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11화 (111/813)

〈 111화 〉 108 빛이 닿지 않는 미궁

* * *

3층부터 11층까지는 올라가고 내려가는 계단을 다 합치면 세 곳 이상이다. 하지만 12층부터 16층까지는 오직 1개뿐.

‘내가 미궁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었나.’

12층까지 내려온다는 보장도 없는데 불확실성에 너무 기댄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이제와서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영혼 시야로 상대의 구성과 무장 상태까지 파악한 환인은 레심에게 미리 사과했다.

“레심 씨. 미안합니다.”

=예?=

“저자들은 비상식량을 노리는 피가죽 클랜의 사냥개인 것 같습니다.”

못해도 100m 너머에서 다가오는 광원을 응시하며 자초지종을 간략히 설명해주자 똑같이 횃불의 광원을 주시하던 레심과 이실리테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사나운 눈빛을 뿌린다.

=어디를 가나 쓰레기는 있기 마련이지요.=

“레심 씨는 나서실 필요 없습니다. 이실리테도 아가씨를 지켜라.”

=예? 아무리 그래도 저쪽은 여덟입니다.=

아우라의 양으로 봐서 2급~4급의 직업자들이다. 아무리 환인이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 해도 여덟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

하지만 레심은 대답 대신 흐릿하게 웃는 환인에게 순간 심장이 서늘해지는 두려움을 맛보았다.

환인은 구슬화 해놓은 바귈의 중하급 영혼으로 강령을 펼치자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동시에 목이 칼칼해짐을 느꼈다.

직감적으로 바귈의 마비 목소리 특성임을 깨달았다.

‘꼬리에서 바늘을 발사하는 삼안견이나 젤라틴 큐브의 부식 공격 같은 이질적인 특성은 불가능하지만 이런 건 되나 보군.’

하지만 쓸 생각은 없다. 아직 관계가 파탄 난 것은 아니니 괜히 의구심을 줄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때 저쪽의 횃불이 훅­ 꺼지며 사냥개들이 암흑 속으로 숨어들었다. 95% 정도 하고 있던 확신이 100%에 도달했다.

“여러분들도 통로로 들어가십시오.”

=하지만!=

=아 주인님이 말한 대로 빨리 움직이기나 해요! 아가씨도 챙기고요!=

이실리테가 바락 소리 지르며 레심을 밀치고 백려강을 조심스레 들어서 바귈과 싸운 중앙 통로로 몸을 피한다.

=불 꺼요!=

=네, 네!=

빛 막대도 훅­ 꺼지며 광량이 완전히 사라졌다.

사방이 어둠에 잠겨 들자 피가죽 클랜으로 짐작되는 직업자들의 행동도 신중해진다. 환인은 영혼 시야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피가죽 클랜에서 오셨습니까?”

목소리를 냈더니 평소보다 카랑카랑하고 목소리가 간질거린다.

=……지금이라도 녹색 쿠에를 넘겨준다면 살려서 보내주겠다. 쿠에를 내놓고 꺼져라.=

“의외군요. 이프리벨 씨가 이런 멍청한 수단을 고를 만큼 어리석어 보이지는 않았는데…… 누가 이런 머저리 같은 계획을 생각해냈습니까. 아시아 루단? 아니면 조직의 삼인자?”

환인이 말을 할수록 여덟의 사냥개들이 환인 쪽으로 발걸음 소리 없이 접근한다.

이런 상황에 대비한 훈련을 많이 받은 모습이다.

=무직자 주제에 말이 많군. 도망칠 시간을 버는 거라면 늦었다. 이미 위층에도 네놈들을 기다리는 조직원들이 있으니까.=

이쪽을 훤히 보고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해 대답 대신 떠벌거리는 놈의 목을 노려 단검을 던졌다.

60m가량 거리가 있었지만, 중하급 강령의 신체 강화 효과를 받은 단검은 펑­ 소리와 함께 환인이 노린 사냥개의 목을 꿰뚫었다.

털썩.

끄르르륽…….

목뼈가 박살 나며 목이 꺾이고 구멍 뚫린 목에서 피거품이 끓는 소리가 미궁 안을 울린다.

동료가 쓰러지자 치익­ 즉시 횃불 4개가 켜지더니 활 든 엽사 3명과 양손 해머를 쥔 투사 1명이 환인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했다.

직후 불화살이 핑­ 소리를 내며 환인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리고 날아오는 불과 바람, 흙의 술법 화살들.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이 정도면 우르거의 주먹질에 비견될 정도.

환인은 왼편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자신의 허벅지를 향해 날아드는 두 번째 불의 화살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단검이 불화살을 꿰뚫는 순간 퍼엉­ 작은 소리와 함께 사람 상체는 간단히 삼킬만한 빨간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듯 터져 나왔다.

‘쳐내선 안 될 위력이군. 유도 성능은…… 없나.’

자신이 움직였음에도 바람과 땅의 화살이 보여주는 궤적은 변동이 없다.

나머지 두 속성 화살을 쳐내는 대신 환인은 술사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겸 바로 왼편,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벽 쪽으로 몸을 숨겼다.

숨겼다지만 그사이 가까워진 일부 사냥개들의 시선은 여전히 환인과 이어져 있는 상황.

사냥개들이 쥐고 있던 횃불을 사방으로 던져져 광원을 만들어낸다.

피피핑­

그리고 날아오는 화살 세 발.

희미한 아지랑이가 담긴 화살을 가볍게 툭툭툭 쳐서 떨어트린 뒤 지근거리에 도달한 돼지머리의 둔기 투사와 1초, 짧은 시선을 교환한 환인은 둔기 투사의 가슴팍에 창을 찔렀다.

(상대적으로)느릿한 찌르기 동작에 둔기 전사는 이런 얼뜨기가 다 있나 하고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투척은 훌륭하지만, 창술은 비루먹은 병신이군!’

창을 쳐내는 동시에 일점 충격으로 환인의 갈비뼈를 으스러트리려 한 둔기 투사는.

=꺽?!=

오히려 자신의 갈비뼈가 작살났다.

둔기 투사의 근육을 통해 공격을 읽고 창을 비틀어 투핸드 해머의 중심축을 툭 쳐서 궤적을 날린 환인이 그대로 옆구리를 후려친 것이다.

우두두둑, 갈비뼈 여러 대가 박살 나는 진동이 손에 착 감기는 것을 느끼며 창을 거꾸로 쥐고 번개같이 둔기 투사의 양어깨를 찍어 어깨뼈를 박살 내버린다.

=끄어억!?=

그리고 이어진 프론트 킥.

퍼어억!

=퀘엑……!=

100kg이 넘는 거구가 수십 미터를 날아 반대편 벽에 충돌한다.

엽사들은 붙은 지 3초 만에 공처럼 날아가는 동료의 모습을 목격하고 흠칫했다.

상대는 무직자라고 들었는데? 아우라도 없다. 그런데 사람을 공처럼 날려버리는 저 힘은 뭐지?

‘게다가 화살을 걸 틈도 없이 게리를 무력화시켰어! 그 새끼들이 거짓말한 거야?!’

독수리의 피가 흐르는 여자는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강한지 약한지 도통 가늠할 수 없는 환인을 응시하며 재빨리 화살을 메겨 쏜다. 쉴 새 없이 이어서 화살을 계속 쏜다.

다른 둘도 따라 화살을 마구 쏘기 시작했지만 잠시 후 말도 안 되는 것을 본 것처럼 주춤거리면서 물러서기 시작했다.

=미, 미쳤어.=

쩍!

그 말을 한 토끼 귀의 여자는 정수리에 돌도끼가 박혀 뒤로 넘어갔다.

=씨, 씨발!=

콰직.

두려움에 욕지거리를 내뱉은 쥐 머리의 남자도 미간에 단검이 틀어박히며 눈이 뒤집혔다.

“…….”

환인은 단검을 위로 던졌다 받으며 백려강처럼 귀가 있는 자리에 얼룩말 무늬 깃털이 난 여자를 응시했다.

독수리 깃털 귀 여자는 입을 열지 못했다.

입을 열었다간 저 단검이 날아와 목을 꿰뚫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던 남자가 뭔가 소지품을 찾는 듯 몸을 더듬는, 방심이 명백한 행동을 해도 화살을 날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12m 거리에서 날아오는 40발에 가까운 화살을 모조리 쳐낸 괴물이다. 저 행동도 뭔가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던 거다.

그 순간 눈앞에 번쩍, 불똥이 튀더니 독수리 깃털의 여자는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죽는 건가…….’

주먹만 한 자갈을 던져 머리를 맞춘 환인은 독수리 귀 여자가 죽지 않고 기절한 것을 확인하며 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지팡이에 술법을 장전한 채 주춤주춤 다가오던 3명의 술법사가 화들짝 놀라 지팡이를 치켜든다.

보자마자 술법을 날릴 줄 알았는데 왜 공격하지 않는 걸까. 앞을 막아줄 방패가 사라져서?

환인은 저 술사들이 언제 술법을 쏠까 궁금해하며 엽사 둘의 머리에 박힌 돌도끼와 단검을 회수한다.

‘단검을 좀 더 많이 사놓을 걸 그랬군.’

생각 이상으로 투척 단검이 유용하다.

중하급 강령의 신체 강화 효과로 던진 단검의 속도는 술사들이 쏜 속성 화살에 버금가는 속도. 이형종 상대로는 아쉽지만 같은 인간을 상대로는 너무나 편한 무기다.

자신의 단검을 회수한 환인은 마지막까지 공격하지 않은 술사들에게 답례로 자신의 단검 두 자루와 죽은 엽사의 단검 한 자루를 날려주었다.

퍼벅­

=끅.= =꺽.=

=……!=

불과 흙 화살을 쏘았던 술법사는 그대로 머리에 단검이 박혀 줄 끊어진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지만, 바람을 쏘았던 술법사는 멀쩡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단검이 풍술사에게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옅은 녹색의 바람이 일어나 단검의 궤도를 바꾼 것.

나중에 회수하기 귀찮아서 일부러 적당한 힘으로 던졌던 게 술법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가 되었음을 깨달은 환인이 속으로 약하게 감탄했다.

‘바람 술법은 생각 이상으로 편리해 보이는군.’

단검은 다 썼고 돌도끼를 주우러 13층 계단 입구까지 걸어가고픈 생각은 없다.

환인이 돌도끼를 손에 들고 걸어오는 모습에 접힌 강아지 귀의 여자가 벌벌 떨기 시작했다.

여자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죽은 사람들도 다들 자기 훈련에 철저한 사람들이었다.

돈을 벌었다고 유흥과 노름에 탕진하는 게 아니라 무관에서 꼬박꼬박 훈련하고 협회에서 술법을 배우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랬던 사람들이 저렇게 허무하게…….

돌도끼에서 피가 뚝, 뚝 떨어지는 것을 본 여자는 결국 지팡이를 떨구고 무릎을 꿇은 뒤 빌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세요.=

“그런 말은 이쪽을 죽이려 하기 전에 했어야지요.”

환인은 그리 대답하며 여자의 턱과 정수리를 살포시 잡은 뒤 180도 돌려버렸다.

으득.

풀썩­

생전에는 예쁘장했지만, 목이 한바퀴 빙글 돌며 내압에 혀와 눈알이 튀어나와 죽은 모습은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죽어서도 아름다운 것은 없지.’

주위를 둘러보니 피가죽 클랜의 여섯 사냥개가 영혼이 허공에 둥둥 떠서 자기 시체를 보며 괴로워하는 중이다.

「어떻게 이렇게 어이없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우리가 무직자에게 전멸했다고……?」

「아아. 아아아…….」

데자뷰 같은 광경, 3층에서 만났던 인간 부스러기들을 떠올리던 환인은 감흥 없이 명령을 내렸다.

‘와라.’

「?!」

「앗, 아아앗!」

「우아아악?!」

「사, 살려줘어­!」

여섯의 사냥개 영혼을 강제로 끌어당겨 구슬로 만든 뒤 단검을 회수한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단검과 불탄 단검은 버리고 엽사 중 도적 직업자의 몸 이곳저곳에 붙어있는 단검 다섯 자루를 챙긴 환인은 단검 벨트에 단검을 끼워 넣으며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를 다시 훑었다.

땅에 떨어져 타오르고 있는 횃불의 광원 덕분에 보이는 붉은색과 검은색이 섞인 가죽 갑옷.

환인은 별 상처 없이 쓰러져있는 독수리 깃털 귀의 여자에게 다가갔다.

“일어나지 않으면 목을 밟아 분지르겠습니다.”

억양이 없는 환인의 말에 기절한 척하고 있던 독수리 깃털 귀 여자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다.

=당신 사람 맞아요?=

대답 대신 환인은 돼지머리의 둔기 투사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걷어찼다. 갈비뼈가 부러진 자리다.

=크아아악!! 크, 끄으으……. 끄윽!=

솜털을 곤두세우는 돼지머리 남자의 비명에 독수리 깃털 귀 여자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질문은 제가 합니다. 허락 없이 말 한 번 할 때마다 손가락 하나씩 자르겠습니다. 자를 손가락이 없어지면 사지를, 그다음에는 목을 치겠습니다.”

=…….=

절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말에 항의하려던 독수리 깃털 귀 여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삽시간에 자신의 파티를 몰살시킨 남자의 신경을 건드리기보단 그냥 입 꾹 다물고 있는 게 신상에 이롭다는 판단을 내린 여자는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일어났다.

돼지머리 남자도 빠르게 상황 파악을 했지만, 양어깨와 옆구리, 그리고 복부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머리를 굴릴 수가 없다.

“현재 두 분의 목숨은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동료들처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인정해요.=

“장비를 모두 벗습니다.”

환인의 명령을 잠깐 이해하지 못했던 독수리 깃털 귀의 여자는 순간 고민했다.

장비를 모두 버리면 희미한 희망마저도 사라진다. 지금이라도 싸울까?

“…….”

하지만 자신들을 이 꼴로 만든 남자의 감정 없는 눈을 보자마자 말없이 착용 중이던 무기와 방어구를 벗기 시작했다.

덤비면 100% 죽음이다. 말을 순순히 따르면? 살아날 가망이 있지 않을까.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며 클랜 소속 갑옷을 벗은 독수리 깃털 귀 여자는 남자가 아직도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설마 옷까지 벗으란 건가.

‘그런 거 같네.’

린넨 셔츠와 린넨 반바지까지 벗고 팬티만 남은 차림이 되고 나서야 남자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니, 돌아간 게 아니라 저 밥값 못하는 빌어먹을 뚱땡이 새끼를 가리킨다.

저놈 장비도 내가 벗기라고?

“…….”

‘후우.’

음부를 겨우 가리는 한 뼘만 한 팬티 차림으로 팔병신이 된 돼지 새끼를 벗기고 있으려니 수치스러워 얼굴이 붉어진다.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다.

저기 죽어 널브러진 동료의 유리 같은 눈알을 외면하며 돼지 새끼의 갑옷을 벗긴다.

돼지 새끼의 고통에 헐떡이는 숨결이 젖꼭지를 스치고 지나가니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친다.

왜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을까. 그게 후회되는 여자였다.

그즈음 소란이 가라앉아서일까, 뒤쪽 통로에서 이실리테가 레심과 백려강하고 함께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세 명의 시선이 먼저 홀딱 벗은 채 인돈족 남자의 갑옷을 벗기는 여자로 향했고, 이어서 주변에 널브러진 여섯 구의 시체와 한쪽에 수북이 쌓인 화살로 차례대로 지나간다.

=앗, 주인님! 화살, 화살 안 맞으셨어요?!=

바닥 한쪽에 수북이 쌓인 화살을 본 이실리테가 매우 놀라 환인에게 달려갔지만.

=아, 생채기도 없으시네.=

“이실리테. 시체에서 쓸만한 것들을 챙겨라.”

=어, 저승길 노잣돈으로 남겨두지 않으시고요?=

“의도적으로 계획해서 죽이려고 온 놈들이다. 노잣돈이 없어 신들의 정원에 들지 못한다고 한들 내 알 바는 아니지.”

=네, 넵.=

이실리테는 환인의 이야기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진짜 죽었을 때 돈이 없으면 신들의 정원에 못 들어가는 거 아냐?’

속옷에 작은 주머니를 만들어서 은화 한 닢 정도 넣고 다닐까 생각하며 시체를 털던 이실리테는 뒤에서 들려온 신음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식은땀을 철철 흘리는 인돈족 남자의 양어깨가 이제 보니 완전히 박살 나 있다.

=…….=

이실리테는 저 두 연놈이 정말로 안쓰러워졌다.

주인님이 누군지 알게 되면 그런 육신의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텐데.

전직 도적 두목의 경험을 살려 재빨리 시체 여섯 구에서 돈주머니와 술사의 지팡이에서 저급이긴 하지만 가공 위상석을 챙기고 인취족 여자가 벗은 거로 보이는 장비까지 뒤졌다.

=이실리테 양. 챙기는 거라면 무기와 방어구까지 다 챙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여덟 벌이니까 가지고 나가면 은화 서너 장은 받을 수 있겠지만요. 주인님은 바리바리 짐을 챙기는 건 원치 않으실 거예요.=

=그럼 이걸 쓰십시오. 1제곱미터 정도 되는 용량의 아공간 주머니입니다.=

레심은 혹시 몰라 챙기고 다니던 소형 아공간 주머니를 이실리테에게 주었다.

주머니 속에 팔을 집어넣자 어깨까지 쑥 들어간다.

이실리테는 레심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팔아봤자 철화 몇 닢도 안 나올 것들은 버리고 장검과 활과 화살, 가죽 갑옷과 지팡이를 전부 챙겼다.

돼지 새끼의 장비를 모두 벗긴 독수리 깃털 귀 여자는 자신의 장비와 옷이 여자의 주머니에 전부 들어가는 것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을 신기한 듯 살피고 있는 새 새끼를 노려보았다.

이놈만 아니었으면 이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쿠엣!

=아윽!=

여자의 사나운 시선을 느낀 비상식량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여자의 정수리를 부리로 콱 쪼았다. 이어서 맨살이 드러난 몸 곳곳을 콕콕 쪼기 시작했다.

감히 친구를 공격했으면서 반성하지도 않고! 넌 혼 좀 나 봐야 해!

쿠엣, 쿠엣!

콕콕콕콕!

=아, 아!=

정수리가 쪼개지는 듯한 고통과 맨살이 쪼아지는 고통 속에서 독수리 깃털 귀 여자는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신경질을 담아 두 팔을 사납게 휘두르자 빌어먹을 새 새끼가 한걸음 물러나더니 이번에는 머리를 낮춘 뒤 꽁지깃을 세우고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기 시작한다.

=……!=

화난 쿠에들이 보여주는 공격 자세에 뒤늦게 침을 꿀꺽 삼킨 여자는 사육자로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의 여자에게 분노와 애원을 담아 쳐다보았다.

빌어먹을! 이 새 좀 어떻게 해봐!

=비상식량. 쪼는 건 괜찮은데 그래도 직업자라서 힘이 세. 머리를 들이밀다가 반격당하면 위험하니까 그냥 밟거나 걷어차 버려.=

쿠에? 쿠엣!

‘미친년아!’

말리랬더니 오히려 부추기는 모습에 여자가 기겁할 때 환인은 백려강과 레심 셋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죄송해요, 환인 님. 본의 아니게 너무 큰 폐를 끼쳤어요…….=

“이제 몸은 괜찮으십니까.”

=정신 보호 술법을 지팡이의 핵에 연결해서 유지 중이에요. 지금은 괜찮아요.=

그 말대로 백려강은 연한 초록빛에 뒤덮여있었다.

초록빛은 백려강이 쥐고 있는 지팡이의 굵은 녹색 보석과 연결되어있었는데, 위상석으로 술법 유지를 위한 위상력을 공급하고 있는 거겠지.

“다행이군요.”

=…….=

“…….”

백려강은 무감정한 환인의 시선에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제 소개를 다시 할게요. 저는 백 6급 호족 가문의 차녀로 이름은 려강이에요. 라드세아 중동부의 항구도시 프라버의 주인, 백중익 님이 부친되세요.=

라드세아는 이 대륙의 이름, 항구도시 프라버는 스사가 보여주었던 중부 지도 끝자락에서 본 기억이 난 환인이었다.

항구도시라고 하지만 바다와 인접한 항구가 아니라 바다만큼 넓은 호수의 항구도시다. 크기는 웨이포드의 1.4배가량이라던가.

신분으로 압박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환인의 눈에 백려강은 그런 의도를 한 점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제가 처음 돌아가는 길이 어렵지 않겠냐고 했던 것은, 환인 님이 짐작하신 대로일 거예요. 환인 님과 비슷한 처지인 분들이 생전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한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들이 종족 연합 주도에 사로잡혀있는 겁니까?”

=환인 님이 받으셨다는 경고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것을 솔직히 말씀드리면, 메리아놀 종족 연합이 환인 님 같은 차원 방랑자님들을 모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다만 실험이나 연구를 위해 모으는 것이 아니라 저희 세상에 무분별한 지식의 전수가 이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예요.=

헉, 소리가 나서 옆을 보니 레심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있었다.

=그래서 종족 연합은 차원 방랑자분들의 소식을 들으면 강제에 가깝게 주도 패시지로 모신 다음 외출에 제약을 걸어요. 그 외에는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제가 ‘그 때문에 후드망토를 하고 다니신 것 아니었나요?’ 라고 질문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고요.=

팔짱을 끼고 설명을 듣던 환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하이에른=조드가 한 경고와 일맥상통한다.

당시 자신은 그 이유를 인체 실험과 해부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구금과 억류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하이에른=조드는 환인 자신에게 그 어떤 해도 끼치지 않고 떠나갔으니까.

만약 모종의 커넥션이나 밀약이 있다면 하이에른=조드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뒤에 돈으로 회유하는 것이 아닌, 종족 연합에 신고해버리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제가 받은 경고는…….”

환인도 하이에른=조드의 신분은 숨기고 그저 우연히 알게 되었다는 식으로 경고 내용을 들려주었다.

그 내용에 백려강과 레심이 침음을 흘린다.

=목숨을 위협한다는 쪽으로 오해하실법한 경고였네요…….=

=환인 님. 짐승 신님께 맹세코 아가씨의 말씀에 거짓은 없습니다. 만약 거짓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제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들은 덕분에 백려강이 환인에게 어떤 결례를 저질렀고 그 때문에 어떤 오해가 빚어졌는지 모두 알게 된 레심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아가씨의 결백을 증명했다.

현재의 레심은 환인이 언젠가 큰 인물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증거를 대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현재의 환인은 범상치 않은 무예 실력 하나뿐이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환인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과거의 대영웅들이 생각나는 레심이었다.

대영웅들이 무명시절 이러하지 않았을까 싶은 상상, 그 이상을 환인이 보여주고 있었던 거다.

예의 바른 모습. 그러면서도 과감한 결단성이 있다. 무직자이면서도 3~4급 직업자 여덟을 상대로 차 한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아 해치우는 무예에 사람을 쉽게 끌어당기는 인간적인 매력까지.

그래서 짐승신 님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이런 남자와 적이 되는 것은 절대 좋지 못한 일이라는 게 그의 직감이었다.

“…….”

자신의 맹세가 통했을까. 무표정한 환인의 얼굴에 작은 쓴웃음이 번지는 것을 보며 레심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허억.=

환인이 풀어놓은 비밀에 레심은 자신의 직감을 따른 게 신의 한 수였음을 깨닫고 전율을 느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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