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102 빛이 닿지 않는 미궁
* * *
[3층 지도]
3층으로 내려온 환인은 지도책을 꺼내 내려온 계단을 빨간 글씨로 2, 그리고 4층으로 내려갈 계단을 4로 표기했다.
그리고 숨을 길게 들이마시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피부를 찌르는 느낌. 이 세상에 처음 떨어졌던 삼림형 미궁의 분위기가 생각난다.
환인은 주위를 낱낱이 살폈다.
회색빛 시야에는 높이가 4m까지 높아진 천장과 곳곳에 통로가 뚫려있는 불규칙한 공동 형태의 동굴이 보이고 있었다.
이형종은 안보인다. 귀를 기울여보면 스으으으, 쓰쓰쓰쓰, 희미하고 작은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레심이나 백려강, 이실리테에게는 그저 새카만 어둠밖에 보이지 않겠지.
시험 삼아 영혼 시야를 종료하니 정말 횃불의 광원 너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3층으로 내려와서일까, 레심이 희미한 신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정말 이름값을 하는 미궁이군요.=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렇게 긴장감을 줄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백려강은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큰 것을 느끼고 지팡이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아까 입구 계단에서 레심이 움찔거린 게 이런 이유에서였구나. 백려강은 속으로 웃다가 별것 아닌 일에 감상을 느끼는 자신을 보고 생각보다 더 긴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한 이실리테가 놀라웠다. 이런 경험이 많은 걸까. 그래서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앞이 잘 안 보여서 조금 그렇긴 한데 주인님을 믿으니까요.=
주인을 믿으니 이런 상황에도 침착할 수 있다. 그 대답에 백려강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선두에서 걸어가고 있는 환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명의 사람에게 이토록 믿음을 살 수 있다니. 그것도 예의를 모르는 도적 출신 아가씨를 갱생시킬 정도로…….
백려강은 자신의 마음속에 환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가 옆에서 나온 목소리에 내심을 들킨 것처럼 움찔거렸다.
=환인 님. 빛 막대를 켰으면 합니다.=
“괜찮겠지요.”
환인의 허락에 레심이 허리춤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팔 길이 정도 되는 나무 막대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미궁용 마도구로 분류되는 빛 막대는 작은 회색 나무 막대기에 꼬불꼬불한 글씨가 빼곡히 새겨져 있는 것으로 손잡이 부분을 돌리면 형광봉처럼 빛을 만들어낸다.
광원의 범위는 횃불의 4배 정도. 가격은 하나에 2열은화로 on/off 기능이 있으며 최장 20시간을 쓸 수 있고 충전에는 1은화가 드는 마도구였다.
레심이 손잡이를 돌리자 막대기 끝에 회색빛이 확 퍼져나오며 40m가량을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밝군요.=
=밝네요.=
빛 막대 끄트머리의 빛을 직시해도 눈이 아프지 않다. 열기도 느껴지지 않아 여러 곳에서 유용하게 쓰일법한 마도구라고 생각하는 중에 하나의 소리가 환인의 예민해진 귀에 포착되었다.
스륵… 저벅……
“…….”
소리가 들린 쪽은 여기서 하나뿐인 통로가 있는 방향.
환인은 빛 막대의 광원으로 이제 확연히 보이는 동굴을 신기한 듯이 살피는 두 명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접근하는 파티는 모두 적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예?=
어벙하게 반문하는 레심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복창합니다. 이제부터 접근하는 파티는 모두 적이다.”
=이, 이제부터 접근하는 파티는 모두 적이다.=
“백려강 씨는 왜 따라 하지 않습니까.”
=네, 네? 아… 이제부터 접근하는 파티는 모두 적이다.=
환인은 갑자기 왜 이러는지 감을 잡지 못한 두 어린이들을 향해 억양 없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입구에서 병사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미궁에서 발생한 문제는 기본적으로 당사자에게 있습니다. 일행을 관리 못 한 책임은 리더에게 있으며…….
백려강과 레심은 환인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뒤늦게 눈치채고 표정을 굳혔다.
“제 고국에는 이런 성어가 내려옵니다. 선한 사람은 오지 않고 오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하지만…… 꼭 나쁜 사람만 다가오리라는 법은 없지 않나요?=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지 백려강이 그리 물었지만, 대답은 뒤에 있는 이실리테가 대신해주었다.
=이 미궁은 노동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장소에요. 그만큼 쉬운 미궁이라는 뜻이고요. 이런 저층에서 곤란한 상황에 빠질 사람은 애초에 안 들어올 거예요. 그러니까 빛을 보고 찾아오는 사람은 이런 저층에서 비싼 마도구를 막막 사용하는 부자들을 노린 살인자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아요.=
=…….=
도적 출신인 이실리테가 말하니 설득력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어진 환인의 이야기에 백려강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라면 척 봐도 알 수 있겠지요. 크게 상처 입거나 행색이 엉망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손짓해서 아직 끄지 않은 횃불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빛이 닿지 않는 저쪽 통로를 향해 횃불을 휙 집어 던졌다.
횃불이 부메랑처럼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다 벽에 탁 부딪쳐 바운드하며 통로 쪽으로 굴러 들어간다.
그리고 벽에 번져가는 화광과 일렁이는 너댓 명의 사람 그림자.
불도 켜지 않고 숨어있는 그 모습에 레심이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며 검을 뽑아 들었고 이실리테도 거대한 양손검을 꺼내 쥐었다.
=거기 숨어있는 자! 나와라!=
레심의 고함에 통로에서 인견족 직업자가 횃불을 툭, 걷어차며 걸어 나온다.
실실 쪼개는 직업자의 뒤로 같은 아우라 형태의 직업자 4명이 완전 무장한 차림으로 따라 나왔다. 4명 전부 활을 들고 있고 엽사 쪽 직업을 획득한, 명백한 인간 사냥꾼의 모습이다.
하지만 환인은 창을 뽑아 드는 대신 이실리테의 허리춤에서 단검 네 자루를 뽑은 뒤.
=헤헤. 꽤 눈치 빠른걸. 그 빠른 눈치를 탓하라고. 덕분에 아~주 아주 고통스럽게 죽을 테니까 말이야.=
가장 앞서서 이죽거리는 인견족에게 단검을 던졌다.
환인의 그림자에 숨어 소리 없이 날아간 단검이 인견족 직업자의 목을 푹 꿰뚫는다.
=끅!? 끄러렄…….=
목줄을 움켜쥐고 그르륵 피거품을 토해내며 털썩, 무릎을 꿇는 인견족 남자.
짧은 침묵 후 남은 4명이 재빨리 화살을 메겨 환인을 향해 쏘고 재차 등의 화살통에서 화살을 메겨 쏜다.
삽시간에 10발이 날아왔지만, 환인은 피하는 게 아니라 돌도끼로 날아오는 화살을 대충 쳐냈다.
티디디디딕 흐느적거리는 듯한 돌도끼의 움직임에 화살이 모조리 튕겨 나가는 모습에 인간 사냥꾼들이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정확하게 쳐내다니?!
=비, 빌어먹을. 평범한 무직자 새끼가 아니잖……! 컥?=
다시 화살을 메기며 소릴 지르던 고양이 귀의 여자가 퍽, 소리와 함께 목을 쥐고 뒤로 넘어간다.
상대의 적의에 마악 행동에 나서려던 레심과 백려강이 눈을 크게 떴다.
인지 능력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
그러는 와중에 이실리테는 슬쩍 백려강의 앞을 가로막으며 거대한 중철 대검을 세워 다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에 대비한다.
“더 안 쏘는 건가.”
나지막이 말하며 다가오는 환인의 모습에 남은 세 명은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압도적인 포식자의 앞에 서있는 듯한 공포.
처음 3급 마수와 마주쳤을 때 느꼈던 심장이 옥죄여오는 두려움.
=빌어먹을!=
=쳐!=
두 명이 동시에 환인에게 달려들었고 한 명은 뒤에 남아 다시 활을 매긴다.
레심도 반사적으로 뛰쳐나가려 했지만, 뒤에서 망토를 잡아당기는 이실리테에 의해 목이 졸려 컥, 소리를 내면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입니까?! 저……!=
=레심 씨, 그냥 지켜보세요.=
=예? 하지만!=
싸움이 벌어지는데 어째서 가만히 있으란 거냐고 항의하려던 레심은 곧 입을 쩍 벌렸다.
퍽! =켁!=
팍, 스각 =끄억!=
흐르는 물결처럼 단검을 던져 활잡이의 목을 꿰뚫어버리고 돌도끼를 유려하게 휘둘러 가장 먼저 접근한 개돼지 머리 남자의 장검을 팔목째로 쳐 날린 뒤 그대로 목줄을 갈라버린다.
한 번 호흡할 시간에 두 명이 죽어 나자빠졌다.
두 손에 단검을 쥔 채 덮쳐들려던 개 귀의 여자는 협공은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동료가 쩍 벌어진 목에서 내뿜는 피를 덮어쓰며 주춤주춤 물러난다.
뭐, 뭐야. 이놈…… 사람 맞아?
환인은 두 손에 단검을 꼬나쥔 채 주춤주춤 물러나는 여자의 배를 도약 차기로 걷어차 버렸다.
뻑!
=끄흑!=
강한 충격에 단검을 놓친 채 뒤로 몇 미터나 날아가 뒹구는 인견족 여자.
배가 찢어지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귀신 같은 상대의 눈빛에 여자는 겁에 질렸다.
눈도 깜빡하지 않고 4명의 멱을 따버린 괴물이다. 덤벼들자니 저 검은 돌도끼가 자신의 머리통을 찍을 것만 같다. 등을 돌리면 단검이 날아와 목을 꿰뚫을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여자는 곧 전의를 상실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비굴한 얼굴로 빌었다.
=사, 살려만 주세요. 그럼 무엇이든 할게요.=
이게 뭐야. 선두가 무직자에 작은 동물을 데리고 비싼 마도구까지 쓰길래 횡재했다고 생각했는데.
횡재는 저쪽이었나? 우린 횡액을 당한 거고?
여자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퍽
=……!=
=…….=
얼굴에 단검이 박힌 여자가 순간 두 팔을 허우적거리다 픽 쓰러지는 모습에 백려강과 레심은 신음을 삼켰다.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까지 저렇게 무자비하게…….
반대로 이실리테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고 있었다. 그날 까딱 잘못했으면 자신도 저 꼴이 되었을 테니까.
돌아가면 스사하고 브릴릿한테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환인에게 말을 걸었다.
=고생하셨어요, 주인님.=
“시체는 뒤지지 말고 단검만 회수하도록.”
=넵. 단검만 회수하겠습니다.=
도적 때의 기질이 살짝 고개를 들어 조금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이실리테는 군말 없이 인간 사냥꾼들의 목과 얼굴에 박힌 단검을 회수하고 날에 묻은 피를 닦는다.
그때 인간 사냥꾼들이 나온 통로 너머에서 후다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무거운 것을 짊어진 채 움직이는 여러 발소리에 환인과 이실리테는 통로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통로에서 뭔가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점차 멀어지는 소리를 생각하면 짐꾼이 도망치고 있는 거겠지.
여기서 다음 층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인간 사냥꾼들이 나온 통로를 반드시 지나가야 했다. 그 사실로 유추해본다면…….
‘평소에는 이형종을 사냥하다가 미궁 초짜들을 발견하면 사람을 사냥하는 인간 부스러기들.’
다섯 명이 착용 중이던 장비에 명백하게 몸에 맞지 않는 것도 있다는 사실이 그 추측을 뒷받침한다.
처음 살인을 저지른 환인이었지만 죄책감은커녕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죽어갈 때 보여주던 짧은 몸짓과 발버둥이 마음속에 작은 싹을 틔우는 느낌이다.
쾌락 살인광이라는 불길한 싹 말이다.
「네가! 네가 날 죽였어!」
「이렇게 죽는 건…… 싫어어…….」
「엄마! 엄마!! 아아악!」
「난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에!!」
잠시 후 시체에서 빠져나온 영혼들은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몸부림쳤다.
행동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환인에게 원한을 드러내는 부류와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 악을 쓰는 부류.
「원망할 테다! 증오하겠어!! 평생 쫓아다니면서 저주할 거야!!」
먼저 죽이려고 시도했으면서 적반하장으로 날뛰는 고양이 귀의 여자 영혼.
알몸으로 다듬지 않은 단발의 머리카락을 거꾸로 세우면서 원한을 줄기줄기 뿜어내지만, 환인은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고 여자 영혼을 노려보며 속으로 말했다.
‘영혼마저 소멸당하고 싶나 보군.’
「……!?」
「히, 히이익! 뭐야! 너 어떻게……?!」
「설마. 설마 영혼사님? 영혼사님이었어?!」
「싫어! 나락으로 가는 건 싫어어어!」
자신들이 죽이려 한 존재가, 자신들을 죽인 존재가 영혼사라는 것을 깨달은 영혼들의 아비규환이 펼쳐진다.
악을 써대던 고양이 귀 여자의 영혼도 얼어버린 것처럼 부들부들 떨기만 한다.
「도, 도망쳐!」
「으아아아……!」
결국 도주를 선택한 영혼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 환인은 강제력을 담은 명령을 내렸다.
이 기회를 이용해 몇 가지를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와라.’
「싫어어으어아아…….」
「엄마아아아…….」
「끄아아아아아…….」
다섯 남녀의 영혼이 귀곡성 같은 소릴 지르며 환인의 왼팔로 빨려 들어와 영혼 구슬로 변한다.
색과 크기는 이형종이나 짐승, 협조받아 구슬로 변한 영혼과 달랐다. 크기도 2배가량 더 컸고 색감도 밝은 회색이 아닌 적색이 감돈다.
‘강제력이 발휘되는군.’
루아의 영혼을 구슬화 해보려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영혼 구슬이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째서 되는 걸까.
루아는 그때 성불하고 있을 때여서? 아니면 자신의 영혼자 능력이 성장해서?
이전에 괴물이나 짐승의 영혼과 사람의 영혼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테스트를 위해 몇몇 사람 영혼에게 부탁해 기술 시험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땐 유의미한 결과를 내지 못했었다. 영혼에 문제라도 생기면 피차 곤란했기에 환인도 적당히 했었으니 말이다.
‘이 자들의 영혼이라면 문제는 안 되겠지.’
=주인님. 다 챙겼어요.=
그사이 단검과 횃불을 회수해온 이실리테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통로로 향하며 말했다.
“지나가겠습니다.”
레심이 든 빛 막대의 회색빛에 죽어 널브러진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3층에도 이형종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드문드문 통로 너머로 횃불의 화광이 보여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님을 알려주었다.
=3층부터는 자리를 잡고 사냥한다더니. 저런 모습은 그 이유에서군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레심의 말대로 3층은 구불구불한 터널이나 코너가 많았다.
사람들은 그런 코너 안쪽에서 횃불을 피운 채 존재감만 알리고 있었는데, 이러는 이유는 미궁의 생태계와 연관이 있었다.
=어떤 이유인가요?=
미궁이 어떤 곳인지에 관해서는 양성기술원에서 배웠지만, 이런 현장감은 배우지 못한 이실리테가 물었다.
=이형종이 미궁에서 발생하는 방식은 현재까지 세 가지로 밝혀졌습니다. 첫 번째로는…….=
1. 천장이나 땅속에서 파고 나오는 것.
2. 제단이나 석상 같은 곳에서 공간을 찢고 나타나는 것.
3. 생성된 이형종들이 번식해서 수가 늘어나는 것.
=……다만 사람의 시선이 닿는 곳, 사람이 있는 곳 근방에서는 이형종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허무하게 위상력을 잃을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고 있지요.=
=천장이나 벽에서 빠져나오는 중에 공격받으면 저항도 못 하고 죽으니까요?=
=예. 그 이유로 통로 안쪽, 코너 사이 틈에 숨어있다가 이형종의 소리를 들으면 나가서 유인해오거나 죽이고 사체를 회수하는 겁니다.=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미궁 지도책에서 26번으로 표시된 지역, 4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걸어가던 일행은 우연히 마주치는 정상적인 파티와는 데면데면한 모습으로 멀찍이서 스쳐 지나갔다.
서로 맞은편 벽에 붙어서 상대와 가까워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
몇 번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면서 대화가 끊기자 일행의 분위기는 그대로 침울해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심과 백려강의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백려강은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고 풀 죽은 것 마냥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레심은 빛 막대를 든 채 먼 곳을 보는 눈으로 앞을 보는 중이다.
좀 전에 있었던 싸움 이후로 줄곧 이런 분위기다.
그게 눈에 밟혔는지 비상식량을 품에 안고 걷고 있던 이실리테가 주변 경계에 신경 쓰면서 입을 열었다.
=아까 죽은 것들은 미궁 도적들이었을 거에요.=
=……그걸 알 수 있는 건가요?=
백려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이실리테는 개의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네. 착용하고 있던 장비가 이것저것 짜깁기 한 것 같은 거나 몸에 맞지 않는 방어구를 끼고 있던 걸 보면 죽인 사람의 장비를 빼앗아서 끼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요. 더욱이 하나뿐인 통로에서 횃불도 켜지 않고 숨어있었다는 게 가리키는 사실은 하나뿐이죠.=
=초보자 사냥꾼입니까.=
레심의 대답에 이실리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빛이 닿지 않는 미궁은 이름답게 미궁 전 층이 새까만 암흑에 잠겨있어요. 그 때문에 미궁에서 벌어진다는 살인강도와 협잡질이 다른 미궁보다 더 자주 벌어진다고 해요. 자리를 잡고 평범하게 사냥하다가도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발견하면 도적 떼로 돌변하는 거죠.=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거죠?=
흐름을 보면 의심받는 것처럼 느껴질 질문이었지만, 이실리테는 신경 쓰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웨이포드에 소속되어있는 미궁이라서 그런지 양성기술원에서 빛이 닿지 않는 미궁에 대한 것은 비교적 자세히 가르쳐줬었어요. 특히 저는 직업자라서 미궁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니까요.=
=……당신에게 화풀이해서 미안해요. 책에서는 위험한 곳이라고만 묘사되어있었지,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설명은 없었어요. 로망만 생각하다 미궁의 민낯을 목격한 기분이라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괜찮아요. 그리고 사람이 사는 곳은 다 똑같지 않나요? 착한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이 있는 거죠.=
=후후……. 그러네요. 그곳에 비하면 이곳은 오히려 편한 곳이었네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치열한 암투를 벌이는 것에 비하면 감정을 직접 전달하니까요.=
=아~ 그곳이라면 무도회나 사교계를 말씀하시는 거죠? 역시 아가씨는 신분이 높은 분이었어. 있잖아요, 무도회 때는 웃는 얼굴로 상대를 욕한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인가요?=
=그, 그렇지는 않아요…….=
이실리테의 관심 덕분에 백려강은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이실리테와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눈다.
레심은 그런 두 명을 힐끔거리다가 슬쩍 후열로 물러나 둘이 편히 대화할 수 있도록 대열을 변경해주었다.
=환인 님. 제가 후열을 맡겠습니다.=
“부탁합니다.”
그리고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마지막 골목, 폭이 3m가 겨우 넘는 통로에서 일단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8명, 아우라 형태의 직업자 4명에 짐꾼 4명의 파티다.
상대는 무척 깊은 곳까지 다녀온 듯 무기와 갑옷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었고 짐꾼들도 등에 짐을 한가득 메고 있었다.
상대 쪽 전열 두 명이 환인을 발견하자마자 적의는 없다는 듯 허리춤의 무기에서 손을 떼고 들어 보인다.
환인도 똑같이 손을 들어 보이며 뒤로 물러나다가 통로에서 멀찍이 비켜주었다.
이런 외나무 다리 같은 통로에서 상대와 마주치면 수가 적은 쪽이 비켜주는 게 예의라고 들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그러자 상대도 마찬가지로 반대쪽 벽에 붙어 이동하며 환인에게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지나가고 환인 일행도 통로로 재차 진입하자 일체의 행동을 조용히 지켜보던 백려강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보통의 파티와 마주쳤을 때의 행동이네요…….=
=그것보세요. 아까 그놈들이 나쁜 놈들이었다니까요.=
=후후. 그러게요.=
이실리테의 유난 덕분에 레심과 백려강의 표정이 풀어지며 파티의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환인은 속으로 이실리테의 평가를 약간 상향 조정하며 지하 4층과 이어진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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