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076 촌락 에트브룩
* * *
잡화점에서 돌아온 스사는 1층의 창가 자리에서 뜻밖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눈이 퉁퉁 부은 이실리테가 환인의 앞에 앉아 훌쩍이고 있었던 거였다.
=우와! 이실리테 씨도 여자였군요?!=
=……죽인다!=
=으악! 농담입니다, 농담!=
코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나무 의자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스사가 브릴릿의 뒤에 숨으며 황급히 사과했다.
이실리테도 지금 기분을 쓸데없이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코를 훌쩍이며 자리로 돌아와 얌전히 앉았다.
대체 자신이 잠깐 잡화점을 다녀오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 사나운 암고양이가 눈물까지 흘렸단 말인가. 여관주인에게 맥주를 사람 머릿수만큼 주문한 스사가 이실리테를 힐끔거리며 환인에게 물었다.
=이실리테 씨가 저렇게 우는 모습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우연히도 이실리테의 혼재를 성불시켜서 그렇습니다.”
=아, 기쁨의 눈물이라는 거군요?=
스사의 배려를 읽은 환인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고 보니 혼재는 이실리테의 어릴 적 동생이었습니다.”
=허어?!=
2층에서 있었던 일을 짧게 축약해서, 이실리테의 과거를 밝히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해주자 음, 흠, 진지하게 경청하던 스사는 이실리테에게 진심을 담아 축하의 말을 건넸다.
=소중한 여동생이 무사히 성불해 신의 정원으로 떠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허어, 그러면 이실리테 씨는 이제 영혼사님을 한평생 따르시겠군요?=
=응. 계약 같은 게 아니더라도 주인님을 평생 따를 거야. 그게 아베트의 부탁이기도 했으니까.=
=잘 생각했습니다. 이실리테 씨도 알겠지만 영혼사님 같은 분, 세상에 많이 없어요.=
=알아. 진짜로…….=
그리 대답하며 환인을 힐끔 바라보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스사는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제대로 홀렸군! 영혼사님께 몸도 마음도 포로가 되어버렸어!’
스사는 감탄 밖에 나오지 않았다.
율캄 마을의 처녀 네 명도 환인이 필요하다면 심장도 바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자가 그런 각오를 보이는 건 사십 평생 처음이었는데 이번에는 각성한 직업자까지!
대체 어떻게 하면 여자를 그렇게 반하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던 스사는 순간 흠칫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레힐 앞에서 벌인 대련 이후 브릴릿도 가끔 환인을 보는 시선이 변하곤 했다.
자칫 잘못하면 애인도 뺏기겠다는 위기감이 스사를 엄습했다.
특히 율캄에서의 마지막 날 밤, 브릴릿과 뜨거운 잠자리를 가진 후 그녀가 만족하지 못한 듯 한숨을 쉬었던 것을 떠올린 스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 되겠어. 오늘 밤에는 비장의 환단을 먹고 힘 좀 써야겠군.’
어느샌가 환인을 존경 비슷하게 하게 된 스사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내 여자를 눈 뜨고 빼앗길 수는 없다.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스사는 잡화점에서 처분한 마수와 이형종 가죽의 대금을 모두 환인에게 내밀었다.
=여기서 소화하기에는 양이 많은 마수 가죽이었습니다만, 이번 오버플로우 현상 때문에 경각심이 들었는지 메라 촌장님이 마수 가죽으로 가죽 갑옷을 만들어 자경대원들에게 입힐 생각이시더군요. 덕분에 좋은 가격으로 대부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건 그 대금입니다.=
주머니 안에는 무려 76 은화가 들어있었다. 산술적으로 가죽 한 장에 190만 원 가까이했다는 뜻.
=이빨과 뿔은 아무래도 웨이포드에서 매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연금술이나 제약에 많이 소비되는 재료라서 에트브룩보다 웨이포드에서 파는 게 가격 면에서도 더 좋으니까요.=
“상행은 스사 씨가 잘 아실테니 맡기겠습니다. 여기,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반올림해 8 은화를 내밀자 스사가 두 손으로 공손히 받는다.
이 거래는 오는 길에 결정한 일이었다. 판매대금이 얼마가 나오든 9할은 환인이 가지고 나머지 1할은 스사 일행이 가지기로.
스사는 당연히 뿔, 이빨, 가죽, 모든 판매금을 양도하려 했지만, 일방적인 거래 관계란 유리처럼 깨지기 쉽다는 걸 환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역할을 감안, 7:3 정도로 수입을 분배할 생각이었지만 스사도 완곡하게 거절을 계속했고 결국은 9:1로 분배율이 결정된 것이다.
8 은화 중 3 은화는 브릴릿, 3 은화는 딘테와 휴슥, 나머지 2 은화는 스사가 갖는다고.
‘그레니어 6마리는 고기와 뼈, 부산물까지 포함되어서 6 은화였던 건가.’
아무튼, 이로써 소지금은 2 금화, 13 열은화 47 은화가 되었다. 원화로 환산하면 3억 7천만 원 정도다.
종족 연합 금화도 있지만 이건 증거용으로 보존해야 하는 것.
‘종속 계약 비용이 금화 한 장. 웨이포드 행정관에서 신분 등록과 미궁 탐사 허가증 발급 비용이 2인 합쳐 5 열은화가 든다고 하니 실제로 쓸 수 있는 돈은 2.2억…….’
많다면 많은 돈이고 적다면 적은 돈이다.
율캄의 잡화점 주인 도리토가 챙겨준 구급용 회복 물약은 내장이 드러날 베인 상처를 그보다 조금 덜 심한 수준으로 아물게 해주는 것으로 1병에 5은화나 하는 물건이다.
이런 소모품을 2인분씩 챙기고 장비의 수리, 수선 비용에 여관의 숙식비용, 정보 수집 비용 등을 생각하면 2 금화는 순식간에 사라질 테지.
‘하지만 미궁 괴물의 부산물이 생각보다 더 큰 돈이 돼.’
설마 가죽 한 장, 비록 상처가 거의 없다곤 해도 늑대 사이즈의 가죽이 190만 원이나 할 줄은 몰랐다.
대강 한 달 정도 정보 수집 뒤에 준비를 하고 미궁에 들어간다면 이익은 내지 못해도 약간의 수입 정도는 더할 수 있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영혼사로 이름을 팔아도 될 테고.’
이슬이 맺힐 정도로 시원한 맥주와 함께 웃고 떠들기 시작하는 일행을 보며 소도시에서 활동할 계획을 차분히 머릿속으로 구상하는 환인이었다.
끼익 끼익 침대 프레임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
뜻이 파악되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소리.
흐느끼는듯한 여자의 앓는 소리.
짐꾼인 엘레스가 누군가와 살을 섞는지, 아니면 브릴릿이 스사와 사랑을 나누는지 명백한 성적 교감의 소리가 나무 벽을 뚫고 들어온다.
“…….”
가만히 누워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던 환인은 결국 잠들지 못하고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그냥 누워있을 바에 촌락을 둘러보고 한가로운 곳에서 얕은 잠을 자는 게 낫겠지.
=으으음…….=
바닥에 모포와 침낭을 깔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자는 이실리테를 건너 방문을 열고 나오니 좌우의 방에서 열락의 신음이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둘 다였나.’
2층에서 들려오는 나무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제외하면 조용하기 그지없는 여관을 나오자 달빛으로 하얗게 물든 촌락의 풍경이 눈에 담긴다.
그리고 군데군데 희뿌연 사람이 서있는 것도.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기겁해서 유령이라고 고함질렀겠지만, 환인은 특유의 메마른 감성으로 무시하고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주, 주인님!=
그런데 이실리테가 망토만 입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자다 깬 듯 망토의 벌진 틈 사이로 숏타이즈 같은 속옷과 얇은 린넨 티 너머로 봉긋 솟은 젖무덤이 다 보인다.
와중에 대검을 챙겨온 것은 본능일까 의도한 것일까.
=아, 안 주무시고 왜 나오신 거예요? 적이에요?=
“잠시 산책 나온 것뿐이다. 돌아가서 계속 자라.”
=아니에요. 주인님을 따라갈게요.=
갈색 웨이브 머리의 미녀가 순박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환인은 잠시 그 얼굴을 보다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며 말했다.
“아베트가 붙어 다니라고 한 것은 지금처럼 항상 함께 있으라는 뜻이 아니었다. 동료처럼 함께 다니라는 뜻이었겠지.”
=어…… 정말요?=
겉으로는 동료로서 끝까지 함께 하라는 뜻이었지만, 속으로는 동료 이상의 관계가 되길 바라는 것도 느껴졌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할까. 솔직히 말하는 것도 우스운 꼴이 될 게 뻔해 환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실리테는 잠깐 당황한듯하다가 금방 환인의 뒤를 따라붙으며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따라갈게요. 주인님은 무기도 안 가지고 나왔잖아요.=
“…….”
자기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실리테의 얼굴에 환인은 약간 불편함을 느꼈다.
겉과 속이 다른 자신과 정반대인,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
같이 있으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
심정적으로 불편하다는 것뿐이지 이런 표리일체의 인간은 함께 하기 좋은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환인은 내색하지 않고 허리춤의 돌도끼를 들어 보였다.
“이게 안 보이나.”
=그런 장난감 같은 걸로…….=
환인은 이실리테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50m 정도 떨어진 곳의 나무 울타리를 가리키곤 별로 힘을 들이지 않은 모션으로 돌도끼를 던졌다.
휘리리리릭…… 쩍!
돌도끼가 정확히 나무에 틀어박히는 광경을 지켜본 이실리테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을 끔뻑이다가 재빨리 달려가서 돌도끼를 회수해왔다.
=주인님은 투척술도 배우셨어요?=
“낮에도 말했지만, 무기를 들고 싸운 것은 3달 전이 처음이었다.”
=……와. 전 단검 투척을 몇 년동안 연습했지만 10m 앞의 적을 맞추는 게 고작인데…….=
“그건 좀 심각하군.”
=아, 아니에요. 이게 보통이에요. ……아마도요.=
“널 가르친 사람도 그 정도 수준이었나?”
=……그 용병은 보통 이상이었으니까…….=
20m 거리의 사과도 맞추던 말라깽이 용병을 떠올린 이실리테가 조금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저었다.
‘관계성이 변했으니 친목 정도는 다져두는 게 좋겠지.’
환인은 땅에 자갈 몇 개를 집어서 이실리테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저 울타리를 맞춰봐라. 나뭇가지가 뻗어나가고 있는 울타리다.”
=…….=
진지한 얼굴로 환인이 지목한 20m 거리의 울타리를 응시하던 이실리테는 헛, 짧은 기합과 함께 자갈을 던졌지만.
피융…….
자갈은 강한 힘을 품고 총알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얼굴이 벌게진 이실리테를 외면하며 환인은 자신의 손 모양과 손목, 어깨를 잘 보라고 한 뒤 기본적인 투구 방법으로 자갈을 던졌다.
쒸잉 팍!
=우와.=
“목표물에서 시선을 떼지 마라. 손목 스냅과 어깨 회전에 신경 쓰고 각도에 따라 자갈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투사체의 무게와 포물선을 머릿속으로 계산해라. 그렇게 연습하다 보면 명중률은 자연히 올라간다.”
=…….=
이실리테는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포물선은 뭐고 각도하고 스냅은 또 뭐지?
하지만 보고 따라 하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냥 잘 보고 맞춰라, 힘껏 던져라, 이 정도도 못하냐 이딴 말만 하던 그 말라깽이 용병하곤 비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이실리테는 환인의 투구자세를 최대한 흉내 내서 던졌다.
쒸익!
막강한 힘이 담긴 돌멩이는 아까보단 나은 궤적을 보이며 울타리를 살짝 빗나갔다.
=와!=
그걸 본 이실리테는 뛸 듯이 좋아했다.
흉내만 냈을 뿐인데 이렇게나 눈에 띄게 바뀌다니, 이 정도면 덩치 큰 대상으로 한정했을 때 30m 거리에서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투척 방식은 투사체의 형태에 따라 조금씩 바뀌지만 대부분 거기서 거기다. 방금 움직임을 잘 기억해두고 틈틈이 훈련하면 투척 실력은 계속 늘 거다.”
설명을 들으면서 다시 자갈을 던진 이실리테는 울타리의 나뭇가지를 살짝 스치고 지나간 것을 보고 환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넵! 와, 주인님은 가르치는 것도 잘하시네요. 투척술을 가르쳐준 말라깽이 용병은 똑바로 보고 던지라느니 힘을 잘 주라느니 이상한 말만 주절주절 늘어놓으면서 돈을 계속 요구했는데!=
“……밤이니 조용히 해라.”
=넵.=
시끄럽게 떠드는 이실리테의 입을 닫게 한 환인은 다시 걸음을 옮기며 그녀의 변화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이실리테의 이런 급격한 변화가 이해되지 않는 환인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이실리테는 그래도 도적 두목으로서 약간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 마리 강아지처럼 보이지 않는가.
‘인터넷의 유무만으로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건가.’
지구에 있을 때 환인은 인터넷이 인간의 악의를 가속한다는 논지의 칼럼을 본 적이 있었다.
현대에 접어들어 인터넷으로 온갖 범죄와 사건·사고를 손쉽게 접할 수 있기에 아이들이 악의를 더 빨리 습득한다는 이야기였다.
환인도 인터넷이 전혀 없는 시대에서 급속히 보급되는 과정을 거치며 자랐기에 어느 정도 그 칼럼에 공감했다.
사람의 인격 형성은 환경에 크게 좌우된다고 한다. 맹모삼천지교도 그런 이야기의 연장선이다.
악의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면 악의에 물들기도 쉽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실리테의 변화는 폭이 너무 커.’
저 모습이 꾸며낸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환기하던 환인은 촌락을 한 바퀴 돌아본 뒤 촌락의 중앙,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같은 나무 아래의 정자에 앉았다.
‘혼재는 없군. 영혼은 전부 밝은 회색에 숫자는 스물일곱.’
휘이잉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걸으면서 조금 달아오른 육체를 식혀준다. 그러자 이마가 다시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낮, 아베트에게 입맞춤을 받은 자리다.
신경 쓰인다. 푸른 빛을 띠던 영혼이 회색으로 변한 것도, 입맞춤을 받은 뒤로 피부에 박하즙을 바른 것처럼 시큰거리는 것까지 전부다.
혼재가 되어가면서까지 십수 년간 이실리테에게 붙어있던 아베트였다.
아베트의 영혼이 해를 끼쳤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근처에서 돌멩이를 주워 적당한 표적에게 던지는 연습을 하는 이실리테를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해를 끼쳤다간 그 영향이 이실리테에게도 간다는 걸 모를 만큼 멍청해 보이진 않았다.
‘그럼 결국 무언가를 남겨주었다는 뜻인데 그게 뭘까.’
팔이 움직일 때마다 망토 자락이 펄럭이며 육중한 젖가슴이 출렁이는 것을 구경하던 환인은 늙은 개의 머리를 한 영혼 하나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영혼사님…….」
이거다.
영혼의 목소리에, 정령의 목소리와 똑같은 울림에 환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