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90화 (90/813)

〈 90화 〉 088 웨이포드 공동묘지

* * *

한동안 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고 집중하던 여자는 지친 기색이 드러나는 몸짓으로 긴 숨을 내쉬었다.

환인은 숨을 고르듯 긴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는 여자를 응시했다.

어깨 위의 아지랑이는 여자가 집중을 풀 때 함께 사라졌다. 그건 뭐였을까. 같은 계통의 술사를 판별하는 기술?

3주간 웨이포드를 돌아다니며 습득한 지식 중에 마법과 비슷한 힘에 대한 것도 있었다.

흔히 법술, 비술이라 부르는 힘인데 법술은 직업자가 아니더라도 여덟 가지 속성을 다룰 수 있게 해주고 비술은 주로 사물, 만물의 변화를 주관하게 해주는 힘이었다.

여자가 쓴 것도 그와 관계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잠시 숨을 고르던 여자는 반듯하게 서더니 살짝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영을 위하여 앞서 봉행하시는 선배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수행자이면서 미처 알아뵙지 못하여 송구스럽습니다.=

환인의 눈에 이채가 들었다.

여자가 한 말의 뜻은 명확했다. 영혼사가 되기 위한 수행자.

그러면 방금 보여준 행동은 영혼사임을 확인하기 위한 마법이었다는 뜻.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기에 환인은 담담하면서도 조용히 물었다.

“아우라가 없는데도 영혼사라는 것을 믿으시는군요. 비술의 일종입니까?”

이엘카타는 대답 없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띤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기분 나쁘다거나 재수 없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 환인은 신기해했다.

행동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가 무언가를 조용히 받드는 것처럼 단아하고 단정하다. 그 때문일까.

환인도 여자처럼 곧은 자세로 서서 살짝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지식이 부족해 불편한 질문을 한 것 같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성불과 정화를 행하시느라 바쁘셨을터이니…… 이해합니다.=

그러더니 스륵, 옆으로 비켜서며 입을 열었다.

=혹, 시간에 여유가 있으시다면 잠시 들르셨다 가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영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주신다면 방황하는 영들도 약간이나마 안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묘지기에게 당부하고 싶은 일도 있었고 부탁하고 싶은 것도 있었다. 물론 묻고 싶은 것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초대였다.

수행자와 함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이동하던 환인은 밤의 공동묘지가 이렇게 포근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고소득층 최고급 주거 지역의 근린공원 같은 느낌이군.’

한국에서 대표적인 부촌으로 손꼽히는 지역의 공원보다 더 고급스러운 묘지를 둘러보던 환인은 저 앞에 대리석으로 지은 소형 건물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일반 주택이나 상가 건물이 아니다. 따지자면 박물관이나 미술관과 비슷한 감각의 외장이다.

그리고 그곳에 영혼들이 모여있었다.

‘나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거였군.’

자신이 쫓아왔던 영혼도 그들 사이에 있는 걸 확인한 환인은 수행자와 함께 영혼들을 지나쳐 하얀 대리석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음.”

70평에 3층 높일 정도 되어 보이던 건물 내부는 그리스식 신전 내부처럼 단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사람 키 높이의 단 위에 인랑족으로 보이는 큰 석상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 표정이 오연하고 거만하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입장하는 자를 쳐다보는듯한 석상의 모습에 환인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누구지.’

단 아래쪽을 훑어봐도 석상의 존재를 유추할만한 글귀가 안 보인다.

평범한 인물을 석상으로 만들어 이렇게 봉랍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 말은…….

환인은 봉안소 내부를 둘러보았다.

왼쪽과 오른쪽 벽을 따라 오더order라고 부르는 기둥이 일렬로 나열되어있는데 루크랑 남녀의 영혼들은 그런 오더 사이사이에서 이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영혼들도 석상 근처에는 다가가지 않는 모습이다.

‘짐승신. 루크랑이 섬긴다는 신인가.’

환인의 시선이 다시 석상에 향했다.

석상의 높이는 매우 컸다. 어림잡아 10m 정도.

수행자는 그 석상 앞의 작은 단에 올라가서 무릎을 꿇더니 방울을 딸랑—…… 딸랑—…… 주기적으로 흔들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영혼들의 대화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엘카타가 처음 보는 사람을 데려왔군.」

「누굴까? 이 시간에 여기까지 들어오는 방문자는 드문데.」

「남자친구 아냐?」

「무례하긴. 수행자님을 깔보는 행동은 자제해라.」

「영혼사님이나 수행자님도 결혼하고 아이 낳으시고 하거든? 그게 자연의 순리인데 깔보니 뭐니, 너야말로 수행자님을 우상화하지 마라.」

길거리나 촌락의 영혼은 환인이 다가가기 전에는 멍한 모습으로 그저 배회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영혼은 자아가 분명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눈다.

「어, 이쪽 봤다.」

「그냥 둘러본 거 아냐?」

「아니야. 방금 눈이 마주쳤어.」

「그래?」

수행자를 우상화하지 말라던 여우 머리의 남자가 호기심이 깃든 얼굴로 환인 근처를 맴돈다.

「으음~? 뭐지? 뭐지? 가까이서 보니까 왠지 모르게 끌림이 느껴지는데? 나도 호모필리아 속성이 있었나?」

「하여간 높으신 분들은 왜 이렇게 동성애를 좋아하는지 모르겠군. ……음?」

여우 머리 영혼과 대화하던 인웅족人?? 남자 영혼도 환인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눈을 크게 뜨고 근처를 맴돌기 시작했다.

「……난 동성애는 혐오했는데. 나도 끌림이 느껴진다.」

「저도 느껴져요…….」

「저도 그러네요. 왜지?」

삽시간에 환인의 주변으로 열 명이 넘는 영혼이 모여들었다.

앞도 가로막으면 신경 쓰였을 텐데 그러는 영혼은 없었다. 옆이나 뒤에서만 얼쩡거릴 뿐.

‘일부러 앞은 피해 주는 건가.’

그때 환인의 뒤에서 기웃거리던 여우 귀의 여자가 짐짓 심각한 어조로 다른 영혼들에게 물었다.

「이분, 혹시 영혼사님이신거 아닌가요?」

「설마.」

「아니야. 영혼사님이 갑자기 여기에 왜 나타나겠어? 그분들은 세상을 떠돌면서 정화의 길을 만드느라 바쁘신 분들이신데. 그리고 난 생전에 성을 찾아온 영혼사님을 뵌 적 있다고. 그분한테는 이런 느낌 못 받았어. 그리고 인도자의 지팡이도 없잖아.」

여우 머리의 남자 영혼, 인호족人??은 영혼사의 지식으로 여자 인호족의 말을 반박했다.

생전에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는지 행동이나 사고가 부르주아의 느낌이 많이 묻어난다. 영혼들이 다들 복장이 좋긴 하지만 그의 복장도 가장 비싸고 세련되어 보였고.

평소였다면 환인도 그 대화에 끼어들어 정보를 모았겠지만, 저 앞에 수행자가 있는데 비전문가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그때 당신은 살아있었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지팡이도 밤늦은 시간에 두고 오셨을 수도 있고.」

「흠. 일리 있는데? 뭐 영혼사님이신지 아닌지는 물어보면 알겠지. 저기요?」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여우 머리 남자 영혼에게 시선을 돌린 환인은 조용히 입 앞에 검지를 세웠다.

그러자 소란이 벌어진다.

「……!!」

「헉.」

「으어. 우릴 보셨어.」

「히익. 진짜, 진짜 영혼사님이다.」

가까이 있던 영혼들은 깜짝 놀라며 후다닥 멀어졌고 멀리 있는 영혼들은 벽에 등을 붙이며 선다.

봉안소를 뛰쳐나가거나 입을 틀어막거나 하는 등 영혼들이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와중에도 이엘카타라고 불렸던 여자는 미동도 없이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수행자는 영혼사와 관련된 힘을 쓸 수 없는 건가. 하지만 방금 보여주었던 것은…….’

잠시 후, 10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이엘카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비켜서 준다. 마치 환인도 기도를 올릴 거라 생각하는 모습이다.

환인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분은 제가 신앙하는 신이 아닙니다. 경외만 하겠습니다.”

=그러십니까.=

상식과 지식을 습득하며 알게 된 것 중에는 이 세계의 신에 대한 것도 있었다.

신은 총 다섯.

짐승의 신, 땅의 신, 물의 신, 하늘의 신, 자애의 신

그들 각각은 종족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루크랑들의 짐승신, 플뢰와 프라우드의 땅신, 사비와 해비들의 물신, 플라비우스의 하늘신, 귀인족의 자애신.

그렇다고 해서 종교 박해나 신앙의 부자유는 없었다.

루크랑이 물신을 믿어도 되고 날개가 달려있다는 플라비우스 종족이 땅신을 믿어도 상관없다.

그렇기에 환인은 수행자가 오해할만한 핑계를 댔다.

오해를 유도했다지만 거짓은 입에 담지 않았다. 환인 자신은 다섯 신 중 누구도 믿지 않고 종교도 없으니까.

신앙하는 신이 아니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거다.

이엘카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방황하는 어린 영혼들을 위해 기도의 시간을…….=

손을 들어 이엘카타의 말을 끊은 환인은 멀찍이 물러서서 이쪽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영혼을 돌아보았다.

역시 눈앞의 수행자는 영혼을 볼 수 없다.

‘비술에는 영혼사의 힘과 관련된 술식??이 없는 거겠지.’

지금도 자신을 믿는 듯 하지만, 좀 더 수월한 대화를 위해서라면 그 믿음을 더 굳건하게 해주는 것이 좋겠지.

환인은 미리 보아둔 영혼, 말이 가장 많던 여우 머리 남자의 영혼에게 손짓했다.

「저, 저를 부르셨습니까?」

가까이 다가온 여우 머리 남자의 영혼에 정신을 집중한 환인은 그에게서 미련과 의문의 감정을 느꼈다.

환인은 율캄과 에트브룩에서 여러 영혼을 성불시켰다. 아베트를 통해 영혼과 대화할 수 있게 되었고 우르거의 영혼을 통해 저주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3주동안 웨이포드를 돌아다니며 적지 않은 영혼을 살펴본 환인은 이제 영혼의 감정을 더욱 명확하게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있었다.

영혼의 감정만 느끼게 해줄 뿐, 전투 면에서는 그 어떤 도움도 안 되는 능력이다.

그러나 성불과 관련해서는 엄청난 효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했다. 대상이 어떤 미련이 있느냐를 알게 되면 그만큼 성불시키기 쉬워지니까.

우선순위 때문에 그동안 창관에서 여자를 안고 온기를 모으느라 그에 대한 가설을 검증하지 못한 환인이다.

그런데 마침 적당한 판이 마련되었다.

환인은 이엘카타의 시선을 느끼며 후드를 벗고 무슨 말을 할지 무섭고 또 기대된다는 듯이 두 손을 비비는 영혼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생각을 보냈다.

그게 이엘카타나 다른 영혼들에게 좀 더 그럴싸하게 보일 거라 생각해서였다.

‘당신에게서 미련과 의문이 느껴집니다.’

「헉. 그것을 어떻게?!」

“…….”

호들갑을 떠는 여우 머리 남자 영혼의 반응에 환인은 할 말을 잃었다.

겉보기에는 꽤 높은 수준의 지식을 쌓은 인물로 보였는데 이 정도 바넘 효과도 짐작하지 못하다니?

현세에 남아있는 영혼은 대다수가 미련을 품고 있다. 미련이 없거나 한이 없는 영혼은 사망 즉시 성불, 승천해버리니 당연한 일이다.

영혼은 영혼끼리 볼 수 있고 방금 행동을 보면 의식도 분명하며 지식 습득도 가능했다.

그러니 이 정도는 간파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감정을 능숙하게 숨긴 환인은 이번에는 목소리를 냈다.

“저는 방황하는 영혼을 인도하여 성불로 이끄는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영혼을 성불시키면 빛방울을 흡수할 수 있고, 그러면 영적 능력이 강해진다.

하나를 행동하면 하나의 보답이 돌아오는 구조다.

아무리 일을 해도 월급날을 제외하면 보람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한국의 업무 환경을 생각해보면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눈을 뜨자 자신의 말에 영혼들은 물론이고 수행자인 이엘카타도 감격과 감동하는 것이 보인다.

환인은 두 손을 뻗어 남자 영혼의 여우 머리에 가져다 대며 훈기를 흘려 넣었다. 이엘카타가 영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러자 영혼들도, 이엘카타도 눈을 크게 뜨며 호들갑을 떨고 목소리를 떨며 난리를 친다.

「어? 뭐야, 헬마르가 실체화한 거야? 어떻게?!」

「영혼사님이다! 영혼사님의 힘이야!」

「우와, 영혼사님은 이런 것도 가능하신 거구나!」

「그러면 우리도 가족들 앞에 나설 수 있는 거야……?」

=……선, 배님. 그건 대체……?=

이엘카타도 놀람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에 환인의 의문이 깊어진다.

‘설마 영혼사는 남들에게 영혼을 보여줄 수 없는 건가. 아니면 이엘카타의 지식이 미천한 걸까.’

이엘카타가 보여주는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환인은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한편 고무된 모습으로 감격하는 여우 남자 영혼, 헬마르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을 방황케 하는 의문과 미련은 무엇입니까.”

「저는…… 제 미련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한 가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

그 대답과 동시에 환인은 헬마르의 영혼 깊은 곳에 숨겨진 꺼림칙한 감정을 느꼈다.

하얀 도화지 위에 떨어진 물 한 방울처럼 께름칙한 감각.

도화지와 물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문제는 대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도화지 자체가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승화될 수도 있고, 우그러지거나 너덜너덜해져서 찢어질 수도 있다.

문득 환인은 이런 감정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이미 수백에 가까운 영혼을 보고 감정을 느꼈다. 얼토당토않은 일이라 치부하기에 연관성이 너무 높게 느껴진다.

“…….”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환인은 다시 생각을 접고 눈을 떴다.

“당신의 생전 이름은?”

「헬마르, 헬마르 베레입니다.」

베레 가문, 현 웨이포드 성주인 알드진=베레의 친족이었다.

영혼들을 물려놓고 사당 밖으로 나온 환인은 이엘카타와 함께 달빛이 내리쬐는 벤치에 앉았다.

이엘카타는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진지한 어조로 환인에게 물었다.

=선배님.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환인은 일부의 진실을 숨기고 솔직히 대답했다.

자신은 이 대륙이 아닌 아주 먼 곳에서 왔으며 당신이 아는 영혼사와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것.

그 때문에 영혼사라는 사실은 숨기고 있다는 것. 지금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행 중이라는 것.

영혼사로서 기본 지식이 아예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까지.

이엘카타는 환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사정을 이해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기도하듯 손을 맞잡고 뭔가 예식적인 자세를 잡는다.

=아득히 먼 곳에서도 영혼의 길이 이어져 있다는 것에 짐승신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사는 곳은 다르지만,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라는 이야기겠지요.”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자의 현명함이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아엘카타의 입매가 처음으로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환인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성공이다.

묘지기도 영혼사보단 못하지만 존경받는 직업이라는 점과 이엘카타의 행동을 보면 입이 가벼운 성정은 아닐 게 확실한 상황.

이것으로 이 세상에서 영혼사가 가지는 신분을 생각해본다면 자신이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인간이라는 사실은 어둠 속에 묻힌 것처럼 조명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더욱 쉽게, 의심받지 않고 영혼사라는 직업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이엘카타에게 드러나는 호의를 느끼며 환인이 담담하게 부탁했다.

“아무튼, 제가 영혼사라는 것은 주변에 비밀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배님께서 바라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헬마르 베레 씨의 일은…….=

손가락 하트 같은 손 모양으로 왼쪽 가슴에서 오른쪽 가슴으로 선을 그린 이엘타카는 자연스럽게 후드를 벗었는데, 환인은 후드 아래에 숨겨져 있던 얼굴을 보고 눈을 약간 크게 떴다.

달빛을 받아 금실처럼 사르륵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 그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길고 뾰족한 귀. 가냘픈 눈매와 눈썹.

붓으로 그린 듯한 아름다움에 약간 뾰족한 느낌의 눈매마저도 부드럽게 다가온다.

‘플뢰 종족이군.’

루크랑 여성들이 야생마처럼 생명력 넘치는 미모의 아가씨라면, 눈앞의 이엘카타는 마치 꽃이나 들풀의 청초함이 느껴지는 미녀였다.

이엘카타가 기도하듯 두 손을 마주 쥐며 중얼거린다.

=헬마르 베레 씨의 일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저로서는 갈피가 서지 않습니다. 혼재가 될지도 모르는 미련이라니요.=

“이엘카타는 그쪽을 걱정하시는군요. 제 걱정은 다른 쪽입니다.”

=다른 쪽이라 하심은?=

“베레라는 성에 따르면 헬마르는 이 도시의 주인인 알드진 베레의 일족이겠지요. 그 일족에서 혼재가 나타날 경우, 혹은 죽었던 일족이 영혼으로 다시 찾아왔을 때 보일 반응이 더 큰 문제라고 봅니다.”

=……?=

“정치가 개입할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

어지간히 강한 미련이 아닌 이상 사람이 죽으면 대부분은 5분에서 10분 사이로 성불하게 된다.

헬마르 베레는 이 소도시의 주인인 일족. 그런 일족이 영혼으로 남을 만큼 강한 미련을 품은 의문이다.

그리고 영혼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꺼림칙함.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좋은 의도의 질문일 가능성은 한없이 적다. 미련이 분노와 원한으로 변질할 경우 혼재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라고 생각하는 환인이다.

환인의 추리를 들은 이엘카타의 표정이 흐려지며 긴 귀가 축 처진다.

‘이 아가씨는 확실히 순박하군. 종족의 특징인가 아니면 수행자의 특징인가.’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는 좋다고 생각하며 환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땅에 온 뒤 두 번의 혼재를 보았습니다.”

=두 번이나……?!=

예상 이상으로 놀라는 모습에 환인은 자신이 영혼사에 대해 정말로 아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아아, 불쌍한지고. 하늘길에 들어서지 못한 불쌍하고 안타까운 영혼이여…….=

이어서 보여주는 반응에 영혼사들은 혼재를 성불이나 정화가 아닌 소멸로 대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에 또 혼재를 만나면 귀찮게 성불을 시도하는 게 아니라 소멸시켜버릴까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다행스럽게도 둘 다 정화에 성공하였고 성불로 이끌었습니다.”

=네?!=

가느다란 느낌의 미녀가 크게 놀라는 모습이 꽤 볼만하다고 생각하며 환인은 말을 이었다.

“혼재는 그 한을 풀어주면 혼재 상태에서 해방됩니다. 아시겠습니까? 헬마르 베레가 혼재가 될 경우 그 한은 틀림없이 일족 살해로 향할 사안입니다.”

호족 살해.

현실에 비유하면 재계 1위 회장이 암살당하거나 일국의 대통령이 살해당하는 수준의 충격이다.

이엘카타의 하얀 얼굴에 작은 주름이 진다.

=다른 선배님들도 개입을 꺼리는 사태가 벌어지겠군요…….=

“일단 이엘카타 씨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이라 하심은?=

“저에게는 이 땅의 영혼사들이 지닌 사상과 개념에 대한 이해, 행동양식, 관습 같은 지식이 전무합니다. 이엘카타 씨에게 그에 관한 가르침을 부탁드리고 싶군요.”

=가르침이라니…… 예의가 과하십니다. 그런 것은 영도에 가시면 손쉽게 배우실 수 있는 것들인데…….=

“영도라는 것도 방금 이엘카타 씨의 이야기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영도?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다는 환인의 이야기에 이엘카타도 심각성을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배운 모든 것을 선배님께 전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혼사의 존재에 대해 정립할 수 있다면 이 사태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했다.

원하는 반응을 끌어낸 환인은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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