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105 빛이 닿지 않는 미궁
* * *
=크기가 작군요. 2급 정도겠습니다.=
=이 정도면 얼마나 해요?=
이실리테의 질문에 레심이 간단히 =13은화 정도일 겁니다.=라고 대답해주는 사이 환인은 이실리테의 손에 들린 위상석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핏빛 돌멩이, 진주색 돌멩이와 같은 물질이 틀림없다.’
위상석의 존재는 환인도 알고 있었다.
위상석.
괴물의 체내에서 발견되는 경도가 일정 이상인 물질의 일종으로 지구의 전기처럼 광범위한 영역에서 사용되는 에너지의 원료다.
마도구, 마도기의 원료이자 에너지 보충제이며 가공해서 무구에 부착하면 특수한 효과가 발동하기도 한다.
물약이나 제약의 재료로도 쓰이고 특수한 기법으로 갈아서 비료처럼 뿌리면 해당 지역의 생산력 증대 효과가 나오기도 한다.
스사에게 들은 설명과 웨이포드에서 기초 상식을 공부하며 알게 된 지식이지만, 그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위상석 같은 전문적인 지식보다 일반 상식을 배우는 게 먼저였으니까.
그랬기에 환인이 위상석을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헌데 그 형태가 자신이 소지 중인 진주색, 핏빛 돌멩이와 같은 물건이다.
“…….”
이실리테에게 위상석을 건네받은 환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선명한 녹색 위상석을 살폈다. 그러다가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파란 위상석을 쥐어본다.
찌릿 몸 안의 훈기가 자극 받는 느낌과 함께 피부 위로 약간 미끄덩한 감각이 퍼져나갔다.
마치 바디 오일을 몸에 바른 듯한 기묘한 감각.
주먹을 쥐었다 펴보고 피부를 만져봐도 미끄러운 감각은 없다. 그냥 평범한 피부다. 하지만 피부 위를 뒤덮은 듯한 미끄러움은 계속 느껴지고 있었다.
이 녹색 위상석이 어떤 효과인지 알 수는 없지만, 환인은 자신이 보유 중인 진주색과 핏빛 돌멩이가 위상석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계란 크기의 위상석이 효과에 따라 수십 금화에서 수백 금화까지 차이 난다고 했었지.’
진주색 돌멩이를 주고 간 땅물개. 핏빛 돌멩이를 흘리고 간 바르툴.
개체의 강함은 위상석의 등급과 관계가 없다는 걸 눈치챈 환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일종의 사리인가.”
=네?=
자신을 돌아보는 이실리테를 환인도 응시했다.
우르거와 싸우기 전에 스사에게 핏빛 돌멩이를 보여주려 했었다. 그때 이실리테는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붕붕 흔들면서 그러지 말라고 했었지.
위상석을 이실리테에게 돌려주며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자 이실리테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시선을 위상석에 주었다가 다시 쳐다봤지만, 이실리테는 이해를 못 하고 눈을 깜빡거릴 뿐이다.
“…….”
눈치는 지식과 관계없는 분야다. 오직 경험으로밖에 키우지 못하는 스테이터스인만큼 환인은 이실리테의 반응을 이해해주었다.
그리고 일행이 이동을 시작했을 때 환인은 이실리테를 불러 조용히 물었다.
“그때 넌 이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군.”
회색 가죽옷 안쪽의 핏빛 돌멩이를 만져 보이며 말하자 그제야 알아차린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인님이 스사를 믿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숨기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러더니 환인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핏빛 위상석은 생명과 관련된 효과 위주라서 엄청나게 비싸요. 그만한 크기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비쌀 테니까 꼭꼭 숨겨서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마세요.=
“……알았다.”
이실리테를 대열로 돌려보낸 환인은 그녀의 뒷모습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엄청나게 비싸다는 말은 적어도 금화 단위일 터.
환인도 이제 이 세상의 물품 가치에 어느 정도 눈이 열린 만큼 알 수 있었다.
그저 그런 수준의 피로 해소와 자연 회복력 향상 효과를 준다고 생각했던 핏빛 돌멩이는 돈 많은 부자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싶어 하는 물건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도적 출신인 이실리테는 핏빛 돌멩이의 가치를 레힐 마을의 여관에서부터 눈치챘을 것이다.
그날 객실에서 이실리테와 단둘이 있었을 때는 핏빛 돌멩이가 옷 밖으로 드러날 만큼 가벼운 차림이었으니까.
‘확실히. 그날부터 이실리테의 태도가 바뀌었었지.’
=이실리테. 녹색의 희귀 쿠에를 키워서 미궁 탐사용 운반 역으로 데리고 다니는 건 너무…… 비생산적이지 않나요?=
=건방지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주인님은 대단한 모험가나 탐험가가 되실 거예요. 그런 분이면 녹색 쿠에를 운반 역으로 데리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걸요?=
=그건 저도 공감하지만요……. 혹시라도 미궁에서 잃기라도 하면 가슴 아플 텐데.=
=삶과 죽음은 언제나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잖아요? 언제 어떤 죽음이 찾아올지 모르는데 멀리 두고 아끼기보단 함께 하면서 추억을 더 쌓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결정은 주인님이 하실 테지만 말이에요.=
앞에서 백려강과 속닥거리는 이실리테를 보고 있자니 속에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적어도 지구에 있을 때의 자신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큰 이득이 눈앞에 생기면 언제고 배신하는 게 인간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믿고 있던 인간에게 배신당해 불필요하게 감정을 소모하기보단 아무도 믿지 않는 게 편하다.
‘이 세상에 떨어진 지 이제 반년 정도인가.’
지구에 있을 때의 자신이었다면 이실리테가 도적으로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순간 인맥 형성 가능성은 0이 되었을 텐데.
만약 스사가 없었다면 충돌이 일어났을 것이고, 오늘 3층에서 마주쳤던 인간 부스러기들처럼 이실리테를 포함해서 전부 도륙을 내버렸을 거다.
그런데 우연에 우연이 겹치다 보니 이실리테와의 관계가 여기까지 왔다.
‘나도 많이 변했군.’
피식, 소리 나게 웃었다.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이실리테를 믿어봐야겠군. 적어도 그녀가 배신하기 전까지는.’
일행은 거침없이 미궁을 돌파했다.
7층으로 내려온 일행은 종합운동장만큼이나 넓어진 동굴을 전체적으로 둘러보며 마주치는 이형종, 괴물 지네와 괴물 거미, 쉬리커, 젤라틴 큐브 등을 사냥하고, 밖에서는 볼 수 없는 미궁 특유의 환경을 구경하며 미궁 탐험의 묘미를 만끽했다.
물론 그런 것은 레심과 백려강, 이실리테 뿐이었으며 환인은 다른 것보다 이형종에 좀 더 관심을 쏟았다.
‘전투의 흥분을 맛보려면 최소 5급 미궁은 되어야겠군.’
만약 우르거 같은 괴물이 3마리, 4마리씩 몰려나온다면…….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슬슬 야영지를 찾아야겠습니다.=
불빛이 어렴풋이 보이는 곳은 다툼 방지를 위해 일부러 피하며 7층을 탐험하던 중 레심이 조금씩 빛이 약해지는 빛 막대를 보며 말했다.
=에너지 잔량에 따라 불빛도 약해지나 보네요?=
=예. 이건 한 번 충전하면 17시간 정도 지속되는 브랜드인데 3시간 정도 남았을 때부터 빛이 서서히 약해집니다. 미궁에 입장한 지 14시간이 지났으니 바깥도 밤이 되었겠지요.=
일행은 지도를 보고 적당히 폐쇄된 통로를 찾은 뒤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불침번은 백려강 씨와 레심 씨가 초번, 제가 중번, 이실리테가 말번으로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일행 중 무직자는 환인뿐인 걸로 알고 있는 레심이 살짝 걱정을 드러내며 묻는다.
아무래도 체력적인 면에서는 무직자보다 직업자가 나으니까.
“군 복무 경험이 있어서 불침번은 익숙합니다.”
=아.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내일은 제가 중번을 서고 아가씨들이 말번을, 환인 님이 초번을 맡는 것으로 하지요.=
그렇게 간단히 불침번 순서를 정한 레심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몇 가지 도구를 꺼내 바닥에 설치한다.
하나는 설치한 지점으로부터 반경 7m 안에 있는 사람, 동물의 피로를 조금 더 빠르게 회복시켜주는 마도구.
‘이건 50금화가 넘을 텐데.’
다른 하나는 침낭 밑에 깔아놓으면 훈훈한 열기를 뿜어주어 따스하게 잘 수 있게 해주는 마도구.
‘이것도 온도 조절 기능이 있는 고급형이군. 1개가 7금화 정도였던가’
마지막은 냄새를 지워주는 소취?? 마도구.
‘이것도 12금화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텐트도 준비했지만 지하 미궁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니 설치하지 않겠습니다. 아가씨, 괜찮겠습니까?=
=네. 저도 이 침낭이면 충분해요.=
저 침낭도 부여 비술협회 직속 마도 상점에서 본 적 있다. 피로회복과 체온 조절, 보습, 보온 효과가 있는 최고급 야영 침낭이다.
가격은 피로회복 효과 덕분에 끔찍하게 비싸서 38금화 가량.
환인은 부자라는 것을 숨길 기색이 없는 레심과 백려강을 보면서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정말 자신이 아닌 다른 직업자를 구해 왔다면 문제가 생겨도 단단히 생겼을 모습이 아닌가
길거리에서 보면 몇 번이나 뒤돌아볼 정도의 미녀인 백려강. 그리고 야영용 마도구만 다 합쳐도 수백 금화는 되는 물건들.
=와, 진짜 냄새가 안 나네.=
이실리테의 감탄사에 그쪽을 돌아보니 세 개의 열판 플레이트에 냄비 하나와 프라이팬 두 개를 올려놓고 요리 중인 이실리테가 있었다.
=가까이서 맡으면 나긴 할 겁니다.=
=음음. 가정용 마도구를 미궁 탐험용으로 개조한 건가 보네요. 이런 건 비싸겠죠?=
=그, 글쎄요? 가문의 창고에 있던 것을 집어 온 터라…… 가격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못해도 금화 10개씩은 할 거 같은데. 레심 씨, 조심해야겠어요.=
=예? 뭘 말입니까?=
=레심 씨가 꺼낸 마도구는 전부가 굉장히 비싸 보이는걸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검은 욕심을 품을 수도 있어요.=
=아.=
그제야 깨달은 듯 레심이 얼빠진 소리를 낸다.
=물론 우리 주인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니까 걱정은 안 하셔도 되지만요. 다른 사람한테는 될 수 있으면 안 보이는 게 좋을 거예요.=
=하하…….=
저녁은 이실리테가 솜씨를 한껏 발휘해(식재료는 물론 조미료도 백려강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잘 구운 송이버섯 인간 구이, 하얀 빵조각을 첨가한 포타주, 고기 야채 볶음을 만들었고, 백려강과 레심은 물론 환인도 만족하며 저녁을 즐겼다.
그 후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가진 뒤 본격적으로 잠자리에 들기 전, 레심이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냄새를 지워주는 마도구 덕분에 냄새를 맡고 다가오는 이형종은 없을 테지만, 미궁을 정처 없이 떠도는 로머가 우연히 접근할 수 있는 만큼 불침번은 이상함을 눈치채면 일행을 모두 깨워야 합니다.=
환인에게는 삼림형 미궁에서 수십 일의 밤을 보낸 경험이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레심의 의도에 따라주었다.
그렇게 미궁에서의 첫날밤을 문제없이 보낸 일행은 야영지를 정리했고.
=자고 일어났는데도 어둡기 그지없으니 신체 리듬이 깨지는 느낌이군요.=
=정신적으로 피로가 생기는 느낌이네요.=
=뜨거운 수프로 아침 식사를 하면 조금 정신이 들 거예요.=
아침으로 야채 스톡stock을 풀고 송이버섯 인간 살 조각을 실처럼 가늘게 뜯어서 토핑한 맑은 수프와 백려강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낸 포실포실한 밀빵으로 식사를 마쳤다.
=확실히 뜨거운 수프가 들어가니 정신이 번쩍 듭니다. 감사합니다, 이실리테 양.=
=고마워요, 이실리테. 덕분에 만족스러운 아침을 먹었네요. 하지만…… .=
수프 두 그릇에 빵 세 개도 부족해 육포를 꺼내 먹는 환인을 보며 놀라워하던 백려강은 이실리테를 돌아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실리테도 어느샌가 한 손에 커다란 육포를 들고 뜯어먹고 있었던 것.
=저, 환인 님. 저도 조금만…….=
레심도 백려강의 눈치를 보면서 환인에게 육포를 얻어먹는다.
아침을 저렇게나 먹는다는 것은 순수한 아가씨였던 백려강에게 놀랍다 못해 걱정되는 일이었기에 환인과 이실리테를 보며 걱정을 드러냈다.
=아침을 그렇게 무겁게 드시면…….=
=으응. 아가씨, 원래 전사들은 식사를 든든하게 먹어둬야 해요. 그래야 힘을 쓰죠.=
=그, 그런가요?=
=네.=
그렇다고 해도 너무 많이 먹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본인이 괜찮다는데 계속 참견하는 것도 실례여서 입을 다무는 백려강이었다.
8층으로 내려온 일행은 작은 마을만큼이나 넓어진 8층을 수색하면서 채굴 포인트를 발견, 빛이 닿지 않는 미궁의 특산물이라 불리는 어둠 결정도 채굴해보고 미궁 구석에 작게 핀 미궁 이끼도 채집해보고 벽을 타고 흘러내려 고인 물웅덩이 속의 작은 미궁 물고기도 구경했다.
중간중간 나타난 이형종과 전투에도 시간을 쓰며 마을 넓이만 한 동굴을 돌아다니다 보니 꼬박 하루가 걸렸다.
3일차는 9층에서 시작했다.
1급 이형종이 거의 출현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7층이나 8층과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백려강과 레심, 이실리테는 미궁 탐험에 흠뻑 빠져든 터라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인터넷을 알고 있는 환인에게 빛이 닿지 않는 미궁은 흥밋거리라고 할만한 게 없는 지루한 곳이지만, 반대로 자극적인 유흥이랄게 없는 세상에서 자라온 레심과 백려강, 이실리테에게는 그야말로 모험 그 자체.
하지만 환인은 속으로 지루해할지언정 겉으로는 완벽하게 호위를 수행했다.
고작 며칠의 미궁 탐사 호위에 10금화나 받는다. 지루함 정도는 돈의 힘으로 해결된다.
그렇게 9층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레심과 백려강을 호위하던 중 환인 일행은 거의 40m에 달할 정도의 넓은 공터에서 40마리가 넘는 대형, 중형, 소형의 괴물 지네 떼와 마주치게 되었다.
=어…….=
=바닥이 이상해요.=
환인을 제외한 일행은 처음에 검은 바닥이 살아서 움직이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갑자기 비춰진 불빛에 흥분한 괴물 지네 떼가 달려들 때도 곧장 반응하지 못했다.
=……!?=
=하읏……!=
아는 사람은 지네가 얼마나 빠른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지네가 60cm, 1.9m, 4.7m 정도로 커지면 평범한 사람은 쫓지도 못하는 속도를 내게 된다.
거기다 수십 마리의 지네가 수천 개의 다리와 길고 번들거리는 몸통을 꾸물거리는 그로데스크한 광경은 엄청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
환인은 즉시 파티의 상태를 파악했다.
범위 공격으로 강한 공격력을 발휘해야 할 백려강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 탓에 굳어버렸다.
레심은 배우고 훈련한 게 있어 그 징그러운 광경에도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방패를 내세웠지만, 몰려드는 괴물이 너무 많은데다 급작스러운 습격에 머리가 꼬인 듯 동작이 매끄럽지 못하다.
유일하게 이실리테만 중철 대검으로 휩쓸기를 하려 준비하는 중이지만…….
‘안돼.’
전열의 레심이 어중간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제 위력을 내지 못할 거라는 게 환인의 눈에 훤히 보였다.
환인은 이실리테의 어깨를 짚어주며 그녀를 지나쳤다.
“이실리테. 백려강 씨와 물러서서 그녀를 지켜라.”
=네!=
환인이 창을 들고 걸어나는 모습에 이실리테는 즉시 백려강의 허리에 팔을 감아 품에 안는 동시에 뒤로 훌쩍 물러났다.
쏴쏴쏴쏴쏴…….
=이놈들아! 여기다!!=
캉캉캉!
한발 늦긴 했지만 정신을 차렸는지 레심이 검자루로 방패를 쾅쾅 두드리며 괴물 지네 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레심 씨, 자리를 만드십시오.”
동시에 환인의 목소리를 듣고 어그로가 잡힌 괴물 지네 13마리가량을 끌고 옆으로 이동했다.
레심이 만들어낸 날카로운 소음에 정신을 차린 듯 백려강도 지팡이를 들어 올렸지만, 그전에 앞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광경에 입을 벌리고 말았다.
=세상에.=
환인이 흑창을 휘두를 때마다 괴물 지네가 2마리, 3마리씩 토막 난다.
마치 괴물 지네가 환인의 창에 베이기 위해 달려드는 것만 같은 모습.
불빛에 이끌리는 나방처럼 환인의 창에 몸을 던지는 모습도 충격이지만 그러한 환인의 동작도 이해가 안될 만큼 평온하다.
가문의 창전사들 훈련을 몇 번 구경한 적 있는 백려강은 그들의 동작이 얼마나 힘차고 강하고 억센 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뭐지? 산책 나온 것처럼 평온하잖아. 저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키시시시식!
그러던중 길이만 5m에 달하는 대형 괴물 지네가 몸을 일으켜 환인을 덮치려 하는 장면에 놀라 움찔,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언제 저기로 돌아가셨지?’
한 번 눈을 깜빡인 사이 환인은 오른쪽으로 다섯 발자국 정도 이동한 상태였고 대형 괴물 지네는 체절이 세 군데 정도 절단나 허공에서 쏟아지는 중이었다.
전투는 길지 않았다.
30마리가 넘는 크고 작은 괴물 지네는 환인이라는 벽을 넘지 못해 모두 토막 나 죽어버렸고, 환인은 창을 세우고 레심이 열세 마리의 괴물 지네를 상대로 분투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 모습만 보면 전투를 치른 사람 같지 않은 담백한 모습.
백려강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레심이 어째서 그를 금화 10닢까지 지불해가면서 호위로 고용했고 존대해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리고 이실리테가 말했던 것도 백려강은 어느 정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강한 사람일수록 강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 비범한 사람일수록 범상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생각해낸 것이다.
=아가씨!=
괴물 지네의 체액을 뒤집어쓴 레심이 달려와 백려강을 살핀다.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곳은?=
=환인 님이 모두 막아주셨고 이실리테가 보호해줘서 괜찮아요.=
백려강의 이야기에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환인을 돌아본 레심은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선을 그은 것처럼 수십 마리의 괴물 지네가 그 선 근처에 모조리 죽어있는 광경.
레심은 으음, 속으로 침음을 흘리며 환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환인 님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설마 40마리에 가까운 괴물 지네가 모여있었을 줄이야.=
대형 지네 괴물은 3급에 해당하는 이형종이다. 그런 것만 사이사이 4마리나 보인다. 2급인 중급 괴물 지네도 10마리가 넘는다.
평범한 파티였다면 여기서 전멸했을 거다.
“호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환인은 겸양을 보였지만 백려강도, 레심도 그런 말로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어……. 죄송해요. 제가 미숙한 탓에 도움도 드리지 못하고.=
=저도 전열에서 괴물 지네의 이목을 끌었어야 했는데 잠시 굳는 바람에 최적의 시간대를 놓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있는 이유가 그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겁니다. 두 번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신경 써야겠지만, 실태를 의식해 손과 행동이 느려지는 것도 좋지 못한 일입니다. 기운 내시길.”
=네…….=
=예.=
주제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것을 본 이실리테가 살짝 끼어들며 묻는다.
=주인님. 이게 그 괴물방이죠?=
“아마도. 44마리나 모여있었으니 틀림없겠지.”
=와. 대형 괴물 지네는 3급일텐데 9층에서 4마리나 나오네요. 다른 파티였다면 버텼어도 사상자가 나왔을 거예요.=
“파티의 구성에 따라 다르겠지. 그보다 8층부터는 다른 파티가 거의 없다 싶더니.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괴물… 이형종이 모여있는 방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조금 신경 써서 탐색하는 것이 좋겠군요.”
=명심하겠습니다.=
=네.=
이실리테는 장갑을 끼고 단검과 작대기로 괴물 지네의 사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앗, 비상식량! 지지야, 지지!=
쿠엣? 쿠우~!
“괜찮다. 저 녀석은 똑똑하니 먹어도 되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 정도는 구분하니까.”
=네? 그치만.=
“먹고 탈 나면 치료제를 먹여도 되는 일이다. 한 번 혼쭐나면 다음부터는 아무거나 입을 대지 않겠지.”
=음. 주인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보다 보이나. 여기, 그리고 여기가 괴물 지네의 약점이다.”
=약점이요? 괴물 지네에 약점도 있어요?=
“이런 절지동물류는 다른 포유류와 다르게 머리를 잘라내도 일정 시간 살아서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신경이 보조뇌와 비슷한 역할을 하기 때문인데 그런 신경이 다발로 묶여 지나가는 자리가…….”
=아! 그게 주인님이 짚어주신 곳인 거네요?=
“그래. 거길 찔리거나 베이면 금세 무력해지지.”
6층에서부터 9층까지 레심과 백려강이 괴물 지네와 싸우는 것을 10번 넘게 목격했다.
거기에 이실리테가 괴물 지네 27마리를 해체하는 것까지 봐둔 마당. 환인은 일찌감치 괴물 지네의 약점과 공격 패턴을 파악해놓은 상태였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식을 이실리테에게 조금씩 전수해주기 시작하는 환인이었고, 그 이야기를 레심과 백려강도 뒤에서 귀를 기울여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짧은 강의가 끝난 후.
=우웁.=
=아가씨?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아, 아니에요. 저도 파티니까, 궂은일을 이실리테에게만 맡길 수는……!=
=크으…….=
백려강과 레심도 해체 도구를 들고 괴물 지네를 헤집으며 위상석을 찾기 시작했다.
차마 뒤에서 구경만 할 면목이 서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럼 헤집은 건 이쪽으로 옮겨주시고요. 이거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들면 내장이 쏟아지니까 위상석을 찾기 더 쉬워요.=
주르륵, 철퍽!
=……!=
꾸울렁, 하고 괴물 지네의 내장이 쏟아지는 모습에 그렇지 않아도 하얀 백려강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변한다.
=레심 씨는 여기 말고 저쪽에서 찾아주세요. 주인님은 빛 막대를 이쪽으로 조금만 비춰주실래요?=
=예, 예.=
“그래.”
두 명이 더 손을 보탠 덕분에 일행은 빠르게 괴물 방의 사체를 정리할 수 있었고, 엄지손톱만 한 위상석 2개를 더 입수할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