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138 성도로 가는 길
* * *
환인과 함께 말없이 한밤중의 커피를 즐긴 노파는 이후 별말 없이 천막으로 돌아가 잠들었다.
“…….”
몇 가지 사실을 적시한 정보가 환인의 머릿속에서 직소 퍼즐처럼 흩어져있다 조립된다.
병사가 노파를 데려올 때 보여준 군기 잡힌 모습.
노파를 호위하는 수라, 윤라 자매가 보여준 태도.
노파의 불가사의한 영기 형태.
노파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 얼핏 드러난 노파의 재력.
마지막 한 모금까지 비운 환인은 커피 향만 남은 빈 컵을 응시하다가 어느샌가 친해져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는 이실리테, 수라, 윤라 세 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는 성급하지.’
작게 콧숨을 내쉰 환인은 수라 자매에게 다가가 컵을 내밀며 말했다.
“잘 마셨습니다. 오랜만의 커피라 더욱 뜻깊은 한 잔이었습니다.”
환인의 칭찬에 수라와 윤라, 인우족人?? 자매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며칠 전에 저질렀던 무례를 허리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두말할 겨를 없이 저희 잘못이었습니다.=
=죄송해요. 부디 넓은 관용으로 용서해주세요.=
“노인장께서 이미 사과하셨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일은 시간과 함께 흘려보냈으니 신경 쓰지 마시길.”
정말 오랜만에, 그것도 절실히 원하던 시기에 커피로 카페인을 충전한 환인은 평소보다 10배는 너그러워져 있었기에 진심을 담아 인우족 자매를 용서했다.
환인은 시선이 인우족 자매의 가슴으로 향하는 것을 억누르며 몸을 돌려 데크로 돌아왔다.
계속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간 실례되는 질문을 해버릴 것 같아서였다.
“…….”
하지만 정말 궁금하다. 저 I컵은 될법한 젖가슴에서 흐르는 게 우유인지 아닌지.
안개가 살짝 낀 다음 날 새벽.
=호오. 자네는…… 그렇군. 그랬어.=
후드를 벗고 젖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환인의 귀에 노파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일세. 그보다 설마 자네가 그들이었을 줄은…… 흘흘.=
“놀라셨습니까.”
=놀라울 일이야 있는가. 자네들도 사람이고 우리도 사람인데. 그러나…….=
흘흘 웃은 노파가 보기 좋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주억인다.
=자네처럼 생명력이 충만한 이는 본 적이 없어.=
“그렇습니까? 적지 않은 사람들을 보셨나 보군요.”
=젊었을 적 패시지에서 잠시 생활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그들을 종종 보았다네. 그들과 자네는 같으면서 달라.=
“노인장께서도 수라 자매와 같으면서 다르지 않습니까.”
환인의 대답에 노파가 순간 멍하니 있다가 무릎을 탁, 때리며 헐헐 웃었다.
=우문현답이로구먼! 이 늙은이의 멍청한 질문에 현인의 대답이었어. 흘흘흘.=
좀 더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환인은 노파를 데리고 불씨를 키운 모닥불가로 데려와 앉혔다.
=여기에 온지 얼마나 되었나?=
“아직 1년이 채 안 됐습니다.”
=허어~. 나는 꼼짝없이 5년은 넘었을 거라 생각했건만. 우리 말도 유창하고 태도에서 여유가 드러나.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깃들어있으니 누가 보아도 훌륭한 모험가로 느낄 테지.=
노파는 놀라워할지언정 환인을 동물원 원숭이처럼 여기는 기색은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성격이 이렇다 보니 냉정하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보다는 노인장의 이야기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은 별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흘흘. 이 니오네브레스는 자네의 지구와 많은 점이 다르지 않나. 운 좋게 일찍 구조된 이들은 그나마 사람처럼 지내지만, 구조가 늦어진 아이들 대다수는 폐인이야. 폐인이 되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일상생활이 어려운 이들이고.=
환인은 아무런 내색 없이 머리를 굴렸다.
하이에른=조드와 백려강이 한 말과 또 다르다.
웨이포드의 상급 무관장이자 7급 투성인 하이에른=조드는 신변이 위험해질 거라는 ‘조언’을 했었다.
백려강은 차원 방랑자들이 문명을 가속하는 것을 우려해 메리아놀 종족 연합이 차원 방랑자를 한데 모아 관리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구조라니. 어떻게 된 일일까.
“방랑자들의 처우에 관한 이야기는 만나는 분마다 다르군요.”
=소식을 이미 들었나?=
“한 분은 힘을 가지기 전에 종족 연합으로 가지 말라 조언하셨습니다. 다른 분은 방랑자들을 구금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노인장께서는 구조라고 표현하시니 조금은 당혹스럽습니다.”
=표정은 전혀 아닌데?=
노파의 장난기 어린 대꾸에 환인은 대답 없이 작게 웃었다.
=다 틀린 말은 아닐세. 사람은 모두 자유로운 영혼이야. 누가 억압받는 것을 좋아하겠나. 그리고 말일세……. 다른 세계에서 흘러들어온 방랑자가 이 세상에 상처 입고 악의에 휩쓸려 스러질 것을 내버려 두기보다는 찾아서 보호해야 하는 게 가진 자들의 의무이지 않을까.=
“…….”
노파는 수라, 윤라 자매와 함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이실리테를 보며 말했다.
=저 아이, 자네를 무척이나 믿고 따르는 걸로 보여. 이 세상에 도착한 뒤로 만난 인연인 듯 한데 사람에게 저만한 믿음을 받아내는 인물이라면 메리아놀 연합도 자네를 가두거나 구조하려 들지는 않을 걸세. 물론 자네의 위험한 지식이 이 세상에 무분별하게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협조 정도는 구하겠지만.=
“그렇습니까.”
=흘흘. 이 늙은이의 이야기가 자네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구먼.=
환인은 쓰게 웃었다. 역시 노익장은 무시할 게 못 되는군.
“제 이름은 환인입니다.”
=이 늙은이는 시두르일세. 자네도 짐작했다시피 호족이지. 어디 호족인지도 알겠나?=
“…….”
=맞춘다면 작은 선물을 주겠네. 어떤가.=
선물이라 하면서 로브 소매에 손을 집어넣는 시두르. 잠시 뒤 소매에서 빠져나온 손 위에는 작은 원두 주머니가 들려있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 노인장과 수라 자매의 옷차림은 매우 깨끗했습니다. 특히 노인장의 옷은 새 옷이 아니라 세심한 관리를 받은 고급 수제품이었지요. 나아가 제 정체를 알아본 것, 노인장의 지식, 행동에 의한 반응, 병사들이 노인장을 대하던 태도로 유추해봤을 때 이곳과 가까운 지역의 호족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성도 파르히스트의 호족이시겠군요.”
=흘흘흘흘.=
환인의 추리에 노파, 시두르는 흘흘 웃고 말았지만, 근처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수라 자매는 매우 놀랐다.
아니 그게 추리로 나올 수 있는 결론인가?
말하자면 나올 수 있는 결론이다.
천연 소재의 옷은 아무리 관리를 잘하고 세탁을 잘하더라도 전문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이상 보풀이 일거나 허는 부분이 나오기 마련.
시두르가 걸친 로브는 말 그대로 수제 최고급의 자연스러운 멋이 드러나는 재질이었으며 약간의 흠도 없었다.
그렇다고 시두르가 로브를 아끼는 태도였냐면 또 아니다. 그냥 길가에 퍼질러 앉아있을 정도였으며 데크에도 아무렇게나 앉았고 잘 때도 로브를 입은 채 잠들었으니까.
옷이 여러 벌이고 매일 바꿔입었다고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며칠 전 처음 봤을 때의 얼룩이 그대로 묻어있었기 때문
=자네 관찰력이 참 좋구먼. 정답일세. 받게나.=
“사양 않겠습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주머니를 받아든 환인은 무게를 통해 원두가 5번 내릴 양밖에 안됨을 간파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파르히스트에서 커피를 찾을 때까지는 마실 수 있겠지.
보존 주머니에 원두 주머니를 넣은 환인은 수라에게 다가가 적을 것을 부탁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당황할 법도 하지만 수라는 내색 않고 아공간 주머니에서 질 좋고 매끈한 종이를 꺼내주었고,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종이였기에 몇 장을 더 요구한 환인은 거기에 자신이 본 영성 하늘 고래의 모습과 크기, 목격한 당시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주었다.
눈 모양. 뒷모습, 지느러미 형태로 유추해본 몸통 형태. 반달 모양으로 팬 골짜기 사이로 지나가는 모습.
4장 분량의 그림과 대략적인 크기에 색까지 적어주자 이번에는 시두르가 매우 놀란 얼굴로 살짝 손을 떨었다.
그림을 보고 있자니 마치 그때 당시를 직접 본 것 같은 착각이 뇌를 통해 눈 앞에 펼쳐진다.
회색빛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산골짜기. 그 사이로 너울거리듯 안개 속을 헤엄쳐 사라져가는 거대한 감색 고래.
=어, 어떻게…….=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시두르는 살짝 거칠어진 숨소리로 물었다.
=크기는 어떻게 안 건가? 머리를 그리지 않은 이유는 뭣 때문인가?=
“간단한 삼각측량법입니다. 오차가 5m~10m가량 차이 날 것을 감안하셔야합니다. 머리를 그리지 않은 이유는 그릴만 한 어떤 정보도 없어서 그렇습니다.”
보지 못한 걸 상상으로 그리면 그건 정보가 아니라 가십찌라시가 된다.
두상을 알 수 없었기에 눈 형태도 따로 그려놓았다.
한동안 말없이 그림을 들여다보던 시두르는 곧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종이를 조심스럽게 말아 윤라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환인에게 고마움이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고맙네. 반평생 영성 하늘 고래를 쫓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수집했지만……. 지금 자네가 그려준 네 장의 그림만도 못하겠구먼.=
“대접해주신 커피의 답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흘흘흘. 자네는 커피를 정말 사랑하는가 보구먼.=
“사막의 목마른 여행자에게 주어진 물 한잔이 냇가를 끼고 살아가는 사람의 물 한잔과 같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시두르는 주름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요즘 어린 것들과 비교되는 참 마음에 드는 청년이다. 자신의 정체는 모른다 해도 호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주눅 들거나 부담스러워하는 패기 없는 녀석들이 천지인데.
=마님.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알았다. 자, 아침 들러 가세나.=
아침 식사는 야영하면서 먹을 수준이 아니었다.
수라가 보존 주머니에서 꺼낸 하얀 빵은 촉촉하고 보들보들하며 갓 쪄낸 듯 온기가 느껴졌고, 그런 빵을 찍어 먹을 수프의 채소는 숨죽은 채소가 아니라 금방 따낸 듯 파릇파릇하고, 아삭아삭했다.
본격적인 요리는 빵과 수프 이후였다.
나이를 먹어 이가 약하고 소화력이 약해진 시두르를 위한 대패삼겹살 숙주찜.
=간이 잘된데다 후추의 톡 쏘는 향과 파의 매콤함이 무척 좋구나. 고기도 연하고 달콤해. 아주 맛있어.=
그 후 강철 위장을 지닌 여전사 셋과 그에 버금가는 남자를 위한 매콤한 두부 돼지고기볶음.
두부는 노인인 시두르를 위한 음식 재료라고만 생각했던 수라 자매는 이실리테의 손에서 재탄생한 두부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씹으면 짭짤하고 매콤달콤한 소스의 육즙이 물씬 퍼져 나온다. 두부 자체도 포슬포슬하고 담백한 맛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한차례 구워 식감까지 확보한 게 신의 한 수로 느껴진다.
=두부에 이런 요리법도 있었나…….=
=마님, 이 두부 좀 드셔보세요. 정말 기발한 요리에요.=
=으흠? 내게는 조금 자극이 강하지만, 이것도 맛있구나.=
여기에 부족한 채소 보충을 위해 탱탱한 아스파라거스를 얇은 삼겹으로 말아 구운 아스파라거스 삼겹구이까지.
만족스럽다 못해 입이 행복한 아침 식사를 끝낸 수라와 윤라는 염치불구하고 이실리테에게 요리의 가르침을 청했다.
=대패삼겹살 숙주찜의 레시피를 가르쳐주실 수 있으신가요? 마님께서 부담 없이 드실 수 있는 고기 요리라서 꼭 좀 부탁드리고 싶어요.=
=두부 돼지고기볶음도…… 부탁드립니다.=
=물론 알려드릴게요. 대패삼겹살 숙주찜 요리법은 간단해요. 일단 냄비 같은 게 있으면 좋구요. 삼겹살 300g에 숙주도 비슷한 양, 대파 세 줄기 정도가 준비물이에요. 실파도 총총 썰어서 넣으면 좋고요. 밑간에 쓰이는 간장 소스는 홀그레인 머스타드에 간장을 두 스푼, 식초를 한 스푼, 물도 한 스푼 넣고요. 대파를 적당히 썰어서 냄비 아래쪽에 깔고 그 위에 숙주를 올린 다음에…….=
이실리테가 이때까지 본 환인은 먹을 것이나 마실 것에 큰 기호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마련된 음식이라면 딱딱한 흑빵에서부터 고급 성찬까지 불평불만 없이 잘 먹었고 그에 대한 감상도, 피드백도 종종 해왔었다.
하지만 그건 음식이라는 것에 대한 반응이었을 뿐.
그랬기에 환인이 커피에 적지 않은 감흥을 보일 때 이실리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커피에 대해서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결심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사소한 지식도 큰돈이 될 수 있기에 지식은 함부로 나누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주인님이 저렇게 좋아하시는 커피다.
이실리테는 쓴소리를 먹을 각오까지 하고 수라 자매에게 커피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싫은 기색 없이 커피콩을 볶는 법부터 갈아서 가루로 내는 법, 물을 내리는 법까지 전부 알려줬어.’
특히 가루를 얼마만 한 굵기로 내는지,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의 차이, 커피를 내린 뒤 첨가하는 설탕, 우유 같은 존재로 커피가 얼마나 변화할 수 있는지 아낌없이 지식을 풀어주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보답할 차례.
이실리테가 자매에게 요리 지식을 성실하게 전수하는 사이 비상식량과 쿠르티의 아침 식사를 챙겨주던 환인에게 시두르가 다가와 환인의 손에 브로치를 쥐여주었다.
=받게.=
“……이건?”
자그마한 흠집도 없는 엄지손톱 크기의 달걀형 루비. 그 피처럼 새빨간 보석 주위를 꽃무늬 금세공이 감싼 장신구다.
환금해서 여비에 보태쓰라는 의미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말은…….
=뭐어 자네라면 어지간해서는 곤란한 일에 당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여행하다 보면 고족이나 호족과 나쁜 일로 얽힐지 모르지. 그때 이걸 내면서 이 늙은이의 이름을 대시게. 그럼 한 번은 상황을 무마할 수 있을걸세.=
“귀한 선물이군요.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흘흘흘. 체면 차린답시고 거절하지 않는 모습이 참 좋아.=
이 브로치의 유용함을 눈치챈 환인이었기에 작게 웃음 지을 뿐이었다.
물론 이 브로치로 모든 사건이 무마되진 않겠지. 이쪽이 먼저 저지른 범죄라던가 이쪽에 원인이 있는 분쟁에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호족의 위세가 조선의 사대부를 능가하는 이 세상의 특성상 여분의 목숨줄이라 봐도 된다.
여기에 환인의 직업까지 더해지면 시너지도 확실할 터.
환인은 미역 줄기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자신을 응시하는 시두르의 맑은 눈을 마주했다.
자신이 노파를 읽은 것처럼 노파도 자신을 읽은 걸까.
고작 두 번 만나고 한 끼 식사를 같이했을 뿐인 사이다. 물론 노파가 간절히 바라던 정보를 제공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어떤 일이든 책임지겠다는 성의를 보이다니.
그게 일회용이라 해도 평범한 사람은 하지 못할 행동이다.
오랜만에 생각을 읽기 힘든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던 환인은 부리로 팔을 툭툭 건드리며 먹이를 보채는 비상식량에게 말린 과일 먹이를 급여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출발 준비를 마친 환인이 시두르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시두르는 데크 가장자리에 앉아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환인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먼저 가시게. 며칠 무리했더니 노구가 비명을 지르는구먼. 이 늙은이는 좀 쉬었다 가야겠어.=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시두르에게 묵례한 환인은 수라 자매들에게도 살짝 묵례한 뒤 비상식량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이실리테도 쿠르티의 등에 올라타서 수라 자매에게 손을 흔들었다.
=수라, 윤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요.=
=잘 가세요.=
=다음에 봐요.=
* * * *
환인과 이실리테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수라는 오전의 커피 한 잔을 즐기는 시두르에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마님. 그 브로치를 넘겨드린 것을 알면 펜리 후스티오 님이 무어라 참견하실 거예요.=
=흘흘흘. 그건 걱정하지 말거라. 마지막 곳간의 열쇠가 이 손에 있는 이상 큰 신경질은 부리지 못할 테니. 그보다 너희가 보기에 환인이란 남자는 어땠지?=
=……평범한 남자는 아니었습니다.=
윤라의 대답에 수라가 말을 보탠다.
=뭔가 대범한 거 같으면서도 무심하고 냉정한 거 같으면서도…… 어린애 같은 순수함이 있었어요.=
=그래. 피아의 구분에 사심을 곁들이지 않았지.=
소심하고 속 좁은 남자였다면 첫 만남에서 새겨진 첫인상 때문에라도 좋은 반응은 내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환인은 이쪽의 사과를 솔직히 받아주었고 이쪽이 내비친 호의에는 호의로 되돌려주었다.
=나는 궁금하구나. 그 청년이 과연 어디까지 성장할 것인지 말이다.=
어젯밤, 시두르는 자신의 장악 공간을 스스럼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환인의 모습에 모골이 송연한 느낌을 받았었다.
위상력을 품지 못한 짐승이나 각성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극심한 두려움과 거부감으로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장악 공간이다.
일반인을 배려해 장악 공간 범위를 최대한 좁혔다지만 그래도 5m는 된다. 그런 공간을 멀쩡히 출입했다는 것은…….
‘에테르 패싱ether passing, 혹은 위상류???라 부르는 체질인 것이지.’
물론 어느 정도 손해 득실의 계산도 있었다.
수백만 명 중 한 명이 타고난다는 위상간섭 흘림 현상을 저리 강하게 받으면서도 멀쩡한 사람이기 때문이며.
‘영성 하늘 고래는 일반인들의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목격담은 전부 영혼사의 틀을 뛰어넘은 영령사나 영성들에게서만 나왔었는데…….’
그 젊은 청년이, 하물며 이 니오네브레스의 사람도 아닌 청년이 영혼사란 뜻.
게다가 1년도 활동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짧은 시간에 영혼사의 벽을 뛰어넘었다고? 그러면서 위상류의 체질까지 가지고 있고?
=…….=
타고난 눈썰미. 뛰어난 지식과 그런 지식을 다루는 지혜. 직업자를 자신의 포로로 만들어버리는 그 포용력과 지배력, 그리고 친화력.
한 명이 가지기에는 지나친 능력이다.
그래서 시두르는 궁금해졌다. 이 청년에게 호의를 베풀어주면 훗날 어떤 식으로 보답reward이 돌아올지.
그랬기에 파르히스트 가문이 큰 은혜를 입거나 권역에서 큰일을 해낸 사람들에게만 상으로, 보답으로 주는 파르히스트의 붉은 눈물을 주었다.
‘임자, 거기로 가는 게 늦어져도 이해해줘요.’
적어도 그 답을 보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지 않나.
먼저 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남편을 떠올린 시두르는 북쪽 푸른 하늘을 돌아보며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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