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02화 (102/813)

〈 102화 〉 099 소도시 웨이포드

* * *

웅성웅성­

“…….”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제2 공동묘지를 찾아왔는데, 공동묘지 앞은 인산인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모여있었다.

저 사람의 벽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

오면서 들은 소문과 환인처럼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멀찍이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이엘카타가 영혼사로 각성한 것은 확정 사항이었다.

‘그러면 감기와 각성을 착각한 거였나.’

이엘카타를 만나 진짜 영혼사는 어떤지 알아보고 싶지만, 지금은 기회가 아닌 듯 하다.

호텔로 돌아가려던 환인은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달려와 근처의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귀를 기울였다.

=얘들아. 영혼사님 지금 묘지에 안 계시대. 성으로 불려가셨다는데?=

=안 계시는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모여있는 거야?=

=혹시 돌아오실 때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기다리는 거겠지…….=

=으음. 너희는 어쩔 건데. 기다릴 거야?=

=글쎄…….=

=영혼사님이 언제 오실 줄 알고. 난 그냥 돌아갈래.=

=나는 더 기다려볼 거야. 어쩌면 지금 아니면 못 볼 수도 있잖아.=

=성에 들어가셨으니까 며칠은 못 나오실 걸? 나도 그냥 돌아가야겠다.=

=엥?! 다 가는 거야!?=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보며 환인도 걸음을 옮겼다.

‘성으로 불려갔다니. 이엘카타는 내 정체를 비밀에 부쳐준다고 약속했으니 밝히지는 않겠지만…….’

플뢰 종족은 타인의 거짓말과 진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만큼 거짓말을 못 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영혼사는 대륙적으로 존경받는 인사들. 영혼사로 각성했으니 호족이 이엘카타에게 나쁜 짓을 하리란 생각은 안 든다.

더욱이 그녀는 플뢰다. 만약 루크랑 호족이 플뢰 영혼사를 박해했단 사실이 알려지면 플뢰 종족이 속해있는 종족 연합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함부로 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조금 신경은 쓸 필요가 있겠지만, 대중의 시선이 이엘카타에게 쏠렸다. 오늘 밤에는 영혼 정화를 하고 다녀도 괜찮겠군.’

이엘카타가 영혼사로 각성하고 성에 불려간 이후 고족 거리, 중심가, 일반 구역 가릴 것 없이 시민들의 시선이 모두 성으로 향했다.

덕분에 활동이 편해진 환인은 밤마다 외출하며 도시를 배회하는 영혼을 찾아 그들의 미련을 해결해주고 성불을 도와주었다.

중간중간 까다로운 영혼 덕분에 시간이 조금씩 지체되긴 했었다.

생전의 기억이 모호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을 찾지 못한다거나, 유가족이 도시를 떠나버려 미련을 해결해줄 수 없는 상태라거나, 살인을 원한다거나.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 그동안 웨이포드를 돌아다니며 얻은 지식으로 5일간 42명의 영혼을 성불시켜줄 수 있었다.

낮에는 정신 단련. 밤에는 영혼 정화.

충실하다고 할 수 있는 5일이었지만 웨이포드의 곳곳에 불안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일반 구역에 분노와 증오로 얼룩진 미련의 소유자가 많았다.’

대다수는 햇볕에 색이 바래듯 분노와 증오가 시간의 흐름에 퇴색되어 자연 성불하겠지만, 몇몇은 환인도 손대기 꺼려질 정도의 원한에 불타는 영혼이었다.

어째서 혼재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원한과 분노에 불타는 영혼.

그런 영혼은 시간을 들여 설득을 시도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수는 다섯.

그중 둘은 아무런 죄 없는 선량한 사람이 뒷골목 조직의 수작질에 휘말리거나 작전에 걸려 억울하게 사망한 사례였기에 환인도 더는 참견하지 않았다.

영혼의 성불을 도와주자고 살아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 아니다. 살인은 이 세계에서도 중범죄. 일면식도 없는 영혼을 위해 그런 죄를 뒤집어쓸 이유는 없다.

그들이 혼재로 변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면 그건 이 도시가 감당해야 할 문제니까.

그러나 나머지 셋은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으로 보아도 악에 속할 만큼 일반 구역의 슬럼가에서 패악을 끼치던 무리였다.

환인은 부담 없이 이엘카타가 말했던 강제 정화를 시도해보았다.

강제 정화라고 해도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냥 영혼 화살로 영체를 꿰뚫을 뿐이니까.

성불할 때까지.

핏­

「끄아아악……! 너, 너무합니다……! 살려주십쇼……!」

‘너무한 것은 너다. 47명의 조직원 전원을 죽여달라니. 악령이라도 되고 싶은 거냐.’

「하지만…… 이용당하기만 하다 살해당한 제 원한은…….」

‘그러는 네놈 손에 죽은 죄 없는 사람들의 원한은 어떻게 할 거냐. 네놈의 영혼을 갈아 넣어 그들의 한을 풀어줄까?’

「그, 그것은…….」

피슛­

「끄아아아??……!」

「결정해라. 한을 내려놓고 성불할 것인지, 내 손에 소멸당할 것인지.」

「흐, 흐으으으…….」

대충 이런 식으로 10번 정도 영혼 화살을 꿰뚫어주면 감정이 대거 탈색된 것처럼 허망한 얼굴로 성불해버린다.

처음 강제 정화를 시도했을 때는 저주를 걸어놓고 4중첩 영혼 화살을 쐈었는데.

‘한 대에 영혼이 소멸할 뻔해서 식은땀을 흘렸었지.’

마지막 세 번째 영혼이 성불하며 남긴 빛의 방울을 흡수한 환인은 기분 나쁜 침묵이 묻어나는 일반 구역의 뒷골목을 빠져나와 중심가로 향했다.

잠시 후면 해가 뜰 시간. 새벽 일찍 중심가로 출근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올츠 호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이동하다가 제2내성문의 경비에게 인식표를 보여준 뒤 중심가로 들어온 환인은 일반 구역과 180도 다른 풍경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꽤 신경 쓰이는군.’

다 사람 사는 곳이긴 하지만 중심가와 일반 구역의 슬럼가 간의 차이가 너무 극심하다.

적당한 차별은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지만 이건 그 ‘적당함’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루 1철화도 벌기 어려워 밥 한 끼 먹기 힘든 사람들의 슬럼가. 그로인해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사망한 영혼들.

그들이 품은 깊은 원한.

고족 거리와 중심가를 다 합친 것보다 10배는 넓은 일반 구역의 1/20도 둘러보지 않았지만, 혼재가 될 가능성이 큰 영혼만 다섯을 보았다.

간단한 산술로 웨이포드에 100명의 혼재 예비군이 있다는 뜻이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자신이 영혼 성불행을 하는 이유는 초능력의 성장을 위해서일 뿐이다. 영혼의 빛방울 수집, 영혼 기술의 수련, 영기의 흡수를 골고루 해야 초능력이 잘 성장하니까.

그래서 웨이포드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그동안 느낀 영혼 수백의 감정 때문인지 괜히 신경 쓰이는 느낌이다.

‘쓸데없는 감정을 너무 많이 받아들였다. 돌아가서 명상 훈련을 해야겠군.’

그리 생각하며 걸어가던 환인은 하이에른 상급 무관 앞을 지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른 아침의 상급 무관 앞은 개방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매일매일 이만한 숫자가 방문한다면 한 달에 15금화를 버는 것은 일도 아닐 거다.

훈련만 하는 게 아니라 교관들이 수행을 목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미궁도 들어가는 거 같으니 수입은 더 많을 테고.

‘그 정도니까 거절당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자신 있게 프로포즈 한 거겠지.’

멀찍이 지나가면서 힐끔 보니 열린 대문 사이로 하이엔=조드가 무관 복장의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는 게 보였다.

표정이 차분한데다 예전과는 다르게 무관의 상급 교관 복장으로 있는 것이 특이하다.

환인이 알기로 하이엔=조드는 무관복을 입지 않았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투박하고 약간 헐렁한 운동복 느낌이어서 입기 싫었겠지.

그랬는데 무관복을 입고 일일 입관자들을 체크하며 받아들이는 모습은 차기 관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건가.’

프로포즈를 칼같이 거절당하고 정신 차린 모습. 나쁘지 않다. 한동안만이라도 저렇게 있어 주면 좋겠는데.

며칠 뒤면 이실리테가 나온다. 그후 빛이 없는 미궁에 들어가면 그사이에는 만나지 못할 테고 미궁을 다녀온 뒤에는 웨이포드를 떠날 테니 피가죽 클랜도, 하이엔=조드도, 이엘카타도 더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날 저녁 환인은 자신을 찾아온 손님 한 명을 만났다.

=…….=

“…….”

두 팔과 다리에 불타는듯한 노란 아우라가 회오리치는 호랑이 머리의 남자.

키 2.5미터에서 전해져오는 강철처럼 단단한 기세의 하이에른=조드, 하이엔=조드의 아버지이자 상급 무관의 7급 직업자였다.

‘빈틈이 생각보다 적군. 기술만으로 싸운다 해도 짧게 끝내지는 못하겠어.’

5급인 하이엔=조드는 걸어다니는 빈틈 덩어리였다. 같은 5급이었던 아윅크 가문의 크타치난도 비슷했다.

하지만 하이에른=조드는 아무리 유심히 살펴봐도 부위별 빈틈이 네 군데에서 다섯 군데 정도뿐이다.

대결을 시작하면 빈틈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단번에 승부를 내기 어려워 보인다.

물론 기술 대결로 한정했을 때의 이야기다. 하이에른=조드가 팔다리를 휘감고 있는 아우라의 증명을 하기 시작하면 환인의 패배는 확정, 문제는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가 된다.

‘……모르겠군. 7급의 전투력을 확인해보지 못해서 알 수가 없어.’

환인이 이렇게 상대를 분석하고 있을 때 하이에른=조드도 눈앞의 환인을 분석하고 있었다.

‘직업자였다면 일대의 패자가 되었을 자질이지만…… 안타깝군.’

그날 딸내미를 두들겨 패던 환인을 보았을 때 하이에른=조드는 근엄함 때문에 참았을 뿐, 속으로는 무릎을 내려치고 있었다.

환인의 무기??는 자신의 눈에도 빈틈, 허점이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술만으로 따졌을 때 말괄량이 딸내미보다 2단계는 높은 수준.

하이에른=조드는 자신의 앞에서도 한 치 흔들림도 없는 환인의 모습에 속으로 애석해하며 날카롭고 뾰족한 손톱으로 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짤그랑­

적색과 금색, 청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수 놓인 비단 주머니가 금속성을 낸다.

=먼저…… 손 쓸 도리 없던 딸내미를 훈육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겠네.=

“…….”

=자네 덕분에 5급에 오른 뒤 계속 방황만 하던 딸아이가 정신을 차렸어. 이것은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자…… 딸에게 더는 접근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주는……?=

환인은 하이에른=조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주먹만한 주머니였지만 묵직하다.

‘이 정도면 금화가 최소 10장.’

그런 환인의 행동에 하이에른=조드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 결단이 너무 빠른데? 진중하고 배려 넘치는 성격이라고 하지 않았나?

말을 듣지 않으면 약간의 힘을 보여서라도 받아들이게 할 생각이었지만,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뭔가 당한 느낌이 적지 않다.

환인은 보일 듯 말듯 살짝 찡그려진 호랑이 무늬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저는 며칠 뒤 웨이포드를 떠납니다. 그 후에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요. 제가 따님을 거절한 이유는 저와 맞지 않는 여성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쪽의 이유가 컸기 때문입니다.”

=음…….=

“거기에 도움을 드렸던 보상이라고 하시니 저로서는 여비가 필요했던 차라 사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해주시길.”

=여비라, 얼마나 멀리 떠나려 하기에?=

“일단 현재 목적지는 종족 연합 주도입니다.”

=메리아놀인가. 멀기는 하군. 괜찮다면 이유를 들려주게.=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입니다.”

환인의 담담한 대답에 하이에른=조드는 나무 기둥 같은 팔뚝으로 팔짱을 끼며 으음, 옅은 숨을 흘렸다.

그러면서 환인의 위아래를 호랑이의 매서운 눈빛으로 살핀다.

=……자네가 내 제안을 조건 없이 수용해주었으니 나 또한 자네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주지.=

“경청하겠습니다.”

고족 집안 자제만큼이나 예의 바른 모습에 하이에른=조드는 속으로 다시금 애석하게 여겼다. 이 남자가 직업자였다면 오히려 자신이 딸의 결혼에 앞장섰을 텐데.

하지만 눈앞의 남자에게서는 그 어떤 위상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너무나 아쉬울 따름이다.

=힘을 기르게.=

“…….=

=도시의 중추 권력마저도 자네를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힘. 그만한 힘을 기르기 전까지…… 종족 연합 주도에는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 좋을걸세.=

“…….”

=표정을 보니 짐작 가는 것이 있나 보군.=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 이상 대답해줄 수는 없네. 이해하게.=

그리 말한 하이에른=조드는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같이 일어선 환인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키보다 턱없이 낮은 문을 열고 허리를 숙여 응접실을 나갔다.

“…….”

호랑이 인간이 나간 뒤 자리에 앉은 환인은 비단 주머니를 풀어보았다.

‘금화 15장.’

뜻하지 않은 불로소득의 거금이 생겨 입가에 미소를 띤 환인이었지만, 잠시 후 미소를 지우고 생각에 잠겼다.

탁자의 분재를 응시하는 새까만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는다.

‘하이에른 조드는 나에 대해 뭔가 아는 눈치였다.’

몇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지구의 문화가 퍼져있는 세상.

사고방식이 지구의 인간과 비슷한 종족들.

종족 연합 주도의 화폐를 줍자마자 강제로 전이된 자신.

특정 도시를 경고하는 7급 직업자.

미국은 외계인을 고문해서 기술을 빼앗거나 만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런 게 이 세상에도 존재한다면?

객실로 돌아온 환인은 창밖으로 말쑥한 차림의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주머니 속의 종족 연합 금화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세상에는 똥 같은 일투성이지.”

지금까지는 그저 훈련에 따른 성장이 눈에 띄게 보여서 재미있다는 마음에 힘을 기르고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별로 재미있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붙게 생겼다.

이실리테가 고급 하녀 양성기술원에 들어간 지 40일째 되는 날이 밝아왔다.

=이실리테 양은 행복한 하녀로군요. 환인 님 같은 주인님이 이렇게 퇴원 날 기다려주기까지 하니까요.=

스사의 부인인 앤플린드는 굳이 나와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이후 일과를 생각하면 기다렸다가 바로 끌고 가는 것이 시간상으로 이득이다.

백려강을 찾아가서 계약 사항을 재확인해야 하고 무기와 방어구도 준비하고 미궁 안에서 먹고 자고 할 준비도 해야 하니까.

40일간 이실리테가 얼마나 바뀌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앞으로 긴 시간 함께 할 인연이니까요. 신경 써주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물론 이것도 진심이다. 그저 며칠 보다 말 얼굴도 아니고 앞으로 쭉 같이 움직일 텐데 친밀도가 높아서 문제 될 것은 없을 테니까.

적색 벽돌 기조의 수녀원 같은 양성기술원 입구에서 기다린 지 1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진갈색의 문이 열리며 여자 두 명이 차분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왔다.

한쪽은 검은색 수녀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고 다른 쪽은 개화기의 서구식처럼 하얀색 셔츠와 검은색 치마 차림을 하고 있었다.

자기 몸 크기만 한 리벳 장식의 트렁크 가방을 들고 있던 여자가 수녀 복장의 여자에게 허리를 살짝 숙이고 돌아선다.

“……허.”

그리고 환인을 보자마자 얼굴이 환해지더니 등허리까지 늘어트린 연한 갈색 포니테일을 찰랑이며 달려오는데, 환인은 순간 이실리테가 아니라 다른 여자로 착각했을 정도로 많은 것이 바뀌어있었다.

=선머슴 같은 모습이 깔끔하게 빠졌네요.=

앤플린드가 그렇게 평가를 했을 만큼 이실리테의 변화는 극적이었다.

남자 같은 팔자걸음에 몸가짐도 수십 년 전장에서 굴러먹은 것 같은 늙은 용병 느낌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부잣집 출신의 산뜻한 아가씨로 변신한 것이다.

=주인님!=

반가워하는 이실리테의 외모에도 대격변이 있었다.

좋은 말로도 부드럽다고 못할 만큼 헝클어져 있던 머리카락은 차분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단정히 묶여있었고 거칠어 보이던 피부도 뭘 했는지 매끈해진데다 화장까지 배웠는지 내추럴 메이크업으로 자연스러운 느낌을 살렸다.

여기에 신체 능력이 향상되는 근접 직업자 보너스까지 더해지니 남자라면 돌아보지 않고 못 배기는 발랄한 느낌의 청순 미녀로 완성되었다.

=……주인님?=

대답 없는 환인의 모습에 이실리테가 조금 불안이 드러난 얼굴로 다시 부른다.

“그래. 일단 겉은 몰라보게 바뀌었군.”

야생 암컷 원숭이가 부잣집 아가씨로 변신한 정도의 충격에서 벗어난 환인이 말하자 이실리테가 다행이라는 듯이 웃으며 트렁크 가방을 내려놓고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두루마리를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받아서 펼쳐보니 성적표였다.

이름: 이실리테

성적품행: E ▷ A회화: E ▷ B기술: C ▷ A지식: C ▷ A총점: D­ ▷ A­비고: 본 학생은 열성적인 학습 태도로 교육 전 과정을 높은 성적으로 수료하였기에…….

비고란에는 500자 정도 되는 이실리테의 교육 태도와 학습 능력을 칭찬하는 글이 적혀있었는데, 요약하면 겨우 40일 만에 2년짜리 심화 코스에 맞먹는 성과를 이뤄냈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놀랍도록 변하셨네요.=

=감사합니다, 부인.=

=후후. 마음 같아서는 저희가 고용하고 싶을 정도예요.=

=죄송해요. 저는 주인님이 아닌 분을 모실 생각은 없어요.=

=알아요. 그러한 마음가짐이 아니었다면 40일밖에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그만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을 테니까요.=

성적표 두루마리를 접은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돌려주며 칭찬했다.

“잘했다. 내 예상을 벗어난 성적이군.”

=그러면……?=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한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주인님!=

활짝 웃으며 얌전히 기뻐하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환인은 그녀를 수도의 메이든 고등대학기술원에도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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