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22화 (122/813)

〈 122화 〉 119 마에스티그 촌락

* * *

세 명 중 한 명,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뜬 토끼 귀, 인마족 여자의 아우라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파도처럼 너울거리는 아우라. 투사다. 농도는 대강 2급 정도.

=엿됐다…….=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인마족 청년이 핼쑥해진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억울함이 잔뜩 담긴 눈으로 누나, 셀피를 힐난했다.

거봐! 내가 영혼사님의 쿠에라고 했잖아! 그런데 바득바득 우기더니……! 어쩔 거야 이거!

인마족 여자 투사가 당황하고 있을 때 학자 타입의 인마족 남자가 환인의 앞에서 앞발을 무릎 꿇으며 머리를 숙였다.

=여가를 즐기시는 데 방해해서 면목 없습니다, 영혼사님.=

=죄송합니닷!=

앳된 티의 인마족 남자도 즉시 무릎 꿇고 소리쳤고, 그 행동에 정신을 차린 인토족 여투사도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죄송합니다! 제가 영혼사님의 쿠에를 마수로 오해해서 확인해야 한다고 우겨 둘을 데려왔습니다! 처벌은 저에게만 내려주십시오!=

“음. 여러분 눈에는 제가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였나 봅니다.”

=……넹?=

앳된 인마족 남자가 어벙한 목소리로 되물었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붕붕 흔든다.

=아뇨아뇨! 그럴 리가요! 다만 영혼사님의 휴식을 방해한 게 너무 죄송스러워서!=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거기 투사분 성함이 셀피, 맞습니까?”

=네, 넵.=

“촌락에 정체를 확신할 수 없는 생물이 나타나면 자경단으로서 당연히 확인해야 하는 일입니다. 혼나야 할 이유는 되지 않지요. 그러니 세 분 모두 일어서십시오. 계속 그렇게 계시면 곤란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세 명은 살았다는 듯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앳된 인마족 청년은 이런 사태를 만든 누나가 마음에 안 드는지 무릎으로 셀피의 엉덩이를 툭 쳤고 셀피는 그런 청년을 째려보더니 팔꿈치로 말 가슴 부분을 퍽 찍는다.

남매인가? 둘이 다투는 모습에 작게 웃은 환인은 하늘을 날고 있는 비상식량을 향해 손가락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쿠엣?

휘파람을 들은 비상식량이 쌩하고 날아와 무슨 일이냐며 묻는다. 환인은 그런 비상식량의 목을 긁어주며 셀피에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이 아이는 제 친구이자 동료입니다. 확인되셨습니까?”

=그……럼녀!=

=그럼녀는 또 뭐야 창피하게 진짜.=

청년의 비꼼에 얼굴이 빨개진 셀피가 이제는 대놓고 청년의 말 어깨를 퍽퍽 때리고, 청년도 질세라 누나의 머리를 퍽퍽 때린다.

하지만 직업자와 무직자의 차이 때문일까, 잠시 후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며 구릉을 달려내려 가버리는 청년이었다.

쿠에?

“됐다. 가서 놀다 와라.”

쿠엣!

비상식량도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고, 학자풍의 인마족도 셀피에게 뭐라 귓속말을 하더니 구릉지를 내려갔다.

환인은 혼자 남은 셀피를 돌아보며 물었다.

“할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요. 영혼사님은 계속 여기 계실 건가요?=

아니라면서 묻는 건 뭘까.

“예. 풍경이 좋아서 쉬다가 내려갈 생각입니다.”

=그으, 여긴 가끔 맹수가 출현하기도 해서요. 괜찮으시면 근처에서 호위하겠습니다.=

하늘에 비상식량이 날고 있으니 위험한 짐승이 접근하면 알려줄 테지만, 굳이 설명하기 귀찮았던 환인은 그렇게 하시라고 한 뒤 다시 풀밭에 드러누웠다.

“…….”

옆에 사람이 있으니 사색에 잠기기 어렵다.

어차피 깊게 생각할 일은 이제 없었기에 한가로이 누워있던 환인은 왼팔을 들었다.

영혼 구슬은 여전히 38개. 웨이포드를 떠난 이후로는 1개도 늘지 않았다.

놀았던 것은 아니다.

비상식량을 타고 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꾸준히 강령을 펼치고 영혼 기술을 사용하고 명상과 정신 집중 훈련도 했으니까.

‘확실히 영혼 구슬을 늘리는 데는 여자의 영기를 흡수하는 게 가장 빠른 거 같군.’

거기다 소비한 영기를 단시간에 회복하는 것도 여자를 안는 게 가장 좋다.

촌락에 도착했으니 조금만 적극적으로 나서면 안겨들 여자는 많을 것이다. 이곳, 마에스티그만 해도 어제 은근한 시선을 던지는 처자들이 일곱은 됐었으니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 이리저리 구슬려가며 잠자리로 데려가는 것이 귀찮아진 환인이었다.

웨이포드의 창관처럼 돈만 내면 쉽게 안을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편한데­

그렇게 생각하는 환인이었지만, 불평 없이 몸을 일으켰다.

‘다음 초능력의 성장 예상은 영혼 구슬이 48개일 때……. 이렇게 하릴없이 시간을 보낼 게 아니다.’

확실히 돈을 내고 여자를 사는 쪽이 간단하고 편하다. 그렇다고 편한 길만 찾아다녀서는 안 될 일.

배부른 소리는 이 정도만 해야지.

환인은 마을로 걸어 내려가며 촌락의 임자 없는 여자들을 침대로 끌어들일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영혼사라는 것만으로도 품에 안겨들 처자는 있었지만, 반대로 영혼사라는 직업의 부담감과 이런저런 이유로 숫자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영혼사’이면서 3급 전사도 가볍게 누를 정도의 실력자라는 게 알려지면?

‘촌락의 임자 없는 여자들이 줄을 서게 되겠지.’

그러나 아침에 대련을 훔쳐보던 사람들은 이실리테에게 호통을 들어 입을 꾹 닫아버렸을 테니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 한다.

‘혹시 이실리테가 여자의 접근을 차단하는 방해꾼 역할인가.’

생각해보니 하녀 기술원을 나온 뒤로 그랬다.

호텔의 메이드 목욕 시중도 막아서서는 자신이 맡았으며 여기 와서도 알게 모르게 여자들을 몸으로 막는 느낌이었지.

속으로 피식 웃은 환인은 일어선 자신을 보며 엉거주춤 서있는 셀피에게 다가갔다.

“자경단분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습니까?”

셀피와 함께 자경단 건물을 찾은 환인은 마을회관 겸 마을창고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큰 건물을 볼 수 있었다.

타닥, 딱­ 따다닥.

퍽­

=큭!=

=낄낄. 넌 아직 나한테 안된다니까?=

=닥쳐!=

그 앞 공터에는 자경단원인 듯, 장비가 제각각인 인마족 남자 서넛과 루크랑족 서넛이 모여 가볍게 훈련 중이었다.

훈련이라기보단 동네 공원의 어른들 체조 같은 느낌.

물론 환인의 눈에만 그렇게 보였을 뿐 그들은 몇 번이고 마수의 습격을 격퇴해낸 어엿한 자경단원들이었다.

‘역시 이곳 자경단도 남자가 대부분이군.’

아직도 환인은 이 시스템이 이해가 안 됐다.

원래 외국의 관습은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는 거라 했지만, 머릿수는 여자가 월등히 많은데(마에스티그 촌락 인구 250명 중 여자가 200명) 어째서 남자만 뽑는 걸까.

오면서 그녀에게 들었다. 촌락에 각성자는 자신뿐이며 자경단에서 여자도 자신뿐이라고.

셀피도 투사로 각성했기에 자경단이 된 거지 아니었다면 자경단에 들어서지도 못했을 거다.

자경단원들은 갑자기 나타난 영혼사의 존재가 못내 신경 쓰이는 듯, 셀피가 가져다준 의자에 앉아 지켜보는 영혼사를 힐끔거렸다.

=영혼사님이 왜 오신 거지?=

=싸움에 관심이 있으신가?=

=하지만 호리호리해서 별로 힘은 없어 보이시는데…… 남자 맞으시지?=

=뭐 직접 움직이시는 쪽이 아니라 구경하는 쪽이 좋으신 거겠지.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훈련이나 하자.=

=어.=

=…….=

=카르사. 넌 왜 말이 없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면 됐고. 자, 나랑 대련하자.=

=야야야 잠깐! 아까 내가 먼저 대련하자고 약속했어!=

=약속한 놈이 어디 갔다 이제 왔어? 늦었으니까 넌 기다려.=

=아잇씨. 촌장님이 부르셨었다고.=

자신과 대련하려고 티격태격하는 자경단 동료의 모습에 인마족 청년, 카르사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말하냐. 셀피를 포함해 우리가 싹 다 덤벼도 영혼사님한테는 못 이길 거라는 걸.’

카르사의 일과는 새벽 구보로 시작된다.

매일 어슴푸레하게 해가 떠오를 무렵 일어나 주위가 환해질 때까지 촌락을 둘러싼 구릉을 따라 계속 달린다.

10년 넘게 이어져 온 일과 덕분에 촌락 주위로 생겨난 동그란 트랙을 따라 오늘도 상쾌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달리던 카르사는 도중에 믿기 어려운 것을 보고 말았다.

어제 오전에 촌락을 방문하신 영혼사님과 그 종자가 대련하는 장면.

‘응?’

거기까진 이상할 게 없다. 여행자라면 무릇 자기 몸을 지킬 기술 하나쯤은 익히는 것이 기본이니까.

문제는 아무리 봐도 우리 촌락의 셀피보다 아우라가 진해 보이는 강한 여전사가 영혼사님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 게 아닌가?

‘응???’

자신도 나름 자경단 나부랭이다. 250명의 촌락 사람 중에서 강함으로 따지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자신한다.

투사로 각성한 셀피와 대련 전적은 42전 24승 12패 6무승부.

이런 자신이 보기에 여전사가 봐주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 말은 즉 영혼사님의 무술 실력은 직업자와 무직자의 차이마저도 없는 것으로 치부할 정도라는 것.

속으로 결정을 내린 카르타는 자신과 대련하려고 으르릉거리며 다투는 불알친구 두 놈을 밀쳤다.

=둘 다 꺼져.=

그리고 환인에게 다가간 뒤 신병처럼 뻣뻣하게 차려 자세로 소리쳤다.

=아, 안녕하십니까!=

“예. 반갑습니다.”

환인의 뒤에 서 있던 셀피는 동네 친구인 카르사를 향해 인상을 쓰며 입술을 달싹였다.

‘야. 설마 아니지?’

‘나도 긴장되어 죽을 거 같으니까 말 하지 마.’

‘미쳤어?! 그만둬!’

‘괜찮아. 내 예상대로라면…… 괜찮을 거야.’

영혼사님은 대륙을 방랑하며 길잃은 영혼에게 안식을 내려주고 신의 정원으로 안내한다는 고귀한 일을 하는 분이시다.

그런 분께 정말 이런 부탁을 드려도 되는 걸까.

긴장감에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지만, 영혼사님의 온화한 태도에 카르사는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저, 영혼사님께서 종자분을 지도하는 장면을 우연히 봤습니다. 호, 혹시 저도 한 수 가르쳐주시면…… 안될…까요……?=

그 자리에 있던 자경단원들, 그리고 연로한 마을 노인들의 놀란 시선이 환인에게 모여들었다.

무엇 보다 놀란 것은 환인을 여기까지 모셔온 셀피였다.

뭐? 종자라면 그 전사님? 영혼사님이 그렇게 강하시다고?

“보셨다니 아시겠지만, 제 가르침은 상냥하지 않습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팔다리가 부러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옙!!=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건가?! 조금이라도 망설였다간 혹시 안 된다고 할까 봐 카르사는 우렁차게 대답했다.

영혼사님은 무려 직업자를 지도하는 실력. 무기를 맞대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일이다.

더욱이 카턴 마을의 무관에서 한 번 지도받으려면 최소 10동화 정도는 내야 하는데 10동화는 이런 촌락에서 일주일은 뼈 빠지게 일해야 벌 수 있는 큰돈.

“좋습니다. 무기를 가져오십시오. 그리고 셀피.”

=옙!!=

=네, 네?

“대련에 쓸만한 봉이 있습니까?”

=네! 잠시만요!=

카르사가 자기 창을 가지러 뛰어가고 셀피도 깎아놓은 나무 봉 중에 가장 튼튼하고 좋은 걸 가지러 뛰어갔다.

잠시 후.

=뭐야. 카르사가 영혼사님한테 한 수 지도받는다고?=

=영혼사님이 그렇게 센 분인가? 별로 안 강해 보이는데…….=

10m 거리를 두고 카르사와 마주 선 환인은 주민들이 좀 더 모여든 것을 확인했다.

밖으로 일하러 나가고 남은 주민들이 다 모인 듯 50명이 넘는 숫자.

그중 절반이 젊은 여성인 걸 본 환인은 카르사에게 속으로 고마워했다.

‘자경단원의 훈련에 끼어들 명분이 필요했었는데. 고마운 일이군.’

환인은 답례로 전력을 다해 두들겨주기로 마음먹었다.

주민들의 수군거림에 따르면 직업자인 셀피를 제외하고 카르사가 가장 강하다는 분위기다. 그런 카르사를 상대로 힘의 격차를 보여주면 임자 없는 여자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겠지.

“…….”

셀피도 그 사이에 끼어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창을 점검한 환인은 혹시 자신이 다칠까 긴장하는 셀피를 한 번 보고 다른 의미로 긴장한 채 두 손으로 창을 쥔 카르사를 살폈다.

등 높이는 1.6m정도. 말 하반신의 체구는 일반 경주마 정도다. 머리까지 높이는 2.4m로 꽤 높다.

시야 높이가 60cm가량 차이 나지만 아까 자경단원들의 대련에서 인마족의 동작과 공격 패턴 등은 파악했기에 문제는 없다.

환인은 최하급 강령을 몸에 펼친 뒤 창을 가볍게 쥐고 말했다.

“먼저 오십시오.”

=옙!! 가겠습니다!!=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와 함께 10m 정도의 거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혀든다.

카르타는 아무 자세 없이 서있는 환인을 절대 얕보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욱 집중하며 환인의 가슴을 노려 전력을 다해 나무창을 찔렀다.

하지만.

따악­!

=……?!=

나무창을 내지른 순간 영혼사님의 나무창이 마치 뱀처럼 얽힌다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땐 자신의 창이 손아귀를 벗어나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네 번의 충격.

퍼버버벅!

=끄허허걱…!=

카르사는 목, 명치, 복부, 말 가슴을 차례대로 찔리고는 끔찍한 고통에 헛숨을 내뱉으며 나동그라졌다.

‘뭐, 뭐야…….’

고통에 부들거리면서 두 손을 보니 그동안 생겼던 손바닥 굳은살이 왕창 벗겨져 속살이 드러나고 있었다.

네 번 찔린 고통보다 무기를 놓쳤다는 데서 오는 마음의 고통이 더 크다.

“끝입니까?”

=……!!=

앞에서 들려온 평온한 목소리에 카르사는 이를 악물고 벌떡 일어났다.

=아닙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친구가 가져다준 나무창을 다시 쥐었다. 굳은살이 뜯겨나간 손바닥에서 찌르르한 고통이 올라온다.

카르사는 그 고통을 마음속에 새기며 속으로 소리 질렀다.

이번에는 절대 창을 놓치지 않는다!

터엉­!

=크흑……!?=

창과 창이 맞부딪쳤지만, 다짐대로 이번에는 창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충격에 두 팔이 번쩍 올라가 버렸다.

이어서 쏟아지는 충격……은 없었다.

=으악?!=

앞다리의 무릎 옆을 얻어맞아 자세가 무너지며 볼썽사납게 나뒹굴었을 뿐.

=으그극!=

허둥거리며 일어났지만 이어서 다리와 옆구리, 말 몸통을 차례대로 얻어맞아 균형을 잃고 다시 뒹군다.

허우적거리며 다시 일어나려는 순간 이번에는 말 앞다리 사이에 끼어든 나무창이 걸리적거려 도무지 설 수가 없다.

카르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분명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함과 갑갑함.

=으아아앗!=

발악하듯 허우적거리며 벌떡 일어난 카르사는 나무창을 종횡무진 휘둘렀지만, 나무창에 닿는 것은 없었다.

대신 온몸에 고통이 샘솟기 시작했다.

퍼버벅, 빠각, 뻑! 퍼엉, 퍼벅, 터더덩!

=으어거거걱……!=

환인의 공격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머리, 어깨, 허리, 가슴, 배, 팔, 얼굴, 말허리, 다리. 맞은 곳마다 불에 지져지는 듯한 고통이 새싹처럼 피어난다.

카르사는 본능과 무의식으로 나무창을, 팔을 휘저었지만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다.

몇 대를 맞았는지 모를 만큼 늘씬하게 두들겨맞은 카르사는 결국 다리가 풀려 고꾸라지다시피하며 넘어졌다.

쿠웅­

=…끄으으…….=

=…….=

=…….=

=…….=

회관 앞 공터에 모여 지켜보던 마에스티그 촌락의 주민들은 믿기 어려운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처음 붙고 몇 분이 지났지? 2분 정도 지났나? 우리 촌의 젊은이 중에서 셀피와 막상막하로 강한 카르사가 저렇게 허무하게…….

땅에 널브러져 버르적거리는 카르사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환인이 물었다.

“더 하실 수 있겠습니까.”

=으어어, 하, 할슈이, 씀미댜…….=

“안 되겠군요. 거기 두 분, 이 친구를 부축해서 그늘에 데려다 놓으십시오..”

=예? 아, 예!=

환인에게 지목받은 인마족 자경단 두 명이 친구를 데려가며 혀를 찬다.

=야, 카르사. 정신 차려. 설 수 있겠냐?=

=끄으어… 하, 하슈이쓰어으…….=

=안 되겠네. 완전히 맛이 갔어.=

=어이구, 눈까지 돌아갔네.=

질질 끌려가는 카르사를 지켜본 환인은 다른 자경단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기왕 창을 쥐었으니 조금 더 할까요. 지도받고 싶은 분이 있으면 나오십시오.”

=저요! 저요!!=

=지도받고 싶습니다!=

=영혼사님, 저도 가르쳐주세요!!=

삽시간에 7명이나 되는 자경단원들이 모여들었다.

“…….”

분명 카르사가 떡이 되도록 얻어터지는 걸 봤을 텐데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걸까.

환인은 눈을 반짝이며 모여든 자경단원들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차례대로 갑시다.”

=끄으흐어어…….=

=아으으…….=

=끄응, 끄으응…….=

모여들었던 자경단원들이 모두 시체처럼 늘어지는 데는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이실리테를 두들기면서 얻은 경험이 빛을 발하는군.’

그전에는 사람과 맞붙는 것을 살짝 꺼렸었다.

죽이는 거야 빈틈을 찌르면 그만이지만 대련은 상대를 죽여서는 안 되니까.

게다가 힘 조절에 실패해서 팔다리라도 부러트리면 후환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웨이포드에서는 사람과 싸우게 되는 경우를 일부러 피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이실리테와 대련한 덕분에 인간형은 대충 어디를 얼마만큼 강하게 때리면 기절하거나 무력화되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그 증거가 눈앞에 널브러진 다섯 명이다.

환인과 대련을 희망한 자경단원들은 차례대로 환인에게 늘씬하게 얻어맞고 나무 그늘 아래로 끌려갔다.

거기서 끝났으면 환인도 서서히 눈에 열망을 띄는 여자들에게 손을 뻗쳤을 테지만, 자경단은 생각 이상으로 열의가 뛰어났었다.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저도요!=

=아직 더 버틸 수 있어요!=

잠시 쉬어서 기운을 차린 다섯명이 환인에게 다시 도전한 것이다.

이번에는 다섯 명을 동시에 상대했다.

그리고 이어진 당연한 결과.

=세상에. 다섯 명이 동시에 덤벼도 못 이기다니.=

=셀피마저…….=

=영혼사님은 대체 얼마나 강하신 거야?=

다섯 명에는 셀피도 포함되어있었다. 포메이션의 구심점이 직업자인 셀피였던 것.

2급에서 3급으로 파악되는 셀피는 끄트머리 추의 크기를 10배 정도 키운 모닝스타를 무기로 사용했는데 수준이 레심에게 기술을 배우기 전의 이실리테와 비슷했기에 제압은 어렵지 않았다.

‘이실리테의 수준이 낮은 편은 아니었다는 거지.’

사실이 그러했다. 이실리테의 수준이 평범했다면 30명에 가까운 도적단을 몇 년씩이나 유지할 수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셀피라는 비교 대상 덕분에 이실리테의 근력과 신체 내구성이 무척 뛰어난 편이란 걸 알게 된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

“다들 열의가 뛰어나군요. 실력도 있는 편이니 앞으로도 훈련을 열심히 한다면 촌락을 지키는 훌륭한 자경단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자경단원들은 아직 더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슬슬 땡볕이 내리쬐는 공터에서 땀을 흘리고 싶진 않은 환인이었기에 적당한 말로 지도를 끝마쳤다.

그 후 보란 듯이 촌락을 산책하듯 돌아다니던 환인은.

=저기, 영혼사님? 날도 더운데 저희 집에서 시원한 음료수라도 한 잔 드시고 가지 않으시겠어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자경단원들을 상대로 힘을 쓴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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