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18화 (118/813)

〈 118화 〉 115 가닌 평원

* * *

115 가닌 평원

=아야야…….=

30분의 대련을 끝낸 이실리테는 수건에 물을 적셔 얼굴과 팔에 묻은 땀, 흙먼지를 닦아내며 신음을 흘렸다.

진짜 몸에 안 아픈 곳이 없다.

‘우와.’

몸도 닦으려고 가죽 갑옷과 셔츠를 벗은 이실리테는 젖소처럼 울긋불긋해진 자기 몸을 보며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복부, 명치, 옆구리, 어깨. 만져보니 등에도 멍이 있는 거 같고 버클을 풀어서 바지 안을 보니 허벅지에도 여섯 개의 멍이 보인다.

대련이라서 철판 흉갑 속에 덧입는 가죽 갑옷을 입고했는데 이 정도다.

만약 철판 흉갑을 입었다면 흉갑도 다 우그러졌을 거란 생각이 드는 이실리테였다.

`아니 뼈가 부러졌으려나?`

와중에 젖무덤만 멀쩡한 것을 확인한 이실리테는 말랑말랑한 젖가슴을 들어 가슴 밑을 닦으며 진주색 위상석을 쥐고 명상 중인 주인님을 훔쳐봤다.

‘일부러 가슴만 피해서 때리신 걸까.’

어쨌든, 주인님의 실력을 몸소 체험한 이실리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마나 두근거리는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에도 젖꼭지가 바짝 설 정도.

‘옆에서 보는 거랑 마주 서서 보는 건 진짜 하늘과 땅 차이였어.’

피가죽 클랜원들이 주인님의 공격을 한 번도 피하거나 막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모습에 이실리테는 아주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주인님의 방어술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깝다. 그 어떤 공격도 주인님이라면 다 피하거나 흘려버리시겠지.

그에 비하면 공격은 많이 평범했다. 궤적은 훤히 보이고 공격 속도도 느릿하다. 그런 공격을 왜 못 막고 못 피했을까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막상 마주 서보니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갔다.

‘자기 몸이랑 무기도 시야를 방해할 수 있는 거였어.’

자신이 무기를 막거나 휘두를 때 생기는 시야의 빈틈을 노리고 길쭉한 흑창이 뱀처럼 다가와 짜릿한 충격을 주고 갔던 것. 만약 실전이었다면 자신은 뭐에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겠지.

봐도 못 막는 공격이 있단 것을 환인과 대련에서 뼈저리게 느낀 이실리테였다.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이다.

처음에는 열심히 배우면 주인님의 발끝 정도는 따라갈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첫 30분의 대련으로 자신감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래도 열심히 해야지.’

자신의 28살 삶에 있어 두 번째로 찾아온 행운이다.

주인님이 실망해서 자신을 버리지 않도록 이실리테는 온 힘을 다해 기술을 배우겠다고 다짐했다.

대련을 끝내고 이실리테가 요리한 뜨거운 고기 스튜, 그리고 육포로 저녁을 해결한 환인은 잠시 쉬었다가 비상식량을 불렀다.

“너도 사람과 싸우는 법을 배워야지.”

쿠에? 쿠우웃.

“그래. 내가 여러 방식으로 공격할 테니 너도 나름대로 피하고 공격해봐라.”

쿠엣!

이실리테는 식기를 정리하면서 주인님과 비상식량의 대련을 호기심에 유심히 지켜보았다.

“무턱대고 머리를 들이밀면, 머리를 때려달라는 거냐.”

딱!

쿠엣! 꾸우~.

“멀찍이서 그렇게 공격하겠다고 표시 내놓고 발톱으로 할퀴어오면 내면 어쩌자는 거냐.”

따닥!

끼엑! 쿠에엑!

파다닥! 퍽, 파박, 따다닥!

몇 번 머리를 얻어맞은 비상식량이 날개죽지를 휘두르고 닭처럼 퍼더덕 날아올라 발톱으로 마구 할퀴고 부리로 찰나에 세 번 쪼아댄다.

그것을 지켜본 이실리테는 살짝 얼이 빠졌다.

‘……비상식량이 나보다 더 잘 싸우는 거 아냐?’

자신과 마찬가지로 환인의 공격은 하나도 피하지 못하고 죄다 얻어맞고 있지만, 맞을 때마다 덜 아픈 곳으로 유도하거나 부리, 발톱으로 막거나 하는 게 눈에 띌 정도다.

쿠우!

20분 동안 맞기만 한 게 약 올랐는지 후다닥 뒤로 물러난 비상식량이 머리는 낮추고 꽁지는 바짝 세운 모습으로 꽁지를 살랑살랑 흔들다가…….

쿠잇!

발돋움과 동시에 쏜살같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와.=

슁­ 쉬이익­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날 정도로 잽싸게 날아다니는 비상식량의 위용은 이실리테의 입에서 탄성을 뽑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꾸에엣­!

독수리가 토끼를 낚아채듯 비상식량이 쏜살같이 환인을 덮쳤지만, 환인은 충돌 직전 뭔가 점프한다 싶더니 어느새 비상식량의 목을 붙잡고 등에 올라타고 있었다.

쿠엣?!

깜짝 놀란 비상식량이 허둥거리며 공중에서 발버둥 칠 때 딱­ 하고 청명한 소리와 비상식량의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꾸엑!

“멍청한 녀석. 훤히 보이는 공격을 하면 어쩌자는 거냐.”

딱!

끼엑!

창 자루로 재차 비상식량의 머리를 딱 소리 나게 때린 환인이 설교를 늘어놓는다.

“날아올랐으면 차라리 멀리 도망가기라도 하던가. 비행 공격은 눈에 볼 수 없을 만큼 빠르지 않은 이상 공격점이 훤히 보이기 때문에 반격당하기 쉬운 행동일 뿐이다.”

‘아니 그건 주인님한테만 그런 거 같은데요…….’

자신의 눈에 비상식량이 덮치는 모습은 솔개가 병아리를 습격하는듯한 모습이었다. 그걸 반격한다고? 그전에 발톱에 머리가 날아갈 거 같은데?

“공격하고자 마음 먹었다면 뒤를 생각하고 공격해야지.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이런 공격을 하면 어떻게 반격할지.”

‘공격한 뒤를 생각해야 한다고?’

이실리테는 하늘에서 술 취한 참새처럼 어지럽게 파닥이는 비상식량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따닥, 딱!

꾸꾸! 꾸에엥!

주인님이 혼내고 있는지 연신 딱딱 소리가 나고 비상식량이 꽥꽥 비명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환인의 이야기에 약간의 깨달음의 얻었던 이실리테는 대검을 들어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그 깨달음을 상기했다.

공격 뒤에 날아올 반격, 그 반격을 다시 되돌려주는 공격.

‘이렇게? 아니면 이렇게?’

잠시 대검을 움직이던 이실리테는 땅에 착지하자마자 털썩 주저앉더니 날개로 머리를 감싼채 끙끙거리는 비상식량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좀전의 자신과 모습이 겹쳐보였기 때문.

비상식량의 옆구리에 기대어 모포를 어깨까지 끌어올린 채 눈을 감고 있던 환인은 이실리테가 다가오는 느낌에 눈을 떴다.

밤이 내려앉은 초원, 그리고 모닥불이 노란 불길을 피워올리며 주변을 밝히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교대 시간인가.”

=네, 주인님.=

모포를 걷어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는 비상식량을 덮어준 환인은 가볍게 스트레칭한 뒤에 모닥불가에 앉았다.

구리 주전자에 물을 채우고 모닥불 위 삼각대에 걸어놓는 환인에게 이실리테가 =고생하세요.=하고 인사한 뒤 모포로 몸을 감고 쿠르티의 날개 밑으로 기어서 들어간다.

환인은 쿠르티가 잠결에도 움직여 이실리테를 포근히 감싸는 것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쿠에는 여러 면에서 말의 상위호환이군.’

먹을 걸 가리지도 않고 튼튼하고 순해서 말도 잘 듣고 짐말만큼이나 짐도 실을 수 있고 지구력도 높고.

추운 밤에는 저렇게 따뜻한 온기를 나누어준다. 저러는 이유도 알이나 새끼를 품는 본능이라던가.

“…….”

이실리테와 불침번을 교대한 환인은 차가운 초원의 공기를 길게 들이마셨다.

진한 풀냄새와 흙비린내, 모닥불의 냄새가 폐부를 채우며 잠기운을 쫓아낸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점차 왼쪽이 잡아먹히고 있는 달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빛이 닿지 않는 미궁에서 나왔을 때는 보름달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하현달이 되어가는 중인데 달에 그림자가 왼쪽부터 지고 있었다.

‘여긴 남반구인가.’

삼림형 미궁을 탈출 할 때는 늦여름에서 가을 사이의 기온이었고 그로부터 4달가량 지났다.

이제 겨울이 와도 이상하지 않은데 밤에 조금 싸늘해지긴 해도 춥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적도에 가까운 지역일지도 모르겠군.’

이 세상의 땅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며 끓인 물을 마시던 환인은 커피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곳이 적도 근방의 열대지방이라면 커피콩 재배를 할 법도 한데 웨이포드, 에트브룩, 레힐, 율캄, 지나왔던 곳에는 커피 문화가 없었다.

‘파르히스트에서 커피를 찾아볼까.’

성도이니만큼 많은 물자가 모일 거다. 찾아보면 커피도 있을지 모른다.

잡생각을 하던 환인은 잠이 완전히 깬 것을 느끼며 왼팔의 붉은 구슬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낮에 거두어들인 강도들의 영혼이다.

환인은 그중 하나의 영혼을 불러냈다.

「…아…….」

영혼 구슬이 빠르게 영혼화하며 개 귀를 한 알몸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환인은 뚜렷하게 보이는 슬렌더 타입의 나신을 간단히 훑어보았다.

‘옷을 입은 것과 벗고 있는 것의 차이는 뭐지.’

「으… 으으……. 흐으으…….」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의 상태도 확인한 여자 영혼은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며 귀곡성 같은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모습이 점차 뿌옇게 변해간다. 성불 전조 증상이다.

‘멈춰라.’

강제력으로 성불을 멈춰보려 시도했지만, 성불은 어찌 못할 자연현상인 것처럼 영혼은 작은 빛방울 몇 개만 남기고 옅은 빛무리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환인도 딱히 성과를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작은 빛방울을 거두어들인 환인은 다른 영혼을 불러냈다.

「끄아아아……! 아아아아……!!」

이실리테의 대검에 두 동강이 났던 사슴 머리 남자가 온몸을 비틀며 괴로움의 비명을 지르다 환인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당신만, 당신만 없었더라면……!」

‘후회는 언제 하더라도 괴로운 일이지.’

「당신 때문이잖아!!」

‘그러는 게 속시원하다면 그렇게 생각해라.’

「이……!」

살해당해 죽었다는 고통과 비참함을 느끼던 중에 조롱당했다고 여긴 인록족 남자는 마악 발작하려다 자신의 몸이 어디론가 쑤욱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강령.’

「뭐하는…… 으아아아­!」

그의 망막에 맺힌 검은 여우 마수가 급격히 커진다.

인록족 남자는 불길함을 느끼고 사지를 버둥거렸지만, 발버둥이 무색하게 검은 여우에게 덧씌워졌다.

캐앵­

그와함께 2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야영지를 염탐하던 늑대 크기의 검은색 여우가 캥,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올랐다.

환인도 허리춤의 돌도끼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뇌성마비에 걸린 것처럼 몸을 비트는 늑대만 한 검은 여우.

여우의 모습은 기괴했다. 몸통에 인록족 남자 영혼의 팔다리가 붙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여우의 몸통에 돋아나 있던 팔다리가 여우의 몸으로 쏙 들어갔고, 비명과 경련을 멈춘 검은 여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환인을 향해 으르르­ 이빨을 드러냈다.

눈동자도 노란색이 아니라 피가 흐르듯 붉은빛을 뿌린다.

‘그러고 보니 이 영혼 구슬들은 왜 붉은색일까.’

율캄에서 영혼의 동의를 받아서 했던 구슬은 전부 평범한 영혼 구슬처럼 회백색이었다.

자신이 살해해서, 혹은 살해당해서 붉은 영혼 구슬로 변한 걸까?

쿠에?

여우가 낸 소음에 잠을 깼는지 등에 모포를 덮은 채인 비상식량이 환인의 뒤에 서며 물었다. 혼내줄까? 라고.

“아니. 실험 중이다.”

아우! 아욱, 아우그극. 그어어!

사람이 여우 몸으로 말하려고 하면 이럴까 싶은 소음을 내던 여우는 잠시 후, 눈에 띄는 적의를 비추기 시작했다.

크악!

“멈춰라.”

환인의 짧은 명령에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으려던 검은 여우가 역동적인 자세로 우뚝 멈추어 선다.

붉은빛을 흘리는 눈만 도록도록 굴리는 여우의 모습에 환인이 서늘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앉아라. 일어서라. 한 바퀴 돌아라. 춤춰라.”

착, 벌떡, 빙글, 덩실덩실.

자신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검은 여우의 모습에 환인은 자연스럽게 몇 가지 문제점을 떠올렸다.

높은 지능을 가진 영혼으로 강령을 펼치면 대상자의 육체 제어권을 빼앗을 수 있는 건가.

별다른 조건 없이 빼앗기는 건가? 아니면 지능의 차이나 의지력의 차이에 따라 결과가 바뀔 수 있는 건가?

사람 영혼으로 펼친 기술은 평범한 짐승 영혼으로 펼친 기술과 위력이 비슷했다.

강령 효과도 그런 영혼과 비슷한가?

‘실험이 필요해. 좀 더 다양한 실험이. 그때까지는…… 가능한 정령으로만 강령을 펼쳐야겠어.’

사람의 영혼을 강령할 경우 생전 그 사람이 지니고 있던 기술을 습득 가능할지도 궁금하다.

동물이나 짐승의 혼을 강령했을 때 수영이나 등반, 나무 타기 같은 기술을 얻었으니 사람 영혼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것.

‘사람 영혼을 강령 받을 경우 기억의 혼재 같은 문제도 발생할 수 있겠군.’

환인은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하며 인록족의 영혼을 강령시킨 검은 여우를 대기시켜놓고 38분을 보냈다.

「크헉! 끄어, 어어윽…….」

강령의 지속시간이 끝나자 검은 여우의 몸에서 희뿌연 안개가 빠져나와 인록족의 형태로 되돌아간다.

뭔가 이지러져 있던 형태가 제모습을 찾아가는데 그 과정이 고통스러운지 인록족이 연신 비명을 흘린다.

그리고 눈에서 붉은빛이 사라진 검은 여우는…….

캐앵!

재차 환인의 목을 물어뜯으려 했기에 환인은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고 돌도끼로 머리를 찍어 죽였다.

다음 날 아침, 이실리테가 야영지를 정리하는 사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풀을 뜯고 있는 쿠르티에게 정령의 구슬로 강령을 펼쳤다.

쿠에.

쿠르티는 환인이 자신에게 좋은 걸 해줬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다가와서 얼굴을 비비며 친밀감을 표시한다.

쿠에들이 쓰다듬어주면 좋아한다는 목덜미를 만져주며 강제력으로 이런저런 지시를 내려봤지만…….

‘통하지 않는군.’

이실리테에게도 강령을 펼쳐봤지만, 강제력이 섞인 명령은 듣지 않았다.

=앗, 정리하는데 축복은 안 해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음.”

말을 알아들을 지능이 있어야 강제력도 통하는 건가. 하지만 정령은 말도 할 수 있었는데 왜 안되는 걸까.

정령이라서 강제력이 듣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면 정령이 다가와 주는 것은 단순한 선의인가?

강도의 영혼 구슬은 아직 11개가 남았다.

어제 짐승에 강림시켰던 인록족은 강령 이후에도 성불하지 않고 지랄발광을 해서 영혼 화살로 몸통에 여섯 군데 정도 구멍을 뚫어주었더니 얌전해졌고, 몇 분 지나지 않아 흐느끼면서 성불해버렸다.

이걸 사람에게도 걸어보고 반응을 탐구하고 싶지만, 여건이 마땅치 않아 아쉬움의 한숨을 흘리는 환인이었다.

=주인님. 출발 준비 끝났어요.=

“그래. 비상식량, 내려와라.”

쿠우~!

장비를 다 갖춰 입고 아침 비행을 즐기던 비상식량은 환인의 부름에 매처럼 빠르게 날아와 척, 날개를 펼치며 착지한다.

“오늘도 잘 부탁한다.”

그런 비상식량의 등에 올라타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니 비상식량도 쿠에~! 힘차게 소리 지르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우리도 가자.=

이실리테도 쿠르티를 움직여 그 뒤를 따라가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억눌렀다.

전투 직전에 축복받으면 기분 좋은 고양감과 함께 온몸에 힘이 솟으며 그 어떤 괴물과도 싸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샘솟는다.

그런데 지금처럼 별일 없는 상황에 축복받았더니…….

‘거기가 징징 울리는 거 같아…….’

배출하지 못하고 해방하지 못해 남아도는 힘이, 몸을 뜨겁게 만드는 고양감이 몸 안에서 맴돌다 성적 욕구로 바뀌는 것 같다.

혼자 야한 생각을 하다가 흥분했을 때처럼 거기에 피가 몰리며 예민해지는 느낌.

미약하게 흔들리는 안장과 맞닿은 그곳이 툭툭 계속 자극받으니 찌릿찌릿한 감각이 스멀스멀 배를 타고 올라온다.

터덕.

=흣…….=

바닥이 파인 구덩이를 쿠르티가 살짝 뛰어넘으며 안장에 둔덕이 부딪친 순간, 이실리테는 자위하다 절정에 오른 것처럼 가벼운 쾌감을 느꼈다.

급기야 뭔가가 안에서 흘러나오는 느낌에 이실리테는 기겁하며 고삐를 꽉 움켜쥐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나 미쳤나 봐! 왜 갑자기 발정 난 거야?!’

강령의 혈류 가속 효과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 도리가 없었고, 38분의 강령 효과 시간이 끝났어도 음란마귀에 씌인 그녀는 한동안 소리 없이 육욕과 싸워야만 했다.

웨이포드를 떠난 지 5일째 되는 날. 환인은 갈림길을 마주 보게 되었다.

직선으로 난 길과 거기서 직각으로 다시 뻗어나가는 길.

주위를 둘러봤지만 광활한 초원만 보일 뿐, 지리적 표시가 될만한 것은 아무것도 안 보인다.

지도가 있다지만 선만 대충 그어서 그린 그림에 이런 자잘한 위치 표시가 있을 리 없다.

이 시대의 지도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마을과 촌락은 대부분 누락, 때로는 중급 도시도 크거나 중요한 도시만 지도에 표시되어있기 일쑤.

하지만 웨이포드에서 얻은 여러 지식 중 인근의 촌락, 마을의 위치 정보도 있었다.

환인은 그런 정보를 써넣어놓은 지도를 펼쳤다.

여기, 남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밀림 근처에 자리 잡은 마에스티그 촌락이 나오겠군.”

=거긴 별 볼 일 없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지나쳐서 바로 카턴 마을로 가시는 게 어떠세요?=

“아니. 촌락으로 간다.”

=넵.=

환인의 결정에 이실리테는 토 달지 않고 즉시 방향을 바꾼다. 하지만 궁금해서인지 환인의 안색을 힐끔힐끔 살피다 조심스레 물었다.

=마에스티그 촌락은 무슨 일로 가시는 거예요?=

“일단은 나도 영혼사니 말이다.”

=아……!=

세상에, 어떻게 그걸 깜빡할 수 있지?!

이실리테는 당혹감에 자기 뺨을 잡고 주우욱 당기며 자책했지만, 환인은 신경 쓰지 않고 일정을 계산 중이었다.

‘비상식량 덕분에 이동 거리가 대폭 짧아졌다. 하루에 8시간, 100km는 이동할 수 있으니…….’

하루하고 반나절이면 마에스티그 촌락에 도착할 수 있을 테고 거기서 이틀을 머무르고 돌아오면 닷새.

이 장소에서 카턴 마을까지 이틀 걸리는 거리고 카턴에서 사흘을 머무른다 해도 카턴에서 파르히스트까지 8일.

‘대축제의 토너먼트는 두 달 뒤에 시작하니 대강 42일 전에 도착할 수 있겠군.’

42일이면 파르히스트의 다섯 미궁 중 한 곳을 탐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일 것이다.

“가자.”

=넵!=

환인은 이실리테와 함께 마에스티그 촌락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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