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41화 (141/813)

〈 141화 〉 137 성도로 가는 길

* * *

수많은 통행으로 단단하게 다져진 길을 따라가던 환인은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대형 캠프장 같은 야영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

허리 높이의 낮은 울타리가 둘레를 감싸고 있고 안쪽에는 나무판, 데크deck가 바둑판처럼 일정 간격으로 설치되어있는 캠프장.

사람들은 그 가로세로 5m 넓이의 데크 위에서 각자 모포를 덮든 침낭을 깔든 해서 편히 쉬고 있었다.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리니 그곳에는 주차장처럼 수십 대의 마차가 그룹별로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고, 바로 근처 10m*10m 넓이의 데크 위에 마차의 주인과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휴식 중이다.

초원에 이런 인위적인 손길이 가해진 장소가 있다는 것은…….

=와. 성도 근처에는 저런 것도 있나 보네요.=

“성도 파르히스트가 관리하는 곳인 것 같다. 저기에 병사 같은 사람이 보이는군.”

=정말이네요.=

비상식량을 몰아 그런 캠프장 같은 곳의 출입장소로 향했다.

출입구에는 자신이 본 것처럼 병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각자 편한 자세로 서서 잡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다 환인의 접근에 자세를 고치고 맞이한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파르히스트에서 관리하는 제8 파르히스트 숙영지입니다.=

제식 형태 가죽 갑옷에 장창을 짚고 서있는 여자 병사가 환인의 인사에 웃으며 대답한다.

“숙영지라면 군의 주둔지입니까?”

=파르히스트는 처음 이시는가 보군요. 이곳은 파르히스트로 향하는 여행자님들이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성주님의 명령으로 건설해놓은 장소입니다.=

여자 병사의 짧은 설명을 들으며 환인은 숙영지를 다시금 둘러보았다.

대형 종합운동장만 한 넓이의 숙영지는 반으로 나눠서 한쪽은 자동차 캠프장처럼 짐마차나 마차를 대동한 이들이 쉬는 곳, 다른 쪽은 환인처럼 소규모 여행자들이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출입구 근처에는 군용 가건물 같은 것이 몇 채 있었는데 병사들이 그곳을 들락거리는 걸 보면 병사들의 막사겠지.

“고생이 많으시군요.”

=마침 날도 어두워지고 있으니 오늘은 쉬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겠습니다. 비용은 어떻게 됩니까?”

=하하. 무료입니다. 이곳 시설의 운영은 성도의 통행세에 포함되어있거든요. 숙박하시겠다면 성함과 출신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저는 환인입니다. 이쪽은 이실리테. 여기 신분증입니다.”

웨이포드 행정관에서 발급받은 신분패를 보여주자 여자 병사는 머리 위에 솟은 강아지 귀를 까닥이면서 종이에 기입하고 숙영지를 안내해준다.

숙영지는 두 곳의 캠핑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둘로 나뉜 곳에서도 다시 둘로 나뉘어있었다.

한쪽은 전체 면적의 70%를 차지하는 대신 평범한 여행자 복장의 이들이 모여 쉬고 있는 곳. 나머지 30% 자리에는 환인처럼 쿠에를 이용 중이거나 옷차림이 비교적 부유해 보이는 이들이 머물고 있었다.

여자 병사가 안내해준 곳은 그 30%인 장소로, 병사들이 머무는 가건물도 그 30%에 들어와 있어 병사들이 그들을 지켜준다는 느낌이 든다.

=저곳과 이곳을 나눈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실리테가 묻자 막사와 비교적 가까운 장소를 안내해준 여자 병사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기 넓은 곳은 2구역이고 이곳은 1구역이에요. 1구역은 신분패를 지닌 분들을 위한 장소죠.=

=아.=

=신분패를 발급받으신 분은 도시에 그만한 이바지를 하신 분이시잖아요? 도시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드리는 거죠.=

확실히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아주는 용도의 데크가 2구역 것은 낡고 헌 느낌이지만 1구역은 새것 같다.

1구역에서 쓰던 게 조금 상하거나 하면 2구역으로 옮겨서 쓰거나 쪼개서 보수하는데 사용한 느낌.

여자 병사는 이어서 2구역 쪽을 바라보며 이곳 숙영지의 규칙을 설명했다.

=숙영지에서 분쟁을 일으키거나 도둑질, 다툼은 안 돼요. 발견 즉시 퇴거 조처되며 이후로 파르히스트의 모든 숙영지 사용이 금지됩니다. 만약 분란 조장의 강도가 높으면 체포해서 파르히스트로 범죄인 수송도 할 수 있어요. 물론 환인 님은 그러실 분으로 안 보이지만요.=

규정상 꼭 알려주어야 하는 거니 기분 나쁘게 생각 말라며 찡긋, 윙크한다.

대놓고 환인에게 추파를 던지는 여자 병사를 향해 약간 불편한 표정을 지은 이실리테지만, 병사가 돌아가자마자 표정을 풀고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다행히 정사각형의 데크 중앙에는 불을 피울 수 있도록 구멍이 나 있었다.

쿠르티의 목줄을 데크 옆 고정 말뚝에 매어놓은 이실리테가 비상식량에게 말한다.

=여긴 다른 사람들도 머무르는 곳이니까 이 근처를 벗어나면 안 돼. 알았지?=

쿠에.

그리고 이전 야영지에서 챙겨둔 나무 장작을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내 불을 피우고 열선 플레이트를 설치해서 1급 위상석을 끼운 뒤 요리를 시작한다.

물을 끓여 육포 겉에 말라붙어있는 소금을 깨끗하게 털어내고 잘게 찢어 투하, 딱딱한 빵도 잘게 부숴 넣은 뒤 뭉근하게 끓이면서 오는 길에 보이는 족족 채집해둔 식용 식물을 보존 주머니에 꺼낸다.

‘강에서 씻어두길 잘했네.’

중간에 발견한 강가에서 휴식할 때 깨끗하게 씻어뒀는데, 8시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물기를 머금은 채 파릇파릇한 걸 보며 뿌듯한 미소를 감추었다.

‘이거면 입안이 산뜻해지는 채소 샐러드를 만들 수 있어.’

돈 많은 부자들은 야채보다 고기를 부르짖는다. 그건 이실리테도 마찬가지였다.

기술원에서 교육받기 전만 해도 ‘채소? 동물이 채소를 먹고 크니까 고기를 먹으면 채소도 먹는 거잖아.’하고 채소는 입에 대지도 않던 부류였다.

그러나 기술원의 선생님들은 고기와 채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몸이 건강해지고 튼튼해진다고 가르쳤다.

고기를 구우면 특정 영양소가 파괴되며 그렇게 고기만 잔뜩 섭취하게 되면 몸이 나빠진다는 것을 정확한 자료를 통해 가르쳐준 것.

이실리테는 눈에 불을 켜고 채소 요리법을 배웠다.

다행히 주인님은 가리는 음식 없이 다 잘 드신다. 그런 주인님께 신선한 채소로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해드릴 수 있는 게 마냥 좋은 이실리테다.

“푸성귀의 적당한 쓴맛이 단맛과 스튜의 짠맛을 잘 잡아주는군.”

=헤헤.=

그리고 환인의 칭찬에 이실리테는 심장이 울렁거려서 얼굴이 붉어질 만큼 행복해졌다.

요리를 가장 열심히 배우길 잘했어.

비상식량을 데크 위로 올린 뒤 옆구리에 등을 기대고 쉬던 환인은 2구역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백색 소음을 들으며 명상에 빠져들었다.

명상이라해서 어떤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따지는 그런 게 아니다.

그냥 잡생각을 털어내고 고요하게, 은하수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뿐.

한국에서 비박을 다닐 때 환인은 별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그저 타프와 비비 쌕sack에 두 끼에서 세 끼 정도 간단히 먹을 것과 약간의 착화제, 소형 코펠, 물과 3~4회분 커피를 가져가는 게 전부.

타프를 설치하고 비비 쌕도 설치한 뒤에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물을 끓인다.

인공적인 빛이 존재하지 않는 어두운 자연 속에서 릴렉스 체어에 앉아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마시는 뜨거운 커피는?

“…….”

불현듯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그 쓴맛과 신맛의 그 어딘가. 살짝 입에 머금으면 비강을 채우는 약한 탄 향에 혀끝에만 살짝 남는 아련한 단맛…….

커피. 커피. 지금이라면 믹스 커피도 커다란 감흥을 느끼며 마실 수 있을 텐데.

=주인님?=

커피에 대한 갈망이 담긴 작은 한숨을 들은 이실리테가 환인에게 배운 홈트레이닝 중 리버스 트렁크 트위스트를 중단하고 환인을 돌아본다.

“이실리테. 커피라는 걸 들어본 적 있나.”

=커피요?=

“검고 쓴맛이 나는 차다.”

=아, 그거 홍…….=

“참고로 홍차는 아니다.”

=…….=

홍차가 아냐? 기술원의 선생님은 홍차를 블랙 티라고 부르셨는데.

머리 밑바닥의 정보까지 파헤치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기대감을 버린 환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지식도 짧고 배움도 적은 도적 두목이었다. 하녀 양성기술원에서 40일간 교육받으며 놀랍도록 바뀌긴 했지만, 아직 지식이 폭넓은 수준은 아니겠지.

계속 신체 단련을 하라고 말하려던 환인은 숙영지 출입구 쪽으로 들어오는 세 명을 발견하고 눈빛이 깊어졌다.

최소 이 길에서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자 병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쪽 1구역으로 들어오던 세 명, 밀짚 쿠에를 탄 노파와 그런 노파를 호위하는 여전사 두 명도 환인과 이실리테를 발견했다.

=흘흘. 짐승신님께서 이 노파에게 기회를 주시는구려. 병사 씨, 우리는 이쪽에 자리하겠소.=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편하신 곳으로.=

여자 병사를 돌려보낸 노파는 환인이 자리 잡은 곳에서 대각선 한 칸 떨어진 데크를 차지한다.

여전사들이 노파를 부축해 쿠에에서 내려주고 짐을 풀어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이런 야영 경험이 많은지 여전사들은 서로 업무를 분담해 능숙하게 초소형 간이 천막을 치고 불을 피우고 쿠에를 말뚝에 묶는다.

그사이 노파는 홀로 환인이 있는 곳에 왔다.

=혹시 잘 준비 중이었나?=

“잠시 명상 중이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셔 불 좀 쬐시지요.”

=명상을 방해해서 미안하군.=

“별말씀을.”

노파에게도, 호위인 여전사들에게도 적대심이나 적의는 일말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환인도 예의를 갖춰 맞이했다.

그렇게 환인의 곁에 앉은 노파는 고마움이 잔잔히 섞인 이야기를 꺼냈다.

=먼저 고맙다고 인사해야겠구먼. 자네 덕분에 약간이지만 영성 하늘 고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네. 1시간만 늦었다면 흔적을 놓쳤을 것이야.=

“그러셨습니까.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요.”

=흘흘. 20년을 쫓아다닌 영성 하늘 고래라네. 자네라면 이 노파의 갈망이 어느 정도인지 알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먼.=

“그 연세로 야지를 돌아다니는 것은 어지간한 뜻으로는 실천하기 어려운 법이지요. 대강이나마 짐작하는 수준일 뿐입니다.”

=빈말 같지만, 빈말 같지 않은 점이 참 마음에 들어. 흘흘흘.=

흘흘거리며 웃던 노파는 잠시 환인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어 무수하게 박혀있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네는 저 하늘의 빛 하나가 한 명의 혼이라면 믿어지는가?=

“…….”

저 빛의 정체를 잘 아는 환인이지만 함부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천문이 어떤 위치에 있는 학문인지 모르니까.

대답을 딱히 바란 질문은 아니었는지 노파는 무릎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사자의 혼은 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어 지상을 내려다보며 그 존재를 정화하지. 그리고 정화가 끝난 혼은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새로운 생과 삶을 얻고 태어난다……. 그것이 이 세계에 전해 내려오는 윤회전생의 근본이라네.=

후우, 짧게 숨을 내쉰 노파가 말을 이었다.

=그런 윤회전생을 돕는 존재가 바로 영성 하늘 고래라네.=

“어쩐지 영혼사가 하는 일과 관계가 깊은 것처럼 보입니다.”

=……자네, 그때 뭔가 보았군?=

“제가 그때 본 것은 옅어져 가는 안개 속으로 사라지며 영혼을 데려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카턴 마을에서 영혼의 성불도 보았습니다. 그 둘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더군요.”

조용한 대답에 노파의 주변으로 쓸쓸한 기색이 번져나간다.

=자네…… 정말 귀한 경험을 했구먼. 평범한 사람은 평생 가도 몇 번 보기 어려운 것을 짧은 시일에 두 번이나…….=

그렇게 말한 노파는 고개를 작게 주억였다.

=그 둘에 분류하여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혼사는 방황하는 영혼을 찾아 하늘로 올려보내고 영성 하늘 고래는 영혼을 인도해 하늘로 보내주는 것일진대…….=

“며칠 전에는 안개 계곡의 영계로 데려간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큰 몸집이 어찌 자주 오르내리겠나. 영혼을 한곳에 모아놓고 일정한 날에 한 번, 하늘로 올려보내지. 그것이 이루어지는 때를 승령천제라 하는 것이고.=

“노인장께서는 그 승령천제에 목적이 있으신가 봅니다.”

=정확히는 그 안개 계곡의 영계에 목적이 있지…….=

“…….”

학구열과 탐구심에 그것을 찾는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환인이었다. 아마도 소중한 이의 영혼을 만나기 위해서가 그 목적이겠지.

환인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다물자 주위가 다시 조용해진다.

그러던 중 환인은 코의 점막을 부드럽게 자극하는 냄새에 눈을 부릅떴다.

약한 신내와 함께 밀려드는 특유의 로스팅 냄새.

코끝을 부드럽게 자극하며 지나가는 향을 추적하던 환인은 곧 그 향기의 발생지를 볼 수 있었다.

노파의 일행, 호위 여전사 중 소처럼 작은 뿔이 난 한 명이 작은 팬에 무언가를 능숙한 솜씨로 볶는 중이다.

……커피. 역시 커피다. 그러면 그렇지. 현실의 문물이 여럿 침투해있는 이 세상에 커피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지.

환인의 시선이 너무 뜨거웠을까, 곁에 앉아있던 노파가 흘흘 웃는다.

=자네, 커피를 좋아하나 보군?=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하하하. 솔직한 게 참 좋아.=

무릎을 탁탁 치며 즐겁게 웃은 노파가 원두를 볶는 여전사를 향해 말한다.

=윤라야. 두 잔 가져와보거라.=

=네, 마님.=

온 신경이 윤라라는 이름의 여전사가 볶는 원두로 향한다. 깨를 볶는 것과 비슷한 고소한 향이 한차례 주위를 휩쓴 뒤 이번에는 약간의 탄 냄새와 함께 더욱 고소한 향이 뒤덮는다.

능숙한 솜씨로 팬을 흔들던 여전사는 이어 드드득­ 드르륵­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드리퍼 소리와 함께 커피콩을 갈기 시작했다.

‘음.’

솜씨가 보통 이상이다. 전문 커피점의 바리스타 정도는 아니지만, 집에서 즐기는 수준에서는 최고점을 찍은 정도.

하지만 도구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그릇의 바닥이 각진 탓에 균일하게 갈리지 않고 봉도 우둘투둘해서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나서서 손을 보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커피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뒤에 직접 구해서 취향에 따라 내려 마시면 된다. 이번에는 얻어 마시는 입장이니 주는 것만으로 고맙게 여기자.

잠시 후 수백 번 해본 솜씨로 여과지를 씌운 컵에 곱게 간 커피 가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1시간 같은 5분이 지나고 유리로 된 컵을 받아든 환인은 코끝을 스치는 강한 원두커피의 향에 크게 감동했다.

이게 얼마만의 커피인지.

커피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 커피가 손에 들어올 줄이야. 이게 간절히 바라면 하늘이 이뤄준다는 그런 것일까.

환인은 약간이지만 신을 믿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노파에게 감사를 담아 인사했다.

“잘 마시겠습니다.”

=흘흘. 잠시만 기다리게. 수라야. 우유 좀 다오.=

우유? 카푸치노, 카페라떼도 나쁘지 않지.

보존 주머니에 담은 우유병 같은 것을 생각했던 환인은 이어진 광경에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했다.

윤라라는 전사처럼 머리에 엄지만 한 작은 뿔이 난 여전사가 갑자기 I컵은 될법한 왼쪽 젖가슴을 까더니 젖을 짜기 시작한 것.

물을 적신 깨끗한 천으로 젖과 손을 닦더니 하얀 사기 접시에 젖을 가져다 대고 젖을…… 짠다.

말 그대로 짠다. 유륜과 유두에 손가락이 닿지 않게끔 큼지막한 젖의 윗부분을 쥐고 부드럽게 밀어낼 때마다——

쪼르륵…, 쪼르르륵…….

……젖병에서 우유가 흐르듯 유두에서 하얀 젖이 흘러나오며 사기 접시를 찰랑일 정도로 삽시간에 채웠다.

그것을 따로 컵에 담아 가져온 여전사.

=넣어 마시면 맛이 부드러워진다네. 마시겠나?=

“……제안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의 커피라 지금은 순수한 커피의 맛과 향을 즐기고 싶군요.”

=그런가. 흘흘.=

젖소의 우유라면 몰라도 인간의 모유…….

‘…모유가 맞나? 색은 우유인데.’

노파가 커피에 여자의 젖을 타는 것을 보던 환인은 혼란을 걷어내고 커피의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젖이 뭐 어떻단 말인가. 지금 눈앞에 커피가 있는데.

스읍­

“…….”

향기만으로 뇌에 카페인이 공급되는듯한 느낌. 묵직하게 가라앉던 뇌세포가 일시에 깨어나는 듯한 감각에 환인은 기분 좋은 한숨을 흘린 뒤 작게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꿀꺽.

“후우…….”

짧고 약하게 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상황에 말은 필요 없다.

밤하늘과 커피와 나. 이 얼마나 훌륭한 조합인가.

=이게 커피인가요?=

=마님께서 즐기시는 유세리아산 원두죠. 커피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네. 많이요. 괜찮다면 조언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물론이에요. 제 이름은 수라, 인우족으로 마님을 모시는 호위 전사예요. 저쪽은 동생인 윤라.=

=저는 이실리테라고 해요. 인성족으로 주인님의 몸종 겸 하녀예요.=

수라와 이실리테의 자기소개에 윤라가 머뭇거리다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존경하는 분을 모시는 입장에서 두 분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니까요. 그러니 고개를 드세요…….=

세 아가씨가 조심스레 관계를 맺는 소리를 들으며 환인은 천천히 식어가는 커피와 함께 깊어가는 밤을 음미했다.

더할 나위 없는 밤이었다.

쿠엣?

“이건 네가 마시기에는 너무 떫다.”

쿠흥.

“……나중에. 네가 마셔도 될 정도로 부드러운 걸 구해주지. 그러니 참아라.”

쿠우~.

자기도 먹어보고 싶다고 졸라대는 비상식량 때문에 조금 그랬지만 뭐, 더할 나위 없는 밤이다.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