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089 웨이포드 공동묘지
* * *
이엘카타의 단기 교육이 시작되었다.
=우리, 영혼의 길을 걷는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자의식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은 고통받는 영혼의 구원과 방황하는 어린 영혼들의 선도…….=
영혼들은 환인의 당부에 근처를 얼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영혼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 것은 당연한 행동이다.
신비가 높을수록 말발로 상대를 휘어잡기 쉬워진다. 반대로 신비가 부족하다는 것은 의심을 사기 쉽다는 뜻.
자신이 영혼사로서 능력은 있지만, 그 지식이 한없이 미천하다면 영혼들이 자신에게 느끼는 신비가 대폭 감소할 거다.
그리되면 화술로 성불시킬 가능성이 대폭 낮아지니 그런 상황은 막아야 한다.
=혼은 세상을 이루는 근원이며 생명 윤회의 중심입니다. 혼의 정화는 세상의 근원을 정화하는 막중한 임무와도 같으며…….=
차분히 영혼사의 개념과 영혼사들의 사상을 읊는 이엘카타의 목소리에 환인은 최대한 집중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은 넓고 수행자의 수는 적으며 영혼사의 수는 그보다 더 적다니.
이 기회에 없다시피 한 영혼사의 지식을 모두 흡수해야 한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
영혼사란 일종의 순례자다. 종교적인 이유로 영혼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순례자.
그리고 수행자는 영혼사가 되기 위해 세계 각지의 공동묘지나 무덤에서 묘지기를 하며 소양을 쌓거나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심신을 단련한다.
‘영도를 찾아가야 하나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군.’
수행자는 영도에서 영혼사가 되기 위한 과정과 몸가짐을 익힌 뒤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물론 영도에서 배우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다. 수행자라는 것은 교회의 전도 활동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는 일반인에 비유할 수 있어서였다.
수행자에게는 어떠한 자격도, 필요한 자질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영혼사가 되고 싶다는 아이가 있으면 수행자로서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일을 알려줄 뿐.
수행자가 지켜야 할 일은 간단했다.
영혼을 모욕하지 말 것.
생명을 해치지 말 것.
전자의 이유는 이 세상 사람들의 풍습과 사상관 때문이다.
후자의 이유는 영혼사로써 각성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해친 생명은 모두 각성의 길에서 마주쳐 혼의 시련을 경험합니다. 해친 생명이 많으면 많을수록 시련 도중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커지지요.=
그렇기에 태어날 때부터 살생을 금지하고 식생활도 극렬 비건 주의자들 뺨치는 채식 및 선식을 위주로 하며 영혼사로 각성하기 전까지 고행에 가까운 수행을 이어간다고.
영혼사들은 어렸을 때부터 수행자로서 교육받기를 권한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직, 간접적으로 해한 생명이 많아져서 시련 도중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20살을 넘어 각성한 영혼사 선배님은 극소수입니다.=
이 대목에서 환인은 의아함을 느꼈다.
자신은 괴롭힘의 보복으로 사람 하나를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간접적인 살생도 포함된다고 했는데 26년간 자신의 입에 들어간 고기는 못 해도 다 합쳐서 수백 킬로그램은 될 것이다.
하지만 각성의 길이라 불린다는 빛의 강에서 만난 것은 곤충 약간과 자신이 직접 죽인 미친개, 녹색과 짐승 머리 괴물들 뿐이었다.
그 외 생명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영혼사의 각성 방법으로 알려진 것이 틀린 건가? 아니면 자신은 영혼사와 비슷하지만 다른 직업을 각성한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튼 그러한 고행을 거쳐도 영혼사가 되는 사람은 50만 명 중 1명이 채 안 될 확률이라 했다.
고행이 힘들어 포기하고, 다른 직업자로 각성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나이를 많이 먹어서 포기하고.
더욱이 수행자로서 30살이 지나면 영혼사로 각성 확률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는 게 정설로 굳어졌다.
직업자들도 대부분 10대 초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에 각성한다. 평균 수명이 수백이 넘어가는 종족도 마찬가지다.
인생 초기, 각성의 틈이 지나간 사람은 결코 각성할 수 없다. 영혼사 또한 각성의 일부기에 그 틈이 지나가면 각성하지 못한다.
그렇게 시기가 지난 수행자들은 진로를 바꾸거나 영혼사가 되기 위한 수행을 하던 공동묘지에서 묘지기를 하게 된다고 이엘카타는 설명했다.
=영혼사로 각성에 성공한 분들은 영도로 돌아가서 영혼사로서 의무와 알아야 할 지식을 배웁니다.=
하지만 환인은 영도로 향할 생각이 없었다.
이제 기초 지식을 대부분 외웠으니 설령 다른 영혼사를 만나더라도 ‘저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영혼을 인도하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면 그만이다.
영혼사 자격증 제도가 있다지만 그런 자격증 제도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영혼사들도 많다고 하고, 자신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영혼을 보여줄 수 있는 방도까지 있으니 더더욱 문제 될 일이 없다.
=영혼사 또한 직업의 아우라가 존재하나….=
오히려 아우라가 없다는 게 환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원한다면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설명 중간부터 자조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이엘카타에게 물었다.
“영혼사임을 증명할 수단 같은 것은 없습니까? 보시다시피 저는 체질 때문에 아우라가 안보이니 혹여 직업을 증명해야 할 때 곤란하지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선배님은 이미 훌륭한 능력을 지니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 능력의 일부만 보여도 믿지 않을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도로 물은 게 아닌데.’
플뢰 종족의 특징인지, 아니면 이엘카타가 순진한 성격이어서인지 알 수가 없다.
환인은 어쩔 수 없이 직접적으로 물었다.
“상대가 영혼사인지 아닌지 분간할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까 당신의 어깨 위로 영혼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데 그것을 배우면 상대가 영혼사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게 됩니까?”
=네, 선배님. 그것은 영시라고 하는 것으로, 영도에서 수행을 개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배우는 것입니다.=
환인은 이엘카타에게 부탁해 그 영시?의 사용법을 배웠다.
딱히 어렵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정신을 집중하고 비문?文을 외우자 몸 안의 훈기가 저절로 움직이더니 영시가 발현되었으니까.
그리고 환인은 자신이 계속 영시를 쓰고 다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들의 가슴과 아랫배에 보이는 온기, 영시는 그것을 보여주는 기술이었던 거다.
=그것이 영기입니다.=
온기가 클수록 영기?가 강하고 온기가 작을수록 영기가 약하다.
영혼사가 아닌 사람은 그 크기가 기본적으로 농구공 사이즈를 벗어날 수 없고 일반적으로 야구공 사이즈. 수행을 개시하면 영기가 점차 커져가며 몸이 아지랑이 같은 것으로 뒤덮인다고 했다.
그리고 영혼사로 각성할 경우 몸이 강한 아지랑이로 뒤덮이고 몸 안도 영기로 가득 찬다고.
영기에 대해 생각하던 환인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영기라는게 흡수할 수 있는 거였나.’
환인은 호기심에 물어보았다.
“영혼사들 중에 교합을 좋아하는 분이 많습니까?”
여자에게 할 질문으로 예의 없는 것이었지만, 매너보다 정보 수집이 환인에게 더 중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엘카타의 하얀 뺨이 홍조에 물든다.
=그,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유달리 좋아하는 분이 계시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같이 부끄러워하거나 쑥스러워하는 것은 하수다.
환인은 영혼사와 관련된 의문 중 하나였다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영혼 구슬 같은 개념이 존재하는지도 은근슬쩍 물어보았고 훈기와 한기에 대해서도 지나가는 듯이 우연히 떠올린 것처럼 꾸며 물었지만, 이엘카타는 아는 게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흠.’
어느새 날이 밝아온다. 동쪽 성벽 위로 불타는 듯한 색이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환인은 생각이 많아졌다.
영혼사도 다른 직업자들처럼 등급제가 있었다.
1급은 영혼사로 각성한 직후.
2급은 대기 중에 영혼의 서늘함과 태양의 따스함을 느끼게 된다. 그 두 가지 기운이 훈기와 양기로 변해 몸에 차곡차곡 쌓이는 단계가 2급.
3급은 영혼을 볼 수 있게 된다. 이야기에 따르면 자신처럼 선명한 게 아니라 매우 흐릿하다고.
4급은 영혼과 미약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급이다. 자신의 말이 영혼에게 전달되는 시기다.
5급은 영혼과 대화할 수 있으며 영혼이 가진 힘을 일부 빌릴 수 있게 되는 단계. 이때부터 아우라의 형태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6급은 영혼의 기억을 일부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7급은 영혼과 동조를 할 수 있다. 아우라가 확연히 변모해 후광처럼 빛나기 시작한다.
8급 이상은 알려진 바가 없다.
‘내 능력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자신이 영혼 시야라고 이름 붙인 것은? 영혼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영혼을 실체화하고 영혼과 대화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은?
이엘카타는 혼재를 강제 정화하는 것은 5급 영혼사부터 가능하다고 했다.
정화가 아니라 제령이겠지.
자신이 영혼 구슬로 만들어서 공격에 사용하는 것처럼 5급 영혼사는 영혼의 힘을 빌려 혼재를 강제로 성불시키는데 그게 5급이라니.
‘이 기준으로 따지자면 나는 5급이지만…….’
환인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영도는 말이 도시지, 고산지대에 있는 산간마을처럼 인구수가 2,000명이 채 안 되는 수도자들의 마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천년에 이를 정도의 역사가 깊은 마을이고, 외부 활동을 하던 영혼사가 황혼을 맞이하면 영도로 돌아와 후학을 기르는 데 힘쓴다고 한다.
그런 이들의 지식이 쌓이고 쌓인 영도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은 전부 사실을 토대로 한 것일 게 틀림없다.
‘결국 같은 영혼사 계열이지만, 내가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서 능력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 가능성이 가장 크군.’
이엘타카의 이야기와 자신의 지식, 도시에서 얻은 상식을 조합한 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환인은 자신의 발목을 옭아매고 있던 마지막 족쇄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세상 출신으로 혹시나 들켜서 산채로 붙잡힌 뒤에 해부당하는 일이 있진 않을까 걱정했던 환인이었다.
그 때문에 질문도 가급적 삼갔고 행동도 조심스럽게 해왔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3주간 웨이포드에서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지구의 상식은 이곳의 상식과 흡사한 점이 많았다.
각성자, 직업자를 제외하고 과학이 극도로 떨어지는 점을 제외하면 실생활도 비슷했고 기후와 자연환경도 미궁, 괴물을 제외하면 비슷한 점이 많았다.
문화에서 차이가 나긴 하는데 그건 시대상이 다른 데서 오는 괴리감과 초능력의 유무 때문이지 사람의 삶이나 사고방식은 거기서 거기였다.
‘영혼사로서 의심받을 일을 가장 걱정했지만 그것도 해결되었고.’
설령 의심받는다 해도 저 먼 대륙에서 넘어왔기에 문화가 달라 그렇다고 하면 의심은 해소될 거다.
생존에 관한 마지막 걱정까지 떨쳐낸 환인이 개운함을 느끼고 있던 것과 반대로 이엘카타는 삶의 허망함을 느끼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옆모습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공허해 보인다.
처음 환인에게 지식을 전해줄 때만 해도 희미한 선망과 자신이 닿지 못한 경지에 대한 부러움이 미약한 표정과 몸짓에서 묻어났던 이엘카타였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선배님께서는 언제 각성하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이제 반년 정도 되었을까요. 날짜를 셈할 시기가 아니었기에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이엘카타 씨는 수행자로써 얼마나 시간을 보내셨습니까?”
=저는…… 올해로 32년째네요.=
지식의 전수가 거의 끝난 말미에 나눴던 이 짧은 대화 이후로 이엘카타는 의욕을 크게 잃은 듯이 보였다.
환인도 조금 얼이 빠졌었다.
32년째라고? 태어나자마자 수행을 시작했다 해도 32살이다. 그런데 30살이면 각성의 틈이 끝난 나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다 이엘카타의 감정을 이해했다.
‘미련이군.’
아마도 30살은 아주 예전에 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엘카타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기서 지내고 있었다는 뜻.
자신을 묘지기가 아닌 수행자라고 소개한 것부터가 그런 의식의 반영이었던 거다.
불타는 노을의 아침 해를 바라보던 이엘카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32년분의 감정이 농축된 눈물이었다.
예전의 환인이었다면 그러든지 말든지 용무가 끝났으니 일어서서 가버렸겠지만, 환인은 떠나지 않고 이엘카타의 곁을 지켰다.
조용한 몸짓으로 눈물을 닦은 이엘카타가 허무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간 영혼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묘지기로 일하며 수행자라고 자신을 소개해왔었습니다.=
32년 동안 이엘카타는 열 군데가 넘는 도시의 공동묘지를 전전하며 영혼사가 되기 위해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고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선식과 금욕을 해온 수행자였다.
긴 시간 영혼들의 틈에서 수행해온 덕에 영혼의 기운을 느낄 수 있게 되었지만 그저 그뿐.
=이제는…… 그만둘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선배님…… 영혼사님을 뵌 덕분에…… 미련을 손에서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개를 숙인 이엘카타의 어깨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처럼 잘게 떨리고 있었다.
“…….”
힘들어하는 그녀의 모습에 환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았다.
이해할 수 없지만, 드라마의 로맨스 장면에 남자 등장인물이 여자 등장인물에게 해주던 것이 기억나서 흉내 내보았다.
몸매를 완벽하게 가려주는 청순한 로브 너머의 어깨는 환인의 예상보다 더욱 가늘었다.
=…….=
이엘카타는 말없이 환인의 가슴에 어깨를 기댔고 환인도 말없이 그녀를 받아주었다.
다행히 안아준 효과는 있었던 듯하다.
* * * *
이엘카타의 집에서 그녀를 몸으로 위로해준 환인은 점심 즈음에 호텔로 돌아왔다.
영혼은 단 1체도 성불시키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값진 영혼사와 수행자에 관한 지식을 얻었기에 아쉽지 않았다.
‘제2 공동묘지 영혼의 성불은 오늘 저녁에 가서 해도 되겠지.’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밤은 영혼의 시간이어서 밤이 되면 영혼의 방황이 현격해진다는 것이 있다.
영혼이 방황하면 영의 힘이 강해져 성불시키는데 어려움이 커진다고.
하지만 환인이 영혼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다. 성불에도 차이가 없었다.
자신이 직접 본 것과 남에게 이야기로 들은 것, 둘 중 어느 것을 신뢰하느냐면 역시 전자다.
그러니 성불행成?行, 영혼의 성불을 진행하는 것은 사람의 시선이 줄어드는 밤에 하자.
‘그때가 되면 기절했던 이엘카타도 일어나있겠지.’
쿠에으에엥…….
객실로 돌아와서 후드 망토를 벗어 벽걸이에 걸어두던 환인은 비상식량의 코골이에 잠시 자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발끝으로 비상식량의 바구니를 살살 흔들었다.
쿳?! 쿠엣? 쿠우?
화들짝거리며 잠에서 깬 비상식량이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보고 웃음을 띤 환인이 손짓했다.
“비상식량. 와라. 밥 먹으러 가자.”
쿠엣!
어젯밤부터 점심까지 먹은 것은 없는데 힘만 잔뜩 썼다. 단백질 위주로 체력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호텔 숙박객 전용 레스토랑으로 내려온 환인은 거의 7인분에 달하는 음식을 주문해놓고 생각에 잠겨 들었다.
“…….”
환인의 자질과 자신의 자질 차이에 크나큰 상실감을 느낀 이엘카타는 환인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오늘만큼은 모두 잊고 싶다고. 30살이 가까워질 무렵 영혼사가 될 수 없다는 걸 은연중에 깨달았지만, 현실을 외면하며 18년을 더 수행자인 척 살아왔다고.
‘16살부터 시작했다는 말인가. 그 말은 48살이라는 말인데 플뢰의 수명은 400년가량이라 하니 아직 어리다고 할 수 있겠군’
이엘카타는 과거를 전부 잊고 앞으로 묘지기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에게 힘을 달라고 부탁했었다.
힘이란 다름 아닌 아기.
율캄과 에트브룩 촌락을 거칠 때만 해도 환인은 이 세상 여성의 정조 개념이 희박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웨이포드에서 상식을 배우며 그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평가와 타인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가치를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는 누구보다 뛰어난 종마였다.
이 세계의 성 비율은 말 그대로 막장이다. 남자가 2명이면 여자는 7~9명 정도 된다.
마을이나 촌락은 그나마 1처 2첩 같은 일이 가능하고 용납되지만, 도시쯤 되면 그런 일은 불가능해진다.
촌락보다 선진화된 지성이 독점욕을 발휘해서 한 집안에서 다른 여자들과 남편을 공유하길 꺼리는 거다.
이런 현상은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여자일수록 두드러졌다. 그 결과 많은 남자가 돈 많은 여자들에게 독점되는 현상이 일어났고 혼자 평생 쓸쓸하게 살아가는 여자들이 많아졌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세상 여성은 남편은 없어도 아이 없이는 못 산다고 한다.
자기 배 아파 낳은 아이를 키우며 가슴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일부 신랄한 비판론자들의 주장은 `혼자 쓸쓸하게 나이 먹어가는 것이 싫은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튼.
그래서 여자들은 기회가 되면 남자들에게 안기려 한다.
물론 아무나 원하는 건 아니다. 자기 기준에 이 남자는 안 맞다 싶으면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걸 알기에 남자들도 인기 없다는 오욕을 피하고자 자기 단련에 집중하는 편이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
아무튼 남자들도 그걸 알기에 어린 시절부터 여자를 알게 된다.
결혼한 이후에도 그리 빡빡하지 않은 관습으로 여자를 찾아 품에 안는다.
아내가 그걸 허락하느냐 하면…… 허락한다. 처나 첩으로 받아들이지만 않으면 꽤 관대하게 허락한다.
여자에게 있어 남자와 결혼은 애정 독점의 이유는 비중이 작기 때문이다.
일종의 과시라고 이해하면 된다.
스사와 브릴릿의 연위 같은 관습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이의 핏줄에 대한 인식도 지구와 굉장히 다르다. 정부인, 처에게서 태어난 아이 외에는 그냥 타인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세계에는 미혼모가 흔하다. 미혼모라고 손가락질받는다거나 그런 일도 없다.
무슬림 쪽이나 유교처럼 여자의 사회 활동에 지장이 있는 시대도 아니고 사회 전반이 여자들의 손에 굴러가니 미혼모에 대한 시선이 지구와는 정반대인 거다.
오죽하면 도시에 계모임처럼 미혼모들이 모여 돌아가며 아이를 돌보는 풍습이 있을까.
고용 시장에도 그런 것이 반영된다.
=아이가 둘이라서 열심히 일해야 해요.=
=혼자서 둘이나 낳았어? 능력은 있는데 남자 복이 없네~ 좋아, 채용.=
=지금은 아이가 없지만, 애를 낳고 키우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니까요. 돈 많이 벌어놔야 해요. 그러니 일 시켜주세요.=
=의욕이 있네? 너도 채용!=
……그렇기에 여자들의 입장에서 영혼사인 환인은 눈이 돌아갈 정도의 보물산인 셈이다.
영혼사로써의 능력도 확실하고 신체 강건해서 무인?人 못지않을 만큼 강하다. 외모도 뛰어나고 지성도 뛰어나니 남편감으로는 두말할 것 없이 1등이다.
그걸 알고 있는 환인은 이엘카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지구에서 연예계에 데뷔하면 큰 인기를 끌 게 틀림없을 정도의 미녀. 더욱이 그녀의 아랫배에 맺힌 온기, 영기는 일반인들과 비교하면 몇 배나 컸다.
그걸 흡수하면 자신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는 게 뻔한 상황. 거절할 이유가 없다.
“식사 나왔습니다.”
테이블을 채우는 다양한 음식에 비상식량이 몸을 옴찔거리며 환인과 음식을 번갈아 쳐다본다.
“먹자.”
쿠우~!
“맛있냐.”
쿠쿠!
“그래. 많이 먹어라.”
다른 숙박객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 룸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환인은 비상식량을 다시 객실에 넣어두고 외출하려 했다.
하룻밤을 꼬박 새웠고 오전에는 힘까지 썼지만, 핏빛 돌멩이 덕에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
그렇게 외출하려던 환인은 웬나, 호텔에서 처음 유료 봉사를 받은 하녀에게 쪽지 한 장을 받았다.
아무것도 아닌 척, 벽에 붙어 손님인 자신이 지나가길 기다리다가 몰래 자신의 주머니에 쪽지를 넣고 간 웬나를 힐끔 돌아봤지만 웬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단정한 걸음걸이로 멀어졌다.
“……?”
자신을 지목해달라는 청탁인가 싶었지만 그런 거라면 말로 하지 이렇게 비밀스럽게 쪽지를 넘겨주지 않을 텐데.
의아해하며 호텔을 나선 뒤 남몰래 쪽지를 펼쳐본 환인은 표정을 굳혔다.
[손님의 녹색 쿠에가 노림 받고 있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