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97화 (97/813)

〈 97화 〉 094 웨이포드 미궁 병영

* * *

시장의 일종을 형성하고 있는 공터를 충분히 둘러본 환인은 다음으로 미궁 병영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 근처의 술집에 들어섰다.

입장하자마자 왁자지껄한 소음이 밀어닥친다. 이제 오전 10시인데 이미 자리가 가득 찼다.

=어서 오세요! 한 분이신가요?!=

“예.”

=자리 안내해드릴게요~!=

명랑한 느낌의 여종업원을 따라가며 주위를 둘러본 환인은 예상과 전혀 다른 술집 내부 분위기에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깔끔하군.’

술집 내부도, 내부를 돌아다니는 종업원들도 현대인의 기준으로 봤을 때 합격점을 주고도 남을 정도다.

시대상을 보면 양초 같은 희미한 광원이 어두컴컴한 내부를 작게 비추고 음침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이미지가 연상되는데, 실제로는 현대의 호프집과 비슷한 분위기와 내부 환경이었다.

천장에는 여러 개의 나무 샹들리에가 환한 빛을 내뿜으며 내부를 밝게 비추고 있고 사람들도 간편한 차림으로 차가운 맥주와 안주를 즐기거나 미궁에서 바로 나온 듯, 갑주 차림으로 술을 들이켜는 사람도 있다.

같은 면 셔츠에 면바지 복장의 사람도 다수였는데 환인은 그들이 군인임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군.’

이런 시대에 군인이라 하면 나름 기득권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그들이 까칠한 느낌 없이 순수하게 술을 즐기는 모습인데 술집을 찾은 손님들이 예의 없이 굴지 못하는 거지.

바의 1인석에 앉자 주변이 시끄러운 탓에 여종업원이 인사하듯 허리를 숙이고 큰 소리로 묻는다.

=주문은 뭘로 하시겠어요?!=

상체를 숙인 탓에 라운드넥의 셔츠 앞섬이 늘어지며 깊은 가슴골이 노출되었지만, 환인은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물었다.

“차가운 맥주 한 잔. 안주는 아가씨가 추천하는 걸로 부탁합니다.”

팅, 열철화 한 닢을 튕겨주자 여종업원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가슴이 출렁일 정도로 허리를 힘차게 숙이며 대답했다.

=주문받았습니다~! 특별히 시원한 걸로 가져다드릴게요!=

이곳은 팁 문화가 번성한 세상.

술집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팁으로 철화 한 닢을 내는 걸 뛰어난 눈썰미로 포착한 환인이다.

호감도 작업을 위해 열철화 한 닢을 팁으로 내긴 했지만, 1,000원에 저리 좋아하는 걸 보니 부익부 빈익빈의 차이가 더욱 깊이 와닿는 느낌이다.

아무튼 잠시 기다리자 여종업원이 살얼음이 살짝 낀 1,000cc 주석 잔과 고기 큐브를 채소와 함께 볶은 안주를 가져왔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필요하신 게 있으면 또 불러주시고요!=

“잠시.”

환인은 여종업원이 떠나기 전에 손을 들었다. 이미 크고 아름다운 팁을 받은 여종업원은 츄르 냄새를 맡은 고양이처럼 잽싸게 환인의 옆에 바짝 붙어 길고 가느다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그러고 보니 귀가 퓨마와 비슷하군.’

고양이가 아니라 암사자일까. 그런 여종업원의 손바닥에 열철화 한 닢을 더 올려주며 여러 가지를 물었다.

빛이 닿지 않는 미궁에는 어떤 괴물이 나오는지.

보통 몇 명이 파티를 이루는지.

어떤 직업자가 많이 들어가며 미궁의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

미궁 병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누구인지 등등.

“병영 사령관님의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정말로 그렇게나 강합니까?”

=7급으로서 6급 이형종을 홀로 토벌해내신 분이시니까요. 부관이신 아르팁 에이커님도 7급이시지만 역시 길리암 차포트 7급 무성님에게는 못 미치시죠. 성주님의 오른팔이시기도 하고 웨이포드 군사령관이시기도 하니까요.=

“하이에른 조드 무관장님과 비교하면?”

=쉬이잇……! 손님, 여기서 그런 말 꺼내면 위험하니까요! 군인님들한테 길리암 차포트님은 영웅이시니까요?!=

“아…… 예.”

그만 일해야 한다며 여종업원이 떠나가고 환인은 입술이 얼어버릴 듯이 차가운 맥주를 쭈욱 들이켰다.

진한 홉 향기와 함께 무거운 맛이 차가운 냉기를 머금고 목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단숨에 잔의 절반을 비운 환인은 브레인 프리즈, 아이스크림 두통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호텔이나 스사의 집에서는 세련된 와인, 싱글 몰트 위스키 등이 나와서 이렇게 머리가 깨질 듯이 차가운 맥주가 참 오랜만인 환인이었다.

“…….”

종업원에게 괜찮은 정보를 모으기란 어렵다. 역시 관련 직종 종사자가 가장 좋은데.

아직 따끈따끈한 고기 큐브를 채소와 함께 찍어 먹으며 잠시 고민하던 환인은 결정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파티가 괜찮아 보이는군. 다들 직업자에 표정도 좋고 차림도 깔끔하고…… 허리춤에 찬 무기도 손질이 잘 되어있어.’

기본이 된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해져온다.

“실례합니다.”

그들 남녀 일곱 명의 면면을 살펴본 환인은 슬쩍 후드를 벗고 그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그 사람들과 친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술과 안주를 쭉 돌린 뒤 자신은 멀리서 여행 온 학자라고 소개하며 이 테이블의 직업자 분들이 훌륭한 모험가들로 보였다고 얼굴에 금칠해주면 끝.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했지만, 지구의 회사 생활을 하며 습득한 처세술과 화술로 레힐 근방에서 벌어진 미궁 역류 현상에서부터 웨이포드 근처에서 우르거를 만난 경험담을 살짝 각색해서 들려주자 이야기에 흠뻑 젖은 사람들은 금방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친해진 뒤에는 적당히 직업자들로서의 자존심을 추켜세워주며 vs논쟁, 혹은 최강 논쟁이라고 부르는 떡밥을 살짝 뿌렸다.

3급 직업자라면 어느 정도로 강해야 할까요.

4급 직업자는 정말로 3급 이형종 몇 마리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습니까?

5급은 마수 떼 십수 마리와 맞서 싸우더군요…….

여자 직업자들은 그저 피식 웃으면서 설렁설렁 이야기한다면, 남자들은 수컷 특유의 슬픈 본능에 따라 3급 직업자들은 얼마나 센지, 누가 무엇을 얼마나 죽였지만 내가 그보다 더 많이 잡았다던가 하는 무용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4급 직업자 관련 소재도 마찬가지였고 이야기가 5급으로 넘어갔을 때는 환인이 앉은 테이블 근처의 사람들까지 끼어들어 논쟁이 가열되기 시작했다.

5급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어느 무관의 상급 교관이 어느 미궁에서 몇 층까지 돌파했더라. 어느 5급 전사가 상급 무관 셋과 싸워 이겼다더라…….

여기까지는 경험담에 입각한 논쟁이었다. 나름 이성을 유지하는 토론의 범주라고 할까.

환인은 여기에 끓는 기름을 부어버렸다.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열띤 토론을 하던 사람들 모두에게 허연 거품이 끓는 시원한 맥주를 몇 잔씩 돌려 분위기를 더욱 끌어올린 것이다.

술이 들어가 이성이 조금씩 마비된 사람들은 설정 싸움을 하는 팬덤처럼 자신의 우상인 6급의 누구가 어디서 어떤 싸움을 벌였다더라, 자신은 7급 누구의 팬인데 그 누구가 어디서 6급 이형종을 때려잡았다더라 같은 카더라 소문을 보따리장수처럼 풀기 시작했다.

TV나 인터넷이 없는 세상이다.

이런 흥미롭고 재미있으며 자신이 몸담은 세계의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니 점잔빼고 이쁜 척, 예쁜 척 앉아있던 여자들까지 끼어들기 시작하며 분위기는 더욱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와하하하~!!

크하하핫!

꺄아~!

입구 쪽 바의 구석으로 물러나 있던 환인은 최강 논쟁을 끝내고 잔뜩 술에 취한 채 웃고 떠드는 술집의 사람들을 구경하며 생각에 잠겼다.

‘7급의 소문은 생각 이상으로 많아. 직업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대충은 알고 있을 정도로…… 하지만 8급은 자그마한 소문조차 듣기 힘들군.’

그때 어디선가 타악기와 현악기를 가져온 사람들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흑인 레트로 펑크 느낌의 반주가 시작되자 사람들의 반가운 표정과 함께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쿵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흥이 걷잡을 수 없이 술집을 채우기 시작하자 얼굴이 발개질 정도로 취한 여자들이 나무 테이블 위에 올라가 클럽 댄스 같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세상 여자들은 다들 미녀다.

그런 미녀들이 음악과 환호성 속에 춤을 추자 남자들은 손뼉과 휘파람을 불고 손뼉까지 치며 환호한다.

“……?”

순간 자신이 현대의 호프 겸 클럽에 들어온 건가 착각을 일으켰을 정도로 이질적인 분위기였다.

가슴을 진동시키는 음악 소리 속에서 클럽 댄스를 추던 여자들이 급기야 상의를 벗어 던지고 브래지어까지 풀어서 생가슴을 드러낸 순간 환인은 술집이 굉음에 터져나가는 줄 알았다.

클럽 음악처럼 쿵작거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귀따가운 환호성과 같은 여자들의 야유.

가슴을 깐 여자들이 Girl`s Love를 연상케 하는 농밀한 춤을 추는데 천장의 샹들리에 불이 훅­ 꺼지면서 적색, 청색, 황색 불이 번갈아 가며 번쩍이기 시작하니 분위기가 달아오르다 못해 끓는다.

잠시 후에는 마치 클럽이 된 것처럼 짐승남과 여자들도 테이블 아래에서 춤추며 놀기 시작했다.

환인은 이렇게 감정이 고조된 사람들을 보고 신기해하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고 민달팽이처럼 얽히는 홀 중심 테이블 위의 여자들을 구경하며 생각에 잠겼다.

7급 직업자의 강함은 대체로 비슷비슷하다.

홀로 6급 대형 이형종과 싸울 수 있을 정도의 강자들이라는 게 주류이고 그중 6급 대형 이형종과 혼자 싸워 이길 정도면 7급의 한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지구와 전혀 연관이 없는 비교법이라 느낌이 잘 안 오는군.’

대충 지구의 군인과 비교하면…….

운용법은 제외하고 단순 위력으로 보았을 때 1급은 모르겠고 2급은 권총을 든 군인 정도.

3급은 기관단총이나 소총, 4급은 대전차 미사일 정도일까.

5급부터는 병종 자체가 바뀌는 느낌이다.

5급 전사나 투사는 장갑차. 6급은 소형 전차 정도에 7급은 중전차 정도일 것 같다는 게 환인의 짐작이었다.

8급은 이야기만 들으면 전투기 같은 느낌이었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8급 한 명이 피아 합쳐 1만가량의 군대가 동원된 전장의 판도를 바꾼다고 하니까.

5급과 6급, 7급도 급수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나지만, 7급과 8급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는 느낌이다.

6급이 다수 모이면 7급도 이길 것 같은데 8급은 7급이 아무리 모여도 이기지 못할 거란 뉘앙스가 사람들 입에서 나왔으니 틀리지 않을 거다.

그런 8급은 루크랑 종족 전부를 합쳐도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을 거라는 게 최강 논쟁 속에서 얻은 환인의 결론이었다.

웨이포드는 소도시다. 이 위로 중급 도시가 있고 그다음에 성도가 있다. 주도는 수도 역할을 하니까 제외.

그런 웨이포드의 상위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성도 파르히스트에만 8급 무성이 한 명 있다.

주도에도 몇 명 더 있다는데 환인은 최소 성도마다 1명의 8급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주도쯤 되면 서너 명, 어쩌면 9급도 있지 않을까.

환인의 근거 없는 직감이었다. 소도시나 중급 도시와 차별성이라면 그런 것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쿵쿵, 쿵두둥쿵­

잠깐 사이 술집은 업종 자체가 바뀌어있었다. 종업원들이 어느새 테이블을 구석으로 치워버리고 술집 가운데를 비워놓아 손님들이 춤추고 놀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환인은 근처에서 춤판이 난 사람들을 구경하며 살짝살짝 어깨춤을 추는 여종업원과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손을 작게 들었다.

=넵! 부르셨나요?!

“계산서 있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종업원마다 담당 손님이 정해져 있는지, 잠시 후 처음 환인을 맞이한 종업원에게서 계산서를 받은 환인은 카운터에서 술값을 지불하고 떠들썩한 술집을 나왔다.

거의 200잔에 가까운 술을 샀는데도 1은화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한국 돈으로 치면 100만원 정도.

‘한 잔에 5000원, 5열철화인 셈인가. 질 좋은 흑맥주에 자릿값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니군.’

=야. 술집에 분위기 제대로 올랐다더라. 얼른 가보자.=

=우와, 여기까지 소리가 들려오네. 술집 주인장 오늘 뭐 좋은 일 있었나?=

술집을 나와 걸어가는 환인 주위로 사람들이 지나가며 나누는 대화가 들린다.

아무튼, 2시간 정도 술집에서 머무른 덕에 미궁 밖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포함, 직업자의 등급 간 무력 차이 정도도 대강 알게 되었다.

그걸 위해 1은화를 지출했지만 아깝진 않았다.

이런 등급별, 개개인별 강함에 대한 정보는 무척 예민한 것으로 취급되기에 무관 같은 곳에 교육받을 때를 제외하면 오랜 시간 직접 현장을 구르면서 얻는 수밖에 없으니까.

빛이 닿지 않는 미궁의 위험도는 딱 예상했던 정도였다.

웨이포드에서 상식을 쌓으며 간간이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예상했던 수치가 많은 직업자들이 방문하는 술집 여종업원의 이야기와 대부분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빛이 닿지 않는 미궁의 심도??는 17층.

16층부터 미궁 내부에 삼림이 펼쳐지는데 17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막혀있고 근방에 웨이포드 정규 전사단이 주둔한다고 했다.

혹시 모를 출입자들이 심장을 부숴서 미궁을 박살 내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몇 가지 의문이 있지만 그건 나중에 확인해보기로 하고.’

16층까지 내려가는 데는 미궁에 적응한 4급 직업자 다섯 명이면 충분히 내려갈 수 있을 정도.

미궁의 지도도 완성된 상태라 5열은화만 지불하면 1층에서 15층까지 지도도 얻을 수 있다.

내부에 출몰하는 것은 하급 무척추 이형종 계통과 덩치가 1m 정도 되는 이족보행 형 이형종. 그리고 아주 가끔 등장하는 반전 개체.

‘신경독과 혈액독의 해독제, 중하급 치료제와 질병치료제 정도만 갖추면 된다고 했지. 나와 이실리테 정도면…….’

준비를 끝마쳤다는 가정을 했을 때 15층까지 내려갈 수 있겠지.

4급 같은 3급 미궁인만큼 피가 뜨거워지는 경험은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미궁의 첫 경험은 이 정도가 좋을지도 모른다.

‘아니, 첫 경험을 6급 삼림형 미궁에서 이미 하긴 했지만…….’

솔직히 거긴 어디까지가 미궁이고 어디까지가 바깥인지 알 수가 없어서 미궁이라는 느낌이 없었다.

괴물하고 짐승이 좀 많이 모인 곳을 험지를 헤쳐나왔다는 감상뿐.

=저기! 앞에 가시는 검은 후드 망토 분!=

그만 돌아가기 위해 미궁병영의 유일한 출입구로 향하던 환인은 뒤에서 자신을 특정해서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짙은 회색 모피의 늑대 머리 남자가 밝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중심가의 남성용 고급 옷가게에서 샀을 법한 차림에 전사의 아우라도 두르고 있었는데, 웨이포드에서 매일 수천 명 이상 얼굴을 본 덕분에 대강이나마 나이대를 특정할 수 있게 된 환인은 상대가 젊어도 너무 젊다는 것을 눈치챘다.

많아봤자 10대 후반, 어쩌면 10대 중반일 수도.

‘있는 집 자식인가.’

환인이 멈춰서자 남자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 말한다.

=아, 역시! 하이에른 상급 무관에서 상급 권술 교관님을 기술로 누르신 분 맞으셨군요.=

“제 입으로 대답하기 민망한 화제군요.”

=음. 저였다면 경력으로 삼기 위해 소문을 한참 퍼트리고 있었을 텐데 역시 겸손하십니다.=

그리 말하는 회색 인랑족의 표정은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환인은 그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미궁 앞에서 아는 척을 해왔다는 것은 미궁과 관련된 일인 거 같은데. 이 반응을 보면 기술의 가르침을 요청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설마 파티 제의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레심이라고 합니다. 검전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환인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그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군요.”

이 대답에도 레심이라 자신을 소개한 회색 인랑족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하얀 건치가 빛날 정도의 미소를 지었다.

‘옷차림이나 장비도 무척 좋은 편이고. 방어술 지도를 부탁할 셈인가.’

그 이유가 아니라면 말을 걸어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레심이 정중하게 부탁을 해온다.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허락하신다면 제가 점심을 사겠습니다.=

만약 평범한 직업자가 말을 걸어왔다면 환인도 정중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 어린 인랑족, 평범하지 않은 옷차림, 웨이포드에서 머무르며 몇 번 들어보지 못한 예의 있는 말투 세 가지 요소가 섞여 환인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았는가, 하는 궁금증이다.

“어떤 말씀을 하시려는지 궁금증이 들어서 거절할 수가 없군요.”

=아……. 하하, 환인 님께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여기서 나눌만한 이야기가 아니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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