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134 성도로 가는 길
* * *
소근소근.
부스럭…… 부스럭.
꾸…….
=……량, 쉬잇……. 가만히…… 주인님 깨겠어…….=
사락. 자박… 자박…….
비상식량의 옆구리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환인은 주변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빠르게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옅은 습기와 풀 내음. 자작거리는 모닥불 소리와 속삭임.
고개를 들고 눈을 뜨자 방수 망토를 두 손으로 펼쳐 들고 살금살금 걸어오던 이실리테와 눈이 마주쳤다.
=…….=
“…….”
문득 습기가 강하게 느껴져 주위를 둘러본 환인은 사방을 하얗게 메우고 있는 짙은 안개를 볼 수 있었다.
“엄청난 안개군.”
=앗, 네. 2시간 전부터 조금씩 끼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진해졌어요. 주인님, 여기 방수 망토.=
“음.”
일어나서 가죽옷 위를 슥 훑어내리자 손에 물이 흥건해진다.
대충 손을 털고 방수 망토를 받아 내려놓은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10m 앞도 채 보이지 않는 안개.
영혼 시야를 발동해봤지만 시야가 아주 희미한 녹색으로 변할 뿐, 안개를 뚫어본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영혼 시야에 안개가 옅은 녹색으로 보인다는 것은 몸에 해로운 것은 아니란 뜻.
‘근처에 수원이 있는 건가 아니면 낮아진 구름이 지나고 있는 건가.’
이곳 가닌 평원이 고지대라서 낮은 구름이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거다.
=주인님. 아침 식사 준비할게요.=
“그래.”
환인이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기 시작하자 비상식량도 옆에서 목을 쭉 내밀거나 꽁지깃을 파르르 떨거나 날개를 쭈욱 펼치며 따라 몸을 푼다.
그리고는 쿠르티처럼 주위를 돌아다니며 발톱으로 바위를 들춰보고 땅을 파헤치며 벌레를 찾아 잡아먹기 시작했다.
스트레칭을 끝내고 방수 망토를 둘러맨 환인은 쿠르티와 쿠쿠 거리면서 대화하는 비상식량을 지켜보았다.
쿠에.
수백 킬로그램은 될법한 바위를 다리로 밀어서 굴린 쿠르티가 비상식량을 향해 울자 비상식량이 그쪽으로 호다닥 달려간다.
쿳? 쿠우.
쿠에~.
큐삣.
쿠르티는 비상식량에게 잘 보란 듯이 바위 밑에 숨어있던 벌레들을 부리 끝으로 콕콕 쪼더니 굵고 두꺼운 발톱으로 무른 땅을 팍팍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부리질을 한 쿠르티의 부리 끝에는 두더지 같은 작은 동물이 다리가 잡혀 버둥거리고 있었다.
쿠엣!
비상식량이 냉큼 부리로 쪼아서 죽이더니 한입에 삼켜버린다.
쿠르티의 먹이를 빼앗은 건가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쿠르티는 애초에 비상식량을 챙겨주고 있었던 것.
“이실리테. 쿠르티도 암컷이었나?”
=네. 쿠르티가 비상식량을 새끼처럼 여기고 있어요. 아무래도 비상식량을 어렸을 때부터 봐서 그런가 봐요.=
확실히 그렇게 보고 있다면 쿠르티의 행동이 이해된다.
웨이포드를 나온 이후부터 쿠에로서 알아야 할 여러 가지를 쿠르티에게 배우고 있는 비상식량이었으니까.
먹어도 되는 풀, 먹으면 아픈 풀, 먹으면 맛있는 풀의 구분에서부터 어디를 파헤쳐야 벌레를 먹을 수 있고 작은 동물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기지개를 켜는 방법과 동족과 소통하는 법, 깃털을 다듬는 법 등등.
비상식량은 새끼일 때부터 자신과 같이 다녔다.
그 때문에 쿠르티가 보기에 비상식량은 쿠에가 알아야 할 것을 전혀 모르는 좀…. 모자란 아이 같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환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상식량은 어째서 거기에 혼자 있었던 거지.’
코로나 베리를 먹으려다 자신이 던진 마비 구슬에 잡혔던 당시를 떠올려본 환인은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새끼나 다름없던 비상식량이 혼자 있었다는 건 가족이 모두 죽었단 거겠지. 적의 구분을 하지 못해서 자신이 있는 곳 근처로 날아와 코로나 베리를 먹으려 했던 거고.
=주인님. 아침 식사가 다 됐어요.=
아침은 두툼한 빵 사이에 계란과 고기, 채소 등을 끼우고 위에 달짝지근한 소스를 뿌려 만든 미국식 핫도그였다.
“잘 먹지.”
=잘 먹겠습니다.=
원래 소시지를 끼워 넣어야 하지만, 구하지 못한 소시지 대신 건식숙성 한 고기를 열선 플레이트에 구워 만든 핫도그는 환인의 맛 평가에서도 확실히 고평가받을만한 퀄리티였다.
육즙 가득한 패티와 아삭거리는 채소, 약간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소스에 사이사이 뿌려진 통후추의 알싸한 맛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빵의 식감까지.
전문적인 햄버거, 핫도그 가게에서 먹은 것보다 맛이 훨씬 뛰어나다. 이건 이실리테의 요리 솜씨가 좋아서겠지.
=입맛에 맞으세요?=
“그래. 맛있군.”
환인의 칭찬에 이실리테는 기쁜 듯이 헤헤 웃으며 손가락을 꼼질거리다 핫도그를 덥석덥석 먹어 치운다.
“보존 주머니는 어떻지? 채소가 아직 싱싱한 것을 보면 효과가 나쁘지 않은 듯 한데.”
=이거 정말 굉장해요. 뒤집어서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엄청 좋아요.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마을에서 음식 재료를 좀 더 많이 사 오는 건데…… 실수했어요.=
“보통의 아공간 주머니는 청소가 힘든가 보군.”
=하녀 기술원 교육 항목에는 마도구 청소도 있었거든요. 그중에 보존 주머니 청소가 제일 힘들었어요. 뒤집어서도 안 되고 안을 꼼꼼히 청소 안 하면 이전에 넣은 물건의 흔적이 새로 넣은 물건에 묻거나 오염되기도 하고…….=
보존 주머니 크기가 작지도 않고 뒤집었다간 술법이 깨지는 일도 있어서 일일이 손을 넣어서 닦고 청소해야 한다고.
=그런데 이건 위상석을 빼면 평범한 주머니가 되니까요. 이걸 발명한 분은 천재가 틀림없어요.=
어젯밤에 보존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만져보더라니 그런 이유에서였나.
식사를 끝내고 비상식량과 쿠르티의 식사를 챙겨준 뒤 돌아오자 야영지를 정리하고 있던 이실리테가 열선 플레이트 마도구를 들며 감탄했다.
=마도구가 있으니까 확실히 편하네요. 이렇게 안개가 심하면 불 피우는 것도 힘든데.=
그리 말하는 목소리에 약간의 아쉬움이 느껴진다.
“다른 필요한 마도구가 있나.”
=저, 보존 상자가 있으면 좋겠어요. 이 정도 되는 걸로요.=
대충 가로세로 70cm*40cm의 직사각형 상자를 손으로 그려 보인다.
“조미료를 담을 통인가.”
=넵. 하녀 기술원에서 봤는데 작은 상자에 조미료하고 소스를 보관하는 상자였어요. 거기 넣어두니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소금이나 설탕이 눅눅해지지 않고 소스도 마르지 않더라구요.=
묻자마자 대답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갖고 싶었던 듯 했다.
“파르히스트에서 구해보자. 그것 말고도 필요한 게 있다면 사줄 테니 미리 생각해둬라.”
=넵!=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의.식.주 세 가지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위한 준비물이면 어느 정도 돈을 쓸 생각도 있는 환인이었다.
맛있는 식사는 삶의 만족도를 올려주는 법이니까.
카턴 마을을 나온 지 오늘로 사흘째.
=주인님.=
이동은 비상식량에게 맡겨놓고 정신 집중과 명상 훈련을 반복하던 환인은 잠시 휴식하는 틈에 이실리테가 부르는 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개가 너무 심한데 걷힐 때까지 기다렸다 움직이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해가 떠오른 지도 한참 됐는데 안개가 거둬지지 않는 이런 안개는 처음 봐요…….=
약간 불안이 깃든 목소리에 환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10시는 되었을 시각. 안개의 밀도가 줄어들긴커녕 오히려 더 짙어지는 느낌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땐 10m 정도였는데 지금은 5m 앞도 겨우 보일 지경.
시야가 제한되어 있어서 달리기는 위험하기에 비상식량을 걷게만 하고 있다.
‘보통 해가 뜨면 안개는 사라지기 마련인데.’
너무 짙어 하얗게 보이는 안개 속에서 녹색 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고 있으니 타박타박, 비상식량과 쿠르티의 발소리마저도 묘하게 들려온다.
쿠르티를 타고 옆에서 따라오던 이실리테도 생소한 감각에 혼란스러운지 주위를 자꾸만 두리번거린다.
“이실리테. 이런 안개에 대한 설화 같은 것은 들은 적 없나.”
=네. 하녀 기술원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못 들었어요.=
‘흔한 현상이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거나 우리가 희소한 상황을 겪고 있거나 둘 중 하나겠군.’
환인은 카턴 마을을 나오기 전에 파르히스트로 가는 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었다.
길을 잃을뻔한 실수는 카턴 마을로 향할 때 한 번이면 충분하니까.
그렇게 얻은 정보는 카턴 마을과 성도 파르히스트까지는 약 13일 거리이며 가는 길은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가는 길을 높고 낮은 절벽이 가로막아 구불구불하게 만들지만, 카턴과 파르히스트 사이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가며 만들어진 대로가 있어 길만 잘 따라가도 파르히스트에 도착한다는 이야기.
물론 소요 시간 13일은 걸어서 이동했을 경우다. 중간에 촌락 하나도 경유해야 하고.
그리고 정보 속에 지금 같은 기상 이변은 없었다.
방수 망토의 겉과 비상식량의 깃털에 잔뜩 맺힌 물방울을 보다가 망토를 털었다. 물방울이 비처럼 촤아악 쏟아진다.
쿠엣~.
갑자기 물벼락을 맞은 비상식량이 몸과 날개를 흔들어 물기를 털어낸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기자 마치 머리를 감은 것처럼 흠뻑 젖어버린다.
“일단 계속 간다. 이실리테, 밧줄을 다오.”
젖은 머리카락, 가지런한 속눈썹에 맺힌 물기, 촉촉하게 젖은 입술.
우수에 깃든 남자의 얼굴이 저런 것일까. 올백으로 쓸어넘긴 환인의 얼굴을 정신없이 훔쳐보던 이실리테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아공간 주머니에서 15m 길이의 밧줄을 꺼냈다.
그걸 받아서 비상식량의 목 띠에 묶은 환인은 끝을 이실리테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쿠르티의 목에도 묶어라.”
시킨 대로 묶은 이실리테는 그러고 나서야 환인에게 이유를 물었다.
=안개 때문에 떨어지면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묶는 거예요?=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살던 곳에는 세이렌이라는 해양 마물의 이야기가 존재하지.”
바리에이션은 여러 가지지만, 대충 결말은 바닷사람을 노랫소리로 유혹해서 바다에 빠트려 죽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이실리테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노래로 사람을 유혹해서 물에 빠트려 죽인다니, 무서운 이야기네요.=
“지금 상황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에서 영혼을 끌어당기는 듯한 노랫소리가 들려오면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음을 옮길 테고, 안개 속에 숨어있는 괴물이…….”
환인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그 상황이 연상되는지 이실리테의 안색이 핼쑥해진다.
=그, 그럼 어떻게 해요? 귀를 막아요?=
“날아오는 법술을 두 손으로 막는다고 막을 수 있을까. 만약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면 즉시 말해라. 두들겨서라도 정신 차리게 해줄 테니.”
=……주인님도 걸리면요?=
“나는 위상력의 영향을 덜 받는 체질이다.”
=아. 네, 주인님.=
위상력의 영향을 덜 받는 체질이라니, 그런 체질은 들어본 적도 없는 이실리테였지만 의심하지 않았다.
주인님이 하는 말은 무조건 맞을 테니까.
고삐를 꾹 움켜쥐고 긴장을 끌어올리는 이실리테를 보다가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가볍게 생각한다.
‘사흘을 왔으니 앞으로 대강 닷새 뒤면 파르히스트인가.’
카턴 마을과 성도 파르히스트 사이에는 촌락 하나가 더 있다고 했다. 그러나 촌락에는 들르지 않을 생각인 환인이었다.
카턴에서 벌어진 소동 때문은 아니다. 애초에 작은 촌락이니만큼 이야기가 퍼졌다고 해도 방문해서 입단속을 요구하면 순박한 촌사람들은 그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일 테니까.
율캄이나 에트브룩, 마에스티그 같은 촌락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성불행을 끝낸 뒤에는 늘 사람들을 모아놓고 강요에 가까운 당부를 했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달라고, 주위가 번잡해져서 영혼 성불행에 지장을 받는 것은 피하고 싶다고 말이다.
그러나 마을이나 도시처럼 수천, 수만 명이 살아가는 곳은 다르다. 어딘가 이야기가 흘러도 흐른다.
때문에 파르히스트에서 볼일을 끝마친 뒤 그 후에 근방의 촌락이나 마을을 순회할 생각인 환인이었다.
예상대로라면 파르히스트에서도 웨이포드에서 보낸 시간만큼 머무를 테고 그만큼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관심이 가라앉을 테니까.
웅 우웅
이동은 비상식량에게 맡기고 왼팔의 영혼 구슬들을 풀어서 구슬 조작과 더불어 정신 집중 훈련을 시작한다.
……….
……….
“…….”
환인은 한쪽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영혼 구슬 핸들링을 시작하면 으레 들려오던 정령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 안개에 뭔가 있긴 있나 보군.’
자신은 체질 때문에 못 느낄 뿐, 안개 속에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점차 확신에 가깝게 올라갈 무렵.
“……?”
환인은 오른편에서 미약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바람은 하나도 불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바람일까.
눈을 가늘게 뜨며 오른쪽으로 시선을 주자 비상식량도 멈칫, 걸음을 멈추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비상식량이 멈춰서자 연결되어있던 쿠르티도 걸음을 멈추고, 긴장 중이던 이실리테도 뭔가 싶어 침을 꼴딱 삼키며 환인을 불렀다.
=주, 주인님……?=
훅
그 순간이었다. 바람이 좀 더 강하게 불면서 안개가 흩어져 밀도가 흐트러진다.
이어…….
————.
새카맣고 거대한 눈동자가 이쪽을 보며 안개 속을 스윽 스치고 지나갔다.
“……!”
=히익?!=
소울 스틱을 뽑아 드는 동시에 비상식량의 목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다. 그리고 눈 한번 깜빡일 시간에 자신과 이실리테, 비상식량, 쿠르티에게 강령을 펼치고 4중첩 영혼 화살 3발과 4중첩 영혼 폭발 3발을 단숨에 만들어내었다.
“…….”
비상식량의 등에 타고 있는 자신의 키만 한 눈동자였다. 너무 커서 눈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생김새도 확인하지 못했다.
대체 뭐였을까.
………….
소름 돋는 침묵이 이어진다. 강령을 받아 펄떡펄떡 뛰는 심장 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그리고 그때 먼 곳에서인지 가까운 곳에서인지 알 수 없는 거리감에서 대기를 진동시키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꾸우우우웅——
‘고래 울음소리?’
실제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 다만 내셔널지오그래픽 영상에서 들어본 고래 소리, 그것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꾸우우우웅—…….
두 번째 울음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
강령하고 있는 영혼은 물론이고 세팅해놓은 기술도, 왼쪽 팔뚝에 모아둔 영혼 구슬까지 몸에서 빠져나간다.
=어, 주인님?=
“…….”
42개의 구체 모양 정령이 살랑거리듯 허공을 유영하더니…….
꾸우우우우웅——…….
세 번째 고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을 때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마치 엄마를 찾아가듯 살랑이면서 날아가 버렸다.
강령 효과가 사라져 차분해져 가는 심장 소리와 함께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안개의 밀도가 빠르게 옅어지기 시작했다.
숨 몇 번 쉴 시간에 수백 미터 너머까지 물러나는 안개.
=주, 주인님 저기!=
그런 안개 사이에 고래의 꼬리지느러미 같은 것이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을 목격했다.
수백 미터나 떨어져 있는데도 수십 층 짜리 빌딩만큼 커 보인다.
=어…….=
어두운 감색에 얼룩지듯 하얀 점이 박혀있는 고래 꼬리는 이내 안개 속으로 사라졌는데, 환인은 고래 피부의 하얀 점이 뒤늦게 영혼이었음을 깨달았다.
한 치 앞도 안보일 만큼 짙던 안개는 고작 몇 분 사이에 옅은 아침 안개처럼 멀어졌고 평범한 고원 같은 주변 풍경이 드러났다.
쿠우~.
쿠엣?
쿠에.
큐이!
쿠르티와 비상식량이 대화하는 걸 들으며 환인은 주위를 훑었다.
언제나 시야에 보이던 정령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없어도 늘 10체 이상은 보였었는데 정말 1체도 없다.
=주인님, 방금 그건 대체…….=
“영혼을 신의 정원으로 안내하는 사자였을지도 모르겠군.”
=네?=
“그 고래의 주변에 영혼이 붙어있더군. 내가 데리고 있던 정령들도 모두 따라가 버렸다. 지금도 주변에 정령이 없다.”
이실리테가 입을 살짝 벌린다.
=그, 그런 사자님이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못 들었는데…….=
“…….”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적으로 지식을 후대에 물려주는 관습이 거의 정착되지 않은 시대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것이 당연한 일.
흑창을 다시 안장에 끼운 환인은 비상식량의 옆구리를 가볍게 건드렸다.
“가지.”
=네, 네.=
쿠르티의 옆구리를 발꿈치로 살짝 건드려 나아가게 한 이실리테는 영혼이 정화 당하는 듯한 신비로운 울음소리를 떠올리다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웠다.
‘역시 그 커다란 생물도 주인님을 신경 썼다는 거겠지?’
자신의 28년 평생 그런 신비한 생물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 근방에 그런 생물이 출현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즉, 주인님 근처에 그 생물이 우연히 나타났을 리가 없다는 게 이실리테의 생각이었다.
이실리테는 환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왼쪽 젖무덤을 꾸욱 눌렀다.
콩닥거리는 심장 박동이 손바닥을 간지럽힌다.
이 고동이 신비한 경험을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주인님을 생각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이실리테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