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35화 (135/813)

〈 135화 〉 131 카턴 마을

* * *

=후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별채로 돌아온 이실리테는 후드 로브를 벗으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옆에서 조용히 후드 로브를 벗고 있는 환인을 훔쳐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주인님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으셨네.’

평범한 사람 영혼은 환인의 옆에 좀 봤었기에 그나마 괜찮았지만, 검게 물든 여자 영혼이 몇 번 발광하려 했을 때는 요도 끝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심장이 벌렁거리고 긴장되어서 혼났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환인의 안색에 이실리테는 역시 주인님이야, 라는 생각을 하며 환인이 벗은 로브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주인님의 안색을 살폈다.

조금 피곤해 보이시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주인님이라도 아까 같은 큰일을 하셨으니까 피곤하실 거야.

=…….=

주인님은 씻는 걸 좋아하신다 ­ 큰일을 했으니 피곤하실 거다 ­ 좋아하는 걸 하면 피로가 풀린다. = 씻으면 피로가 풀린다.

간단한 연상 작용을 해낸 이실리테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님…… 씻을 준비를 할까요?=

그렇지 않아도 차가운 물이든 뜨거운 물이든 몸을 담그고 싶다고 생각하던 환인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듯 호박색 눈동자를 깜빡이는 이실리테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지.”

=넵!=

짧게 대답한 이실리테는 방에 로브를 가져다 놓고 빠르게 목욕할 준비를 시작한다.

마을 유지의 별채라서 그럴까. 순환식 열탕기가 여기도 있었기에 뜨거운 목욕 준비는 10분 만에 끝났고, 이실리테는 주인님의 편안한 휴식에 일조했다는 성취감에 뿌듯한 감정을 느꼈다.

나도 이렇게만 하면 언젠가 주인님의 훌륭한 하녀가 될 수 있을 거야.

아쉬운 점은 마에스티그 촌락의 욕실 사건 이후 주인님의 목욕 시중을 들기가 굉장히 민망하고 부끄럽고 수줍고 창피해서 문을 두드리지 못하겠다는 것.

환인이 반신욕 중인 욕실 앞에서 들어간다, 들어가지 않는다를 두고 내면의 자신과 싸우던 이실리테는.

“수고했다. 너도 씻고 쉬도록.”

=……네에….=

고민하던 사이 환인이 다 씻고 나온 것을 보며 시무룩해졌다.

3시간 정도 자고 일어난 아침의 마을은 이보다 더할 수 없을 만큼 시끄러웠다.

=이보게, 환인 공! 일어났나!=

이실리테에게 어깨 안마를 받다가 루아르다의 외침을 듣고 쪽창을 열었던 환인은 루아르다의 으흐흐, 음흉하게 웃는 얼굴을 보게 되었다.

=좋은 시간을 내가 방해한 건가? 이거 미안하게 됐소. 허허.=

“아닙니다. 그런데 루아르다 씨, 마을을 떠나시는 겁니까?”

날갯짓에 방해되지 않도록 등에 멘 작은 봇짐과 허리에 두른 벨트 파우치. 둘 다 무게 감소 효율이 아주 높은 아공간 주머니로 보인다.

=어? 어어. 그렇소. 환인 공에 이어 이실리테 양과 비상식량 군에게 연달아 패배했더니 이렇게 놀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말았지. 그보다!=

멋쩍게 웃던 루아르다는 이럴 게 아니지 참! 하면서 소리친다.

=지난밤에 영혼사님이 찾아와 마을을 뒤집어놓고 가셨단 말이오! 이렇게 있을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러 가야 하지 않겠소?!=

“저와 이실리테는 어젯밤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마을에 적지 않은 소란이 벌어져 모를 수가 없더군요. 하지만 루아르다 씨는…… 주무시느라 못 보셨나 봅니다.”

=……이실리테 양과 비상식량 군에게 맞은 자리가… 크흠.=

재생력도 마냥 공짜는 아니다. 그건 핏빛 위상석을 애용하고 있는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비상식량과 이실리테하고 대련하며 입은 피해를 복구하느라 곯아떨어졌다는 이야기겠지.

말을 얼버무린 루아르다는 그래서 안 가볼 거냐고 재차 물었다.

“오늘 아침은 좀 여유롭게 쉬고 싶습니다.”

=흐허허. 듣자 하니 마도구점의 미녀 점주분과도 애틋한 시간을 가졌다지? 남자로서 참 부럽기 그지없소. 아무튼 그러면 혼자서라도 다녀와야겠군. 좀 이따 봅시다!=

훌쩍 날아오르는 루아르다를 바라보던 환인은 문득 어깨를 주무르던 이실리테의 손이 멈춘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자 재빨리 새초롬한 표정을 숨기고는 언제 손을 멈췄냐는 듯이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

=…….=

태연하고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실리테는 계속 이어지는 환인의 시선에 태연함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고 친 강아지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던 환인은 피식 웃으며 쪽창을 닫았다.

“난 혼자서 쉬고 있을 테니 마을에 내려가 분위기를 살펴보고 와라.”

=넵……. 다녀올게요, 주인님.=

속내를 들킨 것처럼 얼굴이 빨개진 이실리테가 방을 나간다. 그걸 바라보던 환인은 문이 닫히고 이실리테가 나가는 소리까지 들은 뒤 후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두 손바닥을 들여다보다가 눈을 감으며 주먹을 움켜쥔다.

척추를 따라 흐르는 훈기와 한기가 정신 집중에 반응하며 두 주먹에 기운을 보내기 시작한다.

주먹을 쥔 두 손에 은은한 열기와 냉기가 맺히는 것을 느끼며 눈을 뜨자 두 팔이 어젯밤 검게 물든 여자 영혼처럼 검게 물들어있었다.

소매를 걷으니 팔꿈치 아래까지 마치 잉크에 푹 담갔다 빼낸 것처럼 번진 것이 보인다.

거기다 왼손은 흐릿한 아지랑이에, 오른손은 은은한 안개에 뒤덮여 열기와 냉기를 뿜어내고 있다.

“…….”

찌르륵­ 짹짹.

빛이 비치는 창호지 창문 너머로 새소리가 들려온다. 사람의 인기척은 없다.

문을 열고 나온 환인은 발치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를 들어 나뭇가지에 앉아 우는 작은 새를 맞춰 떨어트렸다.

땅에 떨어져 파드닥거리는 작은 새를 왼손, 냉기에 뒤덮인 손으로 덮자 한차례 꿈틀하더니 금세 움직임을 멈추고 부리를 살짝 벌린 채 색색 가쁜 숨을 몰아쉰다.

그리고 열기에 뒤덮인 손으로 덮자 언제 가쁜 숨을 몰아쉬었냐는 듯이 발딱 일어나서는 파드득, 날아가 버렸다.

‘원기 흡수와 방출.’

어젯밤 푸르게 변한 여자 영혼이 남기고 간 빛 구슬을 흡수하고 얻은 기술이다.

이걸 사용하는 데 영혼 구슬이 들지는 않는다.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 거나 영혼 시야처럼 일종의 on/off가 가능한 패시브 스킬이었던 거다.

사용법은 간단했다.

원기를 흡수하는 것은 냉기를 머금은 손으로 터치해야 한다. 그리고 원기를 방출하는 것은 열기를 머금은 손으로 해야 한다.

왼손, 오른손의 구분도 없다. 그냥 건드리기만 하면 된다.

환인은 오른손만 검게 물들인 뒤 냉기를 쥐고 하얀 나무에 손을 얹어보았다.

‘식물은 흡수를 못하는 건가.’

간단한 실험을 통해 원기는 식물을 제외한 살아 움직이는 것들에게서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자들이 가슴과 배에 품고 있는 영기, 자신의 몸 안을 흐르고 있는 훈기와 다른 에너지라는 것도.

원기 흡수는 그저 지쳤을 때 기운을 회복시켜주는 그런 효과뿐이다. 원기 방출은 자신의 체력을 나누어 주는 거고.

‘어느 정도 유용하겠군.’

원기 흡수에도 훈기를 소모하긴 하지만 그게 많은 양은 아니다.

핏빛 위상석도 체력과 기력을 회복시켜주지만 대신 신체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런데 이 원기 흡수는 타인에게서 원기를 빼앗아 오는 힘이니 활용 방식은 비교적 넓을 거다.

적대하는 인간의 원기를 빼앗아 힘을 못 쓰게 만든다거나 지쳤을 때 타인의 원기를 갈취해서 기운을 회복한다거나.

훈기와 원기 흡수의 교환비는 확인해봐야겠지만 나쁜 수준은 아닌듯하니 안심이다. 그리고 이것도 자주 쓰다 보면 익숙해지면서 교환비도 좋아지겠지.

‘원거리에서 흡수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접촉해야만 흡수할 수 있다는 점이 아쉽다.

마을을 방문한 영혼사는 살인 암매장 사건을 해결하자마자 떠났다고 알려졌다.

그럼에도 마을 분위기는 조금 어수선했다.

불량배 넷이 죽은 것 때문은 아니었다. 허구언날 사고만 치면서 마을 사람들의 짜증을 돋워대던 놈들이었기에 오히려 잘 죽었다고 침을 뱉는 사람도 있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마을이 어수선했던 것은 수십 년간 마을을 위해 헌신해온 사도??의 막내아들이 그 사건에 연루되어 같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사도의 막내아들은 인성이 나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순박해서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우유부단해서 남들에게 쉽게 휘둘리는 성격이었다.

그 때문에 불량배들의 표적이 되었다.

불량배들은 그런 성격을 이용해서 패거리로 만들어 데리고 다녔고, 잘못을 저질러도 사도의 막내아들이란 배경을 써서 크게 혼날 걸 대충 혼나고 마는 경우가 많았던 거다.

그 일로 사도 부부 내외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불량배들과 드디어 손을 끊었기에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했는데…….

=그래서 분위기가 안 좋아요. 프리솔드 사도도 자리를 내놓고 파르히스트로 돌아갈 생각인 것 같았고요.=

그런 건 알 바 아닌 환인이었다.

죄를 지었고 완전 범죄로 만들지 못해 들통났다. 그러면 처벌받아야지.

“영혼사에 대한 관심은 없어졌나.”

=네. 다들 새벽같이 떠나신 걸로 알고 있었어요. 본채의 하녀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낌새였어요.=

이실리테도 환인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막내아들, 에인트가 한 짓을 보면 도적 두목일 때의 성미가 튀어나오려 해서 참느라 곤욕일 지경.

에인트가 불량배들과 어울리지 않기 시작한 시기는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었을 때 그 여자를 강간하고 살해한 직후부터였다.

사람을 죽이고 나서 불량배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건 무슨 뜻인가. 살인했다는 것에 충격받고 겁먹어서 그들과 거리를 둔 거 아닌가.

‘멍청하긴. 잘못했다고 생각했으면 바로 순찰초소로 달려가서 죄를 고백하든가 아니면 아빠 배경을 써서 뭔가 수를 냈어야지.’

그저 입 꾹 다물고 있으면 저지른 일이 사라지기라도 해?

불편한 심정이 얼굴로 드러나려 했기에 이실리테는 재빨리 얼굴을 문질렀다. 주인님 앞에서는 예쁜 얼굴로만 있고 싶…….

“…….”

=…….=

……었는데 문지르느라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환인에게 딱 걸렸다.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도록 해라.”

=아, 아니에요…….=

슬그머니 손을 내리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린 이실리테는 도저히 환인 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있을 수 없어 =무두질 배우러 다녀오겠습니다!= 소리치고는 후다닥 별채를 뛰쳐나갔다.

환인은 이실리테가 왜 저러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요즘들어 가끔 이실리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어지곤 한다.

방금도 왜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지른 건지 모르겠다.

몸이 피곤해서? 이실리테의 체력을 생각해보면 0%에 가깝다. 정신적인 피로? 이실리테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피로가 정신적인 피로다.

고개를 작게 저은 환인도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본채 앞 정자에 앉아있는 문더와 스토레이가 보여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들도 고개 숙여 답한다.

루아르다는 아침 식사 후에 카턴 마을을 떠났다.

칸트위는 그가 일찍 떠나가는 것을 아쉬워했지만, 수행이 부족했음을 통감한다는 말과 함께 다시 수행하러 간다며 기회가 되면 다시 방문하겠다는 말로 그를 달랬다.

그뿐만 아니라 아센도 루아르다가 떠난 직후 뒤따라 마을을 떠났다. 이유는 루아르다와 비슷했다.

=환인 씨를 보니까 현 상황에 만족할 게 아니더라고요. 파르히스트에 좀 더 일찍 가서 미궁이라도 한 번 더 돌아보려고 해요.=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어딜 가더라도 평균 이상은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무조건 잘 될 거라는 무지성 덕담은 안 해주시네요……. 뭐 그게 환인 씨 다운 것 같기도 하고.=

피식 웃은 아센은 환인과 악수를 한 뒤 마을을 떠났다.

손님 두 명이 떠났지만 칸트위는 아쉬운 기색이 아니었다. 아쉬움을 드러내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다고 해야 할 거다.

그도 그럴 게 밤에 벌어진 일 때문에 새벽부터 열린 마을 상공회에서 몇 가지 큰 안건이 줄줄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것.

마을의 방범 시스템을 손봐야 한다는 것에서부터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순찰을 강화하고 마을을 일라일 꽃으로 도배해야 한다는 안에서부터 마을을 방문하는 외부인들을 더 자세히 지켜봐야 한다는 안까지.

3시간이 넘도록 회의를 하다 영혼사라는걸 알게 된 환인에게 극진한 아침을 차려드리기 위해 잠깐 돌아왔던 칸트위는 아침 식사를 끝낸 뒤 루아르다와 아센을 배웅하자마자 바삐 상공회로 되돌아갔다.

“…….”

가기 전에 칸트위가 보여준 반응이 조금 신경쓰이는 환인이었다.

=환인 님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니 부디 편히 볼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 말하는 칸트위의 모습은 정중함이 지나칠 정도였다. 마치 가톨릭 신자가 교황을 마주한 듯한 모습이라고 할까.

‘아무리 봐도 내 능력은 보통의 영혼사 등급과 이질적인 것 같은데.’

자신이 상급 영혼사라고 알려졌기에 보여주고 있는 반응이란 건 이해했다. 하지만 자신의 영적인 능력의 성장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기술의 공격력이야 꾸준한 훈련으로 조금씩 높아지는 중이지만 그 외에는 없는 수준.

그런데 사람들의 평가는 일반적인 영혼사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영혼사가 되었다. 그건 즉 자신의 능력이 이 세상의 영혼사가 지닌 등급 구분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

“…….”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곧 신경을 거두어들였다.

이 세계에도 이레귤러 각성자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술사와 전사의 혼용 직업인 마전사, 전사와 투사의 혼용 직업인 무예가 같은 특수 직업들.

자신의 직업도 영혼사와 그외 직업이 혼용되어 있다고 변명을 대면 십중팔구는 수긍하고 넘어가겠지.

그보다는…….

‘마르테라는 이름의 갈색 인호족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지.’

칸트위는 환인이 그려준 용모파기를 통해 순찰대를 동원해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마르테를 기억하고 있는 마을 사람이 나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용의주도한 놈이군. 찾는 데 오래 걸리겠어.’

그렇다고 손 놓을 생각은 없다. 반드시 찾아서 없앨 것이다.

마을 이곳저곳에 모여 어젯밤의 일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유르파의 마도구점에 도착한 환인은 [금일 휴업] 팻말이 달린 마도구점의 출입문을 응시했다.

자신을 엿먹이기 위해 이러지는 않을 텐데.

‘그러고 보니 막대한 마을 번영 기금을 낸다고 했었지. 상공회의에 불려간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리는데 상점 안쪽에서 다다닷 달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출입문이 벌컥 열리며 청회색 프렌치 로브를 걸친 유르파가 몸을 내밀었다.

=어서 들어오렴!=

거의 끌어당기듯이 상점 안으로 환인을 들여놓은 유르파는 고개만 빼꼼 내밀어 바깥을 살펴보더니 쾅, 문을 닫고 손바닥으로 문고리를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그러자 문고리에서 시작된 푸른색 선이 혈관처럼 출입문을 뒤덮더니 한차례 반짝이고 사라졌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바깥에서 흘러들어오던 소리가 완벽하게 차단된 것이다.

‘차음 결계?’

=이걸로 방해받지 않을 거야.=

유르파는 슬쩍 환인에게 팔짱을 끼더니 가게 안으로 이끌면서 생긋 웃는다. 그러더니 환인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며 만족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으응~. 자기 키 딱 좋아. 멀대같이 너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고.=

설렘이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에 잠시 입을 닫았던 환인은 팔꿈치에 닿는 뭉실뭉실한 젖무덤의 감촉을 느끼며 말했다.

“……어젯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까?”

=응? 무슨 일 있었니?=

살짝 기가 막혔다. 어젯밤 취조와 성토가 이루어진 강변은 마도구점 근처였다. 창밖을 내다보면 그 자리가 보이는 위치.

그곳에서 군중들이 얼마나 웅성거리고 떠들고 불량배들이 비명을, 괴성을 질렀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몰랐다니?

환인의 어이없어하는 기색을 읽은 유르파가 부끄러운 듯 한쪽 뺨을 감싸 쥐며 중얼거린다.

=어제 자기가 너무 격렬하게 안아줘서…… 자기가 돌아간 뒤에 물약을 조금 만들다가 기절했거든. 정신 차려보니 새벽이었지 뭐니.=

그 뒤에 씻고 몸단장하면서 기다렸다고 수줍게 고백하는데 확실히 늘어트린 그녀의 머릿결에서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그래서, 밤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간밤에 영혼사가 악령을 정화하고 여자를 강간 살해한 범죄자를 색출했습니다. 처벌이 끝날 즈음에는 거의 마을 사람 전부가 나왔더군요.”

=뭐? 처벌? 강간 살해범이면 못해도 교수형인데? 혹시 단두대 썼었니?=

“단두대는 쓰지 않았고 교수대를 썼습니다. 이후에는 오체분시해서 마을밖에 버려졌고요.”

=아앗! 아~ 아……. 질 좋은 원한혈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놓쳐버렸네. 아쉬워라.=

“참수형을 당한 죄수의 피도 마도구 제작에 쓰이나 봅니다.”

=정확하게는 원한이 깃든 피를 먹고 자란 식물이 마법 시약의 재료가 되거든.=

그 말과 함께 도착한 곳은 유르파가 사용하는듯한 10평 남짓한 침실이었다.

침실 한가운데는 방의 1/4을 차지하는 캐노피 달린 대형 침대가 차지하고 있었고 벽에는 적당한 미술품이 장식된 선반, 각종 화장품이 올려진 화장대, 작은 수납장이 몇 개 보인다.

벽, 천장, 바닥 가구 전부 황갈색 색조에 적색 색감의 양탄자가 바닥을 가리고 있어 전체적으로 아늑한 느낌.

“조금 어둡군요.”

=자기는 밝은 게 좋으니?=

유르파가 딱, 손가락을 튕기자 천장의 유리 샹들리에에 불이 들어오더니 환해진다.

그리고는 목욕 가운 같이 생긴 프렌치 로브를 벗으며 음란하기 짝이 없는 끈 속옷을 드러냈다.

속옷의 근본적인 기능을 깡그리 무시한, 젖무덤과 아래쪽 가랑이 사이 골짜기를 훤히 드러낸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속옷이다.

유르파가 자신의 젖꼭지를 엄지와 검지로 강하게 쥐었다가 튕기듯이 놓는다.

강한 자극에 눈에 띌 정도로 발기하는 유두를 응시하는 환인의 시선에 유르파는 색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침대맡의 알록달록한 소녀 감성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옅게 반짝이는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물약들.

범용 상급 회복, 범용 상급 원기, 범용 상급 위상력 보조 물약이 종류별로 침대 옆 탁자에 차례차례 올라간다. 그 수만 40개.

=어떠니? 이정도면 5시간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자기 몸에는 약간의 이상도 생기지 않을 거야.=

“……준비를 단단히 하셨군요.”

고작 일순간의 쾌락을 위해서 한 병에 금화 단위를 하는 물약을 수십 병이나 내놓다니.

=우리 흡정족에게 섹스란 곧 원기 회복의 수단이자 쾌락 공유의 수단이며 본질과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즐거운 놀이 시간이야.=

자기 가슴을 주무르며 하아...... 짧게 신음을 흘린 유르파가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같은 주머니에서 녹색과 황색 책자를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지금부터 다섯 시간. 점심때까지 날 안아주면 내가 알고 있는 체질 개선법, 탤런트 수련법을 성실하게 가르쳐줄게. 참고로 이거,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지위가 안되거나 상급 술법사가 아니면 손에 넣지도 못하는 거다?=

녹색과 황색의 책자를 살짝 흔들어주곤 다시 주머니에 넣어 배게 밑에 놔두는 유르파.

어정쩡하거나 모호한 요구 조건이 아니라 이렇게 명확한 조건이면 환인도 납득할 수 있다.

“좋습니다. 다섯 시간 동안 암캐처럼 울부짖게 해드리지요.”

유르파는 환인의 짐승 같은 눈빛에 클리토리스가 바짝 서는 것을 느끼며 하악, 신음을 흘렸다.

이제부터는 본능의 시간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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