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085 하이에른 상급 무관
* * *
식사 시간은 무척이나 온화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준비된 음식은 환인의 입에서도 칭찬이 흘러나올 정도로 훌륭했으며, 장탁자에서 하는 식사는 처음인 환인이었지만, 하녀의 시중이 입 안의 혀처럼 자연스러워 불편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음식이 무척이나 맛있군요.”
빈말이 아니었다. 음식의 수준은 현대의 고급 레스토랑 쉐프의 솜씨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정도.
환인의 진심 어린 칭찬에 스사는 크게 기뻐했다.
그간 몇 번 식당에서 함께 식사한 적이 있었고 음식이 맛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저 예의 삼아 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식사를 끝낸 환인은 스사 부부와 함께 응접실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대화는 주로 환인 자신의 신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간 자신의 신상에 관해서는 입을 꾹 닫고 있던 환인이 조금씩 풀어내는 한국의 사회 시스템이나 환경등을 이야기해주니 상인인 스사는 물론 앤플린드와 브릴릿, 이실리테도 귀를 기울이며 지대한 관심을 내비쳤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환인은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사와 불륜 관계인 걸까 의심했던 브릴릿은 부인인 앤플린드의 인정을 받은 스사의 정식 애인이었다는 것.
“조금 독특한 관계군요.”
=그렇습니까? 연위는 평범한 관습입니다만……. 환인 님의 고국에는 연위가 없으신가 봅니다.=
연위?, 애인으로서 정실의 인정을 받고 남자를 근거리 호위하는 직업이라니. 정말 독특한 관습이 아닐 수 없다.
남자 숫자가 부족하고 여자보다 남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기에 가능한 일인 걸까.
“예. 대외적으로 일부일처제기도 하고 여기처럼 목숨을 뺏고 빼앗길 만큼 심각한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는 드문 곳인지라.”
환인의 대답에 스사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아. 그러고 보니 환인 님이 무기를 잡아본 것도 3개월 전이 처음이셨다고 하셨지요. 치안이 굉장히 좋은 곳인가 봅니다. 저도 꼭 한번 방문해보고 싶은 곳이군요.=
“가능하다면 저도 스사 씨를 초대하고 싶습니다만……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곳이 제 나라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어디쯤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환인 님의 능력이라면 반드시 돌아가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힘내십쇼.=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훈훈한 이야기가 오갈 무렵, 브릴릿은 디저트로 준비된 고구마 파이를 벌써 2판째 먹어 치우고 있는 이실리테를 주시하다가 환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외람되지만 영혼사님께 한 가지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는지 스사와 앤플린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브릴릿을 바라본다.
스사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을 꺼내는 것은 처음 보는군.=
=주인님이 걱정하시는 일은 아닙니다. 그저 이실리테가 조금.=
브릴릿의 대답에 스사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앤플린드도 이실리테와 환인을 차례대로 보더니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웅? 내가? 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환인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다과실에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이실리테 뿐.
“경청하겠습니다.”
환인의 정중한 대답에 브릴릿이 속으로 안도하며 이실리테를 쳐다본다.
=이곳 웨이포드에는 고급 하녀 양성기술원이 있습니다. 주도의 메이든 고등대학기술원의 분교이며 웨이포드의 주인이신 알드진 베레 님의 성을 비롯, 근방의 소도시와 마을의 호족 님들, 고족분들을 시중드는 시녀들 절대다수가 이곳 양성기술원 출신이지요. 이실리테가 그곳에서 교육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떠신지.=
=어?=
=6세 소녀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받은 정규 자격을 딴 메이든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단기 교육을 수료한다면 영혼사님의 앞으로 행보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환인은 눈을 깜빡이는 이실리테를 쳐다보았다.
고구마 파이의 부스러기를 윗가슴과 허벅지 사이에 마구 흘렸고 두 손은 물론 입가에도 고구마 소스를 묻힌 칠칠치 못한 모습.
“비상식량. 이리 와라.”
쿠엣.
그 의자 밑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콕콕 쪼아먹는 비상식량을 불러들인 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실리테에게 기본적인 예의를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환인의 긍정적인 대답에 앤플린드가 나섰다.
=그 일은 영혼사님께서 신경 쓰실만한 일이 아닌듯합니다. 미력한 몸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힘내겠사오니 이실리테 양의 교육 관련 문제는 저에게 맡겨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제 아내가 그쪽으로 인맥이 있습니다. 단기 교육과정은 약 40일가량이니 괜찮으시다면 맡겨보심이 어떻습니까?=
스사의 입에서도 환인이 궁금해하던 정보가 나왔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한동안 이 세상에 대한 정보와 기초지식 등을 수집하며 머무를 생각이었으니까.
‘우르거의 시체를 팔아 번 돈도 많으니 교육비는 충분하겠지.’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브릴릿과 이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이실리테는 한 마디 토도 달지 않고 고급 하녀 양성기술원에 입원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음 날.
=주인님, 저 열심히 배우고 나올 테니까요! 그러니까 저 버리고 가시면 안 돼요…….=
혹시 자신을 두고 가버릴까 두려워하는 이실리테에게 환인은 상냥한 위로가 아니라 살벌한 위협을 주었다.
“반대로 말하지. 제대로 배우지 않고 나오면 널 버리고 가겠다. 그러니 똑바로 배우고 와라.”
=힉. 네, 넵!=
앤플린드의 이야기에 따르면 교육 코스는 여러 가지였다.
정식 하녀 자격증을 딸 수 있는 6년 코스.
간이 자격증을 딸 수 있는 2년 심화 코스.
자격증은 주지 않지만, 졸업증은 주는 1년 기본 코스.
그리고 집중 교육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40일 단기 코스.
정식 자격증을 딴 시녀는 급수가 낮은 호족의 가문에 고용된다.
간이 자격증을 딴 하녀는 그보다 낮은 고족의 저택에 고용되며 기본 코스를 수료한 하녀는 마을의 유지 같은 인물들의 집에 고용되는 편이다.
스사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 4명도 1년 기본 코스를 수료한 사람들이라고.
교육비는 기간이 길수록 비쌌다. 6년은 약 6금화, 2년은 2금화, 1년은 1금화, 40일 단기 코스는 50은화.
처음에는 하녀가 되는데 어째서 금화씩이나 필요한가 했지만, 귀족 집안의 알선과 고용까지 맺어준다는 데에서 납득했다.
이 세상의 기술이 가진 값어치와 인맥 연결 비용이라 생각하면 이런 거금이 이해되는 것.
한 달 조금 더해서 예의범절과 몸가짐, 간단한 기초 교육을 주입하는데 5000만 원이라는 거금을 지출했지만, 환인은 아깝지 않았다.
딱히 타인에게 빡빡한 예의나 매너를 요구하지 않는 환인이다. 그런 일에 별달리 예민하지 않은 성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실리테의 몇몇 돌발행동은 그런 환인마저도 미간을 좁히거나 눈썹을 찡그리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40일 교육으로 그런 면을 다듬을 수 있다면 50은화 정도는 충분히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만약 시간만 충분하다면 1년 과정에 보낼 생각을 했을 정도.
‘메이든 고등대학기술원에도 단기 코스가 있다고 했지. 성과를 보고 기회가 되면 거기에도 보내볼까.’
기술원은 기본적으로 숙식을 권장하기에 다시 혼자가 된 환인은 한결 마음 편하게 지식과 상식 습득을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여기가 웨이포드에서 유일한 상급 무관입니다. 검술의 고급 무관장이 있으며 검술, 창술, 격투술의 상급 교관이 있고 부술, 궁술, 둔기 전반, 단검술 등 여러 가지 무기의 중급 교관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실질 대련 위주의 일일 훈련비용 지불 방식이라 많은 사람에게 호평을 받는 곳입니다.=
이실리테가 하녀 기술원에 입원하고 며칠 뒤, 환인은 브릴릿과 함께 상급 무관을 찾았다.
브릴릿과 대련 이후 창술이 엉망이라는 지적을 받았기에 그 부분을 보완할 목적에서였다.
=상급 무관의 훈련비는 하루에 1은화. 오전 6시부터 오후 19시까지 12시간이며 원한다면 무관장과도 대련할 수 있는 곳입니다.=
“교육비가 싼 편은 아니군요.”
1은화면 하루에 교육비만 100만 원이라는 뜻.
=다른 무관은 최소 한 달에서 길면 반년의 훈련비를 선불로 요구하는 곳이라…… 환인 님께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배울 걸 다 배우고 빠질 게 틀림없다는 브릴릿의 믿음이 만들어낸 상황이었다.
환인도 이런 일일 훈련비 지불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우르거와 싸우기 전에는 정식으로 창술을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싸운 뒤에는 무기술에 대한 열망이 많이 가라앉았다.
한 달씩이나 무관을 들락거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대문이 열리는군요. 들어가시지요.=
브릴릿도 오랜만에 몸을 풀 생각으로 환인과 함께 대문이 열린 하이에른 상급 무관에 들어섰다.
훈련은 의외로 틀이 잘 잡혀있었다.
1회 대련에 10분. 같은 계통의 교관에게는 하루에 3번밖에 신청하지 못한다.
점심은 12시부터 1시까지. 휴식은 각자 알아서.
대련 도중 다친 상처는 상급 무관답게 근처 신전과 계약을 맺어 성술사를 상주시키고 있어서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물론 무관 ‘안에서’ 다친 상처만이다.
=운이 좋군요. 오늘은 무관장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없습니까?”
=무관의 장이다 보니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습니다. 한 달에 많이 나오면 세 번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
5m나 되는 높은 단상에 앉아있는 무관장은 인호족人虎?이었다. 팔뚝이 환인의 허벅지만 했고 앉은키도 1.5m에 달할 정도의 거구.
그런 것보다 무관장의 아우라가 환인의 시선을 잡아끈다.
팔뚝과 두 다리를 뱀처럼 휘감고 있는 노란색 아우라. 삼림형 미궁 심처의 푸른불꽃 호랑이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브릴릿 씨. 하이에른 무관장은 몇 급입니까?”
=7급 투성입니다.=
투성?. 투사가 깨달음을 얻어 벽을 돌파하면 도달한다는 경지.
‘만약 아우라의 형태가 급수를 따라 변화한다면 푸른불꽃 호랑이도 7급 이형종이란 뜻이겠지.’
그날 녹색 유인원과 몇몇 짐승, 괴물을 떠올리던 환인은 문득 스사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7급의 미궁을 깨기 위해서 7급 호족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했다.
7급 전사가 소도시의 무관장을 할 정도라면 저만한 전사가 몇 명이나 더 있어야 미궁을 깰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 말은…….
‘미궁의 괴물은 동급의 사람보다 더 강하다고 봐야겠군.’
꿈틀거리는듯한 무관장의 아우라를 응시하다가 단 아래 서있는 30명가량 되는 교관들에게 시선을 내렸다.
상급 교관은 3명의 5급 전사로, 레힐을 탈출한 그 날 밤 보았던 크타치난이라는 전사와 아우라의 농도가 비슷했다.
중급 전사는 40명의 4급 전사로 4급인 아우라의 농도가 브릴릿과 비슷하거나 더 진한 수준.
땡땡땡땡땡?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직사각형의 대련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이 즉시 교관들 앞에 줄을 선다.
인기가 많은 것은 당연코 검. 검을 패용한 교관들도 가장 숫자가 많다.
=환인 님. 상급 교관과 대련하려면 중급 교관과 대련에서 이겨야 합니다. 무관장과 대련하려면 상급 교관을 이겨야 하니…….=
“알겠습니다. 저는 잠시 구경하다가 참가할 테니 브릴릿 씨는 볼일 보십시오.”
=네.=
그 말을 기다렸는지 브릴릿은 곧장 상급 창술 교관 대련 대기줄로 가서 섰다.
10분 정도 지나자 20개의 대련장이 가득 찼고, 20쌍이 각자의 무기를 휘두르며 대련을 시작한다.
환인도 무관장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관중석 비슷한 곳에서 대련장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대련을 위해 온 사람들은 이실리테보다 아우라량이 낮은 사람부터 상급 교관과 비슷한 농도까지 다양했지만, 무기술의 숙련도는 교관들 쪽이 월등했다.
‘당연한 일이겠지.’
기술을 배우러 온 사람들이다. 자신보다 약한 교관들이 있는 곳을 올 리 없다.
대련은 10초도 되지 않아 끝나는 곳도 있었고 10분이 다 되도록 버티는 곳도 있었다.
특이점은 대련이 끝난 뒤 잠깐 지도해주는 시간이 있다는 것.
그 모습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던 환인은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다른 무기들은 끌림이 느껴지지 않아.’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어느 무기도 끌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창을 오래 써왔고 편했기에 인식이 좋을 뿐. 게다가 뭐라고 해야 할까. 상급 교관들을 상대로 싸운다는 가정을 해봐도 심장이 뛰지 않는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 아닌 대련이라서 그런가.’
마찬가지로 인호족 무관장을 보고 있어도 그다지 설렘이 느껴지지 않았다.
비술사 협회에서 위아레이라는 인토족 비술사와 마주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역시 자신은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하는 환인이었다.
자제하지 않는다면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될 테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살인광이 되겠지.
“…….”
그렇다고 피를 피하는 삶을 사는 것은 내키지 않는 환인이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랬다고, 여긴 지구가 아니고 다른 세상이니 이 세상의 법을 따라야 한다.
다들 죽고 죽이는 곳에서 혼자 불살?을 고수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환인은 될 수 있으면 피에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활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충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린 환인은 그때부터 중급 창술 교관과 상급 창술 교관의 대련을 주의 깊게 눈여겨보았다.
‘창의 파지법은 저렇게 하는 건가. 흐음. 창을 휘두를 때 잡는 위치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군. 어깨와 허리가 연동되듯 움직이고 보폭과 보법은…….’
보법??, 발을 움직이는 법은 볼 게 없었다.
저렇게 움직이면 안될 텐데 싶은 본능적인 감각이 느껴진다고 할까. 중급 교관과 붙는다면 10초도 지나지 않아 이길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선다.
중급 교관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움 되는 쪽은 그나마 검과 창, 맨손의 상급 교관 세 명.
그러나 그들도 환인 자신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보법은 물론 운신법???도 이상하게 여겨진다.
무기와 팔다리, 몸이 일체 되지 않는 느낌인 거다.
환인은 다른 것은 포기하고 상급 창술 교관의 파지법과 창을 휘두를 때 쥐는 간격, 팔과 어깨를 움직이는 법 정도만 주시했다.
‘저 세 명이 모여도 그때 그 바르둘을 못 이기겠는데.’
셋 다 목숨을 도외시한다면 세 명 중 한 명은 죽고 나머지 두 명도 팔다리가 잘리는 등의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바르둘을 죽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괴물과 싸우려 할까.
‘어렵겠지.’
그제야 웨이포드 북문의 하이에나 경비병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게 이해가 갔다.
상급 교관을 대하는 브릴릿의 태도는 정중함과 약간의 경외감이 있었다.
브릴릿이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상급 교관은 이 도시에서 어느 정도 유명 인사라고 봐도 무방할 테지.
그런 사람이 셋이나 있어도 잡기 어려운 게 우르거일텐데 자신은 아우라도 없고 그렇다고 덩치가 큰 것도 아니고.
작게 입매를 들어 올리는데 아까부터 옆에 서 있던 선명한 물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빙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구경하는 것보다 직접 움직이는 게 더 재미있지 않나?=
“그런 의미로 웃은 게 아닙니다. 잠깐 헤프닝이 기억나서.”
=무슨 헤프닝인가요?=
“당신과 공유할만한 기억은 아닌듯하군요.”
냉정하게 느껴지는 환인의 대답에 물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빙그레 웃는다.
환인의 눈도 여자를 살핀다.
아우라의 깊이를 보면 5급인듯한데 동작도 그렇고 움직일 때 몸의 균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을 보면 이곳의 상급 교관들과 비슷하거나 강하면 강했지, 모자랄 것 같지 않은 모습이다.
=그런데 덥지 않나요? 이런 날씨에 후드 망토라니. 잘못하면 염탐꾼으로 의심받을지도 몰라요?=
“소개인과 함께 왔으니 그런 의심을 받진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저는 아우라도 없지 않습니까.”
=아우라가 없으니 더욱 의심받을 수도 있지요.=
여자의 대답에 환인은 표정을 없애고 여자를 응시했다.
코 아래쪽으로 드러난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진 것을 느낀 여자가 살짝 물러서며 두 손을 들어 항복 제스쳐를 보인다.
=미안해요. 농담이 지나쳤네요.=
“장난은 받아줄 사람들에게 가서 하는 게 좋겠습니다.”
=으응.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당신이 여자라고 생각해서 말을 걸었는데 남자 목소리가 들려서, 호기심에 그만.=
“…….”
=그 후드 망토는 남자도 가끔 쓰긴 하지만 여자들이 더 많이 쓰는 유명 브랜드에요. 거기다 보이는 부분이 여자 같은 모습이었잖아요?=
그렇지 않냐고 묻는듯한 이야기에 환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상급 창술 교관의 대련을 보며 대답했다.
“제가 플뢰일 가능성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까?”
=당신처럼 피 냄새가 물씬 느껴지는 기운을 플뢰가 가진다고요? 당신, 플뢰를 본 적 없나 보네요.=
“이 근방에서 당신만큼 플뢰를 잘 아는 사람도 얼마 안 될 것 같군요.”
=헤…….=
반어법이 섞인 조롱에 여자가 재미있는 것을 본 소녀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에 따라 환인의 감정도 부정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무렵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하이엔 조드, 하이에른 무관의 5급 권투사에요. 저와 대련 한 번 해보시는 건 어떤가요?=
“저는 창을 씁니다.”
=적이 전부 창을 쓴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창을 배우러 왔다고 말하는 겁니다.”
=흐응.=
설마 거절당할 줄 몰랐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입가에 미소를 띤다. 거기에는 `내 제안을 거부해?` 같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환인의 시선이 여자의 머리 위에 있는 짐승 귀로 향했다.
모발과 같은 색의 저 털귀는…… 호랑이 귀인가. 시선을 내려 허리 쪽을 보니 과연 푸른 바탕의 호랑이 줄무늬 꼬리가 보인다.
‘이름도 비슷하고, 무관장의 딸인가 보군.’
환인은 불현듯 세상이 마치 자기중심인 양 행동하는 여자에게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대련, 하죠.”
충동적이었지만 그리 생각했다면 실행에 옮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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