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19화 (119/813)

〈 119화 〉 116 마에스티그 촌락

* * *

길을 따라 하루하고 반나절을 이동하자 평원이 기울어지며 옅은 경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초원처럼 풀이 뒤덮은 드넓은 경사가 족히 수십 킬로미터까지 이어져 있다.

그리고 경사가 끝난 지점부터 울창한 정글이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는, 말 그대로 까마득하게 광활한 풍경이다.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지평선까지 뒤덮은 로아팅스 정글을 보며 이실리테가 탄성을 질렀다.

=와아. 엄청 멀리까지 보이네요. 저 지평선까지 가는 데만 쉬지 않고 며칠이 걸리겠어요.=

“음.”

스모그가 없는 세상이라 지평선까지 200km는 족히 될 것 같은 거리임에도 선명하게 눈에 보인다.

말 그대로 시야의 끝판왕을 보는듯한 광경이다.

“이곳의 지대가 생각보다 높군.”

레힐에서 웨이포드까지 오는 동안 은근히 지대가 높아진다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해발 500m는 되지 않을까 싶은 높이. 이 정도면 고원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마에스티그 촌락은 이런 경사 지역의 중간 즈음, 구릉이 모여 이루어진 분지 같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길에서 벗어나 유달리 높은 구릉을 오르자 촌락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진짜 시골이네요!=

대략 50여 가구의 통나무집이 널찍하게 분포되어있고 그런 집을 통나무 방책이 둘러싸고 있다.

촌락 주변에는 감자밭과 고구마밭, 보리밭, 목화밭이 많이 보이고 군데군데 동물을 몰고 다니는 사람도 보이는, 촌락을 가로지르는 작은 개울이 앙증맞은 말 그대로 시골이다.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기 때문인지 옷차림이 매우 얇아 조금 개방적으로 느껴진다는 점, 그리고 통나무집의 천장이 보통의 집보다 50cm 정도 더 높은 점을 제외하면 촌락의 분위기는 율캄과 비슷하다.

구릉 위에서 촌락을 살피던 환인이 입을 열었다.

“50가구이니 인구는 대강 250명 정도인가.”

=네. 특산품이랄 것도 없고 목화를 재배해서 옷감으로 만들어 팔고 가끔 출현하는 마수나 마물의 부산물을 거래하는 게 전부라고 해요.=

그렇게 말한 이실리테는 환인의 표정을 잠시 살펴보고 말했다.

=주인님. 저기서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정체를 숨기고 몰래 성불행 하실 건가요?=

“작은 촌락이다. 방문객도 없을 텐데 성불행을 몰래 하기는 어렵겠지.”

=그럼 저 먼저 가서 촌창을 만나고 올게요. 주인님이 가셔서 바로 직업을 밝히면 큰 소란이 날 것 같으니까요.=

“……그래.”

허락의 뜻을 내비치자 이실리테가 쿠르티에게 박차를 가해 쌩하니 촌락으로 달려 내려간다.

쿠우?

“괜찮다. 천천히 가자.”

쿠엣.

쿠르티의 뒤를 쫓아갈지 묻는 비상식량에게 대답한 환인은 저 멀리 작아지고 있는 이실리테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실리테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눈치가 빨라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후천적으로 눈치를 기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러모로 주변에 신경을 써야 하기도 하고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자아 성찰도 필요한 수준.

더욱이 이실리테 정도의 나이가 되면 눈치를 기르기보단 주변 사람들에게 ‘그냥 니가 나한테 적응해라. 마음에 안 들면 떠나던가’라고 말하는 게 편할 정도다.

그런 눈치를 이실리테가 기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얼마나 진심으로 자신을 섬기는지 알 수 있는 지표였기에 환인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저런 태도가 바뀌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면 좋을 텐데.’

전투에 관한 자질이 떨어지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다.

그녀도 직업자이고 힘도 세니 짐꾼 역할 겸 후방 파티 관리 지원을 해도 되는 일이니까. 모자란 무력은 실력이 뛰어난 동료를 영입하면 해결되는 일이고.

구릉을 거의 다 내려갔을 때 촌락에 들어갔던 이실리테가 나와서 곁으로 다가왔다.

=마에스티그의 촌장은 인마족이었어요. 인마족의 비율이 절반 이상 되는 걸 보면 촌락의 시작은 인마족 집종촌이었나봐요.=

집성촌???도 아니고 집종촌???인가.

=촌장에게 주인님께서 방문하실 거라고 전했으니 오늘 저녁은 편히 쉬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잘했다.”

=넵.=

구릉의 비탈을 내려가며 보이는 촌락 주민을 살핀다.

개, 소, 양, 고양이, 곰 같은 수인족은 많이 안 보이고 하반신은 말, 상반신은 사람인 인마족人馬?이 반수 이상.

눈에 들어오는 모든 곳이 10도에서 30도 사이의 경사가 져 있으니 확실히 저런 반인반마가 아니면 생활하기 힘들어 보이는 지역이다.

그런 켄타우로스, 인마족을 살피자 덩치가 제각각임을 알 수 있었다.

어른임에도 하반신이 조랑말 정도인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직 어린데도 중종마만큼이나 커다란 사람도 있다.

“……?”

환인의 눈이 한 명의 인마족에게 향했다.

가슴에 젖이 달린 것을 보면 여자인데 하반신이 말이다. 말의 몸에 쟁기를 걸고 밭을 갈고 있다. 저쪽에는 짐마차를 말 몸에 묶고 힘들지 않게 끌고가는 여자도 보인다.

‘특이하군’

잘 살펴보니 여자는 두 부류였다. 하반신이 말인 여자와 귀와 꼬리만 말인 여자.

이 세상의 여자라고 전부 사람같은 외모만 있는 것은 아닌가보다.

계단식 논처럼 길 좌우로 늘어선 밭을 구경하며 촌락을 둘러싼 방책의 동문으로 들어선 환인은 촌락 사람들이 입구의 좌우에 모여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오셨다.=

=저분이 영혼사님?=

=우와, 유색 쿠에다.=

족히 80명은 넘는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반짝이기 시작한다.

밤하늘처럼 까만 복장에 멋진 장구류를 착용 중인 녹색 쿠에를 타고 있는 모습. 거기다 직업자를 종자로 뒀다는 점에서 촌락 사람들은 환인의 정체를 의심하지 못했다.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사기꾼이라도 영혼사를 사칭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고.

소근거리는 소리마저 사라지고 숨죽인 침묵 속에서 백발의 나이 지긋한 인마족 촌장이 다각다각 발소리를 내며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귀하신 분이 저희 촌락에 왕림해주신 것을 주민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비상식량의 등에서 내린 환인이 다가가 손을 내밀자 상반신은 사람 남자고 하반신은 말인 촌장이 황송해하며 두 손으로 환인의 손을 공손히 잡았다.

=허락하신다면 영혼사님을 환영하기 위한 잔치를 하고자 합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감사한 말씀이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이틀 뒤에 떠날 예정이니만큼 영혼을 살피는 데 시간을 쓰고 싶습니다.”

=아아……! 무, 물론입니다. 그러면 제가 따라다니면서 시중을…….=

“아니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제 종자를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신 1시간 정도 뒤 공터에 주민분들을 모아주십시오.”

=네,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촌장을 주민들에게 돌려보낸 환인은 비상식량의 안장에 채워놓은 소울 스틱을 빼내 들고 촌락을 돌기 시작했다.

구릉을 내려올 때부터 영혼의 위치는 미리 봐두었다.

하지만 건물에 가려져 안 보이는 곳이 있었기에 그곳을 중점적으로 돌아다니며 건물 뒤편, 방책 아래 그늘진 곳, 마을 중앙의 큰 나무 근처를 살펴 영혼에게 모두 따라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역시 자의식이 흐릿해 보이는군. 땅의 기운과 자의식은 연관이 없는 건가.’

뒤따라 느릿하게 걸어오는 영혼을 살피던 환인은 비상식량과 쿠르티를 데리고 따라오는 이실리테에게 물었다.

“도시의 공동묘지에 대해서 들은 게 있나.”

=영혼의 안식을 위해서 묘지기하고 짐승신님의 신상과 사당을 세운다는 이야기 정도만 들었어요.=

“묘지기 없이 신상과 사당만 세우는 곳은?”

=그건 모르겠어요.=

“흠. 신상을 개인이 따로 구할 수 있나?”

=아마도 신전에 충분한 기부만 하면 되지 않을까요?=

“…….”

영혼 하나를 귀속해서 쓸 수만 있으면 미궁 탐사에 큰 도움이 될 텐데 그걸 이루기 위한 과정에 장애물이 많다.

공동묘지에서 자의식을 가지고 지내는 영혼을 구슬려 데리고 나오더라도 자의식이 흐려지면 곤란한 만큼 대책을 마련해야 할 텐데, 마련하려 해도 가설 수집과 증명에 몇 년은 꼬박 투자해야 할 판이니…….

‘방랑 영혼의 확보는 미뤄두고 마법 무구를 먼저 장만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촌락을 돌아다니며 모은 영혼은 모두 12명.

영혼을 데리고 촌락의 중앙 공터로 돌아가자 촌락의 주민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다들 조용히! 이제부터 영혼사님이 말씀하실 겁니다!=

이실리테의 큰 목소리에 주민들이 일제히 입을 닫는다.

큰 나무 아래 마련된 높은 단에 올라간 환인은 주민들이 불안과 호기심이 깃든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말보다는 행동.’

환인은 첫 번째 영혼을 불러 영기를 약간 나누어주었다.

효과는 대단했다.

첫 번째 영혼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 영혼을 기억하는 주민들로 인해 작은 소란이 벌어졌고, 이실리테가 나서서 그들을 진정시킨 뒤에는 다들 무릎을 꿇고 환인에게 고개를 조아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환인은 차례대로 영혼을 주민들에게 보여주며 영혼의 미련과 바램을 하나씩 풀어주었다.

누군가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누군가에게 하지 못한 말을 전해주고 싶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평온을 주고 싶다.

작은 촌락이었고 촌사람이 모두 모여있었기에 미련과 바람을 풀어주는 것은 금방금방 해결되었다.

물론 트러블도 있긴 했다.

불륜이라던가 치정, 핏줄의 족보 관련처럼 분쟁을 일으키는 것도 있었던 것.

=네 아버지가 먼저 우리 어머니를 꾀었다고 했잖아!=

=네 어머니의 몸가짐이 단정했으면 그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

콰아앙­!!

=지금 영혼사님 앞에서 다투시는 겁니까!!=

하지만 이실리테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중철 대검을 쿵!! 소리 나게 땅에 찍자 직업도 없는 순박한 촌사람들은 즉시 겁을 집어먹고 화해를 나누었다.

힘에 의해 강제로 화해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앙금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서로 악수하는 두 집안의 장남들을 보고 만족하며 성불했고, 영혼이 성불한 이상 환인은 그 이후의 일에 신경 쓸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16명의 영혼을 성불시킨 뒤 환인은 경외하는 표정의 촌장에게 방황하는 영혼의 성불과 정화가 끝이 났다고 알렸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아닙니다. 오히려 방황하는 영혼이 얼마 안 될 만큼 영적으로 청결한 촌락이라 흡족하군요.”

환인의 칭찬에 촌사람들이 황송해하며 다시 고개를 숙인다.

“예상보다 일찍 성불행이 끝났으니 남은 일정은 이곳에서 쉬고자 합니다. 이곳의 여관은…….”

=여, 여관이라니요! 영혼사님 같은 분을 위해 준비해놓은 곳이 있으니 부디 이쪽으로 오시지요=

들뜬 기색이 역력한 촌장의 뒤를 따라가자 벽돌과 석회로 단아하게 지어놓은 1층 건물이 나타났다.

본채와 별채, 그리고 탈 것을 들여놓을 수 있는 고급스러운 마구간과 집 앞을 흐르는 깨끗한 냇가까지.

집 안으로 들어온 이실리테는 뒤따라온 촌장 때문에 놀란 기색을 숨기며 집안을 살폈다.

벽은 나뭇결무늬가 멋지게 드러나는 매끈한 나무 벽이었고 창문도 도시의 호텔처럼 유리창이었으며 가구도 하나같이 전문가의 솜씨가 느껴지는 고급품이다.

방도 무려 네 곳에 몸을 씻을 수 있는 욕실도 준비되어있다.

아무리 귀한 분이 올 때를 대비해서 촌에 이런 집을 하나씩 두는 게 유행이라지만 이건 너무 과한데……?

=어떠십니까. 집은 마음에 드십니까…?=

“좋은 곳이군요.”

환인의 감상에 촌장은 다행이라는 듯 안도한 표정을 짓는다.

“유족분들이 고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힘을 썼더니 피곤하군요. 오늘과 내일 이틀만 신세 지겠습니다.”

=말씀입니까! 원하시는 만큼 쓰셔도 됩니다. 그, 그럼 편히 쉬십시오…….=

촌장이 나가고 조용해진 집안, 환인은 흔들의자에 앉아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피곤했다.

그동안 꾸준한 정신 단련과 훈련으로 훈기의 양이 꽤 많이 늘었지만, 한 번에 12명이나 되는 영혼에게 영기를 나누어 주었더니 90%에 이르던 훈기가 32%까지 줄어들었다.

‘에트브룩에서는 1명에게 영기를 10%는 나누어주어야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었지.’

훈기의 총량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는 증거다.

훈기의 감소로 조금 추위가 느껴졌지만, 흔들의자가 햇볕이 비추는 곳에 있어서 조금은 낫다.

거의 습관이 된 손버릇, 핏빛 위상석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한숨 돌리고 있으니 입구에서 작은 소란이 벌어진다.

=안돼안돼. 들어오지 마. 비상식량 네가 쉴 곳은 저기 마구간이니까. 쿠르티 따라 가!=

쿠엣! 쿠에엣! 쿠우!

=난 네가 울어도 뭐라고 하는지 모르거든……?=

쿠우우우우…!

=아잇. 힘 주지 마! 안 되는 건 안되니까! 오늘 같은 날은 주인님도 좀 편히 쉬어야지!=

여행 가방 두 개를 품에 안은 이실리테가 집 안으로 들어오려는 비상식량의 머리를 한 손으로 밀어내며 힘겨루기를 한다.

쿠에우엣! 큐삐잇!

=저 바닥 양탄자는 척 봐도 비싼 거란 말이야! 네가 밟고 다니면 다 헤져서 곤란해진다구!=

주인님이 바닥 깔개로 쓰는 양탄자를 더럽히는 것은 상관없다. 촌장이 이 집을 내어준 것은 그런걸 고려해서니까.

하지만 쿠에가 밟고 다니다가 발톱에 걸려 찢어지거나 하면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다.

어디까지나 쿠에는 바깥 동물.

쿠에를 위해서 마구간도 고급스럽게 지어놨다. 그런데도 비상식량을 집 안에 들였다가 문제가 생기면 주인님의 인품이 의심받는다.

그걸 몰라주고 계속 집 안으로 들어오려 하는 비상식량의 행동에 끝내 이실리테가 폭발했다.

=아이 진짜! 비상식량 너 자꾸 그러면 혼난다?! 네가 그럴수록 주인님 인품에 흠이 간단 말이야!=

쿠, 쿠에?

잘은 모르겠지만, 이실리테는 머리에 힘을 주던 비상식량의 기세가 주춤해진 틈을 타 힘껏 밀어내며 말했다.

=네가 막무가내로 행동하면 주인님이 뒤에서 욕먹는다구! 집 밖에 있는 건 괜찮지만, 집 안에 들어오는 건 금지야!=

쿠우우……. 큐힝.

자신의 호통이 통했는지 들어오는 것을 포기하고 나가는 비상식량의 모습에 어휴, 한숨을 쉬었지만 금세 미간을 찌푸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운 없이 물러나는 그 모습이 꼭 크게 혼난 10살짜리 어린애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집은 애완동물을 들이지 않는 것을 밑바탕으로 인테리어까지 꾸며놓았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실리테는 주인님과 자신의 짐을 가장 작은 객실로 옮겨놓고 나왔다가 환인이 손짓하는 것을 보고 재빨리 다가갔다.

=부르셨어요?=

“촌장님에게 양탄자를 치우고 바닥을 정리해달라고 요청해야겠다.”

=……비상식량을 집안에 들이시려고요?=

환인은 대답 대신 흔들의자에서 가까운 창문을 가리켰다.

그쪽을 본 이실리테는 할 말을 잃었다.

활짝 열린 2장의 여닫이 창문 너머에 비상식량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을 한 채 서 있었던 것이다.

=……네. 가서 말하고 올게요.=

어휴, 비상식량 진짜.

요청은 금방 받아들여졌다.

촌장이 직접 주민을 데리고 와서 바닥의 양탄자를 돌돌 말아 들고 나가더니 바닥에 잘 어울리는 울긋불긋한 적회색 양탄자를 빈틈없이 깔아놓은 것이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알아보고 진작에 준비를 해드렸어야 했는데요.=

인우족 남자가 멋지게 난 황소 뿔을 쓰다듬으며 멋쩍게 웃는다.

=힘써주셔서 감사해요. 저 아이의 몸값이 워낙 고가이고 또 어리광쟁이다 보니…….=

=어휴. 녹색 쿠에면 당연히 집안에서 키워야죠. 하하. 아무튼 안에 깔아놓은 카펫은 험하게 다루셔도 됩니다. 혹시 몰라서 마을 처자들이 예비용으로 만들어둔 거거든요.=

=네, 고마워요.=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저 아래에 있는 집이 저의 집이니 찾아오셔서 말씀해주십시오. 즉시 고쳐드리겠습니다.=

=그럴게요.=

=그럼, 편히 쉬십시오.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촌락의 남자들이 돌아가고 집 안으로 들어간 이실리테는 주인님이 앉아있는 흔들의자 옆에 행복한 얼굴로 웅크리고 있는 비상식량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주인님이 그렇게 좋을까.

왠지 한 마디 안하고는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에 비상식량의 앞에 쪼그려 앉은 이실리테는 크고 예쁜 눈을 깜빡이는 비상식량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너. 다 크면 문도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커질 텐데. 그땐 어쩌려고 이래?=

……쿠우.

입가를 샐쭉하니 만들며 우는 소리에 이실리테는 신기하게도 비상식량이 뭐라고 한지 알 것 같았다.

이 녀석은 대체 머리가 얼마나 좋은 걸까. 주인님의 말만 알아듣는 줄 알았더니 내 말도 알아듣네.

=더 안 클 거라고? 그럼 주인님을 등에 태우고 날지도 못할 텐데?=

……. ……쿠엣!

이번에는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흔들의자에 앉아계시던 주인님이 피식 소리 나게 웃으신 걸 보면 어린아이 같은 대답을 한 것이리라.

뭐 날개 힘만 더 세지겠다던가 몸만 더 튼튼해질 거라던가.

당당한 표정의 비상식량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일어선 이실리테는 문득 주인님이 핏빛 위상석을 또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주인님은 처음 봤을 때부터 시간만 나면 저 위상석을 만지작거리고 계셨었지.

=주인님. 하나만 여쭈어봐도 돼요?=

“그래.”

=주인님이 계속 만지시는 위상석 두 개 말이에요. 왜 가공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특히 지금 쥐고 계신 거면 틀림없이 좋은 효과가 붙어있을 텐데.=

“가공하면 효과가 더 좋아지기라도 하나?”

=……?=

“……?”

이실리테는 주인님과 대화가 순간 안 맞는 것을 깨닫고 어어, 속으로 망설이다가 물었다.

=어, 저기. 혹시…… 주인님, 그 상태로도 효과를 받고 있으신 거예요?=

“……원래 못 받는 건가.”

=…네…….=

“음…….”

집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꾸엣!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한 마리는 제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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