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107 빛이 닿지 않는 미궁
* * *
‘이 녀석이 처음 진화했을 때가…… 산거북과 마주쳤을 때였나.’
그때로부터 대충 3달 정도 흘렀다.
쿠에 유생이 성체 쿠에로 성장하는데 대략 1.5년에서 2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비상식량의 성장은 그보다 더 빠른 감이 없지 않다.
4~5단계의 성장 중 벌써 3단계. 남은 것은 1~2단계인데 빠르면 몇 달 안에 성체 녹색 쿠에가 된다는 뜻이니까.
비상식량을 휘감은 채 점차 크기를 불려 나가던 빛이 폭사하듯 사방으로 퍼진 것은 그때였다.
=와.=
=어머.=
=호오.=
그리고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비상식량의 자태는 일행이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을 정도였다.
성체 쿠에의 덩치는 경주마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크다. 다만 쿠에는 말과 다르게 두 다리가 매우 튼실해서 좀 더 두껍고 탄탄해 보인다는 점이 차이 난다.
성장한 비상식량은 그런 성체 쿠에보다 약간 작았다.
등 높이는 환인의 어깨높이였고 머리는 환인을 내려다보는 수준.
쿠엣? 쿠우.
=귀여워!=
=어머나…….=
크고 예쁜 눈망울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갸웃 기울이는 모습에 이실리테와 백려강이 다시 작은 탄성을 흘렸다.
포근해 보이는 녹색 깃털로 뒤덮인 쿠에가 환인을 살펴보며 우는 모습이 귀여움의 극치였던 탓이다.
커도 너무 큰 비상식량의 모습에 잠시 굳었던 환인은 ‘너 왜 이렇게 작아졌어?’ 하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상식량의 목을 긁어주며 말했다.
“네가 커진 거다.”
쿠우? …쿠에~.
친구의 이야기에 그제야 자신을 살핀 비상식량이 ‘나도 이제 다 컸어!’ 하며 기쁜 듯이 날개를 펄럭였다가 깜짝 놀랐다.
가볍게 날갯짓을 했는데 몸이 둥실하고 떠오른 것이었다.
쿠?! 쿠엣! 쿠에!
내가?! 날고! 있어!
몸이 무거워져 2달 가까이 하늘을 날지 못한 비상식량이었다. 이제 평생 날지 못하는 줄 알고 시무룩했는데 다시 날 수 있게 되다니. 이보다 더한 희소식은 없었다.
비상식량은 기쁨의 울음소릴 내며 날개를 퍼더덕 펄럭여 날아올랐다가 쿵,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고는 땅에 떨어졌지만, 아픔보다 기쁨이 더 컸다.
쿠에엥! 쿠엣, 쿠우~!
자신에게 엉기며 기쁨을 온몸으로 표출하는 비상식량을 간신히 달랜 환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커진 덩치로 엉겨 붙으니 다독이기도 힘들군.’
이 정도면 이제 등급이 낮은 괴물하고도 싸울 수 있지 않을까.
문득 전투식량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환청이 들린 기분에 고개를 가볍게 저은 환인은 일행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만 쉬었다 가겠습니다. 비상식량이 갑자기 커져서 가르칠 게 생겼군요.”
가르칠 것은 별것 아니었다.
미궁 안에서 비상식량이 해야 할 일, 미궁 밖에서 해야 할 일, 전투가 벌어졌을 때의 행동 방침 등.
“앞으로 너는 짐도 짊어지고 다녀야 할 거다. 미궁 안에서든, 미궁 밖에서든.”
쿠엣? 쿠우. 쿠우웃!
“지금부터 하겠다고? 한눈에 봐도 네 체격은 다른 쿠에들보다 뛰어나지만 넌 아직 다 자라지 않았다. 안돼.”
킁. 쿠엣!
“……그러면 가벼운 것부터 조금씩 싣도록 하지.”
쿠에~.
“좋으냐?”
대화가 일단락된 것을 눈치챈 레심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이실리테에게 물었다.
=환인 님은 비상식량과 대화도 하실 수 있습니까?=
=주인님은 못 한다고 하시는데…… 레심 씨도 주인님이 비상식량하고 대화하는 걸로 보이죠?=
=예. 아가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아가씨?=
=네, 네? 뭔가요?=
=아뇨…… 환인 님이 비상식량과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아. 마음이 통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쿠에 기병들은 탑승하는 쿠에들과 교감해서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을 나눈다고 하잖아요.=
웃으며 대답하는 백려강의 행동에 설마설마하던 레심은 백려강의 눈빛 속에 담긴 감정을 읽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말을 끝내고 다시 환인을 바라보는 저 눈빛. 손을 자신도 모르게 감싸 쥔 저 행동.
‘이루지 못할 감정은 애초부터 품지 않는 게 덜 아픈 법인데…….’
자신은 그걸 빠르게 깨닫고 일찌감치 마음을 정리했기에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 정도로만 남았다. 하지만 지금의 백려강에겐 해독약도 없는 극독이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좋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리는 게 좋다. 백려강의 신분은 환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니까.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백려강과 십년지기 친구이고 단둘이 있는 사석에서는 말을 놓는 사이라지만, 엄연히 상하가 확실한 관계.
더욱이 남자와 여자다. 끼어들어 조언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없는 부분이 있다.
‘이때 레니가 있었으면…….’
레심이 고심하는 사이 비상식량은 부피만 크지 별로 무겁지 않은 짐을 등에 싣고 환인의 주변을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쿠에는 무언가를 등에 태우는 걸 좋아한다.
새끼들을 등에 업고 다니며 키우는 것은 물론 짝도 등에 얼마나 무겁고 커다란 걸 싣고 다닐 수 있는지를 보고 고르는 동물이다.
그런 본능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는지 등에 짐을 실은 것이 비상식량은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짐의 부피가 줄어서 저도 좀 더 활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겠네요.=
=그럼 제 옆에서 2인 전열 체재로 해보시겠습니까?=
=아가씨 호위는 어쩌고요?=
=환인 님이 후열에 계시지 않습니까.=
=아. 하긴.=
12층까지 내려오며 몇 번 후방 공격을 당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환인이 미리 낌새를 포착하고 숨 한 번 쉴 시간에 그게 몇 마리든 모조리 참살해버리는 것을 목격한 레심은 환인에게 강철과도 같은 믿음을 주고 있었다.
설령 몇 마리가 몰려오든 환인이라면 단숨에 해치워버릴 거라는 믿음이다.
‘내가 전력을 다하더라도 환인 님과 1합이나 겨룰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니…….’
=그럼 아가씨, 저는 앞으로 갈게요?=
=네. 힘내요, 이실리테.=
전열 2명, 중열 1명과 1마리, 후열 1명.
이 대형으로 점심 식사를 위해 들어와 있던 공동을 나와 다음 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빛 막대의 빛에 의지해 동굴을 나아간다.
저벅저벅저벅.
4명과 1마리의 발소리가 회색 어둠 속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실리테에게 선두에서 주의해야 할 점을 가르치는 레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자신의 곁을 지키던 이실리테가 앞으로 나가고 중열에 혼자 남은 백려강은 힐끔힐끔 환인을 돌아보다가 슬그머니 걸음을 늦췄다.
자연스럽게 전열과 거리가 멀어지며 후열과 거리가 좁혀든다.
“아가씨. 대열이 무너집니다.”
=호…… 혼자 있는 건 외로운걸요. 환인 님이 제 옆으로 오시면 안 될까요?=
백려강은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비상식량이 안 보이는 걸까. 환인의 시선을 다르게 해석한 백려강이 살짝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그, 그냥 앞으로 갈게요…….=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요. 레심, 2열로 대형을 변경하겠습니다.”
=예.=
환인이 걷는 속도를 올려 선두와 거리를 줄이자 백려강이 티 나지 않게 반색하며 그 옆에 붙는다.
3열을 2열로 변경하는 대신 흑창의 사정거리에 맞춰 앞과의 거리를 3m에서 4m로 늘렸다. 가운데에 백려강을 두고 좌우로 환인과 비상식량이 선 배치다.
그렇게 귀를 열고 이형종의 출현을 경계하며 13층 계단으로 향하던 환인은 비상식량의 이상한 행동을 포착했다.
고개를 바짝 치켜든 비상식량이 오른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은 지도책을 기준으로 12층 중심부로 가는 통로 방향.
환인은 적의 낌새를 감지한 데서 나온 행동임을 직감하고 선두의 레심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왼쪽 코너를 돌 때 주의하십시오. 비상식량이 적의 낌새를 포착한 것 같습니다.”
=예.=
=넷.=
대화가 뚝 그치고 발소리도 조용해진다. 그리고 좌우 폭이 12m 정도 되는 통로에 들어섰을 때.
=바귈!=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이쪽을 향해 히죽히죽 웃는 끔찍한 생물 다섯 마리를 발견했다.
=아가씨!=
=……불어와 몰아치는 칼날 바람!=
환인의 경고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백려강이 즉시 칼날 바람 술법을 발사한다.
위이잉 촤자자자작!
꺄아아악!
끄아아!!
사람의 머리에 귀 대신 커다란 박쥐 날개 같은 게 달린 이형종, 바귈 두 마리가 바람 칼날에 찢어발겨져 추락한다.
남은 세 마리가 천장에서 떨어져나와 펄럭 날개를 펼친다. 괴물의 얼굴이 추악하게 일그러지며 입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한 환인은 즉시 허리춤에 돌도끼와 단검을 꺼내 들고.
‘저놈들의 울음소리에 마비 효과가 있다고 적혀있었지.’
동시 투척, 돌도끼는 한 마리의 머리통에 박혔고 단검은 다른 한 마리의 날개를 찢었다.
남은 한 마리는 이실리테의 대검 내려치기에 절반으로 쪼개져서 사망. 떨어진 바귈은 레심이 튀어 나가 번개 같은 찌르기로 죽였다.
이실리테가 쪼개진 두개골 사이로 뇌수를 흘리며 죽어 널브러진 다섯 마리의 바귈을 둘러본다.
=생각보다 더 징그럽게 생겼네요.=
=다른 이형종과 섞여 나오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이놈들의 울음소리에는 미약한 마비 효과가 있다고 하니까요.=
=3계층이 되니까 확실히 위험한 이형종이 하나씩 나오는 거군요. 대형 괴물 지네하고 싸우는 중에 울음소리를 듣고 마비에 걸리면…… 어휴.=
바귈의 두개골을 쪼개고 위상석을 찾는 이실리테를 잠시 지켜보던 환인은 백려강의 옆에 붙으며 그녀의 판단을 칭찬했다.
선한 의도나 흑심을 품은 의도가 아닌, 호위자로써 의뢰주의 멘탈 관리를 위한 발언이다.
“좋은 판단이었습니다.”
=감사해요. 이제 조금은 술사로써 할 일을 이해한 것 같아요.=
“술법사는 큰 공격 한 번으로 전황의 반전을 일으킬 수 있는 직업이니까요. 비교적 안전한 후방에서 전황을 파악하고 시의적절한 술법으로 전투를 아군에게 유리한 쪽으로 흐르도록 조율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어엿한 술법사이겠지요.”
=말만 들어도 어려운 일 같아요.=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 쉬운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경지는 앞길을 열어주지 않으니 말입니다.”
=…….=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걸까.
이 사람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듣다 보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잘했다. 앞으로도 기척을 감지하면 지금처럼만 해다오.”
쿠에~.
애완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주는 남자, 환인의 모습에 백려강은 입에 바람을 살짝 머금었다.
‘뭐죠. 저에게 한 칭찬보다 더 진심이 담겨있는 거 같네요.’
자리로 돌아와 얼핏 보기에 나른해 보이는 눈으로 사주를 경계하는 환인. 백려강은 그 모습을 곁눈질하다가 문득 이 남자의 목표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호위 의뢰를 거절하려는 기색이었다고 레심에게 들었다. 하지만 10금화라는 의뢰비에 생각을 바꿔서 의뢰를 받아들였다고.
‘돈에 휘둘리는 사람처럼은 안 보여. 이유가 있는 걸까.’
백려강은 의문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당신의 목표는 무엇이냐고.
“이 여정의 최종 목표라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생각지 못한 백려강의 악담에 환인은 그녀를 잠깐 돌아보았다.
아까 점심 휴식 때 한 꼰대질의 복수인 건가. 그런 것치고 백려강은 악담이 아니라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표정인데.
이런 생각을 한 것도 잠시, 환인은 너무나 당연한 듯이 꺼낸 백려강의 이야기에 한발 늦게 수상한 점을 눈치챘다.
어려운 일이라니. 내 고국이 어디인지 알고?
그 순간 하이에른=조드의 조언이 환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도시의 중추 권력마저도 자네를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힘. 그만한 힘을 기르기 전까지…… 종족 연합 주도에는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 좋을걸세.=
환인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제가 어떤 종족인지 알고 계셨군요.”
=그 때문에 후드 망토를 하고 다니신 것 아니었나요?=
혹시나 하던 백려강은 백려강대로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는 정말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사람이었어.
환인의 사고가 6급 삼림형 미궁에 처음 떨어졌을 때처럼 맹렬히 가속한다.
율캄에서부터 오늘까지 사람들의 반응과 태도를 빠르게 떠올려본 환인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백려강을 응시했다.
‘신분이 낮은 사람은 내가 이계인이라는 걸 알지 못해. 최소 호족급에서만 알음알음 퍼지고 있는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비밀리에 소환 의식을 치르는 건가? 예상대로 이계인을 소환한 뒤 외계인 취급하며 이 세상의 문화와 과학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쓰고 있는 식?
그렇다면 음식, 생필품, 장비의 품질과 문화 전반이 익숙하다는 게 완벽하게 설명된다. 하이에른=조드의 경고도.
‘죽일까.’
쿠우?
바로 옆에 있던 백려강은 물론 앞서가고 있는 레심도, 이실리테도 눈치 못 챌 정도의 아주 미약한 살기에 비상식량만 환인을 돌아보며 작게 운다.
여기서 백려강이 살아 돌아가서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면 피가죽 클랜이나 리아나린 상회가 쫓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찮고 성가신 일이 벌어진다.
죽인다고 해서 계약서에 문제는 없다.
지금 상황은 1번 항목, ‘미궁에서 을(환인)은 생명의 위협을 당하지 않는 이상 갑(백려강)의 신변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호위에 성실히 임한다.’에 위배되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여기서 둘을 죽이는 것은 안 된다. 레심의 어수룩한 활동 탓에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았다.
백려강이 이곳에서 실종된다면 호족이 미궁에서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눈치챌 테고 그 즉시 치밀한 수사망이 펼쳐질 것이다.
그리되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겠지.
일련의 생각은 백려강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르게 정리되었고 환인은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후드를 쓰고 다니는 이유는 귀찮고 성가신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제 정체를 유추하는 사람은 당신처럼 호족에 이르는 신분이 아니면 뛰어난 7급 직업자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런가? 하고 고개를 기울이던 백려강은 이어진 환인의 이야기에 안색이 파래졌다.
“그래서, 아가씨는 제 목숨을 원하시는 겁니까?”
=제, 제가 왜 그런걸 바라겠어요?! 절대 아니에요!=
“제게 경고를 해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제 신분 탓에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었지요. 아가씨가 방금 한 일련의 질문은 그 경고에 부합되는 이야기였습니다만…….”
종족을 숨기느라 후드를 쓴 게 아니냐는 질문. 종족이 드러나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백려강은 다급하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환인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
=그분이 어떤 경고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위험한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어요. 믿어주세요……!=
뒤에서 벌어진 작은 소란에 바귈을 해체하던 이실리테와 레심이 뒤를 돌아보았고, 레심은 백려강이 환인에게 안기듯 그의 손을 잡은 것을 보곤 엉뚱한 착각에 눈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왜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아.=
생각해보니 백려강도 의아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그런 식으로, 상대가 불편해할 방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런데 자신은 뭔가에 쓰인 것처럼 이실리테를 질투했고 그를 위협하는 듯한…….
‘……정신 침해!’
이유를 깨달은 백려강은 그 즉시 지팡이를 두 손으로 쥐고 정신을 집중했고, 환인은 순간 흑창으로 백려강의 목을 쳐 날릴 뻔했다.
지팡이로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고 인식, 초월적인 반사신경으로 반격하려 한 것이었다.
만약 수백에 이르는 영혼과 감응하며 감정의 일부가 변화했고, 꾸준한 명상과 정신집중 및 신체 단련으로 정신력을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백려강의 머리는 몸과 따로 떨어져 땅을 구르고 있었을 것이다.
레심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실리테는 환인과 몇 차례 싸움을 함께 한 경험으로 그것을 눈치챘다.
슬그머니 레심의 뒤로 반걸음 물러나 이형종 해체용 단검을 역수로 쥔다. 환인이 눈빛으로 지시하면 곧장 레심의 목에 단검을 꽂기 위해서였다.
그걸 간파한 환인은 레심 모르게 신호를 보내 아니라는 뜻을 전한 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려강은 자신을 공격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에 무언가를 걸고 있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쪽을 강아지의 애달픈 얼굴로 보고 있던 레심을 불러 물었다.
“레심 씨. 아가씨가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음, 정신 보호 계열 술법 같습니다.=
“……이름만 들어보면 미궁에서 굉장히 유용한 술법 같습니다만.”
그걸 왜 여태껏 안 쓰고 이제야 쓰는 거냐는 의미가 함축된 질문에 레심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정신을 보호하는 술법은 쉽게 쓰고 유지할 수 있는 부류가 아닙니다. 지속 영창이 필요하거나 그에 걸맞은 시약 재료가 필요하죠.=
레심도 당황한 상태였다. 여태까지 멀쩡해 보인 아가씨가 갑자기 자신에게 정신 보호 계열 술법을 걸고 있으니까.
술법을 거는 데 시간이 걸리는지 이마에 지팡이의 보석을 가져다 댄 백려강은 계속 입술을 달싹거린다.
녹색 보석에서 빛도 살짝 흘러나오기 시작해 백려강의 하얀 이마를 뒤덮어간다.
마침 잘됐다고 생각한 환인은 레심에게 아까 점심 휴식 시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으음. 부끄럽게도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방금 일도 그렇고 정신 침해에 정신력이 상당히 약해진 듯 하니 아쉽지만 그만 복귀하는 게 좋아 보입니다.”
=알겠습니다. 환인 님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레심은 16층부터 시작되는 삼림 층?과 대형 전이 마도기를 못 보는 게 아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환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미궁은 수없이 들어갈 거다. 자신의 아쉬움 때문에 아가씨에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언어도단.
그사이 환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레심과 백려강의 성격은 스사만큼이나 좋은 축이라는 것을 지난 6일간의 미궁 탐험으로 알게 되었지만, 마지막에 일어난 일이 그간 쌓아온 인연을 송두리째 무너트리려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술법을 거느라 대답이 미뤄진 상태. 마지막 질문에 백려강이 어찌 대답하느냐에 따라 벌어질 일이 정해질 것이다.
“…….”
갈린 선택지에서 백려강과 레심을 죽이는 쪽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최악의 상황만 가정된다.
사회 지도층, 지배계층은 자신의 권위를 도전받는 것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자녀가 아랫것들에게 살해당했다?
절대 참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범인을 잡아들이려 할 테고, 그것은 이 세상의 1/4이 적으로 변해버린다는 뜻이 된다.
말이 1/4이지 거의 세상 전부가 적으로 돌변하는 셈이다.
루크랑 고위 호족의 공적으로 지정된 현상수배 범을 4대 종족에서 내버려 둘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게 되면 이블 팩션이라는 세력으로 넘어가는 수뿐인가.’
그런 상황을 가정해보니 헛웃음만 나온다.
빌어먹을 놈들이 강제로 소환해놓고 죽이려 든다면 이쪽도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칠 수밖에 없다.
영혼을 말과 행동으로 성불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말과 행동으로 영혼을 혼재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환인이다.
‘죽을 때까지 수십만, 수백 만의 혼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면 세상을 뒤집어버리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러면 마왕으로 불리려나.
생각해보니 그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는 환인이었다.
사방이 적으로 가득한 세상. 죽기 전까지 마음껏 피와 살육을 저지를 수 있겠지.
그때 남쪽, 13층으로 내려가는 유일한 계단 쪽에서 횃불의 광원과 함께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통로를 나가 오른쪽을 돌아보자 회색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든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숫자는 8명. 거리는 대략 150m.
전원이 아우라를 몸에 두른 직업자다. 여기에 하나 더, 복장이 모두 통일되어있어 모험가나 탐험가처럼 보이지 않는다.
파티 구성도 전사와 투사는 1명씩이고 활을 든 엽사와 술사가 각각 3명씩.
구성도 탐험이나 모험과 전혀 맞지 않았다.
자신과 자신을 뒤따라온 비상식량을 확인하는 듯한 동선과 표정. 그리고 저자들이 입고 있는 가죽 갑옷의 배색에서 환인은 상대의 정체를 단박에 파악했다.
‘피가죽 클랜.’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는 격이다.
환인은 냉소를 지으며 허리춤의 단검을 움켜쥐었다.
[12층 지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