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01화 (101/813)

〈 101화 〉 098 소도시 웨이포드

* * *

객실에서 후드 망토와 켈틱 돌도끼, 대거 벨트를 착용하고 비상식량과 로비로 내려온 환인은 그곳에서 성이던 하이엔=조드와 마주쳤다.

=인!=

환인을 발견한 하이엔=조드가 냉큼 그에게 달려가 소리쳤다.

=저랑 결혼해주세요!=

=……!=

=어?!=

=헐?=

이쪽을, 정확히는 하이엔=조드를 힐끔거리던 로비의 투숙객과 호텔 직원, 메이드들이 일제히 경악한다.

그걸 눈치챈 환인이 하이엔=조드의 평가를 수정했다.

‘생각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었군.’

환인은 잠시 말괄량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푸른 머리카락의 호랑이 귀 소녀를 응시하다가 후드를 벗고 말했다.

“하이엔.”

=네!=

“거절하겠습니다.”

두 번째 고백도 거절당했지만, 이번에는 충격받지 않았다. 대신 자기 어필을 시도했다. 자신이 얼마나 신붓감으로 훌륭한지.

=다시 생각해주세요! 저 얼굴도 괜찮고 몸도 튼튼해요! 돈도 잘 벌고 집안도 좋고요! 상급 무관도 이어받을 예정이라고요! 저랑 결혼하면 그 모든 게 인의 것이 되는데요?!=

“남이 이뤄놓은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칼 같은 대답에 주변 사람들이 헉, 낮은 헛숨을 마셨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보다 가슴이 큥­ 한 것처럼 홍조를 띤 하이엔=조드가 더 신경 쓰이는 환인이다.

=머, 멋지다……. 남이 이뤄놓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니…….=

레심의 혼잣말을 무시하면서 다시 후드를 쓴 환인은 몽롱한 시선을 보내는 하이엔=조드에게 말했다.

“하이엔.”

=네에.=

“물질적인 것으로밖에 자신을 꾸밀 줄 모르는 여자는 질색입니다.”

=……!=

“제가 똑같은 대답을 한 번만 더 하게 만들면 두 번 다시 당신과 말을 섞지 않겠습니다. 레심, 가시죠.”

=어, 네.=

약간 상기된 얼굴로 오도카니 서있는 상급 무관장의 자녀를 바라보던 레심은 환인의 이야기에 그를 뒤따르며 생각했다.

이 남자도 고국에서는 고족이나 호족과 비슷한 계층일 거라고.

그리고 틀림없이 바람둥이일 거라고.

레심이 아가씨와 머무르는 곳은 환인의 예상대로 글라헬스 호텔의 최고급 객실이었다.

5층에 단 4개뿐인 객실 중 한 곳인 만큼 넓은 거실과 침실 두 개, 드레스 룸, 욕실, 파우더룸, 사용인이 머무를 수 있는 작은 방 하나로 이루어진 호화 스위트룸이다.

흰색과 진주색을 골자로 눈이 편해지는 것과 동시에 밝은 느낌을 주는 내부를 둘러본다.

‘1박에 1열은화나 할만하군.’

허브 향기와 은은한 원목 가구 냄새가 어우러지는 거실이 마음에 드는지 비상식량이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닌다.

레심은 그사이 침실 중 한 곳으로 가서 닫힌 문에 대고 똑똑 노크했다.

=백려강 아가씨. 그분을 모셔왔습니다.=

‘백려강? 작명식이 이쪽과 전혀 다르군.’

그동안 습득한 지식과 상식에는 이런 항목이 없었다.

이야기 꺼낼 필요도 없는 당연한 상식이어서인지, 아니면 입에 함부로 담아선 곤란한 일이어서 그런지 궁금한 마음에 그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은백색의 문이 열리며 쪽빛 머리카락의 여성이 걸어 나왔다.

나이는 대충 18, 19세 정도.

머리위에 짐승 귀가 없는 대신 사람 귀의 자리에 작고 앙증맞은 쪽빛 날개가 나 있다.

허리 뒤쪽으로도 모발과 비슷한 색의 날개가 마치 치마의 장식처럼 펼쳐져 걸음걸이를 옮길 때마다 하늘거린다.

“…….”

환인은 순간적으로 여자의 외모에 홀렸다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여자의 외모는 그저 평가를 위한 수치로밖에 여기지 않는 자신이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도 못 할 정도라니. 무서울 정도의 미녀다.

이목구비는 청순 계통인데 무서울 정도로 하얀 피부에 짙은 쪽빛을 띤 눈썹과 눈동자가 이목구비와 어우러져 한 폭의 명화를 보는 감상을 전한다.

피부를 허투루 노출하지 않는 옅은 회색 블라우스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군청색 주름치마로 몸매를 감추고 있지만, 남자라면 누구나 시선을 줄 수밖에 없는 여성스러운 굴곡이 옷 너머로 훤히 드러난다.

옷과 머리 모양, 피부와 이목구비, 몸매와 장신구처럼 보이는 날개.

이 모든 것이 백려강이라는 여자의 매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거기다 몸짓에서, 표정에서 묻어나는 기품있고 상냥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

이엘카타도 여태까지 만나본 여자 중 한 손에 꼽을 정도의 미녀였다. 하지만 백려강은 그런 이엘카타와 궤를 달리하는 수준의 미녀다.

환인은 레심이 왜 그토록 까다롭게 호위를 구하려 했는지 이해하는 동시에 지극히 타당하면서도 현명한 행동으로 판단했다.

‘저만한 미모라면 목석이라도 흑심을 품겠지. 현명한 판단이었어.’

납득하면서 백려강이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리던 환인은 여자가 먼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것에 살짝 놀람을 느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려강이라고 해요.=

고족의 저택이나 호족의 성에 방문해보진 않았지만, 중심가의 고급 거리를 둘러본 결과 이 세상에는 계급주의가 은연중에 퍼져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신분이 절대 낮아 보이지 않는 여자가 먼저 인사하다니.

“환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환인도 가슴에 손을 올리면서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허리를 숙이며 인사의 답을 보여주었다.

환인과 백려강이 간단히 인사를 나누자 레심이 옆에서 이야기를 꺼낸다.

=이분이 제가 모시는 아가씨입니다. 환인 님께 호위를 부탁드릴 분이시기도 하고요.=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어디 적당히 지체 높으신 분의 따님 정도일 거라 생각한 자신의 생각을 전언 철회했다.

‘못해도 호족, 어쩌면 고위 호족일지도 모른다.’

이름이 루크랑 조인족 특유의 작명식이 아니라면 이름의 특수성으로 지위를 대변하는…… 어쩌면 직계 왕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말투에서부터 태어난 순간 관리받으며 성장한 사람 특유의 느낌이다. 거기다 저만한 외모로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곱게 자랐다는 것 자체가 여자의 배경이 어떠한지 추측하게 해주는 큰 요소.

환인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레심에게 말했다.

“레심. 당신의 행동은 극히 올바른 판단이었군요.”

=……환인 님이라면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고생을 보답받은 것처럼 작게 한숨 쉬는 모습에 백려강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미안해, 레심. 나는 미궁의 분위기만 체험해볼 수 있으면 되는데…….=

=여기까지 왔잖아요. 돌아가면 크게 혼날 텐데 기왕 온 거 미궁이 어떤지 경험해보고 돌아가야 덜 억울하죠.=

=그렇지만 레심이 너무 많은 고생을 하잖아? 환인 님을 찾기 위해 2주 넘게 도시를 헤매기까지 했고…….=

=아, 아뇨. 저야 아가씨가 이번 외유에 만족하길 바라는 마음뿐이라 고생이랄 것 까지도 없어요.=

환인이 파티에 참여하는 걸로 알고 있는 백려강의 이야기에 레심이 긴장을 숨기는 표정으로 환인을 바라본다.

혹시 이렇게 얼굴까지 봤는데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떨치지 못한 모습이다.

이렇게 말 잘 들을 것 같은 아가씨라면 10금화를 위해 며칠 고생을 감수할 수 있는 환인은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서 어찌 된 일인지 간단한 사정은 들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9일 뒤에 제 하녀도 양성기술원에서 퇴원하게 되는데, 그녀의 합류도 괜찮으시다면 호의 의뢰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검전사님이라고 하셨죠? 주인 되시는 분을 보면 그 아래 종자도 알 수 있는 법이라고 배웠어요. 받아들이겠습니다.=

“음. 그 점이 조금 문제가 되어서 40일 단기 코스에 강제로 입원 시킨 겁니다만……. 무의식중에 무례한 행동을 할지 모르지만, 최대한 자제시키겠습니다.”

두 사람은 문제없다는 식이었기에 거실의 티테이블로 자리를 옮긴 환인과 레심, 백려강은 그 자리에서 간단한 계약서를 작성했다.

‘이게 표준 계약 서식 마도구로군.’

비술사의 부여 술법이 들어간 도구는 크게 마도구???와 마도기???로 나뉜다.

마도구는 일상생활에 쓰이는 비교적 저가의 아이템, 마도기는 일상생활을 넘어 전투와 관련되는 비교적 고가의 아이템이다.

대표적인 마도기라면 특수 효과를 부여한 무기와 방어구를 꼽는다.

그 외에 법술식을 새겨넣어 일회용으로 술법을 쏘게 해주는 완드도 있고 설치형으로 전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대형 마도기도 있다.

아무튼, 표준 계약 서식 마도구는 주로 의뢰 임무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매개체로 사용된다.

계약서에 적힌 항목을 어긴다고 바로 물리적, 술법적인 징벌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상호 간에 의뢰를 제대로 완수했는지 확인을 위한 도구이며 성실한 의뢰 수행을 하지 못했다면 행정관에 증거물로 제출해서 의뢰 미이행자에게 페널티를 주는 용도다.

성실하게 페널티(벌금이나 노역, 징역)를 받아들이면 상관없지만, 만약 페널티를 거부하고 도주라도 하게 되면 그 즉시 소도시, 중급도시, 성도, 주도에 수배령이 내려진다.

수배령이 내려지면 해당 지역에 들어가면 인식표가 적색으로 변하게 되므로 도시에는 입장할 수조차 없게 되고 마을도 결계가 조성된 곳이면 못 들어간다.

인식표를 버리고 새로 발급받는 것도 불가능하다.

처음 인식표를 발급받을 때 인식표에 생명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위상력의 파장을 기록하기 때문에 재발급받는 순간 인식표가 적색으로 물들기 때문이다.

“……대략 이정도가 되겠군요. 계약항목을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0. 본 계약서는 갑?(백려강)을 을?(환인과 일행)이 호위하는 것을 명시한다.

1. 미궁에서 을은 갑의 신변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호위에 성실히 임한다.

2. 갑은 안전 확보를 위한 을의 요구에 성실히 따른다.

2. 호위 기간은 미궁에 입장한 뒤 최장 15일까지.

3. 미궁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비품은 갑 측이 부담하며 준비에 성실히 임한다.

4. 의뢰 계약금은 1금화. 보수금은 9금화.

5. 계약의 개시는 계약서 작성일로부터 10일 후, 미궁에 입장한 순간부터 개시된다.

환인이 보기에 굉장히 어수룩하고 빈틈이 많은 계약서지만, 백려강과 레심은 의심하는 일 없이 순순히 받아들였다.

백려강이 먼저 고운 손가락에 마법 시료를 묻혀 갑 측의 인장란에 지장을 찍고 이어서 환인도 을 측의 인장란에 지장을 찍었다.

그렇게 만든 세 장의 계약서를 한 장씩 나누어 가졌다.

레심이 계약서를 챙기며 이해해달라는 듯이 말했다.

=계약서지만 환인 님을 믿지 못해서라기보다 형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합니다. 저도 비슷한 문화가 있는 곳에서 왔기에 계약서에 거부감은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솔직히 이런 단순 조항은 계약이라기보다 약속 같은 것이지 않겠습니까.”

=아……. 아시고 계셨군요? 사실 진짜 쓰이는 계약서는 조항만 수십여 가지가 넘어갈 정도니까요.=

높은 자리에서 쓰는 진짜 계약서는 마도구도 아닌 마도기, 거기에 종속 계약에 쓰이는 것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 조항도 수십여 가지 항목이 넘어간다고.

환인은 기관 제출용 계약서도 집어 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두 분은 행정관을 방문하는 것이 꺼려지실 테니 계약서는 제가 대신 제출하겠습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 며칠 후 이실리테가 퇴원하면 그때 한 번 더 뵙겠습니다. 중간에 연락할 사항이 있다면 호텔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백려강의 다소곳한 대답에 환인은 그녀의 옆자리에서 그녀에게 쓰다듬을 받는 비상식량을 불렀다.

“비상식량. 가자.”

쿠엣.

=아…….=

비상식량이 냉큼 떠나가자 순간 아쉬운 표정을 지었던 백려강은 환인의 시선에 수줍게 웃었다.

일어서서 문 앞까지 환인과 비상식량을 배웅해주고 돌아온 레심은 한결 안도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환인 님이 의뢰를 안 받아주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받아주셔서 정말 다행이야.=

=으응. 레심도 용케 저런 분을 찾았네?=

미묘한 뉘앙스가 섞인 질문이었지만 긴장이 풀린 레심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헤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상급 무관을 방문한 게 정답이었어. 그곳의 버릇없는 무관장의 딸을 대하는 모습에서 저분이라고 생각했거든. 거기다 말이야. 환인 님을 만나러 갔는데 글쎄…….=

올츠 호텔의 로비에서 벌어졌던 일을 열정적으로 묘사하는 레심에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쳐주던 백려강은 클라이막스에서 작게 탄성을 질렀다.

=남이 이뤄놓은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칼같이 거절하는데 같은 남자가 봐도 멋지더라니까!=

=와아.=

=환인 님도 그라아데트 님처럼 돈과 지위보다 자신의 명예와 모험을 더 소중히 여기는 분이라는 게 역력했어. 그런 분이 각성하고 모험가가 된다면 그라아데트 님처럼 훌륭한 영웅이 되시겠지……. 후우, 난 언제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레심이라면 꼭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야.=

백려강의 응원에 레심이 흐흐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있는다고 그날이 오는 건 아니니까, 더 열심히 훈련해야겠는걸!=

그리고 간단한 차림으로 훈련용 중검을 들고 거실 한쪽 구석에서 검식을 수련하기 시작하는 레심이다.

백려강은 십년지기 친구이자 수행 호위인 레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레심은 눈치 못 챈 거 같네.’

그 특이한 머리카락 색과 피부색,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환인이라는 남자는 틀림없이…….

=…….=

무릎을 매만지던 백려강은 귀여운 새가 앉았던 자리에 떨어진 작은 깃털을 발견했다.

새끼손가락만큼이나 짧고 작으면서도 하늘거리는 녹색 깃털. 그걸 집어 든 백려강은 비상식량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새를 떠올리며 작게 미소 지었다.

‘나랑은 상관없어……. 아버님과 오라버니들에게 좋은 일을 해주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돌아가면 남남이 되어 생판 모르는 남자의 집을 장식할 꽃이 될 처지다.

자신의 처지에 시무룩해진 백려강이었지만 곧 표정을 고치고 책을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

싫은 현실을 잊는 데는 미궁 모험기만 한 책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호텔로 돌아온 환인은 바깥 상황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계발에 몰두했다.

원래라면 영혼을 성불시키며 빛 구슬을 흡수할 예정이었지만, 그날 이후 영혼사를 찾는 열기가 줄어들긴 커녕 계속 뜨거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미궁 일정이 끝날 때까지 지금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다면 웨이포드의 영혼 성불은 포기하고 다음 마을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물론 훈련에 몰두한다고 호텔에 틀어박혀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쾌유를 기원한다며 호텔 직원에게 부탁해 이엘카타에게 꽃다발도 보냈고 스사의 저택을 찾아 브릴릿과 대련해주며 피가죽 클랜의 규모와 인원수, 활동 방향 및 성향의 정보를 얻었다.

저택의 연무장을 빌려 창술도 몇 번 훈련했다.

그러는 동안 피가죽 클랜과 리아나린 상회는 잠잠했고 하이엔=조드도 마지막에 보여준 모습과 다르게 얼씬도 하지 않았다.

오전 일과, 명상과 정신 집중 훈련을 마친 환인은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시간을 내서라도 하루 1시간은 정신 훈련을 해야겠군.”

율캄에서부터 웨이포드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할 게 없었기에 마차 위에서 틈만 나면 명상과 정신집중 훈련을 해왔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웨이포드에 도착한 뒤 한 달 정도 그 훈련을 빼먹고 이후 훈련을 재개하자 다른 건 몰라도 불필요하게 느껴지던 감정이 상당히 정리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스사에게 느끼던 부채의식, 피가죽 클랜과 하이엔=조드로 인한 거슬림과 성가심, 이엘카타를 향한 소유욕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많이 제거되었다.

지구에 있을 때처럼 한없이 자유로운 수준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불쾌감 없이 다닐 수 있을 정도.

‘이 정도면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는 상황은 많이 줄겠지.’

그리고 점심을 먹으러 비상식량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간 환인은 의외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설마 영혼사님이 2번 공동묘지의 묘지기님이었다니. 깜짝 놀랐어.=

=일부러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신 거였을까?=

=그렇지 않을까? 플뢰는 다들 조용조용하잖아. 영혼사님들도 남들 눈에 띄는 걸 비교적 안 좋아하시고.=

=근데 영혼사라는게 들켜서 마음 안 좋으시겠다. 우리 도시 떠나시는 거 아냐?=

=엥? 영혼사님이 왜 떠나셔? 묘지기셨다며.=

=숨기고 있던 정체가 들켰는데 더 있으시겠어? 자길 모르는 곳으로 떠나시겠지. 하여튼 눈치 없게 누가 밝혔는지 모르겠어. 그냥 얌전히 있으면 영혼사님 어련히 알아서 활동하실 텐데.=

옆의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따르면…….

‘이엘카타가 영혼사로 각성했다는 건가. 어떻게?’

환인도 웨이포드에서 한 달간 생활하며 직업 각성은 나이 서른을 넘기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최소 40살이 넘은 이엘카타가 각성했다고? 수많은 직업 중에서 딱 맞춘 듯한 영혼사로?

환인은 점심을 빠르게 해결하고 곧바로 제2 공동묘지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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