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093 웨이포드 미궁 병영
* * *
이제 와서 찾고 있다고?
“본때를 보여준 일 때문인가 보군요.”
담담하게 대꾸하자 고개를 갸웃한 스사가 말했다.
=브릴릿에게 그 이야기도 들었습니다만, 그저께 저택으로 찾아왔을 때 본 바로는 원한 때문에 환인 님을 찾는 것은 아닌 듯 보였습니다. 팔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딱히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여길 찾아왔었습니까?”
=예. 브릴릿의 특징은 비교적 드문 편이니까요. 제 애인이라는 것은 금방 알아냈을 겁니다. 그래서, 그날 찾아온 교관은 브릴릿에게 환인 님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고 질문하더군요. 손님의 정보는 밝힐 수 없다는 말로 대답을 거부했습니다. 하이엔 교관도 수긍한 얼굴로 물러났고요.=
“이상하군요. 상급 무관 정도면 사람을 풀어서 절 찾는 것은 쉬웠을 텐데.”
=바로 그겁니다. 저도 그 점 때문에 원한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죠.=
환인은 그날 이후 계속 같은 후드 망토를 쓰고 다녔다.
중심가를 벗어난 일도 없었고 매일매일 돌아다녔으니 사람을 풀어 정보를 수집했다면 자신이 올츠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정도는 쉽게 알아냈을 텐데 왜 자신이 아니라 브릴릿을 찾은 걸까.
과정이야 어쨌든 무관장의 딸을 두들겨 팬 것은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 무예를 익히는 무인?人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딱히 이 세상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구에서도 무술을 배우는 사람들의 자존심은 일반인보다 높은 부분이 있다.
그 후 상급 무관 소속의 교관이든 조교든, 무관 소속의 사람에게 습격받을 것도 염두에 뒀었지만, 일주일이 넘어가도록 조용해서 그 뒤로는 잊고 있었다.
패배한 원한을 곱씹다가 이제 와서 움직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당시 하이엔=조드에게서 분노나 증오는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다 무관 소속의 인물들이 아니라 당사자가 직접 움직였다는 게 신경 쓰인다.
환인은 부정적인 쪽으로 상황을 가정하고 머릿속 퍼즐을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상급 무관 정도면 웨이포드 상류 사회에도 연이 있을 텐데.’
그곳의 교관이나 근무자들은 무섭지 않지만 고족이 얽힌 추격은 성가실 게 틀림없다.
이런저런 대응을 구상하다가 집어치웠다.
아무래도 보복을 위해서 자신을 찾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을 찾는다면 그 이유는…….
‘명예 회복을 위한 재대련.’
가장 유력한 가설이라면 리벤지 매치를 위해서다.
어쨌든 별 신경 쓸 일은 아닌듯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스사에게 부탁했다.
“오늘부터 이리저리 좀 돌아다닐 생각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비상식량을 노린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호텔에 혼자 두기 그렇더군요. 이실리테가 나올 때까지 어딘가에 좀 맡겨두고 싶은데, 괜찮은 곳이 있겠습니까?”
=그런 거라면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브릴릿도 있고 호위도 상주 중이니 간단히 뺏기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따로 조금 모은 정보에 따르면 피가죽 클랜이라는 곳이 노린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피가죽 클랜이요……? 이상하군요. 그 클랜은 중심가로 진출한 이후 불법적인 일에 손을 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클랜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군요.”
=하하. 뒷세계 조직은 모두 알아두어야 상인으로 먹고살기 편하니까요. 그래도 중심가의 조직들 뿐이고 일반 구역은 저도 손 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는 이야기였다.
중심가의 조직은 일반 구역에서 활동 중인 조직들의 상위호환. 중심가의 다섯 조직과 얼굴을 터놓으면 아래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더욱이 중심가의 조직은 강도, 도적질 같은 비합법 행위에 일절 손을 대지 않고 명목상으로 합법적인 일만 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희소성이 큰 물건을 거래해 시세차익으로 돈을 번다거나 고리대금업을 한다거나 향정신성 물약이나 가루 등을 거래한다거나.
고리대금업자들은 환인도 한 번 본 적이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자 스사가 조심스럽게 조언을 건넸다.
=피가죽 클랜의 아시아 루단은 우리 성주님은 아니지만, 다른 호족님에게 성도 하사받은 하급 고족입니다. 자신의 체면이 깎이는 일은 질색하는 사람이니 아마도 녹색 쿠에의 정보를 입수한 클랜이 사실 여부 확인과 소유 대상 조사 중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환인 님이 얻으신 정보는 아마 그 과정에 목격한 정보였겠지요.=
“그럼 조만간 저와 직접 접촉하려 들겠군요.”
=예. 그때 환인 님을 만나려 할 인물은 아마 조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일 겁니다. 환인 님께서는 벌써 20일 넘게 올츠 호텔에 투숙하시며 유흥으로 고급 창관을 다니셨죠. 그 자금력이나 환인 님의 품위 등을 생각해보면 조직 내 고위 인물이 직접 나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서 신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 환인 님은 직업을 숨기지 마시고 솔직하게 드러내시는 걸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마침 도시에 영혼사님의 방문 소식이 크게 번졌으니 그들도 환인 님의 거절을 절대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고려해보겠습니다.”
비상식량은 스사의 자식들과 1층 홀에서 뛰어놀며 장난치고 있었다.
날개를 파닥거리며 조류답지 않게 쏜살같이 달리는 비상식량의 뒤를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면서 쫓아다닌다.
=꺄하하! 잡았다아~!=
쿠엣? 쿠우!
퍼더더덕!
=꺅?!=
=우와?! 날았어!=
=거기서~! 아하하하!=
닭처럼 퍼더더덕 느릿하게 날아오른 비상식량이 2층에서 계단으로 내려오던 환인의 품에 안겨든다.
비상식량을 쫓아 올라온 아이들은 뒤늦게 환인과 스사를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후다닥 계단을 내려갔다.
“당분간 낮시간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얼마든지 맡아드릴 테니 부담 가지지 마십시오.=
아이들 앞에 비상식량을 내려준 환인은 머리와 등을 토닥여주면서 말했다.
“저녁에 데리러 오마. 그동안 말썽 피우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쿠웃! 쿠우엣!
나도 따라갈 거라며 홰를 치는 비상식량이었지만 환인은 허락하지 않았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 널 데려갈 수는 없다.”
꾸우…….
시무룩해져서는 정문까지 쫓아온 비상식량에게 환인은 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고 저택을 나섰다.
촌락에는 친족 경찰이라 할 수 있는 자경단이 존재한다.
임무는 단순하다. 가끔 발생하는 주민들의 다툼 중재나 출입하는 인물들의 검문 검사 같은 일이며 간혹 출몰하는 짐승이나 괴물의 퇴치도 한다.
마을 급은 보다 익명 성을 띠게 되며 자경단에서 순찰대로 바뀐다.
하는 일은 자경단보다 좀 더 다양하다.
출입자들의 검문과 검사는 물론 범죄 감시와 단속, 화재 순찰 및 마을 주변의 위협 요소 배제 등이 있다.
도시급이 되면 순찰대에서 한층 더 진화해 시 외곽에 병영이 서고 군대가 주둔한다.
군대라고 하지만 도시의 주인인 호족의 사설 병력이라 부르는 쪽이 더 가깝다.
하는 일은 순찰대의 업무에 더해 도시 인근 미궁의 안정화 및 도시 근방 지역에 똬리를 튼 도적, 산적, 맹수나 간혹 출몰하는 괴물의 소탕, 퇴치, 도시 소속 마을, 촌락 주변의 순찰 기동 등이다.
소도시 웨이포드의 주둔 병력은 약 7천.
인구 30만의 도시에 7천이면 좀 적은 게 아닌가 싶지만, 그중 500명이 직업자임을 감안한다면 군단급 병력과 비슷한 전투력을 지닌 것과 다름없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매년 소집 훈련을 치르는 만큼 유사시에 동원할 수 있는 군인의 수는 15만을 훌쩍 넘어간다.
남녀를 불문해서 소집하기에 가능한 숫자다.
처음 이 지식을 얻은 환인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혼성군의 고질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했지만, 현실은 자신의 예상과 달랐다.
이 세상의 남자에게 여자는 지키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저 동등한 인격체로 대할 뿐이기에 전쟁이 벌어져 아군인 여자가 사망하면 남성 특유의 기질로 분노해서 닥치고 돌격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오히려 여자 쪽이 ‘감히 우리 남자를 죽이다니!!’하고 광분해서 그에 관한 정신교육을 한다던가.
아무튼 웨이포드 미궁 병영은 웨이포드 서문에서 2km 떨어진 지점에 건설되어있었다.
웨이포드에 인접한 4급 미궁, 빛이 닿지 않는 미궁 때문이다.
=여기, 빛이 닿지 않는 미궁의 출입 허가증입니다.=
“고맙습니다.”
행정관의 미궁 출입 담당 관리가 내민 직사각형 금속패를 받아든 환인은 도시가 돈을 참 잘 번다고 생각했다.
도시 외성문을 통과하기 위한 통행세는 2동화(2만원)이며 중심가로 들어가는 제2 외성문을 통과하려면 신분증이 필요하다. 발급받는데 5열은화(5천만원)이다.
그리고 미궁 출입 허가증 발급 비용은 1열은화(1000만원). 1년에 한 번씩 재발급받아야 하며 미궁을 한 번 출입할 때마다 1인당 1열동화를 내야 한다.
미궁 내부에서 획득한 부산물을 처분할 때 수익이 10열은화 이상 발생하면 수수료로 10%를 떼간다. 1금화 이상부터는 30%를 떼간다.
놀랍게도 비싼 소재를 획득할 수 있는 미궁은 60%까지 떼간다고도 한다.
성도 바라드=미로덴의 7급 황금 미궁이 대표적인데 그곳에서는 황금과 보석이 주기적으로 출토된다고.
몇 번 입장하지 않을 던전 출입증을 구매하는 것은 낭비지만, 경험을 돈 주고 산다고 생각했다. 돈을 내기 싫다고 관리도 되지 않는 멀리 떨어진 곳의 높은 등급 미궁을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적당히 무장하고 소도시 웨이포드의 서문을 나온 환인을 지평선까지 탁 트인 평원이 맞이했다.
10차선 도로 정도 되는 반듯한 포장도로 좌우로 노랗게 익은 밀이 바람결에 흔들린다.
그런 밀밭 사이로 수 킬로미터가량 뻗어있는 포장도로의 끝, 지평선에 규모는 작지만 어엿한 성채가 우뚝 서있는게 보였다.
‘저기가 미궁 병영인가……. 오가는 사람들이 무척 많군.’
좌우 폭 37m 정도 되는 도로가 좁다 하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간다.
이것저것 물건을 실은 마차도 많고 병영 쪽에서 오는 사람들도, 빈 수레도 많다. 하루 교통량만 수천 명에 이를 것 같은 혼잡함이다.
환인도 미궁 병영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틈에 섞여들어 포장된 길을 따라 미궁 병영으로 향했다.
=……일로 도시가 시끄럽더라.=
=그 영혼사님이 미궁에 먼저 와주시면 좋을 텐데~.=
‘……?’
앞에서 걸어가는 3인조의 대화가 귀를 간지럽힌다.
=정말로. 요즘 미궁 근처만 가면 뭔가 숨이 턱턱 막힌단 말이지. 영혼이 너무 쌓여서 그런 거 같은데 말이야.=
=피히히. 네 정신 침해 내성이 낮아서 그런 건 아니고?=
=캬, 할 말 없네 진짜. 돌아 나오던 중에 구토 한 번 했다고 나 죽을 때까지 놀려먹을 거지?=
=뭘 당연한 걸 묻고 있어? 허접한 자식. 고추 왜 달고 있냐. 그냥 떼버려라. 킥킥킥.=
=아오, 진짜. 여자만 아니었으면……!=
=아니면 뭐. 나 때리게? 때리려고? 때려봐?=
=야이! 대가리 들이밀지 마!=
=둘 다 그만해. 그보다 리리나, 영혼사님이 어디 계시는지 아직 안 알려졌지?=
=응.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번 영혼사님은 조용히 잠행 다니시는 분이신 가보더라.=
=나라도 숨어다니겠다. 뭐 모습만 드러내면 즈어기 높은 분들이 겁나 귀찮게 들러붙잖아. 서민들은 영혼사님이 무서워서라도 함부로 말을 못 거는데 높은 분들은 영혼사님을 무슨 신의 정원행 매표소쯤으로 여기니 원.=
=아무튼, 행정관 돈벌레 새끼들은 우리한테 걷어간 세금을 어디다 쓰는지 모르겠어. 그 돈으로 영혼사님이나 싸게싸게 모시지 말이야.=
=동감. 우리가 낸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겠다니까.=
환인은 후드로 시선을 숨기며 앞의 세 사람을 살폈다.
한 명은 갯과의 두상을 한 남자로 한손 검과 방패를 들고 사용감이 가득한 판금 갑옷을 갖춰 입었다. 아우라는 이실리테나 브릴릿같이 특색 없는 무난한 아우라다.
다른 한 명은 강아지 귀를 한 노란색 머리카락의 여자. 메이스와 방패를 들고 호버크라고 부르는 사슬 갑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아우라가 앞사람과 조금 달랐다. 파장이 하이엔=조드처럼 파도처럼 너울거리는 형태다.
마지막으로 가죽 갑옷을 차려입고 지팡이를 든, 허리에 숏소드까지 걸고 있는 양 뿔 여자는 소닉붐처럼 둥둥 퍼져나오는 느낌의 아우라였다.
‘전사와 투사, 법술사군.’
직업 종류별 아우라 구분을 떠올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저들 3인조가 적은 숫자라는 것을 눈치챘다.
같은 대로를 가고 있는 다른 파티는 적어야 5명, 많으면 10명까지 있었던 거다.
그러나 그중 아우라를 지닌 사람은 2명 아니면 3명. 아우라가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덩치보다 더 큰 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우라를 지닌 직업자의 구성 중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전사나 투사였다. 그다음이 엽사?나 술사.
환인은 좀 더 지그시 대로를 오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그렇군. 일반인은 짐꾼인가. 직업자들로만 이루어진 파티는 미궁 탐사가 목적이고 짐꾼을 많이 데려가는 파티는 노동자들이었어.’
미궁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주로 네 가지로 분류된다.
미궁 최하층을 목표로 내려가는 모험가.
미궁의 생태를 조사하려는 탐험가.
미궁에서 실력을 쌓기 위해 입장하는 무인.
마지막으로 먹고살기 위해 미궁을 들락거린다며 조롱의 의미로 불리는 노동자.
빛이 닿지 않는 미궁은 조사가 거의 끝난데다 미궁 관리도 최적화가 되었고 등급도 낮은 편이었기에 노동자 비율이 모험가나 탐험가 비율을 아득히 상회하고 있는 것.
‘그래서 성술사는 아예 안 보이는 거군.’
환인은 근 3주간 상식과 지식을 공부하며 웨이포드가 직접 관리하는 미궁에 관한 정보도 일부 입수했었다.
출현하는 괴물이나 짐승의 강함은 3급이 최고점인데 지하 16층부터 숲이 나와서 4급으로 지정되었다고.
등장하는 이형종의 최고 등급에 맞춰 미궁도 등급이 정해지는 게 보편적인데, 삼림 계층은 4급 미궁 이상에서만 출현하기에 혹시 몰라 4급으로 조정했다는 이야기였다.
‘5급부터 성술사가 필수라고 하니 여기는 초보자와 숙련자 사이의 난이도라는 뜻이겠지.’
애초에 웨이포드도 중급에 이르지 못한 소도시다. 빛이 닿지 않는 미궁은 그에 걸맞은 미궁인 셈이다.
좌우로 나누어져 오는 쪽과 가는 쪽으로 구분 짓는 도로.
환인은 오른편 가장자리로 나와 구슬땀을 흘리며 밀을 수확 중인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옷차림은 비록 남루하지만, 표정이 하나같이 밝다.
농작인의 표정이 밝을수록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는데…….
‘웨이포드의 극과 극을 봐서 인식이 나빠졌던 건가.’
그보다 밀의 낟알이 지구의 밀보다 1.5배는 더 굵고 숫자도 훨씬 더 많다. 지구의 경작을 마친 밭에서 자란 밀보다 훨씬 생육이 좋아 보인다.
‘이게 미궁의 주변 토질 향상 효과군.’
밀밭을 살피고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걷던 환인은 얼마 안 가 미궁 병영의 출입소에 설 수 있었다.
자신 차례의 검문이 오길 기다렸다가 사슬 갑옷 차림의 병사에게 출입 허가증을 보여준 환인은 기린의 귀를 한 여자 병사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받을 수 있었다.
=미궁관리법상 자살자의 출입은 허가할 수 없슴다.=
“저도 미궁의 성장용 비료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사전 조사의 일환으로 동료보다 한발 앞서 미궁 주변을 확인할 의도뿐입니다.”
=……고족이십니까?=
방어구도 없이 허리춤의 돌도끼와 대거 벨트만 착용했기에 자살자, 아니면 미궁을 얕본 천둥벌거숭이라고 생각했던 병사는 되돌아온 중저음의 기품있는 말투에 슬쩍 존댓말로 고쳤다.
“웨이포드와 연관 없는 타향의 신분이니 병사님은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음. 어차피 아우라도 없는 분의 입장은 미궁 앞에서 입구컷할 테니까요. 몹쓸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입구에는 다가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겠습니다.”
=통과! 다음!=
경고받으며 성채 안으로 들어온 환인은 생각보다 더 넓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미궁 입구는 고분형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앞은 조금 큰 종합운동장만큼이나 넓은 공터가 있었다.
공터 좌우에는 축제 좌판처럼 수십 명이 수십 대의 마차를 세워놓고 미궁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서 부산물 등을 매입 중이었다.
각자 원하는 매입 부위를 적은 표지판을 세우고 미궁 출입자들을 상대 중이다.
특이점이라면 출입자들 옆에 한 명씩 병사가 붙어있다는 것.
‘인력으로 수익 검수를 하는군.’
공터는 5층 건물이 2개 구역으로 나뉘어 감싸고 있었다.
외관이 깔끔한 건물에는 여관이나 술집, 식당, 무기점과 방어구점, 잡화점, 대장간 등이 들어서 있었는데 모험가나 탐험가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게를 들락거리고 있다.
‘생각보다 더 깔끔하군. 저 상점들은…… 전부 웨이포드 고족들의 소유인가.’
구역 사이의 도로로 병사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 미궁 뒤편에 병영이 있다는 뜻이겠지.
환인은 묵묵히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부산물을 확인했지만, 이형종과 괴물의 지식이 없어 어떤 것들이 미궁 안에서 출몰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마차 하나를 채우고 있는 사람 머리에 박쥐 날개가 붙은 괴물을 보며 환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간형 괴물인가. 미궁에서는 어떤 종족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듣긴 했지만.’
미궁에서 등장하는 것들은 괴물, 짐승, 곤충을 가리지 않고 전부 이형종으로 부른다.
그리고 4대종족과 7대 아인종, 이블 팩션의 여러 종족의 형태를 띈 괴물은 반전反? 개체라고 부른다.
에트브룩을 나와 마주쳤던 우르거도 미궁의 반전 개체.
‘나무, 돌, 식물, 괴물의 팔다리, 뼈, 이빨…… 광석도 있고. 이 글자는…… 위상석?’
환인은 수레 대신 직업자 1명을 포함한 호위 4명을 뒤에 세우고 위상석이라는 팻말을 꽂은 채 앉아 있는 돼지 두상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뒤편에 서있는 호위들이 즉시 매서운 눈길과 함께 폭언을 날린다.
=뭘 꼴아 봐? 저리 안 꺼져?!=
=거슬리게 하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가라. 응?=
‘아우라가 없으니 이래저래 얕보이는군.’
아우라가 없다고 손님 취급도 못 받는 것에 속으로 실소를 흘리며 그 앞을 지나간다.
‘위상석이라면 술사들이 에너지 대용으로 사용하는 배터리 같은 그거인가.’
주로 괴물이나 이형종의 몸 안에서 발견된다고 하는 작고 푸른 돌멩이인데 같은 무게의 금과 비슷한 가격이라고 들었다.
‘화수분처럼 미궁은 여러모로 돈이 되는 곳이군.’
환인은 의아함을 느꼈다.
아무리 직업자라는 능력이 1차 필터링을 해준다고 해도 내부에서 돈이 되는 부산물이 무한으로 나온다면 언젠가 인플레이션을 넘어 초인플레이션이 찾아올 거다. 그건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 걸까.
황금 미궁에서 주기적으로 상당한 양의 황금이 쏟아져나오고 있다고 들었는데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금화와 은화에는 위상결정이 들어가고 화폐청이라는 곳에서 주조한다고 했지. 지도층이 경제에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겠군.’
경제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현재 자기 능력이라면 이 세상의 상류층에 편입되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보는 환인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죽기 전까지 그러한 문제에 휘말릴 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미궁 병영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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