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136 성도로 가는 길
* * *
성도까지 거리가 며칠 남지 않자 점차 사람들과 마주치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대여섯 명 무리의 사람들도 시간 단위로 한 팀씩 보였고, 짐마차에 뭔가를 가득 싣고 가는 사람도 종종 보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곧 파르히스트의 대축제라는 느낌이네요.=
“그런가.”
=도시나 마을에서 하루거리 이상 되면 사람은 거의 보기 힘들어지거든요. 그런데 도보 이동으로 파르히스트까지 나흘이나 닷새는 남았는데 계속 눈에 보이잖아요.=
“이해하기 어렵군. 도시의 대형 상단이라면 물자 수송도 적지 않을텐데.”
상행위를 위한 물량의 수송이 종종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환인이었지만, 잠시 생각해보곤 그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도시는 보통 자급자족을 하는 편이고, 식량 자급율은 거의 100%라고 할 만큼 도시 주변에서 해결한다.
지구처럼 물류 통행을 위한 도로가 잘 닦여져 있는 것도 아니고 도시와 도시 사이가 안전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수송이 지구처럼 24시간 줄곧 유지되는 식은 아니겠지.
=잦은 편은 아니에요. 도시, 마을 사이 길목에는 위험 요소가 많아서 호위나 경비 병력을 대거 고용한 대형 상단이 아닌 이상 작은 군소 상단 여럿이 모여서 이동하고 여행자들도 그런 상단의 무리에 섞여서 이동하니까요.=
그렇기에 모험가나 용병, 탐험가들처럼 전투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지금처럼 소규모로 5~6명씩 이동하는 여행자는 거의 없다는 게 이실리테의 설명이었다.
“경험담인가 보군.”
=윽. 네에.=
환인의 가벼운 농담에 이실리테가 머쓱하게 웃었다. 확실히 그때는 그런 여행자들을 목표로 도적질을 했으니까.
앞을 바라보는 환인의 옆모습을 훔쳐보던 이실리테는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정말 주인님을 만난 게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어.’
당시의 이실리테는 높으신 분의 수행인이라던가 호위 같은 일을 하는 것들을 얕보고 비웃었다.
그래봤자 죽으면 다 똑같은 피륙의 인간일 뿐인데 신분을 나눠서 누구는 섬김받고 누구는 부리고. 웃기고 한심한 짓으로 여겼다.
‘근데 아니었지.’
이제 이실리테는 수행인이나 하녀, 메이드를 얕보지도 않고 우습게 여기지도 않는다. 그들을 존중한다.
환인과 함께 다니며 훌륭한 분을 곁에서 모시는 게 얼마나 가슴 뿌듯하고 자존감을 채워주는지 알게 된 것이다.
그랬기에 어제 마주쳤던 여전사들도 주인님에게 함부로 말하는 그 태도에 화가 났을 뿐, 사람 자체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진 않았다.
‘나라도 도적이나 부랑자들이 주인님한테 무례한 소릴 해대면 못 참을 테니까.’
그녀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노인을 지나치게 공경했기에 그런 날 선 반응을 내세웠을 테지.
한참을 이동하던 중 갑작스러운 내리막길과 함께 지평선까지 쭉 뻗어나가는 길이 등장했다. 높이만 400m에 가까운 비탈이다.
쿠우? 쿠?
고원이 평원으로 변해가는 지점. 활강에 최적화된 장소가 나타나자 비상식량이 눈을 반짝이며 환인에게 날아도 돼? 돼? 묻는다.
“그래.”
쿠우~!
쿠에~.
허락이 떨어지자 비상식량은 기다렸다는 듯이 속도를 올려 다다다닷 달리기 시작했고 쿠르티도 그 뒤를 따라 속도를 내 달린다.
그리고 약간 가파른 내리막이 시작된 순간 땅을 박차고 날개를 힘껏 펄럭이는 비상식량.
콰아아아아
강풍과 함께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처럼 내장이 한쪽으로 쏠리는 감각에 이어서 붕 뜨는 감각이 찾아왔다.
발밑이 급격하게 작아지고 말로 설명 못할 가벼운 체공감이 전신을 휘감는다.
뒤에 쿠르티도 날개를 퍼덕퍼덕 거리며 쫓아오려 했지만, 날개 크기에서부터 비상식량과 2배 가까이 차이 나는 쿠르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땅에 착지하고는 달려서 뒤쫓아온다.
쿠엣~!
비상식량은 신난 것처럼 힘찬 날갯짓을 이어가며 비행과 활강 사이의 무엇을 해나갔다.
펄럭 펄럭
‘날개가 점점 튼튼해지고 있군. 활강 거리가 계속 늘어나고 있어.’
거친 바람이 후드를 젖혀버리고 머리카락을 사납게 할퀴어댄다. 그렇게 수백 미터를 날아가던 중 환인은 비상식량의 날개에 희미한 초록색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맺힌 것을 발견했다.
백려강이 법술을 쓸 때마다 보이던 그 녹색 기운과 흡사하다.
‘그렇군. 녹색 쿠에는 풍술을 본능적으로 쓰는 건가.’
환인이 알고 있는 가장 큰 새, 비행 가능한 새는 아프리카 큰느시라는 새다.
몸무게는 약 19kg으로 날개를 활짝 펼치면 2.5m에 가까운데 비상식량은 그런 아프리카큰느시보다 8배는 더 무겁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날 수 없는 게 당연한 일.
그런데 비상식량은 100kg을 넘어 200kg에 가까워져 가는 몸을 띄우고 날아다닌다. 그 이유를 이제 이해했다.
풍술로 몸을 띄우고 날갯짓으로 추력을 얻으면서 꽁지깃으로 방향 조절을 하는 거겠지.
한참을 활강하다가 천천히 고도가 낮아진다. 이어 땅에 사뿐히 착지한 비상식량은 비행의 흥분이 남았는지 한차례 몸을 푸르르 털고는 꾸엣! 울더니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뒤쫓아오던 이실리테와 쿠르티도 황급히 속도를 높여 때아닌 쿠에 레이스를 펼친다.
콰과과과과
비상식량이 족히 시속 100km에 비견될 속도로 질주하니 귀에 폭풍이 불어닥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상체를 숙여 공기 저항을 줄이며 주위를 살피니 전후좌우 전부 끝없이 펼쳐진 초원뿐.
미국 중서부의 황량한 고속도로를 달리면 몇 시간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는 풍경에 뇌가 먼저 피로를 호소한다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은 환인이었다.
그러던 중 저 앞에 왜건 형식의 짐마차와 말을 타고 용병 복장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비상식량.”
목덜미를 쓰다듬어주자 알아서 속도를 줄인다.
쿠에헷, 헤엑. 헥.
부리를 살짝 벌리고 혀를 내민 채 헥헥 거리는 게 꼭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곧 따라붙은 이실리테도 지친 듯한 쿠르티의 목을 쓰다듬어주며 환인에게 말했다.
=비상식량이 되게 흥분했나 보네요. 8 킬로미터는 달려온 거 같아요.=
“며칠 얌전히 있었으니 좀이 쑤실 법도 했겠지.”
말만큼이나 달리기를 좋아하는 쿠에다. 때때로 이렇게 진이 빠질 정도로 달려주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을 터.
=그런데 비상식량의 활강 거리가 점점 늘어나는 거 같은데, 맞나요?=
“그래. 이번에는 거의 3km를 난 것 같군.”
=와. 그 정도면 곧 주인님을 등에 태우고 날아다니겠어요.=
“글쎄. 그건 4차 성장을 이루기 전에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활강하는 도중 비상식량의 날개에 맺혔던 것을 이야기해주자 이실리테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바람을 비행에 쓴다면 바람을 공격에도 쓸 수 있겠네요……?=
“노을색 쿠에는 불타는 바위도 소환한다고 하니 녹색 쿠에는 바람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으~. 지금도 이기기 힘든데 더 강해지겠네. 야아, 비상식량. 너 혹시 마수인 건 아니지?=
쿠우?
=아니, 마수보다 성수가 맞으려나. 아무튼 나중에 세졌다고 언니 괴롭히면 안 된다 너?=
쿠흐흥.
이실리테가 손을 뻗어 비상식량의 부리 아래를 쓰다듬어주니 비상식량도 부리 끝으로 이실리테의 손을 밀어내는 등 장난을 친다.
한 점 그늘 없이 웃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환인은 지금까지 눌러놓고 있던 질문을 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읽었다.
“그런데 이실리테. 보통 직업자의 급수는 어떻게 올리는 거지? 따로 하는 훈련이 있는 건가.”
직업자의 성장 방식에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이것을 질문하는 것은 평범하게 터부시되는 분위기여서 이때까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당신, 마누라와 섹스는 하루에 몇 번 정도 합니까. 어떤 체위를 즐기는지? 마누라의 속살 맛은?” 혹은 “당신 남편의 자지는 어떤 모양이죠? 속 깊은 곳까지 긁어주나요? 길이는? 두께는 만족할 수준인가요?” 이런 질문이 덜 민감할 정도였으니 할 말 다 한 수준이다.
술사 협회나 도서관에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도서관은 중심가에서도 일부 허가된 사람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술사 협회에서 선생을 구하면 수업비만 하루에 1~3 열은화씩 지불해야한다. 물론 그런 수업도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실리테가 질문받은 순간 멈칫한 것을 보며 역시 알아보러 다니지 않은 게 정답이었다는걸 깨달은 환인은 그녀가 대답해주길 차분히 기다렸다.
=어…… 훈련은 다들…… 하는 방식이 다를걸요?=
“너는 어땠지?”
=음. 일단 제가 아는 것은 사람마다 각성할 때 시작하는 급수가 다르다는 거예요. 저는 1급부터 시작했는데 하늘이 내려준 자질은 3급, 4급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훈련의 방식은 각자 달라서 브릴릿처럼 꾸준히 무기를 휘두르고 대련을 통해 성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용병들처럼 전장에서 사람을 죽여야 잘 오른다고 믿는 사람도 있어요. 실제로 저랑 이름이 같은 대영웅 이실리테는 전장을 돌아다닌 끝에 9급의 검성이 되었다고 하고요.=
“검성? 전사의 상위는 무성이 아니던가.”
=잘난 사람들은 자길 특별하게 지칭하는 걸 좋아하잖아요.=
“그렇군.”
누굴 죽여서 성장한다는 건가. 게임처럼 사람을 죽이면 경험치를 얻는 방식?
환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비상식량에게 향했다.
“각성은 사람, 그리고 사람과 닮은 동물만 가능하다는 건 사실인가?”
=네. 동물은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어요.=
“그럼 성수나 마수는 그저 태어날 때부터 위상력을 지니고 쓰는 거겠군.”
이실리테의 시선도 비상식량에게 향한다.
잠깐 비상식량에 대해서 몇 가지 가설을 만들어내던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다시 물었다.
“넌 어떤 식으로 성장했지?”
=전…… 1급으로 각성해서 두 번 다 전장에서 성장했어요. 아, 직업자의 급수가 오를 때 벌어지는 현상은 그냥 아우라가 한차례 크게 퍼져나갔다가 좀 더 진해지는 식이거든요. 두 번 다 상대 진영의 직업자를 죽였을 때였어요.=
“그렇다면 성장 방식이 나뉜다는 가설은 맞아떨어지겠군. 혹은 성장이 여러 방식이거나.”
=그런가요?=
“율캄 이전 6급 삼림형 미궁에서 내가 죽인 마수, 짐승, 이형종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천 마리는 될 거다. 죽이는 것으로 능력이 향상한다면 틀림없이 눈치챘을 텐데…….”
자신의 영적 능력이 올라가는 것은 영혼 구슬의 개수가 증가할 때뿐이었다.
6개에서 12개가 되었을 때 성장했고 12개에서 24개가 되었을 때 한 단계 더 성장했다. 중간중간 기술을 익힌 것은 단서와 깨달음을 얻었던 결과이니 성장과는 무관할 터.
환인의 이야기에 이실리테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럼 제가 주인님과 대련하면서 성장하게 되면 성장 방식이 여러 가지라는 게 증명되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헤헤. 주인님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주인님과 대련을 열심히 해야겠네요.=
배시시 웃으며 하는 말에 환인도 피식 웃었다.
“더 열심히 했다간 뼈가 부러질지도 모른다.”
=강해져서 주인님을 도울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어요.=
“……그러냐.”
이실리테의 올곧은 진심이 담긴 눈빛에 환인은 마음속 감정의 바닥에서 무언가 움직이려는 것을 느꼈지만.
“…….”
이 감정은 무언가 꺼림칙하다.
이 감정을 파헤치면 어쩐지 자신이 아니게 될 것만 같은 미묘한 불쾌감과 거부감에 찍어 눌러버렸다.
그리고 비상식량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며 생각에 잠겼다.
직업자는 그렇게 성장한다 쳐도 성수나 마수의 힘은 어떻게 성장하는 걸까.
비상식량이나 칼날 멧돼지를 보면 위상력을 가진 적을 포식해서? 아니면 섭식으로 에너지를 모은 뒤에 해방하는 식으로?
그러던 중 앞의 상단 행렬 후미와 가까워졌다.
후미의 용병들이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기색이 보인다. 꽤 예민한 것으로 보아 습격을 받았다거나 그런 경험이 있는 듯하다.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신호를 보내 상단과 거리를 두고 추월하려 했다.
괜히 가까이서 지나가려다가 예민한 자들을 자극해 오해를 빚는 일은 피하기 위해서다.
이 세상에는 착하고 순박한 사람이 지구보다 많다는 데 동의하는 환인이다. 그렇게 착하거나 순박한 사람도 특정 조건에서는 난폭하고 사나워진다.
대표적인 예가 어제 마주쳤던 노파의 여전사들.
=와. 대형 상단인가 봐요. 짐마차와 왜건이 12대나 되네. 직업자도 넷이나 있어요.=
“용병들이 예민한 상태로 보인다. 시선을 주면 시비에 걸릴 수 있으니 자제해라.”
=넵.=
길에서 벗어나 풀밭을 밟으며 멀찍이서 행렬을 지나치고 있으니 용병들과 사람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몇몇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우왓. 녹색 쿠에잖아? 캬, 장구도 존나 멋지네. 형님형님. 저기 좀 봐요.=
=어…… 유명한 모험가인가? 나도 저런 쿠에 타볼 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군.=
=끌끌. 우리 같은 놈들은 녹색 쿠에는 타지도 못한다. 있으면 얼른 팔아서 남은 평생 놀고먹어야지.=
=엥? 왜요? 저렇게 멋지면 타고 다니면서 종마로 써도 돈 많이 벌 텐데.=
=임마, 희귀 유색 쿠에는 부르는게 값일만큼 비싸. 우리처럼 별거 없는 놈들이 저런 으리으리한거 타고 다녀봐라. 재수없이 호족이나 고족한테 물리면 반강제로 강탈당하는 거여.=
=알스 말이 맞아. 지키지 못할 보물은 가지고 있어봤자 불행의 씨앗만 되지.=
=쩝. 꿈과 희망도 없는 이야기네요.=
인견족과 인랑족, 인묘족 남자들이 나누는 대화에 환인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어서 다른 마차의 여자들이 속삭이는듯한 이야기 소리도 들려온다.
=부럽드아~. 누구는 하루하루 피똥 싸는 허드렛일꾼인데 누구는 팔자 좋게 남자 끼고…… 앜! 왜 때려?!=
=입 싸물어 미친년아…! 녹색 쿠에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평범한 사람일 거 같아…?!=
=저 또라이는 입만 열면 사고 치려고 하네.=
=야……. 척 봐도 일반인 아닌데 대가리가 달렸으면 생각 좀 하고 말하자, 응?=
=뚫린 입인데 내 맘대로 말도 못 하나…….=
=뚫린 입으로 개소리만 쳐하니까 그렇지!=
=사라야. 밤마다 침 질질 흘리는 아랫입으로 쩝쩝거리는 것 가지고는 부족했니? 아예 윗입 아랫입 다 꼬매줘?=
=아 행수 언니는 나만 갖고 그래.=
=후우……. 사라야, 저번 로겔 상단 일꾼이 지나가는 고족님보고 야부리 털었다가 보복으로 상단이 크게 휘청였다는 소문 들었니, 못 들었니?=
=……들었죠.=
=출발하기 전에 사장님이 상행 중 입을 조심하라는 교육 받았니, 안 받았니?=
=받았…… 악, 앜!=
철썩! 철썩!!
=들었고 받았다는 년이 그딴 소릴 내뱉어! 응!? 너 진짜 나랑 푸닥거리 한번 해볼래?!=
=죄송! 죄송!!=
“…….”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가 무슨 삼류 소설의 클리셰를 밟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이지.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근본 선민사상의 고족이나 호족이 본다면 욕심낼 건 분명하고.’
파르히스트는 상급 도시, 성도인 만큼 고족이나 호족의 수는 더 많을 거다. 수가 많으면 또라이 보존의 법칙에 맞춰 정신병자들도 많을 테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환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상단 행렬을 추월한 뒤 비상식량을 재촉해 조금 더 속도를 높이며 생각했다.
‘비상식량의 소유권 지정 방법과 소유권 보장 제도가 없는지 알아봐야겠군.’
=주인님.=
“음.”
=파르히스트에 조금, 문제 되는 고족이 많나 봐요.=
“파르히스트만의 문제는 아니겠지. 파르히스트에 도착하면 숙박업소를 찾기보다는 장원이나 단기 임대 주택 같은 곳을 빌려야겠다.”
=네? 카턴에서 칸트위 씨한테 받은 소개장은요?=
칸트위가 소개해준 곳에 가면 영혼사라는 신분에도 어색하지 않은 고급스러운 장소가 제공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만큼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오갈 가능성도 크겠지.
자신의 신분도 노출될 가능성과 비상식량이 고족, 호족 같은 자들에게 알려질 가능성까지.
처음부터 소개장은 무시할 생각이었지만, 방금 일로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칸트위 씨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개장을 주었을 뿐이니 그곳에 머무르지 않더라도 실례될 일은 없을 거다.”
=네에.=
솔직하게 말해서 이실리테는 주인님의 행동에 이해되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직업을 숨기는 거였다.
영혼사라는걸 알리면 활동이 훨씬 쉬워지실 텐데. 신분을 숨기고 싶으면 위에 몇 사람한테만 알리면 안 되나?
“내가 직업을 숨기는 게 이해되지 않는 눈치군.”
=앗, 저 그게…….=
“이실리테.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 테지.”
=…….=
“직업을 밝히고 원조를 받는 행위 그 자체가 빚을 지는 행위다. 너는 고족이나 호족에게 잡혀 그들만의 영혼사가 되는 것을 바라느냐.”
=아. 이해했어요.=
평소 자신에게 큰 의문을 가지지 않고 따르는 이실리테가 궁금해한 점이었기에 설명으로 이해시킨 환인은 보이지 않는 파르히스트를 응시했다.
성도는 상급 도시인만큼 웨이포드 보다 몇 배는 넓으니 영혼도, 창관도 많겠지.
노파의 불가사의한 영기 형태를 보고 상단 일꾼의 잡담에 섞인 이 세상의 풍토를 읽었더니 경계심이 한 단계 올랐다.
원래는 대축제 기간 동안만 머물다가 떠날 계획이었지만, 계획 변경이다.
‘영혼 구슬을 60개까지 늘려야겠어.’
그 정도로 늘리면 영혼 기술의 위력도 늘어날 것이다. 사용 횟수도 늘어날 테니 여차하면 아우라가 없는 희귀 속성 법술사라고 위장할 수도 있을 거다.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파르히스트 근처에는 마궁이 다섯 개나 된다고 했다. 그곳 미궁을 순회하며 돈을 벌고 창관을 순례하며 영기를 수집해야겠다.
성불행을 통해 그곳의 부자들에게 금전적인 기부를 받아내도 괜찮겠지.
이동은 비상식량에게 맡겨두고 파르히스테서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해나가는 환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