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143 성도 파르히스트
* * *
남부 파르히스트라고 해서 북부 파르히스트와 다른 점은 없었다.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들은 북부와 똑같이 대로변과 상점가에 북적였고 상점 주인들은 그런 여행자들을 상대로 장사에 여념이 없다.
아루루는 그중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초록색의 선명한 원색 건축물이 모여있는 거리로 환인과 이실리테를 이끌었다.
얼핏 3층 기숙사처럼 보이는 ㄱ자, 혹은 ㄷ자 모양 건물들.
=저기 지붕이 세모 모양인 건물은 법술사님들의 기관이에요. 빨간 건물은 적술사님들, 파란 건물은 청술사님들, 초록색은 녹술사님들의 기관 건물이죠.=
“어떤 사람이 자신을 풍술사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녹술사라고 하나 보군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 어…….=
환인의 질문에 순간 당황한 기색을 드러낸 아루루가 품에서 수첩을 꺼내 뒤적이다가 눈을 반짝였다.
=네. 염술, 풍술 이렇게 부르는 분들은 근본주의라서 그렇고 적술, 녹술, 이렇게 부르는 분들은 근대주의라서 그렇대요. ……그, 그런데 어른들이 하는 말씀을 적어놓은 거라서 근본주의하구 근대주의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공부가 존재한다면 학파??도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
아루루의 설명에서 이해한 것을 환인이 아루루의 수준에 맞추어 설명해준다.
“간단히 설명하면…… 저 사과를 예로 들겠습니다. 근본주의는 사과를 먹을 때 사과는 이대로 먹어야 사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근대주의는 사과를 이용한 요리, 사과파이나 사과주스, 사과사탕 및 사과 가루도 사과라고 봐야 한다는 사람들이지요.”
=오…….=
=와…….=
아루루의 눈높이에 맞춰 매우 단순화 시킨 설명이었는데 이실리테의 눈도 동그랗게 변한다.
아무튼, 지붕의 모양으로 법술사와 비술사를 나누고 외벽의 색으로 술 계통을 나눈다는 이야기였다.
즉 세모꼴 지붕의 파란 외벽 건물은 물을 다루는 법술사의 조합/기관/협회 건물, 옥상이 있는 파란 외벽 건물은 부여술을 다루는 비술사의 조합/기관/협회 건물이라는 뜻.
=환인 님. 여기예요.=
파란 외벽에 간판까지 파란색 건물, 거기다 [비술사 협회 공식]이라는 글자를 간판에 금색으로 새겨놓은 마도구점에 아루루가 먼저 들어가며 힘차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문 안쪽으로 울려 퍼지는 힘찬 인사를 들으며 이실리테에게 물었다.
“조미료 보관용 상자 외에 더 필요한 것은 없나.”
=식료품을 담을 보존 주머니가 따로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큰 보존 주머니를 구매해서 따로 상자를 구해 조미료를 담으면 되겠지.”
=앗, 그러면 되겠네요.=
“알았다. 넌 여기서 비상식량과 쿠르티를 지키고 있어라.”
일단 구매할 것은 용량이 좀 더 큰 아공간 가방과 이실리테가 희망한 조미료 보존 상자와 식료품 보존 주머니.
그 외에 필요한 것은 없을까 생각하며 마도구점에 들어가자 상점이라기보다는 작은 찻집 같은 분위기의 내부가 환인을 반겼다.
아루루는 카운터 쪽에서 화려한 청색 레이스 로브 차림의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환인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분이에요!=
=어머, 아스시온 마도구점에 어서 오세요. 저희 마도구점은 파르히스트 부여술사 조합에 가입해 정식으로 유통하는 인허가 상점이랍니다.=
귀부인의 매력이 듬뿍 묻어나는 상점 주인의 환대에 환인도 후드를 벗고 정중히 인사하며 말했다.
“아루루 양의 소개로 왔습니다. 몇 가지 마도구를 구매하고 싶습니다.”
말하며 마도구점 내부를 둘러보았지만, 상품은 하나도 없었다. 있는 것은 네 개의 차 탁자와 의자, 꽃병과 화분, 바닥을 채우고 있는 포근한 느낌의 양탄자와 벽에 걸려있는 풍경화, 인물화 약간.
=잘 오셨어요. 우리 마도구점과 계약을 맺은 부여술사님은 5급 공간 계통의 부여술사님이세요. 만족스러운 품질의 상품을 보장한답니다. 이리로 오셔서 앉으시지요.=
귀부인 점주가 의자를 당겨서 자리를 만들어준다. 그곳에 앉으니 귀부인은 카운터로 잠시 이동했고 아루루는 환인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고 마도구점을 나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온 귀부인 점주의 손에는 은빛 쟁반이 들려있었고 그 위에는 레스토랑의 메뉴판 같은 하드커버의 얇은 책자와 김이 모락모락나는 녹색 차 한 잔이 올려져 있었다.
찻집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설마 진짜 차가 나올 줄이야.
선명한 연녹색을 띈 찻잔 속의 내용물을 바라보다가 책자를 집어 들었다.
“…….”
10장 정도 되는 판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펴본 환인은 꽤 체계적으로 장사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책자에는 품목별 기본 가격이 적혀있고 옵션 추가 시 가격 별도이며 형태와 색상 등을 선택할 수 있게 되어있다. 그리고 주문한 즉시 제품의 제작이 시작되며 5일이면 완성된다는 문구도 적혀있다.
말 그대로 팸플릿이다.
“이것과 이것, 그리고 이것을 구매하고 싶군요.”
=3m*3m*2m의 공간 확장, 무게 평준화, 방수 옵션 가방이니까 20금화. 마찬가지로 같은 사이즈의 방수 보존 주머니 15금화. 중급 빛 막대 5자루에 1금화. 합해서 36금화네요. 가방과 주머니의 가죽 재질 및 색상은 어떤 것으로 고르시겠어요? 마수 가죽을 고르시면 내구성과 가격이 조금 더 오른답니다. 어떤 가죽은 특정 효과를 가졌기 때문에 옵션과 효과가 중복되면 옵션 쪽을 제외해 가격이 더 내려갈 수도 있어요.=
“점주께서 추천하는 가죽이 있습니까?”
=미궁 탐험까지 염두에 두신다면 무르히스의 뱀가죽을 추천해요.=
무르히스 가죽은 cm면적당 1열은화씩 추가된다고 되어있었다. 가장 비싼 가죽이다.
“비늘에 불빛이 반사되는 건 곤란하군요.”
=뱀가죽에 거부감은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무광 처리를 하시는 걸 권해드려요. 무르히스의 뱀가죽은 자체 방수 기능이 있어서 구매하신 품목 중 방수 옵션은 제외하셔도 돼요. 그러면…… 비용이 1.5 금화 줄어서 34.5금화가 되겠네요.=
자신이 알고 있는 마도구의 가격을 대강 대입해본 환인은 이 귀부인이 꽤 양심적으로 장사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눈빛에 호감이 듬뿍 묻어나는데 그 때문인가.
“그럼 그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주문 감사드려요. 원하시는 것은 주문 제작이신가요, 아니면 곧바로 물건을 받아보시길 바라시나요? 주문 제작은 지금 계약서를 쓰고 선납금을 받은 뒤 제작에 들어가게 된답니다. 곧바로 물건을 수령하시길 바라시면 조합에 재고분이 있는지 알아본 뒤에 연락을 드리구요.=
후자의 경우에는 크기가 약간 조절될 수 있다고 귀띔해준다.
‘품목별로 규격을 정해놓은 게 그래서였군.’
잠시 생각해보던 환인은 귀부인 점주에게 물었다.
“점주께서는 어떤 방식을 추천하십니까?”
=절 믿어주시는 건가요? 후훗. 시간의 여유가 있으시면 전자가 좋죠.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 주문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후자도 나쁘지 않아요. 보통 구매 취소가 된 마도구여서 실사용은 없는 새 제품과 다름없거든요.=
단지 취향이 반영되지 않았으며 옵션이 살짝 달라질 수도 있다는 대답이었다.
“주문 제작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구매 결정 감사드려요, 모험가님.=
대답하며 생긋 미소 짓는데 연애 세포가 사멸해가는 사람이 보아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만큼 호감이 듬뿍 묻어나는 미소였다.
환인도 은은한 미소로 화답하며 주문 후 5일 뒤에 제품을 납품받겠다는 계약서에 사인하고 주문금액의 10%를 선불로 낸다.
그 후 마도구 펜을 품에 집어넣으며 귀부인 점주에게 슬쩍 운을 띄우듯이 물었다.
“혹시 파르히스트의 미궁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웨이포드에서는 자신의 신분이나 정체를 밝히지 않기 위해, 들키지 않기 위해, 그리고 부족한 상식 탓에 조심스럽게 빛이 닿지 않는 미궁에 대한 정보를 모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어진 상황이다.
마을이나 도시를 오가면서 미궁만 탐험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그간의 여행에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 자신처럼 아우라가 없는 사람이 미궁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다니기도 한다는 걸 카턴 마을의 식객들이 하는 이야기에서 깨달았기 때문.
=손님도 미궁순례자신가요?=
“미궁은 남자의 낭만과 로망이 있는 곳이니까요.”
사실을 밝힐 일은 아니었기에 대강 얼버무린 환인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귀부인의 경계심을 무너트렸는지 쿡쿡 웃으면서 환인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의외네요. 손님같이 중후한 매력이 있는 분이 그런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도 있으시구.=
“여성분들의 눈에 남자는 몇 살을 먹어도 어린아이일 뿐이지요.”
=후후후.=
본격적으로 귀부인 점주의 눈에 호감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예의 바른 모습에 플뢰 남자처럼 털 없는 종족이지만, 그렇다고 플뢰 남자처럼 여성스러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남성적인 얼굴 선. 거기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위트까지.
귀부인의 취향 존에 스트라이크였던 것이다.
환인은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다면 오늘 안으로 그녀를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겠다고 계산했지만, 선은 넘지 않았다.
건물 밖에 이실리테와 아루루가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닷새 뒤에도 기회는 있으니까.
=으응……. 도시 인접 미궁의 이름은 우둔 고트모그의 감옥이라는 곳이에요. 4급으로 분류되는 곳이죠. 이름에서 짐작하시겠지만, 감옥형 미궁이며 등장하는 이형종은 해골과 걸어 다니는 시체 두 종류에요.=
언데드가 출몰하는 미궁인가.
“4급이라면 20층 미만이겠습니다.”
=네. 지하 19층 규모지만 이 시기에 미궁에 들어가는 것은 추천하지 않아요. 대축제 기간이 되면 망나니 같은 자들이 유입되어서 미궁의 실종자들이 대폭 늘어나는 시기거든요.=
“주둔군이 꽤 신경질적이겠군요.”
=그렇지요. 미궁 안에서 사망하는 분들이 많아지면 미궁의 배를 불려주고 관리 어려움의 증가로 이어지니까요. 더욱이 죽은 자의 미궁이라서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하구요.=
1층부터 19층까지 등장하는 이형종은 같지만 죽은 자가 출현하는 미궁의 특성상 내부에서 죽은 직업자가 시체로 일어나는 일도 있다며 눈썹을 살짝 찡그린다.
=그럼에도 미궁에 들어가시려거든 체액이 얼굴에 튀는 것을 막아줄 복면이나 마스크를 구매해두시는 게 좋아요. 평범한 마스크보다 성수에 며칠간 재워 축성 받은 천으로 만든 마스크면 더 좋겠지요. 온기를 감춰주는 마도구를 마련하시면 휴식을 편히 할 수 있어 유용하죠. 보존 주머니도 좋지만 이미 구매하셨구…… 신전이나 연금술 상점을 방문하셔서 질병 저항 물약을 갖추시는 것도 좋겠네요. 그리고 또…….=
눈매가 살짝 처진 얼굴이 매력 포인트인 귀부인의 이야기를 경청한 환인은 그녀의 손을 살짝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춘 뒤 그녀와 시선을 나누며 은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언 감사합니다. 귀부인께서 신경 써주신 덕에 한결 편히 입장을 준비할 수 있겠군요.”
=벼, 별말씀을…….=
살짝 놀란 듯 뺨을 은은하게 붉힌 귀부인과 눈을 맞추고 빙그레 웃어준다.
“그럼 닷새 뒤에 찾아뵙겠습니다.”
=네에…….=
얼굴이 살짝 풀어진 귀부인 점주를 두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환인은 마도구점을 나가며 생각했다.
첫 탐사에서 저층까지 내려갈 생각은 없으니 마도구를 더 장만하는 건 그 이후로 미뤄야겠다고. 보존 주머니와 아공간 가방을 구매하느라 지출이 컸다.
환인이 마도구점을 나와 비상식량의 등에 올라타자 이실리테와 아루루도 쿠르티의 등에 올라탄다.
“다음은 신전으로 갑시다.”
=신전은 남쪽하고 북쪽 둘 다 있는데 어느 쪽으로 갈까요? 두 곳 다 하는 일은 똑같아요.=
“그러면 집에서 가까운 북쪽으로 가죠.”
원래는 며칠 파르히스트를 돌아다니며 파르히스트의 시국과 종족 연합 도시의 소식, 그리고 파르히스트와 인접한 미궁의 정보를 수집하며 차분히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마도구점의 귀부인 덕분에 일정을 조금 앞당기게 되었다.
‘미궁에 해충들이 들끓는다면 인간 영혼 강령의 인체실험을 시도해볼 좋은 기회지.’
그렇지 않아도 빛이 닿지 않는 미궁에서 백려강과 레심의 시선 때문에 실험해보지 못한 게 줄곧 아쉬웠는데 이번에 그 아쉬움을 해결할 수 있을 듯 하다.
상점 밀집 구역을 벗어나 대로로 나온 환인은 북적거리는 인파 사이로 회색 영혼 하나가 생기 없는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는 것을 보며 아루루에게 제안한다.
“내려올 때는 서쪽을 경유해서 내려왔으니 올라갈 때는 동쪽으로 가보죠.”
=넵. 동쪽 강변 근처에는 대학원도 있어서 구경할 게 좀 있으실 거예요.=
성도 파르히스트는 밖에서 본 것과 안에서 느낀 것이 일치하는, 환인의 기준에도 불편함 없이 살기 좋은 도시였다.
높은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도시는 땅도, 집도 넓직넓직해서 여유가 넘치는 느낌이다.
인구수는 대략 100만 명이며 도시 면적은 약 30㎢ 정도.
1850㎢ 면적의 제주도 인구가 약 70만 명인 것을 고려하면 땅은 1/61정도로 작은데 인구수는 대충 1.4배다.
면적대비 인구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니 상당히 비좁고 바글바글할 거라 생각되지만 파르히스트도 남는 공간이 많았고 길거리도, 도로도 넓직넓직했다.
‘가구당 인구가 제주도의 몇 배나 많기 때문이겠지.’
이 세상에서 평균적으로 한 가구에 작게는 세 명부터 많게는 일곱, 여덟 명이나 된다. 제주도의 경우에는 실 주거지가 얼마 되지 않으니 그 갭을 메우면 이 결과가 나올 테지.
아무튼, 사람들이 생활하는 도로는 작은 골목까지 로마식으로 잘 포장되어있었고 급수 시설인 우물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시민들의 표정은 여유롭고 넉넉했으며 풍족한 지갑 사정에서 사람들의 인심이 나오는 것을 증명하듯 파르히스트의 사람들은 친절했다.
그런 100만 명의 인구 중 50만 명 이상이 원시산업에 종사 중이고 나머지는 사회 각계각층에서 성도 파르히스트를 살아 숨 쉬게 만들고 있다.
그런 사람 중에는 아루루처럼 외지인을 대상으로 3차 산업을 업으로 삼는 이들도 많았다.
자급자족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일종의 관광 도시가 파르히스트였던 것.
북부와 남부를 가르고 있는 홀로렌 강을 건너던 환인의 눈에 아카데미 같은 건물이 배경으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루루 양. 저 건물은 무슨 건물입니까?”
=네? 아, 저기가 아까 말씀드린 대학원이에요. 되게 머리 좋은 사람들이나 각성한 직업자들이 성주님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부하는 곳이에요. 부잣집 아이들도 저기서 공부하고요.=
‘말 그대로 아카데미군. 지구처럼 초중고대로 나누는 게 아니라 종합 커리큘럼이라는 점이 다른가.’
물어보니 이곳에도 하녀 양성기술원이 있다고 들었지만, 웨이포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분교라는 설명에 관심을 껐다.
중간에 익스퍼트 토너먼트 경기장도 봤고 2차 산업 밀집 구역도 구경했고 파르히스트의 고위층이 모여 사는 부촌 거리도 보았다.
‘부촌 거리는 웨이포드의 고족 거리와 다를 게 없었다.’
차이점이라면 웨이포드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했고 여기는 지정된 길로만 다녀야 하긴 해도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점일까.
비상식량과 쿠르티를 타고 마차 도로를 이용해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다.
걸어서 돌아다녔다면 남부 파르히스트의 마도구점에 들렀을 때 저녁이 되었을 텐데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다.
=환인 님. 여기가 신전이에요.=
그리고 도착한 짐승신의 신전.
웨이포드의 신전이 그리스식이었다면 이곳 파르히스트의 신전은 가톨릭 성당의 느낌이었다.
높이만 10층에 달하는 거대한 몸집.
고딕gothic식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듯 하늘을 찌르는 뾰족뾰족한 탑과 건물 외벽에 가득 새겨진 아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중세 유럽에서 유행하던 건축 양식의 신전을 응시하던 환인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 세상의 건축 양식과 문화가 지구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신빙성은 낮았기 때문.
‘하지만 근현대의 문명도 보이는 마당에 전기의 발명이 아직인 건 이해가 안 되는군.’
자신은 문과였기에 전기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이 세상으로 넘어온 사람 중에 이과가 없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역시 종족 연합 주도가 기술의 발전을 억누르고 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 편의를 맛본 사람은 더욱더 큰 편의를 찾기 마련이니까.
종족 연합의 사람들은 어째서 기술의 발전을 막고 있는 걸까.
차원을 건너온 사람에게서 전기의 발견과 발명, 문명의 진화를 통해 기득권을 잃을 수 있다고 여겨서? 아니면 신탁이 내려왔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여기며 신전에 들어가기 위해 30개의 계단을 오르던 환인은 신전의 옆에 공동묘지가 붙어있는 것을 목격했다.
웨이포드의 그런 공원 같은 묘지가 아니라 환인이 익히 알고 있는, 잔디밭에 묘비를 세워놓았을 뿐인 평범한 묘지다.
“…….”
이상한 것은 그곳에 영혼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환인은 철 울타리로 가려진 공동묘지를 잠시 응시하다가 신전을 방문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거대한 아치형 신전 입구를 통과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