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121 카턴 마을
* * *
가슴이 뻥 뚤리는 고원 풍경의 마에스티그 촌락을 빠져나온 환인은 왔던 길을 되짚어 카턴 마을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다.
날씨는 쾌청하고 야생 동물이나 맹수, 마수들도 출현하지 않는 편안한 여행길이었다.
한 가지 문제라면,
=아…… 또 갈림길이에요.=
“…….”
갈림길이 자꾸만 나온다는 것.
카턴 마을로 가는 길의 표지판이 있거나 길에서 확연하게 갈라지는 갈림길이면 괜찮은데 지금처럼 Y자 모양으로 어중간하게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올때마다 난감하기 그지없다.
“마에스티그를 나오기 전에 길을 물어보고 나왔어야 했군.”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미 세 번째 표지판 없는 갈림길과 마주친 상황.
“그럴 필요는 없다. 지금부터는 걸어서 이동하지.”
비상식량의 등에서 내린 환인은 안장에 묶어놓은 짐과 여행 가방을 푼 뒤에 비상식량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넌 하늘을 날아서 쫓아와라. 그러다 마을이 보이면 내려와서 알려주고. 할 수 있겠지?”
쿠엣!
환인의 지시에 힘차게 대답한 비상식량이 타닥타닥 도움닫기 후 하늘로 훌쩍 날아오른다.
비상하는 참새 같은 귀여운 모습에 이실리테가 감탄사를 흘렸다.
=비상식량이 하늘에서 살펴보는 방법도 있었구나.=
지금 걸어가는 가닌 평원은 로아팅스 정글을 동서로 나누는 평원으로, 좌우 폭이 대략 300km 정도 된다.
300km.
수치만으로 보면 굉장한 넓이다. 대한민국의 동서 폭이 평균 270km 정도니까.
그러나 여긴 한국, 지구와 비교할만하게 못 된다.
가닌 평원은 이름값을 하는 평평한 초원 지대가 300km에 걸쳐 펼쳐져 있었고 스모그와 안개라곤 한 점도 없는 쾌청한 날씨.
현재 평원의 중심을 따라 이동 중이니 비상식량의 시력이라면 지상에서 1km 정도 높이에서만 살펴봐도 가닌 평원 대부분을 볼 수 있다.
카턴 마을을 놓치고 지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이실리테가 쿠르티의 등에서 내린 뒤 환인에게 여행 가방을 받아 안장에 올리며 말했다.
=주인님, 쿠르티를 타고 가세요.=
“내가 혼자 쿠르티의 등에 타면 비상식량이 토라질 거다. 그렇다고 둘이 타고 내 가방까지 실으면 쿠르티에게 부담이 많이 갈 테지.”
걸어가는 게 낫다.
=그럼 저도 걸어갈래요. 주인님이 걸어가시는데 하녀인 제가 편히 타고 갈 수는 없죠.=
“그래.”
팔려 가는 당나귀 우화가 생각나 피식 웃은 환인은 좌우 갈림길 중 사람의 통행이 더 잦은 것으로 파악되는 길을 선택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사흘.
이실리테는 환인을 따라가며 그의 안목에 다시 한번 놀라고 있었다.
‘주인님은 추적에도 자질이 있으신가?’
몇 번이나 표지판 없는 갈림길을 따라 이동했는데도 가끔 나타나는 표지판은 빠짐없이 카턴 마을까지 남은 거리를 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맞은편에서 오는 행상인들, 여행자들, 모험가나 탐험가, 간혹 용병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빠짐없이 카턴 마을로 가는 길이 맞다고 확답을 해주었다.
이실리테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주인님은 어떻게 이 길이 카턴 마을로 가는 길이라는 걸 아셨어요?=
“웨이포드와 카턴 사이에는 많은 촌락이 있겠지. 촌락에서 나온 사람들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아무래도…… 도시나 마을이겠죠?=
“그래. 촌락에서 다른 촌락으로 이동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을 거다. 그렇게 통행인이 많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음…….=
환인이 한 말을 되새겨보던 이실리테는 긴가민가한 얼굴로 말했다.
=길이…… 넓어지나요?=
“같은 길로 다니는 사람들이 생기면 길이 만들어진다. 그 길을 많은 사람이 오가면 길이 넓어지지. 우리가 가는 곳이 촌락이 아닌 한, 갈림길이 나올 경우 더 넓거나 발자국이 많이 찍힌 곳을 고르면 어지간해서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도 완벽하지 않기에 비상식량을 하늘로 날려 보낸 거라는 설명에 이실리테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였다.
사람이 다니는 곳에 길이 생긴다는 것은 간단한 이치다. 하지만 그런 이치를 시의적절하게 생각해서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
‘그게 지혜라는 건가?’
이실리테는 두 발자국 앞서 걸어가고 있는 환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힘세고 잘생겼고 밤일도 잘하는 데다 금운도 따르고 머리까지 좋으신데다 영혼사이기까지 한 완벽한 주인님.
환인의 등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연모의 감정이 솔솔 피어나고 있었지만, 그것은 환인도 이실리테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
카턴 마을의 근속 5년차 숙련된 경비병은 눈앞에 선 두 남녀의 모습에 순간 당황했다.
한쪽은 아우라가 없지만 보기에도 멋진 장비를 착용한 녹색 쿠에를 타고 있다. 그런데 다른 쪽은 평범한데다 장비도 없는 밀짚 색 쿠에를 탔는데 보기에도 선명한 아우라를 가진 전사다.
남자와 여자가 쿠에를 바꿔 타야 할 거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경우가 전혀 없진 않았기에 잠깐 버벅대던 경비병은 여자에게 통행증을 요구했다.
이런 경우 밀짚 색 쿠에를 탄 쪽이 하급자였기 때문.
=통행증이 있다면 제출해주십시오.=
=통행증은 없고 신분증은 있어요. 여기, 웨이포드에서 발급받은 거예요.=
=확인했습니다……. 저분은?=
=주인님이세요.=
이실리테는 내 주인님한테도 신분증을 요구할 생각은 아니겠지? 하고 지그시 쳐다봤지만, 경비병은 무시하고 환인에게도 신분증을 요구했다.
“여기 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통행세는 쿠에 두 마리까지 합쳐 4 동화입니다.=
웨이포드에서 발급받은 신분증을 보여주고 통행세까지 지불한 뒤 카턴 마을로 들어온 환인은 뒤에서 이실리테가 꿍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경비병이 눈치가 없네요. 저래서야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눈치가 아니라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거지.”
=그치만 주인님은 ……이시잖아요.=
“내가 그런 것에 신경 썼다면 지금쯤 웨이포드의 알드진 베레와 친분을 다지고 있었을 거다. 아니면 레심을 따라갔거나.”
=……진짜요? 아니, 주인님이니까 그 정도는 왠지 당연할 거 같네요.=
이실리테가 자문자답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 환인은 북적이는 대로를 따라 걸으며 묶을만한 여관을 찾았다.
카턴 마을은 레힐 마을보다도 컸다.
비록 레힐은 방문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도망치듯 빠져나와야 했지만, 도로를 오가는 인구수만 봐도 그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수가 오가는 짐마차와 여행 마차.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모험가나 탐험가로 보이는 사람들.
8차선 도로 정도 되는 길의 좌우에 늘어선 각종 상점과 노점들.
파르히스트의 대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지나치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노리고 장사에 여념이 없는 마을 사람들.
깔끔한 외관의 삼각꼴 모양 지붕에 2층, 3층 건물이 늘어선 대로변 건물을 구경하던 환인은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로는 여전하지만 불규칙한 사거리가 나타나 길이 사방으로 뻗어간다.
=조금 복잡한 마을이네요.=
복잡하다지만 마을에 녹색이 많이 보여 답답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군데군데 나무가 심겨져있고 적지않은 건물 외벽에 넝쿨이 감고 있어서 지구의 경치 좋은 시골 도시 비슷한 풍경이었던 거다.
“그래. 그나저나 머물 여관은 찾기 어려워보이는군.”
대로변의 여관으로 보이는 곳은 하나같이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길목으로도 적지않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걸 보면 숙박업소가 포화 상태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잠시 생각하던 환인은 바로 옆 인도에서 걸어가고 있던, 풍채가 좋고 입은 옷도 주변 사람들과 대조될 만큼 고급스러우면서도 표정에 느긋함이 묻어나는 인돈족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 실례합니다.”
=응? 호우……. 무슨 일이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여기, 카턴 마을은 처음이라 쉴만한 곳을 찾고 있는데 그러한 곳을 찾기가 어렵군요. 혹시 지혜를 나누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꽃돼지를 닮은 인돈족 남자는 자신에게 말을 건 남자와 일행으로 보이는 여자를 살펴보곤 눈에 이채를 보였다.
남자는 아우라가 없었지만, 분위기에서 타고난 무언가가 느껴졌다. 쿠에를 타고 있지 않았더라도 옆의 여자가 아랫사람으로 느껴질 정도.
=그러셨습니까! 혹시 파르히스트의 대축제에 참여하러 가시는……?=
“겸사겸사해서 파르히스트로 향하는 길입니다.”
=역시. 그렇지 않아도 매년 이맘때면 파르히스트로 향하는 여행자님들이 많이 늘어납니다. 때문에 숙박 업계는 너나 할 것 없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시기이지요. 아마도 여행자님의 마음에 들 법한 여관은 빈 객실이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인돈족 남자는 환인이 탄 녹색 쿠에를 힐끔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수준이 낮은 여관에 머무르시면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겠지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 머무시는 것은 어떠신지.=
“폐가 되진 않을지 우려가 듭니다.”
=폐라니요. 그런 섭섭한 말씀을. 뜻밖의 인연이 닿은 귀하신 분을 집에 초대할 수 있는 것은 저희같은 사람들에게는 둘도 없는 즐거움 아니겠습니까. 자자, 부디 사양 마시고.=
“그러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비상식량의 등에서 내린 환인은 인돈족 남자와 악수를 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종족 연합 주도를 향해 여행 중인 환인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이실리테.”
=이실리테입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주인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어어, 저는 바깥에서 작은 농장을 경영하는 칸트위라고 합니다.=
직업자가 호위도 아니고 하녀라고? 칸트위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이실리테와도 악수했다.
이거, 예상대로 여행 중인 어느 먼 도시의 고족님일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칸트위는 환인과 이실리테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환인이 풍채와 복장, 그리고 태도를 보고 말을 걸었던 칸트위는 카턴의 유지?? 중 한 명이었다.
카턴이 아직 촌락 규모였을 때 칸트위의 고조부가 되는 사람이 타고난 상재로 땅, 사람, 물자를 전부 모아 마을로 발돋움할 바탕을 마련했고, 자연스럽게 지역의 유지가 되어 지금까지 대가 이어져 왔다고.
=여기가 제 집입니다.=
그런 칸트위의 집은 마을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언덕의 언저리에 세워져 있었는데 크기가 4층 본채와 2층 별채 2개, 마구간, 창고 우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방만 30개가 넘어가는 저택이었다.
더욱이 인연을 즐긴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저택에는 환인보다 먼저 온 손님 4명이 더 있었다.
마침 손님들이 본채 앞 나무 정원에 모여있었기에 그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반갑소. 프라버 쪽에서 온 루아르다라고 하오. 호수갈매기 일족이오.=
새보다 인간에 가까운 하얀 깃털의 조인족 루아르다.
=문더입니다. 칸트위 씨의 배려로 잠시 머물고 있는 식객입니다.=
=…….=
회색 두더지과인 인언족 문더, 이름도 밝히지 않은 과묵한 인웅족 남자.
=아센이에요.=
흰여우의 피를 이어받은 인호족 여자 아센.
네 명 전부 직업자로 이실리테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농도의 아우라를 몸에 감고 있었다.
“환인입니다. 이쪽은 제 호위 겸 하녀인 이실리테.”
칸트위의 손님인 네 명은 환인에게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환인의 종족이 흥미롭다기보단 무직자면서 직업자를 호위로 두고 녹색 쿠에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
그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칸트위의 집사에게 마구간을 안내받아 비상식량과 쿠르티를 거기에 넣으려던 이실리테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쿠에~! 쿠엣!
비상식량이 반항적인 태도로 이실리테가 쥐고 있던 고삐를 부리로 물고 잡아당기며 마굿간에 들어가기 싫다는 거부의 뜻을 격렬하게 드러낸 것이다.
[꽃돼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