관절 가동 범위를 자유롭게 해주느냐, 얼마나 거치적거리지 않느냐가 중요하니까요.=
실제로 사슬 갑옷은 타이트하면 할수록 입고 벗는 게 끔찍할 만큼 괴로워진다.
하지만 방어구점주가 추천하는 사슬 갑옷은 그런 제약에서 벗어났으며 방어력은 방어력대로 확보했고 여성적인 선까지 드러낼 수 있는 훌륭한 제품이다.
안쪽에 얇은 누비 갑옷을 입고 그 위에 검은 사슬 갑옷 상하의를 입은 뒤 철판 갑옷을 덧입은 이실리테의 모습은 판타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기사 그 자체였다.
이제야 전사의 태가 나는 느낌이다.
그 자리에서 사슬 갑옷의 대금으로 37은화를 지불하고 철판 갑옷을 사슬 갑옷에 맞게 재조정한 뒤 나온 환인은 소장원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아루루 양이 오면 곧장 안 씨를 만나러 가지.”
=네, 주인님.=
장원으로 돌아온 이실리테는 곧장 대검을 휘두르며 사슬 갑옷의 길들이기에 들어갔고 환인은 명상과 정신 집중을 통해 불필요한 감정의 찌꺼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엘카타를 향한 소유욕이라는 감정이 정리되질 않는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도 명상과 정신 집중을 했지만 깔끔하게 털어내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편지를 보냈기 때문인가.’
편지를 보낸다는 행위로 소유욕을 인정했기 때문에?
어쨌든 이런 감정에 매달리는 것은 정신건강 면에서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환인은 천천히 부정적인 감정의 부산물을 정리해나갔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아루루는 근처 가정집에서 음식 냄새가 나기 시작할 무렵 다시 찾아왔고, 환인과 이실리테는 각자 편하지만 예의를 차린 복장으로 아루루의 안내를 받아 안이 투숙하고 있다는 하겔 드리온츠 호텔에 도착했다.
=환인 님, 여기예요.=
“…….”
북부 파르히스트 제6 번화가, 혹은 하드리온 거리라고 불리는 곳은 환인의 눈에 영국의 오래된 도시처럼 다가왔다.
수백 년의 세월이 겹겹이 쌓인 낡은 도시에서 그 낡은 껍질만 벗겨낸 듯, 사람들이 만들어낸 삶의 활기가 가득 느껴지는 곳.
그중에서도 4층 규모의 중후한 적색 호텔 입구를 바라보던 환인은 아루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1동화 한 닢을 손에 쥐여주었다.
“아루루 양. 우리가 용무를 볼 동안 저녁 식사는 이걸로 해결하면서 기다려주세요. 만약 저 해가 고지대에 닿을 때까지 오지 않으면 먼저 돌아가도 됩니다.”
=넵!=
아루루를 보낸 환인은 적색과 금색, 흑색의 3가지 색 복장을 한 개 귀의 여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하겔 드리온츠 호텔의 방문객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고객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쿠에의 수납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주위를 보면 비슷하게 말이나 쿠에를 타고 온 사람들이 눈앞의 사람들과 비슷한 복장의 인물들에게 마차, 혹은 탈것을 맡기고 호텔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성도의 호텔에는 도어맨도 있는 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비상식량의 고삐를 도어맨에게 내어줬고 이실리테도 쿠르티의 고삐를 건네주었다.
호텔 내부는 서구식으로 적잖게 호화스러웠다. 웨이포드의 글라헬스 호텔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높은 급이라고 할까.
로비로 들어서자 호텔리어가 다가와 친절한 미소로 응대하는데, 환인은 익숙한 기시감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야 자신이 다른 세상에 있는지 지구에 있는지 착각이 들 지경이다.
“이 호텔에서 묶고 있는 안 씨와 약속이 되어있습니다.”
=확인을 위해 종족적 특징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은발의 플뢰 여성입니다. 체구가 큽니다.”
=확인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로비에 드문드문 마련된 호화스러운 의자에 가서 앉으니 이실리테가 쭈뼛거리면서 환인의 근처 빈 소파에 조심스레 앉는다.
이실리테는 주인님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는 수준으로 로비를 슬그머니 훑어보곤 속으로 주눅이 들었다.
‘이런 세계도 있구나.’
웨이포드에 머물렀던 올츠 호텔도 이실리테의 눈에는 입이 떡 벌어지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레심과 백려강이 머물던 글라헬스 호텔은 도적년 시절에는 짐작도 못했을 만큼 부귀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곳 하겔 드리온츠는 글라헬스보다 더하다.
입구에서 쿠에를 대신 수납해주는 사람이라니? 저기 저 사람은 손님의 짐을 옮겨주는 건가? ……소파에 앉은 사람에게 뭔가 가져다주는 사람은 뭐지?
로비의 다른 소파에 앉은 부자 옷차림의 여자에게 뭔가 마실 것을 건네주는 흑적황 3색 유니폼의 사람을 쳐다보던 이실리테는 그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움찔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신가요?=
“괜찮습니다.”
=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벨을 울려주세요.=
“예.”
‘……주인님은 이런 곳을 자주 이용해보신 걸까? 하지만 주인님은…….’
이실리테가 조금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위층으로 이어진 세 곳의 융단 계단에서 눈에 확 띄는 거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이다.
루크랑 중에 키가 2m를 넘어가는 사람은 적지 않은 편이지만 그건 전부 남자들이다. 그런데 플뢰가, 그것도 여자 같은 사람이 나타나자 호텔 로비에 있던 사람 대부분이 그쪽을 쳐다본다.
환인이 소파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 이실리테도 곧장 일어섰고, 잠시 후 다가온 안을 바로 앞에서 본 이실리테는 다시금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커도 너무 크잖아. 나보다 머리 두개는 더 크네.
=한번 보자고 했다며? 잘 왔어.=
안이 여전히 몸과 부조화가 극심한 청순한 얼굴로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환인이 나서며 대답했다.
자신과 이실리테 둘 중 이실리테를 보며 인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요청을 흔쾌히 허락해주어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쪽 덕분에 도움 받은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당신이 일행의 리더야? 저 언니가 아니고?=
10명이 모이면 큰 키로 따졌을 때 늘 1번 아니면 2번이던 환인도 누군가를 올려다본다는 진귀한 경험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루루 양에게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환인입니다. 이쪽은 여행 동료인 이실리테.”
=안녕하세요.=
=……이거 놀라운데. 어, 난 안이야. 안이라고 부르든지 안느라고 부르든지 편한 대로 해.=
=네. 안느 씨.=
=어어.=
이실리테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안느는 진심으로 놀랬다.
눈앞의 반반한 얼굴의 남자를 처음 훑어봤을 때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신경 써서 살펴본 순간 평범하게 힘없는 무직자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이다.
지금 당장 주먹을 휘두른다면 오히려 이쪽이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다.
이 남자 정체가 뭐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냥 남자A로 여기던 안느는 환인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