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086+ 하이에른 상급 무관
* * *
=갑자기요?=
환인의 번복에 여자의 얼굴이 놀란 것처럼 동그래진다. 그 표정 속에 의기양양한 느낌이 있어 환인은 더더욱 이 여자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주겠다고 결심했다.
이 내가 호기심에 말을 걸어주었는데 그런 태도를?
이 내가 생각해주고 있는데 그런 태도를?
이 내가 대련해주겠다고 하는데도 거절하고 그런 태도야?
이게 환인의 신경을 긁은 여자, 하이엔=조드의 태도였다.
환인은 무관에 비치된 봉을 적당히 쥐어보고 가장 손에 맞는 걸 고른 뒤 상급 창술 교관의 파지법과 운신법 일부를 기억에 따라 펼쳐본다.
몇 번 반복해본 환인은 대충 원리를 이해하고 마침 자리가 빈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남이 보기에는 그저 봉을 들고 우스꽝스럽게 휘적거리는 꼴로 보였을 것이다. 그 증거로 대련장에 올라온 하이엔=조드는 인상을 묘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별거 없는 떠벌이었다고 생각하는 표정이군.’
=이봐요, 이름 없는 분. 그거 쓰고 할 거예요?=
하이엔=조드의 지적에 환인은 뒤늦게 후드 망토를 기억해내곤 벗었다.
착용감이 편해서 잊고 있었다.
마침 첫 번째 대련을 끝냈는지 이마에 땀을 살짝 흘린 브릴릿이 다가왔기에 그녀에게 망토를 넘겨주자 브릴릿이 대련장 위에 서있는 하이엔=조드를 힐끔거리며 말한다.
=환인 님, 저분은…….=
“별일 아닙니다. 잠시 망토 좀 맡아주십시오.”
=네, 네.=
봉을 들고 대련장 가운데 서있는 하이엔=조드에게 다가가자 하이엔=조드가 다시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환인을 얼굴을 구경하며 말했다.
=플뢰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르네요. 귀는 그게 원래 모습인가요?=
“지금 하는 것은 대련이 맞습니까?”
=……맞아요.=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질문으로 되돌려주는 환인에게 하이엔=조드가 심통 난 표정을 짓는다.
환인은 그런 하이엔=조드를 덤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우라의 양은 브릴릿보다 조금 더 짙은 수준.
주변의 상급 교관들과 아우라가 비슷한 농도인 걸 보면 실력도 비슷할까, 아니면 관장의 딸로 짐작되는 만큼 더 강할까.
짧게 생각하는 틈에 주변의 교관이나 훈련 참가자들이 대련장 근처로 모이기 시작했다.
=어라? 하이엔 아가씨잖아. 상대는 누구야?=
=모르겠는데. 아우라가 없는 거 보면 무직자일 테고, 지도 대련인가.=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환인이 하이엔에게 물었다.
“대련 중에 어떤 꼴을 당해도 상대를 원망하는 일은 없겠지요.”
=그건 제가 할 말인데 그쪽이 먼저 해주시네요. 걱정 마세요. 짐승신 님의 교단에서 파견 나오신 사제님은 실력이 무척이나 뛰어나 팔다리가 부러져도 금방 회복시켜주시거든요.=
“좋군요.”
은근히 뼈가 부러질 수 있다고 겁주는 하이엔=조드의 언행에도 환인은 덤덤하게 봉을 쥐고 자세를 잡는다.
그러자 주변에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와, 자세 정말…… 창의 기초를 겨우 뗐나 본데.=
=저런 사람을 왜 아가씨가 상대해주시는 거지? 그냥 로한이나 리에식에게 맡기면 될 텐데.=
=아가씨의 호기심을 건드린 거 아냐? 아가씨는 자주 변덕을 부리시니까…….=
남들이 보기에 창에 처음 입문한 초짜가 어설프게 창술을 흉내 낸다고 볼법한 모습. 그만큼 교관들의 눈에는 빈틈투성이로 보이는 자세였다.
정작 환인에게는 상하전후좌우 모든 방향의 공격을 회피하거나 반격하기에 가장 좋은 자세인데 말이다.
한 번 환인과 대련해본 브릴릿만 저 자세가 절대 뚫을 수 없는 철벽과도 같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브릴릿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상급 교관마저 환인의 실력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여기서 계속 훈련을 받는 게 옳은 일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준비됐어요?=
너클을 낀 주먹끼리 쾅, 부딪치며 하는 말에 환인이 고개를 끄덕였고, 하이엔=조드는 즉시 땅을 박찼다.
우선 저 반반한 얼굴에 일단 팬더처럼 멍부터…….
멍……부터……?
‘어라. 땅이 왜 다가오지?’
풀썩.
순간 눈앞이 흐릿해지며 땅이 자신에게 다가온다고 느낀 하이엔=조드는 털썩, 엎어지고 나서야 자신이 다운됐다는 걸 깨달았다.
=뭐, 뭐야?=
=방금 뭐였지?=
=아가씨가 왜 쓰러진 거야?=
=방금…… 봉이 아가씨의 턱을 가격한 것 같았는데.=
주위에서 수근거리는 소리에 하이엔=조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턱을 맞았다고?
넘어진 채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던 하이엔=조드는 자기 머리 앞의 땅을 봉이 탁탁 때리는 것을 뒤늦게 눈치채고 시선을 들었다.
무표정한 검은머리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괜찮습니까? 힘들면 여기까지 할까요.”
자신에게 고마워할 줄 모르는 얄미운 목소리도 귀에 들어온다.
=……!!=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 하이엔=조드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물었다.
=무슨 사술을 부린 거죠?=
상대가 보기에는 사술 같았나.
환인은 대답 없이 봉 끝을 들었고 하이엔=조드는 입을 앙다문 채 이번에는 상대에게 온 신경을 쏟으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멀대같이 서있는 남자에게 번개 질러차기를 날리려는 순간.
쿠당탕!
균형이 무너지고 가속도가 더해져 대련장 위를 엉망으로 구르는 하이엔=조드였다.
=뭐야 방금!=
=봉이 어떻게 그런 움직임을……?!=
=아니 그런 것보다 공격의 타이밍이……!=
=……??=
하이엔은 이번에도 자신이 왜 굴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남들에게는 하이엔=조드가 몸을 360도 회전하며 다리를 내지르려는 순간 지지대 역할을 하던 무릎을 봉이 가격한 게 보였지만, 하이엔의 시선에서는 봉의 궤적이 내지른 다리에 가려져 안보였기 때문이었다.
문득 무릎이 시큰거리는 걸 느낀 하이엔은 그제야 자신이 무릎을 맞고 자세가 무너져 뒹굴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평소 자랑하는 물빛 머리카락이 흙먼지에 엉망이 되었지만, 하이엔은 진지한 태도로 환인을 응시하며 조드 류 격투 준비 자세를 잡는다.
한 번이면 우연일지라도 두 번이면 필연이라는 아버지의 철학.
하이엔=조드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남자의 무예는 자신보다 위라고.
‘하지만 나는 직업자야. 무직자와 직업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
“안 옵니까?”
=…….=
하이엔은 남자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긴장의 촉을 세운다.
왼쪽 손날을 세워 끝을 환인에게 향하고 오른손 주먹은 옆구리에 끼운 견제와 공격의 태세.
이거라면 어느 방향에서 남자의 공격이 날아와도 반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쪽이 가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극도로 긴장한 하이엔은…….
=……?=
느긋하게 걸어오는 남자의 행동에 의문을 품었다.
뭐야? 무슨 뜻이야?
마실 나온 것 같은 상대의 태도에 당황한 것도 잠시, 봉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이를 앙물며 손날로 봉을 쳐내는 동시에 남자의 가슴에 주먹을…….
=컥!=
……지르려 했지만, 봉이 뱀처럼 움직여 옆구리를 깊게 찌르고 들어와 하이엔은 격한 숨을 토해냈다.
내장을 온통 뒤흔드는 충격에 보법도 잊고 황급히 서너 걸음 물러난 하이엔=조드는 연신 컥, 커헉, 거친 숨을 토해내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자, 잠깐……! 숨이……!’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옆구리에 깊게 들어온 봉이 척추를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내장을 중심으로 고통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기다리라고 말을 꺼내야 하는데 고통 때문에 폐부가 수축돼 말을 못 하는 하이엔=조드.
환인은 그 상태를 읽었으면서 자신을 향해 내민 팔을 봉으로 빡, 후려쳤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가슴의 중앙을 봉 끝으로 강하게 찍었다.
퍽!!
우당탕
명치를 찍힌 충격에 뒤로 몇 바퀴를 구른 하이엔=조드는 그제야 쪼그라든 폐가 확 펴지는 느낌에 격한 기침을 토해냈다.
=끄으읍……~!=
배를 감싸고 상체를 접은 채 쿨럭쿨럭, 기침할 때마다 눈물 콧물 침이 쏟아져나온다.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은 좋은데 찍힌 명치가 너무 아프다.
폐도 아프고 내장도 끊어질 것처럼 아프고 척추도 찌릿거리고.
아니 그런 것보다 상대의 공격이 어떻게 이루어진 건지 이해되지 않아서,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처럼 맥없이 얻어맞은 게 너무 화가 나고 창피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하이엔=조드였다.
=…….=
=…….=
=…….=
좌중은 그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연무장을 연신 뒹구는 저 여자가 누구인가.
하이에른=조드.
권각계통 투사로 각성해서 7급의 벽을 넘는 것과 동시에 4급 호족 알드진=베레에게서 성surname을 하사받은 권각술의 천재.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아 17세의 어린 나이로 5급 투사에 오른 웨이포드의 신성??이 하이엔=조드였다.
그 하이엔=조드가 아우라도 없는 무직자에게 어린아이처럼 얻어맞다가 그로기에 빠지다니?
=어떻게 된 거야? 무직자의 공격이 왜 5급 직업자에게 통하는 건데?=
=진짜 사술을 쓴 거 아냐?=
=사술은 아니야. 사술 특유의 기운은 없었어.=
일어날 리 없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혼란스러워하는 갤러리의 소음에 하이엔=조드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고통을 참고 일어서서 다시 자세를 잡았고.
퍼버벅 뻑!
=으윽, 꺄윽!=
빡, 콰직, 우두둑
=흐어…… 악!=
쾅!
=끅.=
10분 동안 봄날 개 맞듯이 늘씬하게 처맞았다.
=그만…… 그만! 제가, 제가 졌어…… 아팟!=
항복선언 직전에 정수리를 딱, 소리 나게 때린 환인이 그제야 봉을 거두어들이자 그녀는 두 팔로 몸과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아 끆, 끄흑.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정수리도 뜨거운 물이 쏟아진 것처럼 뜨겁고 아프다.
5급 투사의 체외 방어력을 뚫고 들어오는 이 고통이 생소하다.
하이엔=조드도 직업자다. 상처를 입은 적은 많았다. 아버지와 대련하며 뼈가 부러졌던 적도 많았고 미궁 훈련 코스에서 이형종에게 죽을 뻔한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이 고통은 그것들과 궤를 달리했다.
마치 뼈가 조각조각난게 아닐까싶을 정도의 격통.
엉망진창으로 머릿속이 엉키는 와중에 한 가지 생각만 또렷하다.
창술의 기초 자세도 모르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강아지였던 게 아닐까?
그렇다고 이렇게 심하게 팰 것은 없지 않나.
‘아빠한테도 이렇게 맞은 적이 없는데!’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가득 찬 눈에 원망을 담았던 하이엔=조드는 환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오는 모습에 =힉.= 새된 소리를 지르며 움츠러들었다.
남들에게는 고작 10분이지만, 환인에게 얻어터진 하이엔=조드에게는 100분 같은 시간이었다.
고통의 공포가 머릿속에 각인되기에 충분한 시간.
겁에 질린 하이엔=조드를 내려다보며 환인이 입을 열었다.
“하이엔.”
=…….=
“대답 안 합니까.”
환인이 봉을 세워 쿵, 땅을 찍자 하이엔=조드가 움찔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네, 네.=
“기분이 어떻습니까.”
=…….=
“좋지 않겠지요. 세상이 자기 위주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테니까요.”
=저, 저는…….=
“부친의 휘광은 부친의 것이지 당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 부친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당신은 무력합니다.”
=…….=
“세상은 당신을 위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만한 아우라를 지니게 된 당신도 넓게 보자면 이 세상의 자그마한 부속품 정도 밖에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지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직설적인 표현에 하이엔=조드는 침을 꼴딱 삼켰다.
“그러니 오늘 일을 기억해두십시오. 무례한 행동에 돌아오는 것은 폭력뿐이며, 그 폭력은 당신의 작은 머리를 쪼갤 도끼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말입니다.”
그리 말하고 몸을 돌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하이엔=조드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난……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하지만 저 남자의 말에서 틀린 것은 없었다. 아빠의 위광을 믿고 내키는 대로 살아온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맞은 자리의 고통은 여전한데 가슴 속에서 새로운 고통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창피함이라는 이름의 고통이다.
대련장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이 칼날처럼 느껴진 하이엔=조드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무기 진열대에 봉을 반납한 환인은 5m 단상에 앉아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무관장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브릴릿에게 망토를 건네받았다.
무관장 외에도 무관의 교관과 훈련 참가자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환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브릴릿과 함께 하이에른 상급 무관을 빠져나왔다.
=영혼, 아아니 환인 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무관장의 딸을 그렇게 두들겨 패시다니…….=
무관을 나오자마자 브릴릿이 걱정을 드러냈지만, 환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족히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딸이 개처럼 얻어맞았다.
만약 팔불출이었다면 그때 난입했지 계속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을 거다.
실리주의자였다면 딸을 이렇게까지 교육하는 ‘척’ 해주었다는 사실에 악을 품지는 않을 거다. 나름대로 무관장의 입장을 배려해준 거였으니까.
그리고 속이 좁아 이런 일로 앙심을 품는다면 자신도 그에 맞춰서 움직이면 될 일.
“하이에른 무관장은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에 자신을 바라보는 하이엔=조드의 시선은 원망이 담겨있을지언정 원한과 분노는 없었으며 하이에른=조드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조금이지만 관심을 띄우고 있었으니까.
‘그걸 노리고 몽둥이찜질 이후 꼰대질을 하긴 했지만.’
=……그럼 왜 무관을 나오신 겁니까?=
“계속 절 응시하는 무관장의 시선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거기 더 있다간 사람들이 귀찮게 할 것 같았고요. 더 배울 것도 없어서 나왔습니다.”
=그, 그러셨습니까.=
어쨌든 버릇없는 계집애를 두들겨 패서 속은 시원하다.
지구였다면 사회에서 매장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지만, 여기서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으니 기분도 가볍고.
그나저나.
‘5급 전사쯤 되면 신체가 그렇게 단단해지는 건가.’
중간부터는 뼈를 부러트릴 생각으로 작정해서 팼는데 뼈에 금이 가는 느낌은 있었지만 부러지지는 않았다.
이실리테만 보더라도 직업자의 신체가 우월하다는 건 명백하지만, 그게 설마 이정도였을 줄이야.
잠시 머릿속으로 5급 직업자와 싸움을 시뮬레이션하던 환인은 브릴릿을 상대로 직업자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뒤에서 복잡한 얼굴로 따라오는 브릴릿에게 말한다.
“비싼 훈련비를 내셨는데 1시간도 채 못 채우고 나오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 괜찮…….=
“대신 스사 씨의 저택으로 돌아가서 잠깐 대련해드리겠습니다. 사과의 의미로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귀가 번쩍 뜨이는 제안에 괜찮다고 말하려던 브릴릿은 재빨리 말을 삼키고 허리를 꾸벅 숙이며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후 환인은 하이에른 상급 무관은 물론이고 어느 무관도, 훈련소도 방문하지 않았다.
유일한 상급 무관이 그 정도 수준이면 더 볼 게 없었으니까.
무관장? 그런 괴물과 손을 섞고 싶지 않다.
그가 누군가와 대련하는 것을 보면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애초에 그는 상징적이자 불가침적인 존재로 있는 것 같았으니 한 달을 꼬박 출근해도 그가 대련하는 모습은 볼 수 없겠지.
어차피 창술에 필요한 정보는 대부분 모았다. 이제 짬짬이 창을 휘둘러보면 될 일.
다음날부터 환인은 중심가의 길을 따라 돌아다니며 이 세상의 도시를 살피는 한편 상식과 지식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다쳤을 때는 어떻게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마을과 마을 사이는 어떻게 이동하는지, 신분별로 사용하는 식당이라던가 모험가나 여행자들이 마련하는 소모품, 그리고 소모품을 구하는 장소나 방법, 특권층이나 지배계층은 어떻게 대해야 하며 이 세계의 신분에 따른 지위 차이, 마구馬? 같은 것을 빌리거나 사는 곳, 물건들의 평범한 시세, 현시대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 도시별 이미지, 파벌, 신분, 관습, 풍습, 종교와 신적인 존재에 대한 탐구 등.
일상생활 전반에 대한 지식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길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식사 시간의 식당, 노동자들이 모여있는 근처나 주점 등에서 얻었다.
미궁과 관계되거나 직업자에 관한 정보 같은 특수한 정보는 웨이포드의 성술사 협회라고 할 수 있는 신전(짐승신을 섬기는 장소)에서 약간의 기부금을 내고 사제(성술사)와 대화를 나누며 얻었다.
신전은 아무래도 미궁의 탐험가나 모험가, 용병들이 자주 방문하는 곳이라 신전의 로비에 앉아만 있어도 현재 환인에게 필요한 기초적인 정보가 속속들이 손에 들어왔다.
웨이포드 서쪽에 위치한 지하미궁을 탐험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무기나 방어구를 잘 손질해주는 곳이라던가 미궁이 몇 층까지 탐색 완료되었는지, 미궁에 어떤 적이 나오며 사람들은 어떻게 미궁을 탐험하는지 등은 탐험가나 모험가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귀동냥으로 얻었다.
밤에는 호텔에서 추천하는 고급 창관을 방문해 여자들을 안는 한편 뒷세계의 이야기를 들었다.
도시에 어떤 유명 인사가 있는지.
도시의 주인인 알드진=베레는 어떤 인물인지.
요즘 도시에 어떤 주제가 핫이슈인지.
지하세계 조직이 얼마나 있는지.
도시 서쪽 바깥에 있는 지하 미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같은 이야기.
물론 이런 정보만 모으는 건 아니었다.
=손님은 이런 창관이 처음이신가 봐요?=
“이곳 문화가 처음입니다. 여기서 좀 먼 곳에서 왔기에 상식이 부족한 편이지요.”
=하긴. 손님의 외모가 이국적이긴 하네요. 아무튼 피임은 하지 않아도 되는 거냐고 물으셨죠? 여기 정도 되는 고급 창관은 창부 관리도 엄격하답니다.=
“엄격하다면?”
=예를 들어 마음에 드는 부자 손님의 아이를 일부러 배서 측실이나 첩으로 들어가려 한다던가 하는 일이죠. 후후후.=
“없다곤 할 수 없는 경우겠군요.”
=맞아요. 그래서 건물 자체에 피임 술법진을 새겨놓는 게 보통이예요.=
피임 술법진이 새겨진 건물 안에서는 아무리 성행위를 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창부 개인에게 피임을 맡기던 시절에는 높은 신분이 놀러 올 때마다 인생역전 한 방을 노리고 수작질 부리는 일이 계속 생겨서 아예 시스템을 개편했다고 한다.
=그게 10년 전의 일이에요. 그 뒤로는 손님들도 안심하고 즐기시고 우리도 약품으로 몸 상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아졌죠. 몇몇 애들은 실망했겠지만요. 손님께서 오신 곳은 피임을 어떻게 하나요?=
“저희는…… 남자와 여자가 각각 책임지는 편입니다. 남자는 투명하고 얇고 신축성이 강한 것을 씌우고 하며 여자는 약으로 조절하는 거죠.”
=그런 걸 씌우면 재미없지 않나요? 아무리 얇아도 그렇지, 옷 같은 걸 씌우면 아무 감각도 없고 여자도 아프기만 할 거 같은데?=
잘 관리받아 윤기 나는 적갈색 모발의 고양이 귀 처녀가 고양이처럼 생글거리며 환인의 가슴 위로 엎드린다.
“매우 얇고 매끄럽습니다. 머리카락보다 더 얇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말도 안 돼! 그러면 몇 번이나 재사용하겠네요?=
1회용이라고 하자 더욱 놀라는 아가씨의 머리 너머로 장모종 특유의 고양이 꼬리가 살랑이는 게 환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손을 뻗어 그 꼬리를 만져보자 보드라운 털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누비며 간지럽힌다. 굉장히 신경 써서 관리했다는 게 느껴지는 부드러움이다.
=아앙~. 제 꼬리는 아무나 만질 수 있는 게 아닌데……?=
창부가 교태를 부리며 환인의 가슴에 자기 가슴을 문지른다.
“그러면 다른 아가씨를 부를까요.”
=안 돼요. 오늘은 제 차례인걸요? 후후…… 아직 건강하시네요. 그럼…… 흣.=
환인의 기둥을 잡고 조준한 뒤 허리를 내리는 창부.
굵고 묵직한 살기둥이 자신의 속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감각에 고양이 귀 여자가 귀를 두 차례 파닥거리며 신음을 흘린다.
아랫입은 허락해도 윗입은 허락하지 않는 게 이곳 상급 창관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자부심이지만, 고양이 귀 여자는 자부심 따윈 아랑곳하지 않으며 개구리처럼 방아를 찍어대는 동시에 열정적으로 환인의 입술을 탐했다.
환인도 자신과 몸을 겹친 채 움직이는 여자의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고 그 행동에 호응해나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