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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109화 (109/813)

〈 109화 〉 106 빛이 닿지 않는 미궁

* * *

이실리테가 괴물 지네의 체액으로 엉망인 위상석을 깨끗하게 닦는 사이 환인의 곁으로 이동한 레심이 입으로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환인 님의 방어술이 뛰어남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만, 가까이서 보았더니 그 훌륭함과 완성도는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사람을 상대로 하는 방어술과 이형종을 상대로 하는 방어술은 같지만 다르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아직 미숙한 제 눈에 환인 님의 방어술은 두 가지를 하나의 원류로 이루어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본 것이… 맞습니까?=

“잘 보셨군요.”

그런 적 없지만 설명을 길게 하면 자신만 피곤할 뿐이기에 짧게 대답하는 환인이다.

레심은 눈에 띄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냐고 묻자 레심은 부러움과 공경이 선명한 얼굴로 대답한다.

=저에게 무술을 가르쳐주신 사부님은 6급 검전사이십니다. 그분도 같은 이유로 무술을 연마하고 계신데, 제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사부님의 경지는 환인 님의 발끝에도 닿지 못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괴물 지네를 썰어버리는 환인을 보기 전까지 레심은 사부가 그 분야에서 최고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환인의 전투를 본 순간 순수하게 알아차리고 말았다.

사부의 실력은 그저 흔하디흔한 수준이라고. 사람을 상대하면서 익힌 방어술의 묘리 일부를 따와서 이형종과 괴물을 상대할 뿐이었다고.

=사부님이었다면 방금 괴물 방의 괴물 지네 정도는 단숨에 해치웠을 겁니다. 그만한 힘과 위상력이 있으시니까요. 하지만 위상력을 쓰지 않고 상대하라고 하면…….=

사부에 대한 예우 때문에 차마 말을 맺지 못하겠는지 끝을 흐리는 레심이다.

레심은 환인이 별말을 하지 않고 작게 웃음 짓는 모습에 용기를 내서 물었다.

=환인 님. 무례한 부탁임을 알고 있지만, 괜찮으시다면 제게 약간의 가르침을 내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늑대 귀를 쫑긋 세우고 초롱초롱한 눈을 한 레심의 부탁은 10대 후반 소년의 순수함이 느껴지는 부탁이었다.

환인은 이실리테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이실리테도 환인을 보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

멋진 회색 늑대의 두상을 하는 레심을 가만히 바라보던 환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레심의 쫑긋 솟은 늑대 귀가 풀죽은 듯 뒤로 눕는다.

“저는 누구를 체계적으로 가르칠 만큼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약간이라고 해도 그게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되는군요.”

=어…….=

“대신 이렇게 합시다. 이실리테에게 레심 씨가 익히고 있는 검술의 기초를 전해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당신과 대련해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능력이 된다면 자신과 대련에서 방어술을 재주껏 익혀라. 대신 너는 이실리테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사실 이런 데서 기술을 가르쳐달라는 요구를 하는 레심이 이상하고 무례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두고 뭐라 하지도 못하는 게, 레심은 아직 어린데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좋은 집안의 막내.

그런 사람에게 꼰대질하기 보다는 적당한 딜을 제안하는 쪽이 보기에도 그럴싸하고 괜찮는 방법이다.

레심과 이실리테는 환인의 제안에 살짝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사실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환인은 그동안 레심의 전투를 보면서 그가 익힌 운신법, 보법, 파지법, 검술을 어느 정도 읽어냈고 그걸 고스란히 이실리테에게 전수해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심은 이 세상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호족 가문의 직계의 호위다.

그런 그가 익혔다면 틀림없이 가문이나 명망 있는 무술일 텐데 도적 출신인 이실리테가 익혔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는 일.

=……알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기초를 전부 이실리테 양에게 전수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일과에 대련과 지도라는 항목이 한 가지가 더 추가되긴 했지만, 미궁 탐험이라는 원래 목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대신 여행 나온듯하던 이전의 분위를 싹 걷어내고 좀 더 긴장을 부여잡으며 탐험이라는 본연에 충실히 행동하기 시작했다.

괴물 방을 만난 덕분에 자신들이 3급 술사와 4급 전사라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 미궁에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장비는 환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다.

백려강의 일견 평범해 보이는 가죽 갑옷은 온갖 내성 저항과 물리 저항 술법 부여로 떡칠 되어있었고 지팡이는 무려 6급 위상석인 풍마석을 가공해서 박아놓은 지팡이였다.

평소 위상력을 충전해놓으면 위상력이 다 바닥난 상황에서도 풍술법을 쓸 수 있다고.

레심의 방어구 또한 생김새와 색만큼이나 비싸고 자기 역할에 충실한 무구였다.

온몸을 촘촘하게 보호해주는 것은 물론 물리 피해 저항과 술법 피해 저항 옵션 두 가지에 집중한 덕분에 백려강의 방어구보다 더 뛰어난 방어력을 지녔다.

9층 괴물 방에서 2급 3마리, 1급 10마리 정도를 상대하며 상처 하나 없었던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런 두 사람이 방심하지 않고 주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환경을 섬세하게 파악하며 천천히 탐험률을 올려 나가니 위험성이 대폭 감소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덕분에 진행 속도는 더 느려졌지만, 안정성은 물론 레심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이실리테의 미궁 경험치도 점차 쌓여나가는 게 환인의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사흘이 더 흘러 미궁 진입 6일차가 되었을 때, 일행은 12층을 탐험하고 있었다.

=지하 미궁은 대부분 5층 간격으로 이형종이나 미궁의 성질이 변화합니다. 지하 1층부터 지하 5층까지는 1급 이형종이 출몰하고, 6층부터 10층까지는 1급과 2급 이형종이 출현하며 11층부터 15층까지는 2급과 3급 이형종이 출몰하죠.=

=층수가 낮아질수록 등급이 낮은 이형종도 적게 나오고요?=

=예. 계층이 갈리기 직전의 층은 그 계층의 급과 같은 등급의 이형종만 나오게 되죠.=

이 때문에 11층부터는 레심과 백려강도 소풍 나온 듯한 감각은 버릴 수밖에 없었다.

3급 이형종은 그들로서도 쉽게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강한 적이었으니까.

3급 젤라틴 큐브는 그 크기가 사람을 간단히 삼킬 정도였고 3급 괴물 지네는 대형으로서 몸길이가 4m에서 7m까지 다양했다.

비명 괴물, 쉬리커는 덩치가 성인 여성 정도로 커졌고 팔도 5개, 머리도 두 개가 될 정도로 이형종의 티가 강하게 드러났다.

3급 괴물 거미는 말 그대로 사람도 잡아먹을 수 있는 사이즈였고.

=그리고 이실리테 양도 보셨을 테니 아시겠지요. 미궁에는 괴물방, 이른바 몬스터 하우스가 존재합니다.=

괴물방은 해당 층에 비해 최대 한 등급 높은 이형종도 나올 수 있어 마주칠 경우 무척 위험한 상황이 연출된다.

크기도 있어 소형, 중형, 대형으로 나뉘는데 주로 2계층부터 나온다고 알려져 있다.

8층 이상에 다른 파티가 거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하루하루 미궁 이형종을 잡아 벌어먹고 사는 노동자들이 위험을 무릅쓸 리가 없으니까.

=괴물 방의 크기는 방에 있는 이형종의 숫자로 결정됩니다. 소형은 대충 10마리 내외. 중형은 30~40마리 내외이며 대형은 40마리를 넘어가면서 종이 다른 이형종도 섞여 나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형화된 미궁의 괴물 방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미궁 중에서는 돌연변이가 존재하는데 이런 돌연변이 미궁은 후천적으로 발생한다고 설명하는 레심이었다.

=돌연변이는 짧은 시간에 자신의 등급보다 더 높은 침입자에게 여러 번, 자주 돌파당한 미궁이 일으킵니다. 특징이라면 격심한 계층간 차이며 등장 이형종 컨셉도 뒤죽박죽이 되기에 굉장히 위험해지죠. 가장 약한 1계층에 3계층의 이형종이 등장하는가 하면 화염 계층이 갑자기 혹한 계층으로 변화하는 예도 있습니다.=

=와아. 그런 곳에서 대형 괴물 방을 만나면…….=

=6급 돌연변이 미궁일 경우 저층 괴물 방에 7급 이형종도 나올 수 있는 겁니다. 그런 방을 만나면 짐승신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구나 생각해야지요.=

=으아.=

하지만 생각 외로 위험한 경우는 별로 발생하지 않는다.

애초에 돌연변이 미궁에 입장하는 이유는 그 미궁을 없애기 위해서다. 돌파를 목표로 삼고 파티를 모집한 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입장하니 저층에서 괴물 방을 만나더라도 문제는 그다지 생기지 않는다고.

환인은 점심 휴식 시간 중에 레심이 이실리테에게 미궁 지식을 전수하는 것을 들으며 왼쪽 팔뚝을 쓰다듬었다.

사흘 전 거래를 통해 레심은 이실리테에게 검술 기초를 지도하는 한편 자신이 익힌 미궁 지식도 전수하기 시작했다.

­ 환인 님과 대련에서 제가 얻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검술 기초만 지도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한 듯 하니 허락하신다면 재량껏 지식도 전수하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미궁 교육은 이실리테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 무작정 힘으로만 대검을 휘두르던 모습에서 지금은 어느 정도 자세와 각, 보법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봤자 환인의 눈에는 1초면 목을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빈틈 투성이었지만, 일단 성장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점심의 훈련을 시작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미궁 지식 전수가 끝났는지 이실리테가 중철 대검을 쥐고 일어선다. 그리고 레심의 지시에 따라 대검을 장검처럼 휙휙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실리테 양의 장점은 그 강력한 힘입니다. 어쭙잖은 기예를 부리기보단 바위를 쪼개버리는 힘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겁니다.=

=넷!=

=상대가 1m짜리 장검을 휘두를 때 이실리테 양은 2.5m짜리 대검을 휘두릅니다. 1.5m 리치 차이는 근접전의 세계에 15m만큼이나 차이 납니다. 그점을 명심하고 적의 공격을 끝까지 보면서…….=

쿠우.

훈련 장면을 지켜보던 환인은 비상식량이 답답해하는 소리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려강이 비상식량을 품에 끌어안고 매끈한 등깃털을 쓰다듬으며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게 미궁의 영향인가. 기다리던 현상이긴 하지만…… 좋지 않군.’

우울은 모든 정신병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감정. 저대로 두면 미궁 정신 침해 때문에 100% 문제가 발생할 거라고 환인은 직감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호위 임무는 실패나 다름없어진다. 그녀의 곁으로 자리를 옮긴 환인은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비상식량이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네? 앗, 미안해요.=

꾸으으으~

드디어 풀려났다는 듯 바닥에 내려선 비상식량이 양 날개를 활짝 펴고 머리까지 쭉 뻗은 채 기지개 켜듯 부르르 떨다가 파다닥 짧게 홰를 쳤다.

그리고 쪼르르 움직여 환인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적거린다. ‘이상한 여자한테 붙잡혀서 힘들었어!’라고 하는 것처럼.

이 일련의 행동에 백려강이 더욱 쓸쓸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표정만 보면 세상에 내 편은 한 명도 없다는 듯한 우울이 느껴진다.

“외로우십니까.”

=외롭다는 감정하고 슬프다는 감정하고 부럽다는 감정이 혼돈처럼 몰아치고 있네요…….=

“멋지군요.”

=……멋지다구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의 백려강에게 환인이 흐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감정을 겉핥기로나마 맛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멋진 일이지요.”

=…….=

“숨 막힐 정도로 외롭고 사무쳐서 눈물도 나오지 않을 만큼 슬프며 내장이 꼬일 정도로 부럽다는 감정을 모두 느끼고 있다면 겉으로 표시조차 낼 수 없습니다.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꼬이고 마음은 영혼이 바닥없는 암흑 속에 침잠해가는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으니까요.”

백려강은 자신이 방금까지 느끼고 있던 감정을 몇 배나 웃도는 무거운 표현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화…… 환인 님은 그런 감정을 직접 경험해보신…건가요?=

조심조심 머뭇머뭇하며 질문한 백려강은 대답 대신 아무런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웃음을 받았다.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닌 얼굴에 오싹 소름이 돋는다. 사람이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책에서는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고 나면 다른 감정이 탈색된 것처럼 옅어진다고 하던데 그런 현상인 걸까.

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경험이었기에?

물론 아니었다. 환인은 입을 열었다간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대답하지 않았을 뿐. 그런 경험도 해본 적 없다.

“레심 씨가 아가씨를 상대해주지 않아서 토라진 겁니까? 아니면 이실리테의 자유가 부러워서?”

=……레심은 소꿉친구일 뿐이에요. 남매 같은 거지요. 그리고…… 네. 맞아요. 이실리테가 너무 부러워요.=

백려강은 머릿속을 점령해가는 의문과 호기심을 한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미궁을 내려갈수록 이실리테가 점차 부러워졌다.

자신은 이제 우울의 절벽으로 내려가는 길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녀는 빛이 가득한 저 대지를 사모하는 남자와 함께 걸어갈 수 있을 테니까.

그 와중에 하고 싶은 것도 하고 배우고 싶은 것도 배우고 보고 싶은 것도 봐가면서 자신을 단련하고 성장해가겠지.

하지만 나는 얼굴도 모르는 호족 가문의 남자와 결혼해서 인형처럼 웃고 인형처럼 말하며 그 집의 후계자를 낳는 가축이 되겠지…….

“이실리테는 태어났을 적 부모에게 버려진 이후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빈민가의 고아들과 뒹굴며 도둑질로 목숨을 연명해왔습니다.”

=……!=

“죽음의 길목에서 운 좋게 직업자로 각성했지만, 삶은 잘 풀리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삼류 용병대에서 몇 년을 구르다가 겨우 신생 용병단을 만들어 독립했더니 상류층과 기득권들에 이용만 당하다 도적단으로 전락했다더군요. 마지막에는 그런 도적단에서도 배신당해 내쳐졌고요.”

자신의 고민이 한 방에 날아가 버리는 엄청난 인생의 요약에 백려강에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런 이실리테의 눈에 아가씨는 빛 그 자체로 보일 겁니다. 지금도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모, 몰랐어요…….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는데…….=

백려강은 설마 저 밝은 아가씨에게 그런 암울한 과거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그저 어쩌다 도적단에 투신해서 도적으로 활동했을 거라는 상상을 한 정도? 그러다 환인 같은 남자를 만나 갱생해서 앞으로 즐겁게 살겠구나, 이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얼굴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백려강을 못 본 척하며 환인은 말을 이었다.

“아가씨가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야 앞으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고 애를 낳으며 살아야 할 텐데 미래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요.”

남자가 나이는 많지나 않을지, 성격은 멀쩡할지, 이상한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닐지, 시댁 식구는 정상일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걱정이다. 두렵고 무섭다.

“그러니 앞날이 어둡게 느껴질 법도 합니다.”

환인의 이야기를 들은 백려강은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의 고민을 이렇게 공감해준 사람이 있던가.

어머니도, 오라버니와 언니들마저도 ‘복에 겨운 소리 하지 마라.’ ‘가문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라고 나무라기만 했었다.

그런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완벽하게 공감해주다니.

하지만 부끄러워졌다. 얼굴도 들지 못할 만큼 창피해졌다.

자신의 고민은 오라버니의 말대로 ‘행복에 겨운 어린애’의 투정이었다. 가출을 감행한 것마저도 부끄러워 몸서리쳐질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는 법입니다. 그게 평범한 사람이라면 정상적인 반응이지요.”

=…….=

“하지만 아가씨는 가지지 못한 것보다 가진 것이 더 많은 사람입니다.”

이해하지만 이 사람도 날 비난하는 거네. 하긴 나라도 그럴 거야. 한평생 고생이라곤 모르고 자란 여자의 어린애 같은 투정이었으니까.

그리 생각하고 있던 백려강은 이어진 환인의 이야기에 머릿속에서 바람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하지 못 할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겁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주어진 돈을 쓰고 한 다리를 건너면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눈높이를 바꾸면 시야가 바뀌듯 생각을 바꾸면 세상도 바뀝니다. 지식은 곧 힘이며 경험은 무기가 됩니다.”

환인이 자신과 눈을 마주친다. 어쩐지 감정이 흐릿한 그 눈 속에 강한 의지가 보여 백려강은 등줄기가 짜릿하게 서는 것을 느꼈다.

“세상을 마냥 원망하며 세월을 낭비하기보다 그 시간에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아보고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요. 당신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미래…….=

짧게 중얼거리는 백려강의 표정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서서히 걷혀나가는 것을 본 환인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호위자 일도 간단한 게 아니군.’

정신 침해.

미궁 자체가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사항이기도 하고, 환인은 그러한 현상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었다.

정신 침해는 미궁의 급이 높을수록 위력이 강해진다. 그런 정신 침해를 막기 위해서는 마음을 강하게 먹거나 정신력을 키우는 방법뿐.

두 가지 모두 사람이 평범하게는 어찌할 수 없는 부류라 미궁에 얼마나 잘 버틸지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인식이 박혀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기준이 잡혀있으니, 해당 미궁의 등급과 같은 등급의 직업자는 보통 15일에서 20일 정도가 미궁에 머무르는 한계 시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3급 미궁에 3급 직업자가 들어오면 최대 20일 정도 버틴다는 이야기. 그 이상이 되면 환각을 보든 착란을 일으키든 정신이 나가버리든 정신 상태가 급속하게 나빠진다.

물론 최대 15일에서 20일이라는 거지 최소는 사람마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제각각이다.

예를 들어 좀전의 백려강처럼 부정적인 감정에 잠겨있으면 미궁 침해율이 급속하게 늘어나는 식.

‘감정을 케어해주었지만 정신력을 낭비했으니 15일 풀타임을 머무르지 못하겠군. 남은 건 사나흘 정도일까.’

6일을 보냈으니 앞으로 4일, 올라가는 길을 생각하면 2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레심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겠…… 응?’

쿠우, 쿠으! 꾸, 쿠! 엣, 쿠엑!

환인은 갑자기 앞으로 걸어 나가며 팝핀poppin을 추는 것처럼 움찔거리는 비상식량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녀석은 또 왜 이러지.’

동물한테도 정신 침해가 일어나는 건가? 미궁 짐 운송용 쿠에에게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그 생각을 하느라 백려강이 옆에서 미묘하게 달라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환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비상식량에게 다가갔다.

“비상식량, 갑자기 왜 그러는 거냐.”

쿠우웃, 쿠엑! 꾸, 윽!

움찔움찔하면서 움직이는 게 정상처럼 보이지 않아 영혼 시야로 비상식량의 상태를 살펴봤지만, 색계통에 이상은 없었다.

훈련하던 이실리테와 레심도, 표정을 고친 백려강도 모여든다.

=주인님? 비상식량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나도 모르겠군.”

=레심, 해독제와 질병치료제를 꺼내주세요. 혹시 모르니 먹여봐야겠어요.=

=예? 예. 그런데 이상하군요. 아까까지 멀쩡했…… 음!=

=앗.=

“…….”

다들 걱정하는 가운데 비상식량의 몸이 환한 빛에 감싸였고, 환인은 그제야 걱정을 풀고 빛 덩어리가 된 비상식량을 응시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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