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141 성도 파르히스트
* * *
소장원 근처의 상점가에서 장을 본 이실리테는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어머. 처음 보는 처자네. 근처에 새로 이사 왔어요?=
=어머나. 직업자시네?=
=아까 실렌 씨하고 남편처럼 보이는 분이랑 같이 가시던데, 쿠에 두 마리랑 같이 있던 분 맞죠?=
=네. 그, 그런데 그분은 남편이 아니라 주인님이세요.=
=호모나 세상에~. 두 분 사이가 굉장히 좋아 보여서 꼼짝없이 남편인 줄 알았어요!=
=응응. 후드를 깊게 눌러썼지만 미남 훈남 느낌이 물씬 풍기던데, 가끔 아가씨 돌아보는 모습이 굉장히 애틋해 보이더라고요.=
=좋은 사이 맞죠?=
=그, 그런거 아니에요.=
시장의 채소, 과일, 식재료 상인들의 이야기에 부쩍 성장한 그녀의 소녀 감성이 가차없이 자극받았기 때문이었다.
‘주인님이 남편이라니……. 남편…… 후히히.’
후드를 눌러쓰고 있었는데 시선을 어떻게 알았으며, 미남인지 어떻게 알았는가 판단할 이성은 이실리테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헤벌쭉하던 이실리테는 핫! 흠칫 놀라서 자기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정신차려! 주인님 앞에서 이렇게 헤벌쭉할 거야?!’
아무튼, 자신을 주인님의 아내로 봐준 것도 좋았지만 상점가의 식자재가 하나같이 신선하고 품질이 좋았던 것도 이유였다.
하녀 양성기술원을 나온 뒤로 제대로 솜씨를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줄곧 호텔에 머무르거나 촌락의 고급 하우스에서 머무르거나 마을 유지의 집에서 신세 지거나 하며 남들이 해준 음식만 먹었기 때문.
야영할 때 그나마 실력을 조금 발휘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요리도구와 재료도 없고 화력도 부족한테서 실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부터 2달 동안은 주인님께 유감없이 요리 솜씨를 보여드릴 수 있겠지?’
음식 재료가 가득 든 바구니를 안고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기분 좋게 걸어가던 이실리테는 앞에서 다가오는 순찰병 세 명을 발견하곤 그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백색의 가죽 갑옷과 활, 검, 방패를 패용한 파르히스트 소속 치안 순찰병.
세 명이 지나가는 데도 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은 해맑고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다. 사람들도 웃는 얼굴로 순찰병들에게 인사하고 순찰병들도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아준다.
순찰대나 병사, 군인들을 볼 때마다 도망치던 도적단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이실리테의 시선이 주변의 집으로 향했다.
주로 하얀색 외장재의 1~2층 단독 주택들.
벽면을 담쟁이덩굴이 타고 오르는 건물, 겉에 멋들어진 글씨를 새겨넣은 나무 간판의 가게 건물, 광장 건너편 짐승신님께 예배를 올리는 예배당.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장소 같은 어색함과 낯섦에 주변과 격리된 듯한 감각을 느끼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자신을 내친 자기 이름을 딴 도적단, 그중 2/3는 주인님께 걸려 몰살당했고 나머지 1/3은 소식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자신은 주인님을 따라 천상계로 올라가는 중이다.
까르르
거기서~!
꺄하하하.
=……음.=
상전벽해라는 말을 떠올리던 이실리테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며 몇 가지 상상을 해보았다.
주인님과 비상식량이 없고 자신 혼자 이런 곳에서 평범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상상.
예전처럼 다시 도적질하는 상상. 미궁에 들어가서 이형종과 싸우는 상상.
신기하게도 그 어떤 것도 개미 눈곱만큼의 흥미조차 생기지 않는다.
반대로 곁에 주인님이 있다고 상상하면 그 모든 상상이 가슴 설레고 흥분된다.
‘아. 이제 주인님 없이는 못 사는 몸이 되어버렸구나.’
그걸 깨달은 이실리테는 입술을 복잡한 심경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집에 돌아온 이실리테는 곧장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철 냄비와 오븐, 팬은 충분하다. 주방의 화덕과 화로에 불을 붙이고 오븐 안쪽에도 달아오른 나무 장작을 넣어 온도를 올린다.
그후 소스를 잔뜩 만들고 손질된 고기를 꺼내 바르고 오븐에 넣고 굽고 철 냄비에 넣어 찌고 팬에 올려 굽는다.
구우면서 채소도 깨끗하게 씻으면서 7인분의 요리를 준비해나간다.
주인님 2인분, 자신 1인분, 비상식량 4인분.
7인분이나 만들어야 했지만, 주인님이 드실 2인분만 신경 써서 만들 생각이었고 나머지는 대충 볶고 찌고 소스를 발라 구워낼 예정이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녀 양성기술원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배운 것이 요리였다. 이 정도는 쉬운 일이다.
그렇게 대량으로 만들어낸 볶음 요리에 과일소스 구이, 오븐에 통째로 구운 통구이 중 가장 잘 만들어진 요리의 부위만 먹음직스럽고 정갈하게 떼네 접시에 플레이팅한다.
쿠우.
=비상식량? 그거 주인님 드실 거야.=
쿠잇.
접시에 먹음직스럽게 담긴 음식에 슬그머니 다가가던 비상식량은 친구 거라는 말에 즉시 부리를 물렸다.
쿠엣~. 쿠흥, 쿠삐잇!
비상식량이 하는 말은 여전히 못 알아듣겠지만 그래도 저 소리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
=다됐으니까 거실로 나가서 기다려.=
아니나 다를까 주방 앞에서 서성이던 비상식량이 냉큼 거실로 간다.
이실리테는 작게 웃으면서 주인님이 드실 식사부터 먼저 쟁반에 담아 장탁자의 가장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주인님 앞에 차례대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비상식량이 먹을 대량의 고기 요리도 탁자 중간부터 왼쪽까지 늘어놓고 주인님의 앞에 앉는다.
요리를 준비하느라 1시간 넘게 걸렸지만 고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포크와 나이프로 깨끗하고 깔끔하게 식사하시는 주인님의 표정에 약간이지만 미소가 떠 있었으니까.
맛있는걸 드실 때면 나오는 표정.
이실리테는 입이 귀에 걸리려는 것을 참으며 주인님의 식사 예법을 흉내 내 깨끗하고 깔끔하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쿠흥~
=……? 왜 그래? 아직 배고파?=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이실리테는 자기 등에 이마를 비비적거리는 비상식량을 돌아보며 물었다.
쿠웃. 쿠엥!
=……??=
쿠삐삐거리면서 뭔가 말하는 거 같은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표정이 부드러운 걸 보면 나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비상식량의 머리를 토닥거려주고 다시 설거지를 시작한다.
잠시 후 설거지물을 정원 구석에 있는 텃밭에 뿌린 이실리테는 쿠르티가 밥을 다 먹은 것을 확인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엉겨 붙는 비상식량의 행동에 살짝 당황했다.
=주인님. 비상식량이 아까부터 이러는데 왜 이러는지 혹시 아세요?=
“네가 만든 음식이 맛있었다고 그러는 거다.”
=…….=
대량으로 만들어낸 통구이와 볶음 요리에 소스를 잔뜩 부어 구운 과일소스 구이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건가.
쿠우르릉. 큐삣. 큐우웃.
=……?=
비상식량의 울음소리를 들은 주인님이 갑자기 큭큭 웃으시기에 뭐가 재미있으신 걸까 했는데…….
“네가 음식을 그렇게 맛있게 만들 줄 몰랐다는군. 존경스럽다고 한다.”
=…….=
뭔가 비상식량에게 힘이 아니라 음식 솜씨로 인정받다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기분이 복잡미묘한 이실리테였다.
“다 끝났다면 장비 챙겨서 내려와라. 대련을 시작하지.”
=넵!=
기다리던 시간이다.
도시에 막 도착했기에 오늘 대련은 넘어가는 게 아닐까 했지만, 오늘도 대련을 빼먹지 않으시는 성실한 주인님.
2층의 자기 방에서 가죽 갑옷을 껴입던 이실리테는 가죽 갑옷의 내구도가 많이 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미궁에 들어갈 때나 바깥을 이동할 때만 입는 철판 흉갑이나 허리, 건틀릿과 그리브는 새것처럼 반짝반짝하다.
그러나 대련 횟수가 누적되고 있는 가죽 갑옷은 이음매 부분부터 헐거워지고 있다.
‘수리를 맡겨야겠네.’
이건 훈련용으로 입고 미궁에 들어갈 때 착용할 새 가죽 갑옷을 사는 게 나을 것 같다.
‘주인님은 무두질한 가죽은 팔아서 내 용돈 하라고 하셨으니까…….’
카턴 마을에서 파르히스트로 오는 길에 다섯 마리의 짐승과 1급 마수 1마리의 가죽을 무두질해놓았다.
작업장 언니가 말해준 대로라면 그게 대충 3은화 정도 될 테고 마에스티그에서 팔았던 가죽 값이 1은화에 레힐에서 주인님이 주신 것도 있으니까……
‘4.5은화로 가죽 갑옷을 사는 건 무리일 텐데.’
잠깐 고민에 빠졌던 이실리테였지만, 주인님과 대련을 두고 딴생각을 하는 것은 자살의 지름길이다.
가죽 갑옷에 대한 것은 접어두고 대검을 챙겨서 정원으로 나간 이실리테는 대련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잊고 환인의 공격을 어떻게든 막고 피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퍼벅 빡!
=크읍!=
허벅지에 정통으로 가격당한 이실리테는 왼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을 느끼며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이전에도 몇 번 이런 경우가 있었고 그때마다 나뒹굴었기에 이실리테는 또 새로운 대응책을 내놓았다.
뒤로 훌쩍 물러나며 대검을 면으로 강하게 올려 친 것.
바우웅!
통나무도 쪼개버리는 강력한 힘에 의해 일어난 풍압이 잔디밭 일부를 들썩이게 만든다.
그러나 대검이 머리 위로 올라간 순간 환인은 망설임 없이 이실리테의 품 안으로 들어가 하나만 기능 중인 다리를 거는 동시에 대검을 쥔 팔의 손목을 잡고 허리를 감싸 안았다.
=?!!=
눈 깜짝할 사이에 주인님의 품에 안긴 모양새에 이실리테가 당황해서 눈만 도록도록 굴리고 있을 때 환인은 이실리테를 바로 세워주고 대검도 다시 돌려준 뒤 말했다.
“방금은 아까웠다. 올려 치는 것이 아니라 내려치기 이후 횡 베기 견제를 준비했다면 완벽한 방어의 한 수였을 텐데.”
=아…….=
이실리테는 안타까움에 몸이 배배 꼬일 지경이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주인님이 칭찬해주셨을 텐데……!
“누누이 말했지만, 방어는 1수 앞을 내다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2수, 3수, 4수,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상대의 공격보다 더 많은 수를 읽어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법.”
전투에 정해진 공방은 없다. 상대의 공격을 근육과 자세에서 읽고 그에 해당하는 모든 수를 읽어내며 실시간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진정한 방어가 완성된다.
환인이 오랜만에 던져주는 힌트를 재차 머릿속에 박아넣던 이실리테는 마비됐던 허벅지가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느끼고 다시 대검을 움켜쥐었다.
=넵! 다시 부탁드립니다!=
“그래.”
이실리테의 저녁 대련 일과를 끝낸 환인은 비상식량과도 어울려주었고, 그렇게 비상식량의 훈련까지 끝내자 이번에는 이실리테와 비상식량이 붙었다.
=하아압!=
쿠엑!!
환인과 대련으로 감각이 예민해진 둘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면서 서로의 실수를 유인하고, 때때로 마구잡이 난타전을 펼치며 투닥거린다.
‘둘 다 실력이 계속해서 늘고 있군.’
비상식량의 실력은 빠르게 늘어 카턴에서 만났던 조인족 4급 투사인 루아르다를 완벽하게 넘어섰다.
자신이 상대해주며 습득한 회피dodge와 반격riposte을 야생동물의 본능으로 펼쳐내며 거기에 루아르다를 통해 베꼈던 카포에라도 쿠포에라로 승화시킨 것이다.
지금 루아르다와 다시 대결하면 더 빠르게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비상식량도 날 수 있으니 공중전의 이점도 없을 테고.
이실리테의 실력도 상당부분 향상되었다.
자신을 통해 방어defense와 회피를 익히고 비상식량과 싸우며 실전 감각으로 단련하고 있어 점점 공격을 읽고 피하는 능력이 오르는 중.
그날 루아르다와 대련에서 판정승을 따낸 이실리테였지만, 지금이라면 확실한 승리를 차지하겠지.
쿠엣!
퍽
어깨에 쿠포에라 킥을 먹은 이실리테가 비틀거리며 자세를 무너트리자 비상식량이 이때다 하고 연속기를 넣으려 한다.
쿠쿠!
무기를 쥔 손이 헐거워졌다. 지금 제대로 때리면 무장을 해제할 수 있?!
캉 소리와 함께 대검이 바로 튕겨나간 걸 본 비상식량이 당황해버렸다. 어, 이렇게 날아갈 정도로 강하게 차진 않았는데?
맥없이 대검이 날아가 버리는 것에 비상식량이 흠칫하는 사이 이실리테가 얍, 짧은 기합과 함께 등에 올라타는 데 성공한다.
‘오늘은 이실리테의 승리군.’
=이겼다~!=
일부러 어깨에 킥을 맞아주고 자연스러운 빈틈을 드러내 공격을 유도한 이실리테다. 비상식량은 그걸 읽지 못해서 등을 내어준 거고.
목을 붙잡혀 패배당한 비상식량이 분한 듯 파닥파닥 홰를 치며 꽥꽥 울고 이실리테는 한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구한 인성질, ‘너 개못하잖아.’를 펼치며 이 순간의 승리를 만끽했다.
꾸우! 꾸우우~!
=응, 안돼. 돌아가~.=
한 번 더 붙자며 옷자락을 물고 늘어지는 비상식량과 오늘의 승리를 내어줄 생각이 없는 이실리테의 장난을 지켜보던 환인이 입을 열었다.
“이실리테. 오늘 낮에 보았던 거구의 플뢰, 기억하나.”
=네? 네. 그런 특이한 사람은 한 번 보면 잊기 어렵죠.=
“일단은 그녀를 찾아 영입 제안을 해볼 생각이다.”
=주인님이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저도 찬성이에요.=
망설임 없이 찬성하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환인은 의외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인가.”
다시 물어보는 환인의 모습에 잠깐 생각했던 이실리테는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플뢰였잖아요. 그리고 그냥 무시해도 되는 일에 일부러 말을 걸어서 인사를 남겼고요. 성격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쪽은 제가 노력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능력에 관해서는 자신의 안목을 믿기 때문에 찬성한다고 대답하는 이실리테였다.
성격도 괜찮고 실력도 충분하다. 그만한 덩치에서 나오는 저력은 어떤 파티라도 환영할 테지.
=정하셨으면 그 사람을 빨리 찾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인연이라면 안달 내지 않아도 동료가 되겠지. 아니라면 안되는 거고.”
대답은 그리했지만, 내일부터 그 플뢰가 언급했던 익스퍼트 토너먼트를 위주로 살펴볼 생각인 환인이었다.
키가 2m를 넘는 거구의 플뢰. 사람들의 눈길을 쉽게 빼앗는 특징이니 찾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
다음 날 아침.
=안녕하세요, 환인 님! 이실리테 언니! 좋은 아침이에요!=
=어서와.=
대련과 아침 식사, 샤워의 아침 일과를 끝낸 환인은 아루루가 오길 기다렸다가 파르히스트 행정관으로 향했다.
쿠르티를 타고 자기 앞에 아루루를 태운 이실리테가 주변을 둘러보며 묻는다.
=아루루. 파르히스트는 고족님들이 사는 구역이 안 나누어져 있어?=
=네. 하지만 도시의 중심부 홀로렌 강변에 모여 계세요. 그리고 성벽만 없다 뿐이지 아무나 들여보내지는 않아요.=
=들여보내는 기준이 있어?=
=음~. 환인 님은 지금이라도 들여보내 주실 거 같구 이실리테 언니는 좀 더 예쁘게 꾸미면 통과 허가가 날 거 같아요.=
=옷차림이랑 복장이 고족 거리에 어울려야 들여보내 준다는 거구나.=
=외모도 좋아야 해요.=
‘치안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나 보군.’
웨이포드가 3단계로 벽을 나누어놓은 것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기도 하지만 신분 계층을 가르고 하층민이 중산층과 상류층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는 방어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그런것이 없다는 말은 그만큼 치안이 뛰어나고 파르히스트 시민들의 만족감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
매년 대축제를 벌일 정도니 민심이 나쁠리가 없지.
잠시후 파르히스트 행정관에 도착한 환인은 이실리테를 데리고 들어가 신분증을 등록했다.
=오, 웨이포드에서 등록하신 여행자님이시군요. 파르히스트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환인은 신분증을 등록하면서 행정관에게 혹시 고가의 물품을 안전하게 보장할 시스템이 없는지 물었다.
파르히스트에 오면서 길가의 상단이 한 이야기가 뇌리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귀속 시스템을 성주 펜리 후스티오 파르히스트 님의 이름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시스템은 다른 도시에서도 시행 중이며…….=
거래 귀속 보증 시스템.
이 귀속 시스템은 일정 가치 이상의 물품에 도시 행정관이 보증을 서주는 기능으로, 예를 들어 특정 물품을 팔지 않겠다고 신청하면 파르히스트의 행정이 그 공증을 서는 식이다.
귀속 물품에는 생물도 포함되며 귀속 신청에 이런저런 조건과 항목이 존재하지만, 비상식량을 귀속하는 데 문제 없는 항목들이었기에 환인은 망설이지 않고 귀속 신청을 냈다.
=에~, 그러니까 귀속 해제는 본인만 가능하며 해제 없이는 물건을 거래하지 못합니다. 만약 누군가 귀속 물품을 무단으로 거래할 경우 귀속 물품을 구매한 구매자는 구매품을 반납하여야 하며 구매한 비용의 절반밖에 돌려받지 못하고 판매자는…….=
판매자는 법을 어긴 죄로 등록 시 평가된 가치의 몇 배나 되는 손해 배상을 져야 하고 감옥에도 갇히게 된다는 게 귀속 업무 담당 행정 직원의 설명이었다.
=호오오. 정말로 늠름한 아성체 녹색 쿠에로군요. 이 정도면 간이 감정가로도 300금화는 나오겠습니다.=
즉 300금화의 가치가 있는 비상식량을 누군가 훔쳐 가거나 해친다면 1000금화에 가까운 손해 배상을 치러야 하는 식이다.
물론 이중 300금화만 신청자에게 돌려주고 나머지 700금화는 도시가 꿀꺽 삼킨다.
‘보증 돈벌이인 거군.’
이런 시스템이라면 납득된다.
귀속 신청자는 도시의 성주인 호족의 비호를 받게 되고, 만약 귀속된 물품에 문제가 발생하면 성주는 무력을 동원해 회수 징집 절차를 밟아 수익을 늘리는 셈.
“비상식량은 사람 말도 알아들을 수 있으며 2급 마수 정도는 혼자서 싸워 이기는 무술 실력도 있습니다.”
그래서 환인은 비상식량의 가치를 적당히 올리는 시도를 했고 그 결과 무려 600 금화라는 몸값이 매겨지게 되었다.
이 정도라면 함부로 비상식량을 건드리지 못하겠지.
4급 직업자와 대련해 이길 정도의 힘이 있으니 어중간한 좀도둑은 비상식량의 부리에 쪼이고 발톱에 채여 죽을 거다.
비상식량의 무력을 감당할 수 있는 집단이라면 성주의 응징과 징수가 무서워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테고.
그 후 비상식량의 능력 실기를 거친 뒤 귀속 등록은 정상적으로 마무리되었고, 귀속 물품의 가치 0.5%, 3금화를 보증금으로 냈다.
=여기 있습니다. 이 명판은 진은 합금의 특수 마도구로 귀속 보증이 발동 중이라는 증거입니다. 귀속 해제할 때 명판을 반납하셔야 하며 명판을 분실할 경우 귀속 해제가 불가능하고 본인 확인과 재발급에 5금화의 추가 비용이 발생하니 분실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예.”
그뒤 미궁 출입 허가증까지 발급받고 행정관을 나온 환인은 단단한 금속 목걸이에 달린 멋진 세공의 금속명판을 비상식량의 목에 걸어주었다.
=와, 은빛 목걸이가 되게 멋있어요.=
=비상식량 멋진걸?=
쿠삐~
아루루의 감탄과 이실리테의 칭찬이 이어지니 비상식량의 목에 힘이 들어간다.
우쭐해 하며 보무도 당당하게 자신의 주변을 걸어 다니는 비상식량의 모습에 환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귀속 명패는 그저 비싼 목줄일 뿐이지만…… 아니, 실제로도 멋있긴 했다. 은은한 청색이 감도는 은색 명판은 시린 은빛을 자체적으로 뿌리며 그 존재감을 드러냈으니까.
‘자기가 만족하면 그만이지.’
환인도 비상식량의 목을 쓰다듬어주며 “잘 어울린다.”라고 슬쩍 추켜세워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