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6화 (76/813)

〈 76화 〉 075 이실리테

* * *

스사가 에트브룩에서 하나뿐인 잡화점에 들러 마수 가죽과 뿔, 이빨을 처분하고 있을 무렵 환인은 여관의 2층 방에서 이실리테에게 붙어있는 혼재를 살펴보고 있었다.

“…….”

30분째 말도 없는 환인 때문에 덩달아 꼼짝하지 않고 있는 이실리테는 뒤틀리려 하는 몸을 억지로 붙잡으며 참았다.

얌전하게, 조신하게 있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지만, 주인님(이 되실 분)이 혼재를 봐주고 있다.

자신도 그에 마땅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환인은 그런 태도에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고 이실리테의 어깨에 매달려있는 혼재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이상하군.’

깜빡깜빡

눈을 깜빡이며 자신과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 혼재는 아홉 살 남짓한 인마족人馬? 여자아이.

자신이 본 혼재는 율캄의 하나뿐이었기에 지금 자신과 상호작용을 하는 소녀의 혼재가 정상인지 아닌지 판단할 정보가 부족하다.

율캄의 혼재는 자신이 근처에서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이 아닌 율캄 촌락의 사람이 있어도 오직 자신을 살해한 루킬만 노려봤었다.

그런데 눈앞의 혼재 소녀는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면 자신을 쳐다본다.

지팡이든 뭐든 눈앞에서 흔들면 그걸 보다가 만져보고 싶은 듯이 손을 뻗기도 한다.

마음속으로 이리 오라고 명령을 내리면 싫은 듯이 살짝 움츠러들며 고개를 젓는다.

억지로 당겨볼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억지력을 발휘하면 어찌 될지 모르는 일.

“정말 기억나는 게 없나.”

=네……. 제가 멍청하긴 해도 기억력이 나쁜 건 아니에요. 제가 죽인 사람 얼굴도 다 기억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 얼굴은 본 적이 없다고.”

=네.=

처음 혼재의 얼굴을 그려서 이실리테에게 보여주었을 때 이실리테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이실리테의 말대로 좀 이해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기억력은 뛰어나다고 할 수준이었다. 정말로 모른다고 봐야겠지.

“…….”

시작부터 오리무중이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환인은 이실리테를 손짓해서 자신의 앞에 왼쪽 어깨를 보이도록 앉혔다. 그리고 혼재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내 말을 이해할 수 있니? 이해할 수 있으면 고개를 끄덕여주렴.”

…….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혼재 소녀.

이게 자신의 초능력이 성장해서 가능한 일인지, 아니면 혼재 소녀가 특이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질문을 계속 던졌다.

이실리테가 누군지 아느냐. (끄덕.)

이실리테가 싫어서 붙어있는 거냐. (도리도리)

이실리테가 죽었으면 좋겠느냐. (도리도리도리!)

이실리테가 좋은 거냐. (끄덕)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는 거냐. (……)

네가 죽었다는 건 알고 있느냐. (끄덕)

언제 죽었느냐. (……)

누구 싫어하는 사람이 있느냐. (……)

이실리테와 함께 있고 싶은 거냐. (끄덕)

이실리테에게서 떨어질 생각은 있느냐. (도리도리)

……

……

……

네가 혼재라는 걸 알고 있느냐. (……)

네가 혼재인 걸 아느냐고 물어본 환인은 눈을 내리깐 혼재 소녀를 응시하며 흘러내린 앞머리를 올백으로 쓸어넘겼다.

그리고 한숨을 작게 쉬었다.

‘답이 없다.’

들러붙어 있는 이유는 같이 있고 싶어서. 이실리테가 싫은 것도 아니고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 질문에 표정이 크게 흐려진 것을 보고 질문을 멈춘 이유는 혼재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혼재의 강렬한 감정이 어떤 현상을 불러일으킬지 모르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네에…….=

어떻게 됐는지 묻고 싶은 이실리테였지만, 피곤해하는 모습이나 스사가 ‘먼저 질문하는 것은 금지,’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어서 입을 꾹 다문다.

내가 알아둬야 할게 있다면 주인님이 먼저 말씀해주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굳은 몸을 풀려고 나가는데 환인이 불러세웠다.

“네 옛이야기를 들려줬으면 좋겠군.”

=……제 과거 이야기요?=

“그래. 내 판단일 뿐이지만 혼재는 널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에게 오래전부터 붙어있었다는 이야기에 이실리테의 표정이 작게 찡그려진다.

“혼재가 너에게 붙어있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다.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나는 대로 전부 이야기해라.”

=…….=

잠시 머뭇거리던 이실리테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자신의 과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전 북부의 어느 소도시에서 태어났어요. 부모가 누구인지는 몰라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거든요.=

시작부터 묵직한 이야기에 환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보고 배운 게 도둑질과 구걸이었죠. 아기 때는 운 좋게 착한 거지 여자의 젖을 먹고 자랐고 움직일 수 있을 때부터 구걸하러 다녔어요.=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지고 자신을 키워준 거지 여자가 어느 겨울, 더러운 돌다리 밑에서 얼어 죽은 뒤에는 다른 거지 패거리에 합류했다.

그때부터 구걸 외에도 동냥, 도둑질, 협잡질에 바람잡이 일에 동원되며 실수하면 얻어터지고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이실리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난 어째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고 이야기했다.

=조금만 넓은 길로 나가면 제 또래 아이들은 저보다 훨씬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것을 먹고 사는데 저는 조금만 잘못하면 죽도록 맞고 굶는 것도 예사였어요.=

맞다가 어디 부러져 불구가 되면 오히려 구걸하기 좋아진다며 혹독한 구타가 끊임이 없었다고.

그러다 12살이 된 그녀는 소속된 뒷골목 패거리와 새로 유입된 패거리 사이에서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세력다툼에 휘말렸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도망 다니던 이실리테는 죽은 용병의 피 묻은 대검을 우연히 잡아볼 수 있었다.

무기를 잡은 이유도 별거 없었다. 그냥 통짜 철이니까 뒷골목 노파상인에게 팔면 빵 한 조각이라도 먹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고.

“그때 검전사로 각성했군.”

=네. 이 힘 덕분에 세력다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때 제 또래나 저보다 어린애들은 거의 다 죽었거든요. 그때 결심했죠. 이 꼴로 살다 죽고 싶지 않다고요. 전 뒷골목을 빠져나와 다른 마을로 이동하는 상단의 뒤를 무작정 따라갔어요. 그리고 힘만 있으면 아무나 받아주는 삼류 용병단에 가입했죠.=

모든 게 엉망진창이고 주먹구구식인 용병단이었지만, 때마침 소도시와 소도시 간에 파벌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 일감은 풍부했고 인력은 부족한 상태였다.

거기서 8년간 전쟁 용병으로 활동하며 무기술과 기승술, 글자와 세상살이를 익혔고 파벌 전쟁이 끝나갈 무렵까지 살아남은 이실리테는 모은 돈으로 독립해서 용병단을 꾸렸다고.

=직업자라서 어중이떠중이긴 해도 인원을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용병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애들 몇몇도 꼬드겼었고요.=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어렸을 때부터 험하게 자랐음에도 이실리테는 요령이 좋지 못했다.

의뢰주에게 얕잡아 보여 의뢰 대금을 절반 가까이 떼어먹히기 일쑤였고 의뢰 도중 이런저런 시비가 걸려 오히려 손해배상을 낸 적도 있었다.

검전사로서 8년 동안 전장을 구르며 벌어놓았던 수입이 용병단의 운영비로 모두 소진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결국 의뢰비를 떼먹다 못해 상단을 호위하던 자신의 몸마저 노린 상인의 목을 베고 돈 되는 재산을 모조리 탈취한 이실리테 용병단은 도적단으로 전락했다.

용병단으로 힘들여 일하는 것보다 도적질이 더 돈이 되고 훨씬 쉽다는 걸 깨달은 거다.

그 뒤에는 오히려 일이 잘 풀렸다.

10명에 불과하던 용병단은 도적단으로 탈바꿈한 뒤 30명 넘게 불어났고 어찌어찌 쿠에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며 수입의 일부를 근처 마을 경비대에게 뇌물로 먹이는 등 열심히 활동하다 보니 장비도 용병단 때보다 훨씬 좋아졌다.

? 두목은 검전사가 아니라 도적으로 각성해야 했던 거 아뇨? 크히히히.

부하가 이런 말을 자신 앞에서 공공연히 할 정도로 도적단은 잘나갔다.

활동 지역을 10곳으로 나누어 시기마다 랜덤으로 교체하는 등 나름대로 토벌대와 평판도 신경 썼다.

이실리테 도적단은 사실 도적단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했다.

훈련은 정규 용병단처럼 했고 수입에 의한 분배도 정규 용병단과 흡사하게 했으니까.

도적단의 탈을 쓰고 불법과 범법을 저지르는 용병단이라고 할까.

그러던 중 하필이면 건방진데다 겁대가리 없는 호족 직계를 살해하게 되었고, 도적단은 4천여 킬로미터를 이동해 활동 지역을 바꾸었다.

=그리고 영업 첫날에 주인님을 만나게 된 거죠.=

“…….”

환인은 이실리테의 이야기 속에서 혼재가 들러붙었을 가능성이 큰 지점을 떠올렸다.

도적질이나 용병질 중에 우호적인 혼재가 들러붙을 일은 거의 없을 테니, 붙는다면 그때뿐이다.

하지만…….

‘혼재가 되는 것은 원한에 의한 것뿐만이 아닌 건가.’

혼재 소녀의 반응과 이실리테의 이야기를 통해 내놓은 자신의 추측대로라면, 저 혼재 소녀의 혼재화 이유는 한?이 아니라 미련이다.

생각을 정리한 환인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이실리테에게 혼재 소녀의 그림을 다시 보여주며 말했다.

“잘 생각해봐라. 근래의 일이 아니라 네가 각성하기 전의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이렇게 생긴 소녀는 없었나?”

=…….=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이실리테를 바라보던 환인은 혼재에게 시선을 주었다.

‘루아의 영혼은 엉망이던 시체와 다르게 깨끗했었다. 그렇다면…….’

그림을 좀 더 손본다.

머리는 거칠고 부스스하게. 볼살은 더 빼고 눈 밑도 퀭한 느낌으로. 얼굴도 좀 더 더럽게.

오랫동안 구걸과 동냥질을 했을 것 같은 거지 소녀의 그림. 그것을 이실리테에게 보여준 환인은 물어볼 필요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림을 본 이실리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본 것처럼 변했으니까.

=아, 아베트…….=

이실리테가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낸 순간 혼재 소녀가 허공을 둥실, 이동해 이실리테의 앞에 섰다.

=주인, 주인님. 정말 아베트가 제 어깨에 있는 거예요?=

“지금은 네 앞에 있다.”

=……!=

고개를 휙 앞으로 돌린 이실리테지만, 간절한 바람과 다르게 보이는 것은 나무로 된 작은 방뿐.

이실리테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지더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처럼 흐느끼기 시작한다.

=아…베트. 아베트…… 미안해, 아베트……. 나만 도망쳐서, 나만 살아서…….=

환인이 그려준 그림을 품에 꼭 안고 눈물을 철철 흘리며 소녀에게 계속 사과하는 이실리테. 아베트는 그런 이실리테의 머리를 부드러운 표정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아베트는 널 원망하지 않고 있다. 지금도 네 머리를 부드러운 표정으로 쓰다듬고 있군.”

=하지만, 하지만 아베트가 혼재라고 하셨잖아요. 혼재는…….=

“혼재라고 마냥 원망하고 원한을 가진다는 게 아니란 거지. 아베트의 경우에는 원한이라기보단 미련일 거다. 네가 잘 사는 것을 보고 싶다는 미련.”

그 말이 맞는다는 듯이 아베트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안타까운 점은 그 미소가 순수하게 와닿지 않는다는 것.

이실리테의 말대로라면 저 혼재가 이실리테에게 들러붙은 시간만 대략 20년. 이실리테와 같은 것을 보고 살아왔다면 순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아…….=

환인은 흐느끼는 이실리테를 두고 혼재, 아베트에게 말했다.

“아베트, 너는 이제 성불해야 한다.”

=안 돼요! 아베트, 성불하면 안 돼!!=

보이지도 않으면서 아베트를 붙잡으려는 듯이 두 팔을 허우적거리는 이실리테를 감정이 깃들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던 환인은 발로 쿵, 바닥을 강하게 찍었다.

소리와 진동에 움찔하며 멈춘 이실리테를 향해 묻는다.

“네 나이가 올해로 몇이지.”

=스물아홉……이에요…….=

“12살에 아베트와 헤어졌다 해도 17년이나 지났다. 이 땅의 영혼이 어떤지 모르지만, 평범한 영혼이 현실에 오래 머무른다면 지박령이나 악령으로 변해도 이상할 게 없다.”

=……!!=

“그 증거로 아베트는 널 원망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데도 혼재로 변했지. 네가 마지막으로 일라일 꽃을 만진 적이 언제였지?”

=……3, 3년 전에 한 번 일라일 꽃밭을 지난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멀쩡했는데…….=

말하면서 다시 눈물을 철철 흘리기 시작한다. 이실리테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베트가 자신에게 오래 붙어있느라 혼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걸…….

환인은 고민했다. 할거라면 분위기가 잡힌 지금이다. 하지만 이게 통할까? 통하지 않는다면 성불은 갈수록 어려워질 거다.

고민하던 환인은 일단 질러보기로 했다. 안된다면 억지로 소멸시킨다는 방법도 있으니까.

“아베트. 네가 이실리테의 곁에 있었던 이유는 이실리테가 바보 같을 정도로 우직하고 남에게 잘 속는 성격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겠지.”

속마음을 읽힌 것처럼 눈을 크게 뜨는 아베트의 표정 변화에 역시, 라고 생각한 환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얼마든지 성불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러지 않은 것은…… 아니, 성불하지 못한 것은 멍청하게 용병단을 나와 자기 행복을 찾지 못하고 도적질 따위를 해서였을 테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베트의 표정이 무언가를 바라는 것처럼 바뀐다.

환인은 이제 오열하고 있는 이실리테를 쳐다보며 약속했다.

“이실리테가 다시는 바보짓을 못 하게 잘 데리고 다니겠다고 약속하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움도 주겠다.”

=흐으으으윽…….=

“그러니 이실리테를 위해서라도 이제 그만 성불해라.”

그편이 너에게도 좋은 일이며, 혼재로 인한 파국이 이실리테를 덮치는 건 너도 원하지 않을 것 아니냐고 마음으로 전한다.

…….

그러자 아베트의 혼이 붉은색에서 물이 빠지듯 빠르게 푸른색으로 변했다.

‘푸른색?’

처음 보는 영혼의 색에 놀란 것도 잠시, 아베트가 스르륵 환인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잡았다.

‘……힘을 조금만 보태달라고?’

어떻게 해야 보태줄 수 있는 걸까. 잠시 생각하던 환인은 정신 집중을 할 때처럼 손바닥에 두 가지 기운을 빨아들이는 것이 아닌, 내보내는 식으로 의지를 집중한다.

그러자 손바닥을 통해서 훈기가 아베트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감사해요, 영혼사님.」

“……!”

=아베트? 아베트!=

훈기를 받아들인 덕분에 혼의 모습이 보이게 되었는지, 이실리테가 눈물을 뿌리며 달려들었다. 물론 실체는 없었기에 이실리테는 이베트의 혼을 통과, 환인을 깔아뭉개듯이 침대 위에 넘어트리게 되었다.

“…….”

=앗, 아앗.=

깜짝 놀라 눈물마저 쏙 들어간 이실리테가 허둥거리며 황급히 물러나 침대 밑으로 내려간다.

환인은 조금 짜증이 났지만, 지금은 아베트가 먼저라고 생각하며 아직 손을 놓지 않고 있는 아베트에게 다시 훈기를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런 환인에게 미소로 인사한 아베트는 이실리테를 돌아보며 말했다.

「17년 동안 걱정 많이 했어.」

=흐으으으.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 언니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그때 같이 도망쳤으면…….=

「헛소리 그만하고. 나 시간이 얼마 없어. 이제 가야 해. 그러니까 부탁 하나만 들어줘.」

시간이 없다며 인정 없이 말을 끊는 아베트였지만,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흩어지는 모습에 이실리테도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아베트의 말을 기다렸다.

「영혼사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야. 그러니까 더는 바보같이 헤매지 말고, 앞으로 영혼사님이랑 딱 붙어 다녀.」

=그럴게. 그럴게!=

울먹이는 목소리에 아베트는 걱정되는 언니를 보는 듯한 얼굴로 손을 뻗어 이실리테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런 못미더운 언니를 두고 성불해야 하는 것이 못내 걱정이라는 얼굴이다.

「울보 언니야. 나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내 몫만큼 행복하게…… 살다 와야 해. 약속이다……?」

=응, 응……!=

이실리테에게 당부 아닌 당부를 한 아베트는 이번에는 환인을 돌아보더니 상반신만 남은 모습으로 환인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그러자 마치 힘이 그 입술을 통해 전달된 것처럼 이마가 찌릿찌릿하다. 영혼의 푸른색도 물이 빠진 것처럼 사라지고 보통의 영혼처럼 회색에 가까운 흰색으로 변했다.

입맞춤을 받은 곳을 만지작거리는데 삽시간에 목 아래까지 빛으로 산화한 아베트는…….

=아베트으……!=

이실리테에게 작은 미소만 남기고 스러지듯 빛가루가 되어 모습을 감추었다.

* *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