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00화 (100/813)

〈 100화 〉 097 소도시 웨이포드

* * *

하이엔=조드의 차림은 무관에서 보았던 무복 차림이 아닌 가죽상의에 가죽바지, 부츠 차림이었다.

문제라면 팔꿈치와 무릎에 철판이 덧대어져 있고 부츠도 정강이와 발목, 발등에 발가락까지 보호하는 경화 가죽 부츠였다는 것.

즉 당장 싸움을 벌여도 이상할 게 없는 복장이었다.

하지만 표정이나 몸짓에서 공격 의사는 느껴지지 않는다.

“안녕하십니까. 한 달만이군요.”

=정확히는 26일이지만요. 약속도 없이 무례하게 찾아온 것을 사과드릴게요.=

이제부터 무례한 요청을 할 거라는 암시인가. 아니면…….

환인은 잠시 파도처럼 너울거리는 아우라를 두른 하이엔=조드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 뒤에서 조용히 서있는 여성에게 시선을 주었다.

맞춤복인 듯 위아래 검은색 정장을 입은 적색 곰 귀의 여자는 환인의 시선에 앞으로 나서며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리아나린 상회의 수석부장을 맡은 이프리벨이라고 합니다.=

“리아나린 상회라고요.”

=피가죽 클랜의 서브 리더기도 해요.=

끼어드는 하이엔=조드를 이프리벨이라 자신을 밝힌 적색 인웅족 여자가 지그시 쳐다본다.

호랑이 귀의 하이엔=조드도 무심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맞받아치며 눈싸움을 시작한다.

‘배포가 뛰어난 여자군.’

5급 투사인 하이엔=조드의 압박에도 아무렇지 않은 여자. 저 정도가 되니까 무직자이면서 피가죽 클랜의 서브 리더인 거겠지.

루크랑 종족은 수십 종의 동물 유전자로 형성되어있다.

지구의 인간에게 친근한 개나 고양이, 말, 돼지, 소, 닭 같은 종에서부터 독수리, 비둘기, 백로, 올빼미, 펭귄 같은 조류 종도 있고 먹이사슬의 상위권을 차지하는 사자, 호랑이, 곰, 하마, 코끼리 같은 종도 있다.

종간??의 차이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

인서족人??, 쥐 인간이라고 해서 남들보다 1/2, 1/4씩 약한 것은 아니다. 인호족, 호랑이 인간이라고 해서 다른 종에 비해 두 배, 세 배 이렇게 센 것도 아니다.

하지만 덩치 큰 맹수과는 덩치가 작은 초식동물들에 비해 약간이지만 신체적, 정신적으로 강한 면은 있다. 포식자의 유전자가 존재한다고 할까.

그보다.

‘상회는 피가죽 클랜의 양지 사업체라고 보면 되겠지.’

곰과 호랑이가 눈싸움하고 있는 듯한 환상을 잠시 구경하던 환인은 흠, 작은 헛기침으로 두 사람을 일깨우고 말했다.

“일단 자리를 옮길까요.”

“그래서, 두 분은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겁니까.”

호텔에서 제공하는 접대용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환인이 입을 열자 그의 맞은편에 앉은 두 여자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희 리아나린 상회에서…….=

=우리 하이에른 상급 무관은…….=

말이 겹치자 두 여자가 다시 서로를 노려본다. 그 순간 이프리벨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본론을 꺼냈다.

=저희 리아나린 상회가 고객님을 찾은 이유는, 고객님께 귀가 솔깃할 만한 거래를 제안하기 위해서입니다.=

환인은 조금 찡그린 표정의 하이엔=조드를 쳐다보았다.

그가 파악한 하이엔=조드의 성질머리는 좋지 않다.

지금 같은 상황이면 짜증 내거나 심기기 불편하다는 티를 팍팍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날의 참교육이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하이엔=조드는 알듯말듯 미간을 찡그리며 소파에 등을 묻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예의 때문에 일단 얌전히 있는다는 모습이다.

환인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이프리벨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제안일지 짐작은 갑니다만……. 일단 들어보겠습니다.”

=……고객님께서 귀한 녹색 쿠에의 유생을 길들였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저희가 드릴 제안은 군납용 성체 회색 쿠에 한 마리와 금화 200장입니다.=

“…….”

이프리벨은 더 할 말은 없냐는 듯이 바라보는 환인의 시선에 살짝 당혹감을 느꼈다.

무려 금화 200장이다. 이 정도면 이곳 웨이포드에서 괜찮은 정원이 딸린 3층 저택을 구할 수도 있는 거금이다. 그런데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는 태연함이라니.

오히려 옆에 앉아있는 재수 없는 호족 계집애가 놀라고 있지 않은가.

=주도의 희귀 생물 경매소에 출품할 경우 250에서 300장의 금화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경매 수수료나 경매장의 악질적인 작업꾼에게 걸려 더 낮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점, 이동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가 드리는 제안이 절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이해합니다. 녹색 희귀 쿠에가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고 하나 아직 어린 개체이고, 고위 계층과 대면 거래를 하지 않는 이상 리아나린 상회에 판매하는 것이 여러모로 시간을 아끼는 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

아프리벨은 남자의 식견에 살짝 놀라는 한편 직감했다. 이 남자는 쿠에를 팔 생각이 없다고.

‘뭐지? 나와 푸른 고양이 계집애를 두고도 전혀 눌린 기색이 없어. 소수 종족인가 본데 비장의 한 수라도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이 푸른 고양이와 남자는 아는 사이로 보였어. 어떤 관계지?

‘26일 만이라고……. 설마?’

그즈음에 상급 무관장의 딸이 어떤 무직자에게 크게 패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근거 없는 헛소문처럼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기에 신경을 껐었는데.

이프리벨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간다.

“하지만 그 아이는 제 목숨의 은인이기도 하고 가족 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가족을 돈 받고 팔 수는 없는 일이니 양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게다가 단어 하나하나에 지식층의 어휘가 느껴진다. 태도와 몸가짐에서도 가진 자의 여유가 묻어난다.

무직자의 신분으로 찌끄레기에 불과하던 피가죽 클랜을 리더인 아시아=루단과 함께 중심가 뒷골목의 5대 세력까지 키운 이프리벨이다.

그녀의 안목은 환인을 거인이 될 사람이거나, 혹은 이미 거인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체적인 조사에 따르면 이 남자는 근처에 연줄이 없다. 뒷배라고 할만한 배경도 없다. 기껏 해봤자 행상 쪽으로 유명한 스사라는 개인이 있을 뿐.

원래라면 이런 인물과 적대관계를 맺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지만…….

‘하지만 녹색 쿠에를 확보하면 군부에 확실한 줄을 댈 수 있어. 상회를 한층 성장시킬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어!’

각오를 다진 이프리벨이 다소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하려는 순간이었다.

눈이 가늘어진 환인과 시선이 마주친 이프리벨은 온몸의 털이란 털이 모두 곤두서는 듯한 오한과 소름을 동시에 느꼈다.

아가리를 쫙 벌린 이무기infraclass dragon의 앞에 무방비로 서 있는 기분.

“양해, 해주시겠지요?”

귀로 심장이 벌떡벌떡 뛰는 소리가 들린다. 손가락 끝이 차가워지고 삽시간에 맺힌 이마의 식은땀이 또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느, 네…….=

괴물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은 듯한 느낌에 이프리벨은 더듬거리며 힘겹게 대답했다.

악과 깡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이프리벨의 자존심은 웨이포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수준이었지만, 말을 더듬었다는 것에 창피함을 느끼지도 못했다.

환인은 그런 이프리벨의 반응을 보며 속으로 만족했다.

이프리벨의 표정 변화에 수작질을 부릴 생각이라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오랜만에 ‘진심’을 드러낸 건데. 영혼이 남긴 감정의 여파에 휩쓸려 녹슬진 않았을까 했지만 이프리벨의 반응을 보면 아직은 쓸만한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순수한 환인의 관점이다.

이 세상으로 넘어와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수백이 넘는 생명을 자발적으로 빼앗으며 자신의 기질이 더욱 무섭게 연마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환인이었다.

그나마 비상식량의 존재와 율캄의 소녀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체온으로 녹여주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환인은 괴물로 취급되어 율캄에 발을 들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속으로 떨고 있던 이프리벨은 갑자기 눈앞에 들이밀어 진 환인의 손에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듯이 물러났다.

상대에게 실례가 되는 행동이었지만, 환인은 개의하지 않고 물러선 이프리벨의 손목을 잡아와서 억지로 악수하며 말했다.

“이번에는 아쉽게도 제안을 거절하게 되었지만, 다음에는 서로 웃는 얼굴로 거래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거절에 앙심을 품고 보복하면 서로 웃으며 만나진 못할 거다.

그렇게 해석한 이프리벨은 목각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급히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환인은 약간 후줄근해진 모습으로 응접실을 나가는 이프리벨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리아나린 상회라…….’

중심가에는 대충 열두 개의 상회가 존재한다. 그중 대형 상회가 세 곳, 중형이 다섯 곳, 소형이 네 곳이다.

상회 중 유명한 곳을 꼽으라면 촌락과 마을간의 고품질 행상 물류 개인 운송으로 유명한 스사 상회.

중심가와 일반 구역에 대규모 생활 잡화를 유통하는 알펜시스 상회.

주도와 성도의 최신 유행을 전파하는 리아나린 상회.

이 셋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리아나린 상회는 웨이포드에 존재하는 대형 상회 세 곳 중 하나.

‘귀찮은데.’

달칵, 문이 닫히는 까지 본 환인은 겁먹은 새끼 고양이처럼 뻣뻣해진 하이엔=조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당신은…….”

=결혼해주세요.=

“……예?”

=네?=

하이엔=조드는 환인의 어이없어하는 반문에 그제야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얼굴을 확 붉히며 벌떡 일어나 손을 엉망으로 휘저었다.

=아, 아앗. 아니 그게 아니에요! 말이 잘못 나온 거예요! 아아니! 그렇다고 싫다는 뜻은 아니고, 그게 저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횡설수설하는 하이엔=조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목소리가 천천히 작아지다가 입을 꾹 다문다.

그리고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숨을 고른 하이엔=조드는 한층 진정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 이름이 어떻게 돼요? 저번에는 저만 자기소개를 했지, 당신 이름을 듣지도 못했어요.=

“환인입니다. 성이 환, 이름이 인입니다.”

=인…… 왠지 느낌 있게 울리는 이름이네요. 좋은 느낌이에요.=

“고맙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할게요. 그날 이후 당신을 잊을 수 없어서 찾아다녔어요. 처음에는 단순히 인정받고 싶은 마음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걸 방금 깨달았어요. 반했어요. 한눈에 반하고 말았어요. 무직자이면서 창술과 방어술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그 무예. 거기에 더럽고 냄새나는 주제에 자존심만큼은 7급인 곰탱이를 단숨에 찍어눌러 버리는 기백과 절 패배시키고 자랑하지 않는 겸손함까지……. 당신은 제 이상형이에요. 그러니 저와 결혼해주세요.=

“거절하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났다면 저는 이만.”

긴 고백에도 불구하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당한 하이엔=조드는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갑자기 프로포즈라니.’

환인은 뜬금없는 하이엔=조드의 프로포즈에 황당해하며 객실로 돌아왔다.

요즘은 드라마에서도 쓰지 않는 ‘날 때린 건 니가 처음이야. 반했어’다. 그 아가씨는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 걸까.

“그래도 꼰대질을 수용하는 순수함은 있나.”

쿠에?

“아무것도 아니다.”

쿠우.

다리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는 비상식량을 쓰다듬던 환인은 겁먹은 듯이 도망치던 이프리벨을 떠올렸다.

경고는 확실히 먹혔다. 이제 이후 반응을 확인할 차례인데…….

‘리아나린 상회인가.’

전면에 상회의 이름을 대고 나올 정도면 비법적인 일을 할 생각은 없다고 봐야겠지만, 하이엔=조드가 이프리벨이 누구인지 꿰뚫어 본 게 마음에 걸렸다.

그 정도로 알려진 상태라면 클랜과 상회가 손잡고 같이 움직일 수도 있다는 뜻이고, 그리되면 매우 귀찮아진다.

정신을 차린 이프리벨이 억하심정에 상회가 아니라 피가죽 클랜으로서 활동을 개시할 경우에 대한 수를 계산해본다.

“…….”

간단한 쪽으로는 이래저래 자신이 영혼사임을 밝히는 플랜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스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별문제 없이 잘 해결되리라 예상하지만, 이 이상 의존도를 높이는 것은 내키지 않고…….

‘뒷세계 조직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겠군.’

환인은 영혼사로서 직업을 밝히지 않는 선에서 피가죽 클랜을 분쇄할 대략적인 계획을 구상하며 진주색 돌멩이를 쥐고 영혼 구슬 핸들링을 시작한다.

처음 훈련을 시작했을 때는 왼팔에서 10cm 정도 떨어진 곳까지만 의도한 대로 움직이던 구슬이었는데 지금은 몸에서 50cm까지 떨어지는 수준.

「꺄하하하.」

「히히히.」

「오아아아~.」

이런 훈련을 시작한 이유 중 하나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핸들링은 영혼 구슬 컨트롤 훈련도 되지만, 자기들이 말하고 싶을 때만 말하는 정령의 목소리가 핸들링 훈련을 할 때만 들린다는 이유가 적지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물론 완성된 문장으로 말하는 게 아닌 웃거나 재미있어하는 반응이 대다수였지만.

훈련에 매진하다 보니 금세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왠지 호텔 로비에 하이엔=조드가 있을 것 같아 환인은 호출 벨을 울려 룸서비스를 주문했다.

마침 이런저런 일로 호텔 메이드 중에 가장 친하다고 생각되는 웬나가 찾아왔기에 그녀를 무릎에 앉혀 아랫배를 살살 어루만져주면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혹시 로비에 푸른 머리카락의 인호족이 있었습니까?”

=네……. 올라오면서 봤는데 소파에 앉아계셨어요.=

역시.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수줍어하며 꼼지락거리는 웬나를 통해 리아나린 상회에 관해서 물어본 환인은 이프리벨의 수완이 상당함을 알 수 있었다.

피가죽 클랜에 대해서도 알고 있던 웬나가 리아나린 상회는 평범한 상회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인이 피가죽 클랜과 리아나린 상회간의 커넥션을 모를 정도라는 건가.’

하이엔=조드가 알아본 것은 상급 무관장의 딸이라는 인맥이 있어서?

상회 이름으로 불법을 저지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드는 환인이었지만 사람 일은 모른다. 대비는 해두는 것이 좋다.

웬나를 통해 로비 상황을 전해 들은 환인은 오늘 하루 밖으로 나갈 생각을 깔끔하게 접고 초능력 훈련에 매진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를 돕지 않았다. 오후에 레심이 환인을 찾아왔던 것.

=아가씨는 환인 님이 호위를 맡아주시길 바란다고 전하셨습니다.=

“……저도 아가씨가 어떤 분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확실히 전하셨습니까?”

=저…… 미궁에 들어가기 전 한 번 만남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설득을…….=

레심은 환인의 표정을 살피며 말하다가 안좋은 느낌을 받고 고개를 팍,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를 모시는 입장에 그런 이야기를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품이 정말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막돼먹은 여느 영애들과 다른 분이시니 부디!=

“그런 훌륭한 분이 신분을 숨겨가면서까지 미궁을 탐험해보고 싶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어떨지…….”

지적받은 레심이 우는 듯, 혹은 웃는 듯 이상한 표정을 짓다가 목의 갈기를 쓸어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아가씨가 그러시게 된 원인에 제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

이어진 이야기는 평범함과 거리가 먼 환인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 부류였다.

고족 가문의 막내인 레심은 가문을 이어받을 장남이나 그런 장남을 뒷받침해줘야 할 차남들보다 가문의 율법에서 꽤 자유로운 몸이었다.

의무가 없으니 권리도 없는 식이다.

그래서 레심은 어렸을 때부터 가문을 벗어나 세상을 돌아다니는 모험가, 탐험가를 꿈꿨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문의 어른 중에 그런 식으로 유명해진 모험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심은 그 어른을 목표로 열심히 몸을 단련하고 지식도 모자람 없이 공부했다.

운이 좋아 어린 나이에 직업자로 각성했고, 가문의 어른들도 싹수가 보이는 레심에게 약간의 지원을 해주기 시작하며 레심은 꿈이 점차 가까워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던 레심도 어느덧 사교계에 데뷔할 나이가 되었다.

가문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며 의무도 발생했기에 소속 가문보다 상급인 같은 파벌의 가문이 주최한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고, 거기서 백려강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둘은 공통 관심사가 있어 쉽게 가까워지게 되었다.

물론 지위의 차이가 있었기에 연애라던가 남녀 사이로 발전하는 일은 없었다. 거기에 관해서는 아가씨도, 레심도 확실한 선이 그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둘은 좋은 친구 관계가 될 수 있었다.

새로 나타난 미궁 소식에 함께 호기심을 보였고 어느 고위 미궁을 돌파한 모험가와 탐험가의 소식에 함께 흥분했으며 어떤 공방에서 어떤 마도기가 출시되었다는 소식에 직접 찾아가 구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가씨는…… 새장 속의 작은 새 같은 분입니다. 자유도 없이 저택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귀부인으로서 배워야 할 것만 배우다가 나이가 찼을 때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가게 되는 거죠. 그런 아가씨에게 미궁이란 하나의 자유였습니다. 갑갑한 새장에서 조금이나마 바깥을 느낄 수 있는 자유였죠.=

“…….”

=하지만 아가씨가 결혼적령기에 이르며 그런 자유도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가문 간 정략결혼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며 행동에 더더욱 제약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지요. 매파가 오가기 시작하면 그때는 감옥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그래서 정식 혼담이 나오기 전에, 결혼이란 족쇄에 얽매이기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궁을 탐험해보고 싶다는 거였군요.”

=예……. 적당한 미궁을 선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에 여기까지는 쉽게 왔지만, 문제는 저와 아가씨 두 명이서 미궁을 들어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위험하다는 거였습니다. 그 뒤는 환인 님께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아가씨의 신분상 아무나 파티로 받을 수는 없다. 아가씨는 척 봐도 귀하게 생겼기에 트러블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궁 안에서 벌어진 일은 당사자밖에 모른다.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행정관의 의뢰 알선을 통해 충분히 검증되고 알려진 실력자를 구하는 것도 곤란하다.

아가씨와 자신은 성에서 몰래 빠져나온 입장.

=가문에서 저와 아가씨를 찾고 있을 겁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그 즉시 잡혀서 돌아갈 테고 그다음은 없어지겠지요. 저도 아가씨를 함부로 데려 나와서 큰 벌을 받을 게 예정되어있고요.=

“그런데도 아가씨에게 미궁을 경험시켜드리고 싶은 거군요.”

=그 한 번이 아가씨의 남은 평생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줄 테니까요.=

환인의 눈에는 레심이 거짓말하는 걸로 보이지 않았다.

환인과 호위 계약이 틀어지면 그냥 다 내려놓고 돌아갈 생각이라고 고백한 레심이다. 미궁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혹여 아가씨의 몸에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한 거다.

그렇다고 해도 남의 말만 믿고 수락할 생각은 없는 환인이었다.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아가씨를 보러 갈까요.”

=끄응…….=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받아주지 않으시다니.

레심의 심란한 표정을 본 환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응접실을 나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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