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084 소도시 웨이포드
* * *
중심가와 고족 거리를 잇는 통로인 제1 내성문의 경비는 제2 내성문의 경비와 복식이 또 차이 났다.
제2내성문은 판금 갑옷과 사슬갑옷을 섞어 입었는데 이들은 완전한 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치고 있었던 거다.
거기다 희미하지만 아우라를 두르고 있는 직업자.
이실리테는 그걸 보고 놀라서 입을 살짝 벌린 상태였다.
2인 1조인 두 명의 경비병 중 1명만 직업자였는데, 그래도 직업자를 경비병으로 쓰고 있다는 게 그녀로서는 혼이 나갈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던 거다.
‘중세 말기 유럽의 판금 갑옷과 비슷한 면이 많아.’
기병이 아닌 보병의 판금 갑옷은 양산형으로 분류된다. 때문에 무릎, 혹은 정강이까지만 보호되는 형식이 많은데 눈앞의 경비병은 전신을 판금으로 감싸고 있었다.
더욱이 성능보다는 외견을 중시 여겼는지 몸의 굴곡에 맞춘 커스터마이즈 느낌이 강하다.
사바톤sabaton 또한 끝이 뾰족한 게 아닌 구두처럼 뭉툭한 외형.
회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은 여기사 느낌의 경비병은 환인이 제출한 임시 통행증을 확인하며 말했다.
=신분증 발급을 위해서군요. 확인했습니다. 대로를 따라 직진하시면 행정관이 나오니 거기서 신분증을 발급받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로를 절대 벗어나지 마십시오. 이건 경고입니다.=
임시 통행증을 돌려받고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경비병을 지나쳐서 중심가보다 더 포장이 잘 되어있는 고족 거리에 들어섰다.
‘미국의 부촌 느낌이군.’
대로에는 다니는 마차도, 통행인도 얼마 없었고 상점이나 노점도 없었다.
보이는 거라곤 허리께 정도 되는 담벼락, 혹은 관목 너머로 2~3층 높이의 세련된 저택과 정원들 뿐.
저택도 미국의 고급 주택지역에서나 볼법한 수백 평 규모의 대저택이다.
으리으리한 대저택의 향연에 이실리테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감탄한다.
=와……. 직업자를 경비병으로 쓰는 것도 놀라운데 안쪽은 더 으리으리하네요. 근데 왜 대로를 벗어나지 말라고 한 거지?=
“거리의 품위를 해치지 말라는 뜻일 거다.”
=네?=
대답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이실리테에게 환인은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특권 계층들은 자신들이 거니는 거리를 일반 서민들이 더럽히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진짜요? 걷는 것도 못 하게 한단 말이에요?=
뜨악한 표정으로 거리를 둘러보는 이실리테의 행동에 환인이 옅은 비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부자들의 소유욕과 자의식, 선민사상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나 보군.”
=주인님. 자의식이랑 선민사상이 뭐예요?=
“…….”
옆에서 걷는 이실리테를 쳐다보니 ‘진짜 몰라요.’하듯이 맹추처럼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다.
그녀의 품, 풍만한 가슴 위에 머리를 올리고 졸고 있는 비상식량을 본 환인은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나는 영혼사다. 그럭저럭 싸움법도 알고 있고 그럭저럭 지원도 가능하지.”
=네.=
그럭저럭이 아닌데. 그 점을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얌전히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이렇게 경험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것, 그것이 자의식이다. 그리고 널 걷어차고 때리며 도적나부랭이가 어딜 감히 내 옆에서 걷고 있느냐고 욕을 퍼붓는다고 상상해봐라.”
=주인님은 안 그러실 거잖아요…….=
“상상이라고 했을 텐데.”
=…….=
“그런 식으로 남달리 잘 사는 사람,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을 깔보고 업신여기는 태도를 넘어 그걸 당연한 일이라고 우월감을 가지는 것을 선민사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나 잘났다고 생각하는 놈이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게 선민사상이라는 거네요. 와, 여기 사는 놈들은 되게 나쁜 놈들이네.=
“아닐 수도 있지.”
=……??=
“남의 물건을 훔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거리를 더럽히는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한 걸 수도 있고.”
환인은 머리를 긁적이는 이실리테의 머릿속이 대충 보이는 듯했다.
그래서 나쁜 놈이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 환인은 대로만큼이나 넓은 도로를 건너면서 저 멀리 보이는 해자와 도개교가 설치된 거대한 성문을 바라보았다.
높이만 20m에 가까운 거대한 성문이다.
‘말 그대로 성이군.’
과연 저 성의 주인은 어떤 생활상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중세와 비슷한 느낌? 아니면 현대 감각에 중세를 섞은 느낌?
생각하며 걸어가는 사이 도개교 옆 하얀 대리석의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저택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관공서 양식의 건물이다.
앞에는 나무와 꽃과 분수 등으로 조경을 꾸며놓은 작은 공원도 있고 몇몇 귀족 차림으로 대리석 건물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저기가 행정관인가 보군.”
=우왓. 대리석이다.=
행정관에 들어가기 전, 분수 근처에서 이실리테를 불러세운 환인이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이런 걸 묻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아베트에게 개인적으로 받은 것도 있고 웨이포드로 올 때까지 네가 보여주었던 각오가 있었기에 마지막으로 묻겠다. 잘 생각하고 대답해라.”
=네, 넵.=
“날 계속 섬길 테냐. 아니면 네 길을 찾아 떠날 테냐.”
순간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실리테에게 환인은 말과 여자들이 역동적으로 조각된 커다란 분수대를 돌아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네 길을 찾아 떠나겠다면 이전에 있었던 일은 잊고 놓아주겠다. 스사 씨에게 부탁해 도적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고 먹고살 수 있도록 도움도 주지.”
이실리테가 급히 무언가를 말하려 했기에 손을 들어 입을 막은 환인은 눈을 날카롭게 떴다.
=딸꾹.=
놀라 딸꾹질 하는 이실리테에게 계속 말했다.
“하지만 날 쫓아오겠다면, 나는 네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현재 다수의 목적을 지니고 있지만, 그중 하나는 높은 급수의 미궁 탐사다. 지금 네 수준으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
=…….=
처음에는 반사적으로 환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죽어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소리치려 한 이실리테였지만, 환인의 이야기에서 그녀는 거의 느껴본 적 없는 진심이 가슴 깊이 전해져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에 깊이 빠져들었다.
나는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주인님이 혼재였던 아베트를 성불시켜주셨고 몇 번이나 축복을 내려주셨으니 나락으로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평범하게, 안락하게 살고 싶다면 전자를 선택하면 그만이지만…….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기다리던 환인의 귀에 이실리테의 각오가 담긴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주인님을 따라갈래요.=
“네가 맞이하게 될 끝이 여행 도중의 죽음이라고 해도?”
=전 사실 똑똑하지 못해요. 멍청하고 배운 것도 없고요. 그래도…… 아베트가 주인님한테 꼭 붙어있으라고 하기도 했고…… 그날 주인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언제고 길거리에서 등을 찔리든, 예상 못 한 강자를 만나서 몸이 베이든, 정규군한테 붙잡혀서 성벽에 목이 매달리든 해서 죽었을 거예요.=
“…….”
=그런 죽음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개죽음이겠죠. 하지만 주인님과 함께 미궁 탐사를 하다가 죽으면…… 더러운 빈민가 출신의 거지 계집애가 마지막에는 영혼사님의 하녀로 죽는 거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죽음일 거에요. 저는, 저는 죽어도 주인님의 곁에서 죽고 싶어요.=
“그러냐. 마음대로 해라.”
=넵!=
환인의 허락이 기쁜 듯 생글거리며 따라오는 이실리테와 함께 행정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심은 조금 복잡했다.
스사나 브릴릿의 평가대로 이실리테은 남을 속이는걸 잘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방금 이야기가 모두 진심임을 알게 되었는데, 환인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죽어도 자신의 옆에서 죽고싶다니.
“…….”
깊어지려는 생각을 걷어내고 행정관에 들어선 환인은 주민센터와 비슷한 내부를 살펴보며 자신과 이실리테의 신분 등록 절차를 진행했다.
보증인으로 스사의 소개장과 임시 통행증, 그리고 등록비로 1인당 50은화씩 1금화를 지불하자 손가락 두 개 크기의 옅은 보랏빛의 금속패와 임시 통행증 발급 비용인 40은화를 되돌려받았다.
1밀리 정도 되는 두께의 금속패는 발급받은 날짜, 발급받은 위치, 소유자 성명이 적혀있고 아래쪽에는 보증인인 스사의 이름과 4급 호족 알드진 베레의 인장이 작게 찍힌 물건이었다.
‘인식표인가.’
군 복무를 하며 목에 걸고 다녔던 망할 물건을 떠올린 환인은 행정관을 나가려다 소매를 잡아당기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실리테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행정관을 가리키며 말한다.
=주인님, 일방적 종속 비술 계약 안 했어요.=
“필요 없다.”
툭, 손을 털고 행정관을 나서는 환인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실리테가 후다닥 달려가서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왜, 왜요? 제가 배신하면 어쩌시려고요?=
“배신할 거냐.”
=안 할 거예요!=
“그럼 됐지.”
그런가……? 하던 이실리테는 이게 아닌데! 하며 퍼뜩 정신을 차리곤 다시 물었다.
=주인님,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건데요?=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시험을 냈었다.
만약 자신의 질문에 이실리테가 풀어달라 했다면 원하는 대로 풀어주었을 거다. 말한 대로 스사를 통해 직업 알선도 부탁하고 소지금 일부도 나누어주었겠지.
따라가겠다고 큰 고민 없이, 즉답했다면 그대로 데리고 갔을 거다.
일방적 종속 계약을 맺고서 말이다.
하지만 이실리테는 자신의 질문에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속내를 전부 밝혔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처음에는 피식자와 포식자의 관계였던 비상식량과 좋은 관계가 된 것처럼, 이실리테도 한 번은 믿어보자는 일종의 변덕 같은 마음.
“한 번은 널 믿기로 했다.”
=……!=
물론 의심이 일상인 환인에게 남을 완벽하게 믿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그저 의심하고 의심받는 관계보다 어느 정도 믿음과 신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가 더욱 편하기에 고른 선택지이기도 하다.
이실리테에게 어느 정도 신뢰를 산 것도 틀림없으니 말이다.
올츠 호텔로 돌아온 환인은 즉시 호텔의 하녀에게 목욕을 준비시켰고 근 3달 만에 몸을 씻는 쾌감을 누릴 수 있었다.
“후우…….”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욕조에 두 팔 뻗고 누워있으니 온갖 잡생각과 걱정이 사라진다.
=물 온도는 뜨겁지 않으세요?=
“적당하군요.”
옆에서 목욕 시중을 들어주는 호텔 소속 메이드에게 대답한 환인은 눈을 감으며 발치의 욕조 가장자리에 다리를 올렸다.
그동안 물을 적신 수건으로 매일 몸을 닦아왔지만, 현대인의 감각이 남아있는 환인으로서는 불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역시 목욕은 이렇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줘야지. 못해도 매일 샤워는 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집을 사야겠지. 아니면 이런 목욕 시스템이 있는 여관이나 호텔에서 묵던가.
옆에서 물 온도 조절을 해주고 팔과 어깨를 안마해주던 호텔 소속 하녀는 환인의 머리를 조심스레 들어 자신의 윗가슴골에 내려놓곤 목이며 어깨,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안마하며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다.
=손님. 목욕 시중에는 유료 봉사 항목이 있는데…… 한 번 이용해보시겠어요?=
뒤통수에 느껴지는 폭신폭신한 감촉으로 미루어보아 유료 봉사라는 것은 그렇고 그런 게 틀림없겠지.
“흥미 있군요. 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겠습니다.”
메이드 캡을 쓴 빅토리아 시대의 메이드 복장 하녀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환인의 이마를 마사지하는 척, 환인의 머리가 자신의 가슴을 더 누르도록 꾹꾹 누르며 말했다.
=안타깝네요……. 그땐 꼭 저를 불러주셔야 해요? 성심성의껏 봉사해드릴게요.=
“아가씨의 이름은?”
=웬나에요.=
“기억해두겠습니다.”
짐승 귀는 메이드 캡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고 꼬리도 단정함을 강조하는 롱스커트로 숨겨져 있었지만, 풍성한 금발이나 왼쪽 눈 밑에 찍혀있는 눈물점 등이 색기 넘치는 아가씨다.
물론 외모도 이 세상의 평균에서 조금 높은 수준. 아랫배에 온기도 충분하니 환인의 입장에서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지만, 잠시 후에는 스사의 집을 방문해야 한다.
환인이 목욕하고 나온 뒤에는 이실리테도 들어가서 씻었고 둘 다 외출 준비를 끝내자 시간을 맞춘 것처럼 스사가 마차를 타고 마중을 나왔다.
짐마차가 아니라 마차다. 레힐을 탈출할 때 보았던 마차들과 비슷한 수준의 고급 마차.
마부가 열어주는 문으로 들어가자 16세기 유럽의 남자 귀족 같은 옷을 입은 스사가 웃으며 자신의 앞을 손짓했다.
=오! 후드 망토를 새로 사셨군요. 과연…… 도시에서 이름난 브랜드로 구입하시다니, 역시 환인 님의 눈썰미는 보통이 아니십니다.=
스사의 아부에 뒤따라 올라탄 이실리테가 눈썹을 찡그리며 핀잔을 준다.
=아부 좀 그만해, 이 아부쟁이야. 길 가다가 보이는 양장점에 들어가서 산 건데 브랜드는 무슨.=
=어허! 한평생 속고만 살았습니까? 루아르도 양장점하면 고족 거리의 고족들도 주문하는 브랜드 중의 브랜드이건만! ……그나저나 씻겨놓고 좋은 옷을 입혀놓으니 그럭저럭 환인 님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을 정도는 되는군요.=
=그래? 다행이다.=
=…….=
발끈할 걸 예상하고 뒷말을 붙인 건데 솔직한 반응이 돌아오자 스사는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스사 씨도 옷이 멋지시군요.”
=아닙니다. 세련됨은 환인 님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옷일 뿐이지요.=
그러면서 머쓱하게 웃는데, 무릎까지 올라오는 하얀 부츠에 초록색 통이 넓은 바지, 그 위에 베스트vest와 코트까지 걸친 모습은 16세기 무대 의상 그 자체로 보였다.
‘저런 복식은 누가 퍼트린 건지 정말 궁금하군.’
마차는 대로를 따라 서쪽 이동했는데, 도착한 스사의 집은 고족 거리의 대저택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3층 높이에 높은 담장과 15개는 되는 방을 가진 어엿한 고급 저택이었다.
행상 도중 간간이 들은 그의 신변 이야기에서 적잖이 잘 사는 느낌을 받았는데 예상 그대로였다.
저택 입구에 멈춘 마차에서 내려 정문으로 들어가자 작은 홀이 나타나며 문 앞에 나란히 서 있던 하인과 하녀 8명이 허리를 꾸벅 숙인다.
그들 사이로 홀의 중앙에 서있는 두 명의 여자와 어린아이 둘이 가까이 다가왔다.
한 명은 가벼운 승마바지 차림의 브릴릿. 다른 한 명은 빅토리아 시대를 연상케 하는 드레스 차림의 연약해 보이는 미녀.
재빨리 움직인 스사가 그녀들 사이에 서더니 가슴에 한쪽 손을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어서오십시오. 방문을 환영합니다, 환인 님.=
=방문을 환영합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정중한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스사와 함께 허리를 숙이는 여인들과 소년소녀를 바라보던 환인도 가슴에 손을 올리고 살짝 목례하자 스사가 기쁨이 온몸에 묻어나는 모습으로 다가와서 웃는다.
=헤어진 지 반나절도 안 됐는데 이런 말씀 드리기가 참 뻘쭘합니다만, 이렇게 뵐 수 있어서 참 반갑습니다. 환인 님을 초대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쁘고요.=
“아닙니다. 이렇게 좋은 마음으로 초대해주시는 분이 있으셔서 저도 타지에서의 외로움이 조금은 가시는 기분입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들은?”
=제 가족들입니다. 이쪽은 제 아내인 앤플린드. 브릴릿은 잘 아실 테고요. 그리고 여기 이녀석이 장남인 질레우, 여기 꼬마 숙녀가 에아라, 제 자식들입니다. 앤, 질레우, 에아라. 이분은 이번 여행에서 인연을 맺게 된 환인 님입니다. 영의 길을 걷는 고귀한 여행자님이시지요. 인사드리세요.=
스사의 소개가 끝나자 부인이라 소개된 미녀가 부드럽지만 약간 힘이 없는 느낌으로 허리를 깊게 숙인다.
=앤플린드입니다. 남편을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주신 것에 감사드려요.=
가까이서 본 앤플린드의 모습은 연약함이 아니라 병약함 그 자체였다.
가을 논밭의 잘 익은 벼색의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틀어 올리고 화장도 조금 짙게 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걸로는 창백한 안색을 숨기지 못했다.
더군다나…….
‘온기가 다른 여자들의 1/4밖에 안 되는군. 선천적인 온기가 적으면 병약해지는 건가.’
그러나 그만큼 외모는 뛰어났다. 이 세상에서 본 여자 중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
=안녕하세요. 에아라에요.=
=질레우에요!=
두 소년·소녀는 스사와 앤플린드의 자식임을 증명하듯 질레우는 새끼고양이처럼 동글동글한 치타 머리의 소년이었고, 에아라는 앤플린드를 닮아 아직 어린데도 미모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소녀였다.
“반갑습니다. 환인입니다.”
후드 망토의 후드를 내리고 인사를 하자 스사의 자식들은 눈을 반짝이며 작게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말을 걸기에는 부끄러웠을까. 환인과 눈이 마주친 아이들은 앤플린드의 치마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민다.
자식들의 귀여운 모습에 하하 웃은 스사는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환인을 이끌었다.
=자자, 여기 이렇게 서 있을게 아니라 다이닝 룸으로 가시죠. 오늘 환인 님을 위해 아내와 요리사들이 힘을 썼습니다. 마련한 음식이 부디 환인 님의 입맛에 맞으면 좋겠군요.=
“요리 솜씨가 어떨지 기대됩니다.”
도착한 곳은 10명이 앉을 수 있도록 인테리어가 꾸며진 다이닝 룸.
적갈색을 기조로 복잡한 양탄자 무늬 벽지가 천장의 작은 샹들리에에서 내려온 빛을 받으며 독특한 공간감을 환인에게 안겨준다.
룸의 중앙에는 5m짜리 직사각형 식탁이 있었는데 그 위에 차려진 음식은 조금 힘을 썼다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근처에 호수나 바다도 없는데 성인 남성의 몸통만 한 큼직한 생선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김을 피워올리고 있었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칠면조 요리에 각종 야채와 과일 요리가 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인테리어 촛대가 음식에 광택을 주며 더욱 먹음직스럽게 꾸미는 가운데 이실리테가 브릴릿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스사 엄청 부자였네?=
=스사 님은 도시에서도 알아주는 명사시다. 본래는 너 같은 게 함부로 말을 걸어도 되는 분이 아니야.=
=내 주인님은 스사보다 더 대단하거든?=
=영혼사님이 대단하신 것이지 네년이 대단한 게 아니지 않나.=
=호족 집 개새끼는 고족도 함부로 못 한다는 말 못 들어봤어?=
=…….=
어떻게 이런 말을 태연스럽게 내뱉을 수 있는 거지?
브릴릿은 어이가 없어 이실리테를 쳐다봤지만, 이실리테는 아랑곳하지 않고 식탁의 말석에 앉아 환인이 언제 포크와 나이프를 드는지 기다리며 몸을 들썩일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