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111 소도시 웨이포드
* * *
다음 날 아침, 중심가의 시민들은 너 나 할것 없이 없이 동서남북에 하나씩 있는 중앙 사거리의 소식판으로 향했다.
환인도 이실리테와 함께 후드 망토를 쓰고 가장 가까운 소식판으로 향했고, 그 앞에 먼저 나온 사람들이 군중을 이루며 커다랗게 붙은 공고를 보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우와.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요.=
“좀 더 가까이 가지.”
소식판은 컸고 거기에 붙은 공고문은 더 컸다.
적당한 거리에서 공고문을 읽으니 중심가에 자리 잡은 피가죽 클랜과 리아나린 상회가 한통속이며 6급 호족 영애의 습격범으로 확정. 지난밤 토벌이 있었다는 내용과 함께 4급 호족 알드진=베레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근처의 시민들이 수군거린다.
=백 6급 호족님이라면 저어기 어디냐…… 어디였지? 항구도시였는데.=
=프라버. 알류겔 호수 서부에 있는 도시잖아.=
=아아 맞아. 거기였지, 참. 그런데 그곳의 영애님이 여긴 어쩐 일로 오셨대?=
=우리가 그런 귀하신 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어떻게 알어. 아무튼 리아나린 상회가 피가죽 클랜하고 이어져 있었다니 참…… 뒤통수 맞은 기분이네.=
=그러게. 성도의 최신 유행을 빠르게 가져오길래 믿고 샀었는데.=
“…….”
리아나린 상회를 찾아가 보니 정규군 병사들이 4층 건물을 들락거리며 온갖 물건을 들고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행정관에서 근무하던 자들과 비슷한 복장의 사람들도 서류 상자 같은 것을 마차에 싣는 중이고 운송용 밀짚 쿠에 수십 마리도 줄줄이 오가며 짐을 수송하는 중이다.
=리아나린 상회 정도면 우리 도시에서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었을 텐데 뭔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참.=
=어유, 언니도 참. 가진 놈들 욕심이야 어지간하겠어요?=
=이봐, 들었어? 피가죽 우두머리가 행정관 앞에 목이 매달렸다던데 한번 가보자고.=
=그렇지 않아도 수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는데, 보고 일이나 하러 가세.=
리아나린 상회 건물 근처에 있던 시민들이 행정관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환인도 그 뒤를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도시의 주인 되는 호족의 힘이 참 대단하군.”
토벌의 진행 속도를 보면 증거 확보도 없이 바로 쳤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게 놀라워서 한 말이었는데 이실리테의 대답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주인님. 호족 성주님이면 해당 도시에서 왕님이나 다름없어요.=
“…….”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다. 중세 시대의 지방 귀족은 해당 영지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다고.
알고 있다고 해도 지식으로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의 차이는 비교가 불가능한 법이다.
알드진=베레는 정황상 백려강의 이야기를 듣고 가타부타할 것 없이 바로 군을 동원했다.
작전 진행에 3시간, 뒷정리에 1시간이 걸렸으며 그 결과에 의문을 드러내는 시민은 적어도 이 자리에는 1명도 없었다.
소도시 정도 되는 주인인 호족의 권력이 이 정도면 중급 도시나 성도, 주도는 어느 정도일까.
‘백려강의 `제가 본 것이 증거이고 제가 들은 것이 증거입니다.`라는 발언은 한치의 가감도 없는 솔직한 발언이었군.’
아무튼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건이 정리되었다는 사실에 환인은 나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었다면?
‘영혼에게 강제력으로 정보를 토설하게 만든 뒤 본거지를 야습해 모조리 죽이고 이탈했겠지.’
그러는 데 이틀은 걸렸을 것이다. 정찰에 하루, 그리고 실행에 하루.
하이에른=조드의 경고가 피부에 와닿는 것을 느끼며 행정관 앞에 도착한 환인은 일반인 기준으로 꽤 끔찍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교수대에는 일곱 명이 목매달려 있었는데 목 아래로 피부 가죽이 벗겨져 근육과 힘줄을 통으로 드러내고 있었고 그 옆에는 벗긴 사람 가죽이 매달려있었던 것.
사람 가죽도, 시체도 멀쩡하지 않았다. 혹독한 고문이 있었던 것처럼 시체의 상태가 엉망진창이다.
=누가 수괴여?=
=저기 팻말 박혀 있네. 가운데…… 아시아 루단, 인랑족.=
=어이구, 6급 엽사? 생긴 것도 멀쩡하고 상회까지 거느렸으면서 뭐가 아쉬워 호족님을 건드렸댜.=
‘저래서 목 아래로만 가죽을 벗긴 건가.’
검은색 늑대 귀의 젊은 여자, 아시아 루단이 혀 빼물고 죽어있는 것을 잠시 지켜본 환인은 남은 시체들도 살펴보다가 여자 한 명의 얼굴에 시선이 갔다.
분노가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난 채 죽어있는 독수리 깃털 귀의 여자.
=알드티스도 죽었네요.=
“음.”
그쪽으로는 이미 관심이 없어진 환인이다.
환인은 죽은 7명 중 상회 책임자이자 클랜 서열 2위라는 이프리벨의 시체가 없다는 사실에 여러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그리고 가설은 합쳐져 하나의 줄기를 만들어냈다.
‘호족을 건드린 데 대한 보복만 있는 게 아니군.’
교수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영혼은 안보였다. 딱히 보였어도 뭔가 할 생각도 없었지만.
슬슬 통행량이 많아지기 시작했기에 호텔로 돌아온 환인은 급사 소년에게 팁과 함께 쪽지를 쥐어서 스사에게 보냈다.
어젯밤에 미궁에서 나왔으며 내일이나 모레 도시를 떠날 것이니 그전에 마지막으로 식사 한 끼 하자는 내용이었다.
그 후 아침을 먹은 환인은 피가죽 클랜의 무기와 방어구를 팔러 나가려던 이실리테를 붙잡았다.
“무기와 방어구는 그냥 파기하도록.”
=네? 16벌이나 되는 데다 상태도 양호해서 다 팔면 1금화는 족히 나올 텐데요…….=
“호족을 공격했다는 명분으로 처형당한 놈들의 물건이다. 대량으로 처분하려다 의심받을 수 있으니 도시를 떠난 뒤 들판에 그냥 버려라.”
=아……. 음, 주인님. 잠시만요.=
그렇게 말한 이실리테는 바닥에 전리품을 늘어놓더니 이리저리 꼼꼼히 살펴본다. 무기는 하나하나 분해해서 날인까지 확인했다.
=무기는 다 팔아도 될 거 같아요. 보통 이름있는 조직 같은 경우에는 무기도 주문 제작하면서 표식을 남기는데 이건 전부 기성품이에요.=
“그럼 무기만 나눠 팔도록.”
=네!=
힘차게 대답한 이실리테는 얕보이지 않기 위해 중철 대검에 갑옷까지 차려입고 나갔다.
혼자 남은 환인은 잠시 예정을 생각하다가 거실 양탄자 위에 배를 깔고 앉은 비상식량을 바라보았다.
쿠우?
“일단 나가자.”
쿠웃!
비상식량을 데리고 향한 곳은 중심가 남부대로 제2내성문 인근의 역참??.
대로에서 골목 안으로 꺾여 들어가는 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물류창고 비슷한 외관의 건물이 나타났다.
기차역처럼 트인 건물 외부에는 수많은 마차와 캐리지, 짐을 가득 실은 수레 등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많은 사람과 마차가 오가며 시끌시끌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환인은 그런 역참 주변에 늘어선 각종 마차 관련 부속품 상점과 말과 쿠에의 장비품 상점들을 살폈다.
‘저기군.’
쉴 새 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마차를 피해 길을 건넌 환인은 비상식량과 함께 엔틱 느낌이 강한 가게로 들어섰다.
벽 위에는 각종 쿠에용 장구??가 가득 달려있었고 벽 아래 진열대에는 박차와 등자를 비롯해 굴레와 재갈 등이 보기 좋게 나열되어있다.
그리고 텅 비어있는 가게 한복판.
쿠에와 함께 들어와서 시착에서 탑승까지 해볼 수 있도록 꾸며진 인테리어다.
딸랑, 방울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안쪽에서 안장 비슷한 것을 손보고 있던 흰유황앵무 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돌리며 일어선다.
=어서오십시오. 무어헛?! 녹색 쿠에!?=
쿠엣?!
후다닥 달려오는 남자의 모습에 비상식량이 깜짝 놀라 위협하는 자세를 취한다.
=오, 오오오! 정말, 정말로 녹색 쿠에잖아! 멋져! 훌륭해! 최고야! 이 매끈한 깃털이며 대지를 박차는듯한 굳건한 다리하며……!=
쉭쉭, 비상식량이 쇳소리를 내면서 경계심을 잔뜩 드러내는 모습에 환인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잠시 괜찮겠습니까.”
=……핫?! 이, 이런.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해서 추태를 보였군요.=
뒤늦게 정신 차린 점주가 머쓱하게 웃으며 물러섰다.
=이야기로만 듣던 녹색 쿠에를 실제로 보아서 저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 녀석이 착용할 가슴 보호대와 발목 보호구를 보고 싶군요. 추천하는 물건이 있습니까?”
취미와 직업이 같아 보이는 주인장의 행동에 환인은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러셨습니까!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저희 쿠에 환상점은 일반 품종의 쿠에에서부터 희귀 품종 쿠에까지, 쿠에 장비란 장비를 총망라한 웨이포드 최고의 쿠에 장비 상점입니다! 가게 역사로 말할 것 같으면……!=
“…….”
점주는 좋게 말해서 직업의식이 뛰어났고, 나쁘게 말하면 눈치 없는 오타쿠 습성이 충만했다.
쉬지 않고 떠드는 점주의 모습에 환인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대충 맞장구쳐주고 적당히 말을 끊어가며 쿠에용 가면 투구, 앞가슴보호대안장 일체형과 다리 보호구를 구매했다.
=이 일체형 앞가슴 보호구안장은 미궁산 녹채목??에 흑철판을 덧대 만들었습니다. 보시다시피 녹색과 대비 색이 훌륭해 이 아이의 아름다운 깃털을 더욱 돋보게 해주죠!=
=이 띠와 고삐가 연결된 안장이 보이십니까? 이것도 흑화목???으로 제작해 색감의 밸런스를 이뤘죠. 물론 띠와 고삐도 평범한 가죽이 아닙니다. 2급 이형종의 가죽으로 제작해 내구도는 물론 방수 기능도 제대로 갖춘 물건이죠!=
=다리보호구 또한 비범한 물건입니다! 빛이 닿지 않는 미궁의 어둠 결정을 강철과 섞어 만든 결정철, 그걸 철판으로 뽑은 뒤 두드려 단조했으며 안쪽은 섬세한 쿠에의 다리에 상처나 압박을 주지 않도록 부드럽게 연마한 가죽을 덧대었습니다! 며칠이고 다리보호구를 착용하고 다녀도 짓무르거나 상처가 생기는 일은 없다고 자신합니다!=
=이 가면 투구는…… 크으~! 정말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여기서 닷새 거리의 작은 촌락이 있는데 거기에 정말 뛰어난 솜씨의 가공 장인이 사시는데 그분께 사정사정해서 계약을 맺고 납품받는! 3급 미궁산 경철목 재료로 한 투구죠! 보이십니까? 이 윤곽선과 마감을! 그야말로 쿠에의! 쿠에에 의한! 쿠에를 위한 투구죠!=
“……훌륭…하군요.”
점주의 열띤 반응이야 어쨌든 제품은 말 그대로 훌륭했다.
가슴 보호대와 안장, 다리보호구도 명품이었지만 가면 투구가 그야말로 걸작이었으니까.
연노랑의 부리 색에 맞춘 것으로 비상식량의 머리를 전부 덮는 게 아니라 부리 위쪽과 이마에서 정수리까지만 살짝 덮는 물건인데 디자인이 발키리 헬름처럼 샤프하고 날렵해 쿠에의 멋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것.
색도 흑회색이 기조라서 다른 장구와 함께 세트 아이템 느낌이 강해서 더욱 마음에 드는 환인이었다.
비상식량도 착용한 장비가 만족스러운 듯 자기 몸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턱을 치켜들고 으쓱거린다.
그걸 영상 기록 마도구로 촬영하던 환상점의 주인, 유오가 환인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저엉말 감사합니다! 환인 님의 비상식량 덕분에 저희 제품이 희귀 쿠에의 골격에도 잘 맞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야말로 싼 가격에 제품을 제공해주어서 고맙습니다.”
비록 세 가지 장비를 구매하는데 1시간이 넘게 들었지만 아깝지는 않았다.
덕분에 3금화나 되는 제품을 1/3의 가격에 구매했으니까.
비상식량이 4차 성장을 이뤄 덩치가 더 커지더라도 조금만 조율하는 것으로 계속 쓸 수 있는 고급품이 1금화라니.
=환인 님! 장비에 문제가 생긴다면 비상식량과 함께 꼭 다시 방문해주십시오! 그게 원가에 드리는 약속이니까요!=
“그러겠습니다. 가자.”
쿠에~.
상점을 나온 환인은 비상식량에게 장비를 갖춰준 효과를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저 귀여운 애완조를 보는 시선에서 잘 훈련된 전투용 쿠에를 보는 시선으로 바뀐 것.
사람들이 슬금슬금 비상식량에게서 멀어지는 모습이 마치 도로에서 롤스로이스나 람보르기니와 마주친 국산 차처럼 느껴진다.
이러니 필연적으로 도난에 대한 걱정도 치밀어올랐다.
‘비상식량에게도 전투 기술을 가르칠 수 있을까.’
알드티스를 걷어차고 때리던 것을 생각해보면 호전성은 충분하다.
머리도 똑똑하니 적당히 대련을 해주다 보면 공방?? 정도는 익힐 수 있지 않을까.
“…….”
시도는 해보는 게 좋겠지.
비상식량이 쓴 투구와 연결된 고삐를 쥐고 걸어가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던 환인은 제2 공동묘지의 출입 금지 팻말이 치워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엘카타가 돌아온 건 가해서 출입구의 종을 딸랑딸랑 울리고 잠시 기다리자 이엘카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습니까.=
하얀 로브를 입은 하얀 늑대 머리의 남자. 환인은 직감적으로 새로운 묘지기임을 깨닫고 물었다.
“저는 환인이라고 합니다. 이전 묘지기인 이엘카타 씨와 친분이 있었는데…… 제2 공동묘지의 묘지기 분이 바뀌었나 보군요.”
=아아, 당신이 그분이셨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이엘카타 영혼사님께 받은 부탁이 있습니다.=
기다리겠다고 하자 인랑족 묘지기는 안으로 들어갔다가 손에 편지 한 장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그분께서 부탁하신 편지입니다.=
“고맙습니다.”
편지를 받고 인사한 환인은 공동묘지에서 천천히 멀어지며 편지 봉투를 살펴보았다.
곱게 접힌 편지의 오른쪽 아래에 적힌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필체가 눈에 들어온다.
[나의 님께, 이엘카타=엘위드리스가.]
‘나의 님이라…….’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글귀에 눈을 내리깐 환인은 편지를 열어보려다 말고 부리 끝으로 자신의 어깨를 살짝 미는 비상식량을 돌아보았다.
쿠에~.
“뭐냐.”
쿠엣!
“……등에 타라는 거냐? 네게 아직은 무거울 텐데.”
쿠쿠! 쿠에에~.
해보지 않고는 모른다며 꾸꾸 우는 모습에 환인도 피식 웃으며 등자에 발을 올리고 단숨에 올라탔다.
‘편하군.’
흑회색 안장부터가 고급이라 적당한 쿠션감이 하반신을 받쳐주며 허리도 똑바로 잡아주는 느낌이다.
쿠엣! 쿠우!
하나도 무겁지 않은지 비상식량이 것보라는 듯 몸을 들썩인다.
안장에 앉아있던 환인은 그 움직임에 피식 웃으며 발키리 헬름 뒤로 드러난 비상식량의 머리를 긁어주었다.
“그래그래. 알았으니 그만해라.”
쿠흥~.
“올츠 호텔로 돌아가자.”
쿠엣.
짧게 대답한 비상식량은 타다닥, 가벼운 발걸음으로 인도를 빠져나온 뒤 오가는 마차를 따라 올츠 호텔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간다.
‘말을 알아듣는 것과 길을 찾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 비상식량은 일반적인 녹색 쿠에가 아닌 건가.’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환인은 올츠 호텔에 도착한 뒤 잘했다고 칭찬하며 목을 긁어주었다.
“비상식량. 이대로 날 수 있겠느냐.”
쿠에? 쿠우.
자신을 태우고서 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한지 몇 차례 날개짓을 해본 비상식량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완전한 성체가 되어야 누굴 태우고 날 수 있는 거군.’
비상식량의 등에서 내려온 환인이 날아서 객실로 돌아가라고 하자 망설임 없이 날개를 펄럭여 나오기 전에 열어놓은 창문으로 쏙 들어갔다.
=어? 쿠에가 날아간다.=
=거 술 작작 마시랬더니 대낮부터 헛것을 보고 자빠졌네. 정신 차려!=
=아니 진짜 날아올랐다고. 저기 봐…… 없네?=
=하아, 진짜.=
아웅다웅하는 다람쥐 머리 남자와 청설모 머리 남자 둘을 지나쳐 로비로 들어가자마자 지배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
애원하는듯한 눈빛. 좀 전에 비상식량을 데리고 로비를 가로지를 때도 저 표정이었지.
환인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 객실로 돌아왔고, 거실 한복판에서 스스로 장비를 벗고 있는 비상식량을 볼 수 있었다.
가슴 보호대와 안장은 이미 벗었는지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부리를 움직여 다리보호구를 푸는 중이다.
“기다려. 네가 부리로 당기면 금방 뜯어져 못쓰게 된다.”
쿠우.
발키리 헬름을 벗겨주자 머리를 푸르르 흔들었고 다리보호구를 벗겨주니 속이 시원한지 다리를 들었다 내렸다 하다가 창가 의자, 환인의 지정석 옆에 주저앉는다.
척 봐도 자신을 태우고 와서 조금 지친 모습이었지만 환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힘들어서 다리를 덜덜 떠는 것도 아니고 저 정도면 평범한 근력 훈련이 될 테니까.
장비를 한곳에 정리해두고 창가 의자에 앉은 환인은 팔걸이에 머리를 올린 비상식량을 쓰다듬으며 이엘카타가 남긴 편지 봉투를 열었다.
팅
“……?”
초대장 같은 봉투를 개봉했더니 작은 별똥별이 튕기듯 날아가다 사라졌다.
‘실링 왁스 같은 건가.’
편지 봉투에서 편지지를 꺼내자 향긋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 냄새를 맡았는지 비상식량도 눈을 뜨고 편지지에 호기심을 비춘다.
“…….”
내용은 여성스러운 감수성이 흘러넘치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B4 크기만 한 편지 두 장 내용을 요약하면 이랬다.
[먼저 연락이 늦어 죄송했다.
지금은 알드진=베레님의 호의에 성에서 머무르고 있다.
며칠 후 영도의 영혼 기사들이 도착하면 영도로 떠날 것이다.
본인의 각성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님의 덕분이다.
감사하며 감읍할 따름이라 님을 뵙고 절을 올려야 함이 옳을 것이나, 상황이 여의찮아 죄송한 마음을 금치못한다.
미궁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오시면 본인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이별이기에 아쉬움이 흘러넘치지만, 님과 보낸 한여름 밤의 추억을 생각하며 견디겠다.
본인이 나머지를 책임질 것이니 웨이포드의 걱정은 하지 않으시길 당부한다.
땅신님의 가호 아래 님을 다시 뵐 수 있길 기대해본다…….]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은 환인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덕분이라.’
환인도 우연의 일치치고는 무척 공교로운 타이밍이라 생각했지만, 고민하고 생각해보았자 진실은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 일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만약 이엘카타의 각성에 자신이 이바지했다는 근거나 증거가 있다면 감사 인사를 받으며 적당한 이득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게 전혀 없다.
이러면 그냥 자신이 한 것은 없다는 듯이 물러서 있는 것이 호의를 사기 쉽다.
편지의 뒷부분에 헬마르=베레의 일은 자신이 책임질 것이라 적혀있었지만, 환인은 애초에 1g만큼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기에 그 부분에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런가' 하는 생각 뿐.
=다녀왔습니다. 오는 길에 브릴릿을 만나서 같이 왔어요, 주인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실리테의 목소리에 환인은 편지를 품에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