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069+ 마을 레힐
* * *
쿠엣! 꾸우! 꾸구국!
이실리테와 맺을 계약에 관한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객실로 올라온 환인은 밥을 기다리던 비상식량에게 먹을 것, 채소와 과일 한 바구니를 내려놓자마자 분노한 비상식량의 공격을 받았다.
“진정해. 왜 이러는 거냐.”
환인이 손으로 부리 쪼기와 날갯죽지 때리기를 막아내며 물었지만, 비상식량은 화를 풀지 않았다.
꾸국! 꾸에엑!
엄청 맛있는 냄새가 났지만 시킨 대로 꾹 참았는데! 아까도 밥을 조금만 줘놓고는 이게 뭐야!
“비상식량. 진정해라.”
흥분한 비상식량을 두 손으로 붙잡은 환인은 품에 안고 진정하라고 등을 쓰다듬어준다. 그러자 겨우 화를 참고 씩씩거리는 비상식량이었다.
그걸 방구석에서 지켜보던 이실리테가 말했다.
=……영혼사님.=
“마을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마라.”
서늘한 목소리에 찔끔한 이실리테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주인님. 성장기의 쿠에는 고기를 특히 많이 먹어야 해요. 풀하고 과일 쪼가리만 주면 에너지를 충분히 못 모아서 성장을 못 하거나 반푼이처럼 성장해요.=
“…….”
=그걸 본능적으로 알고 화내는 거예요.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만큼 먹여줘야 튼튼하게 잘 자라요.=
환인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
식탐과 식욕을 억제하지 못해서 꾸역꾸역 처먹고 닭둘기처럼 뒤뚱거리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쿠에 사육에 관해서 잘 알고 있나 보군.”
=전문가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용병단에 있을 때 쿠에 사육하고 번식을 도왔던 적이 있어서요.=
힘없이 말하는 이실리테를 잠시 바라본 환인은 비상식량을 내려놓고 불만스레 쳐다보는 비상식량에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고기를 가져올 테니 날뛰지 말고 기다려.”
쿠엣!
고기라는 말에 날개를 활짝 펴고 좋아한 비상식량은 환인이 먼저 가져온 채소와 과일 바구니에 머리를 처박고 우적우적 씹어먹기 시작한다.
“이실리테. 너도 내려가서 식사하고 와라.”
=네…….=
“돈은 있나.”
=…….=
환인은 말 없는 이실리테에게 은화 한 장을 꺼내 튕겨주었다.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소도시 웨이포드. 그곳의 행정관에서 일방적 종속 비술 계약을 진행할 예정이다. 그때까지. 여행에 필요한 걸 사라.”
이 세계에서 가성비를 따졌을 때 열철화 한 장, 1,000원이면 한 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아까 스사와 했던 호화스러운 저녁 식사는 7동화(7만원)정도.
율캄에서 자신의 가죽 가방을 꾸리는데 7열동화(70만원)를 지출했었다.
1은화면 한 끼 식사와 여행 준비물을 구매하는데 충분하겠지 싶었는데 이실리테의 표정이 ‘돈을 이렇게나 많이 줘?’인걸 보고 너무 많이 준 건가 생각했다.
‘씀씀이를 볼 기회로 삼으면 되겠지.’
안도와 불안이 공존하는 얼굴의 이실리테를 내보내고 1층으로 내려간 환인은 2동화를 지불하고 새끼 돼지 양념 통구이를 주문해서 방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쿠에~!
“……좋으냐?”
쿠엣!
환인이 멀티툴 나이프로 먹기 편하게 살점을 발라주며 묻자 정말로 기분 좋은지 꽁지깃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덥석덥석 받아먹는 비상식량이다.
그리고 비상식량의 먹성에 환인은 적잖이 놀랐다.
비상식량이 먹고 남기면 자신도 먹을 생각으로 3인분에 가까운 통구이를 주문한 거였는데…….
꾸엑.
고기는 물론 야채 과일 바구니의 내용물까지 모조리 먹어 치웠다.
“…….”
자기 체중보다 더 많은 고기를 먹어 치우다니, 저 몸속은 통짜 위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건가.
환인은 잠시 식비를 계산해보았다.
자신도 식사량이 대폭 늘었다. 비상식량도 어마어마하게 먹는다. 둘이 합치면 거의 5인분가량. 여기에 입이 하나 늘었으니…….
‘종족연합 금화는 쓸 수 없으니 실제로 사용 가능한 돈은 1금화.’
웨이포드에 도착하면 돈벌이부터 찾아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머리로 소지금과 앞으로의 식비를 계산하던 환인은 비상식량이 뼈다귀가 쌓인 접시에서 가장 큰 뼈를 빼내 가는 것을 목격했다.
쿠엣. 꾸우.
뭘 하는 건가 의아해하다가 개처럼 뼈다귀를 씹기 시작하는 비상식량의 모습에 환인은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똑똑한 녀석이니 알아서 하겠지.’
스스로 먹을 수 있는 것과 못 먹는 것을 구분까지 하는 비상식량이다. 금붕어처럼 배 터질 때까지 음식을 먹지는 않을 테지.
속 편하게 생각하며 접시를 1층 주방에 가져다준 환인은 방으로 돌아와 후드 코트와 가죽 재킷, 롱부츠를 벗었다.
그리고 여관 급사가 가져다 놓았는지 커다란 나무 물통과 놋쇠 대야가 문 앞에 있었기에 들고 들어와 수건을 물에 적셔 얼굴과 몸을 닦았다.
샤워하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비누 덕분에 찝찝함은 씻어낼 수 있어서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한결 편한 차림이 된 환인은 스사가 준 가죽 종이에 종속 계약 항목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최우선사항은 날 향한 일체의 적대행위 금지.’
계약은 일종의 개념으로 이루어지기에 적대행위 금지라는 항목을 넣으면 대다수 배신과 관련된 행위가 금지된다.
‘세부 항목으로 공격에 관한 소소한 제약과 상해를 일으킬 수 있는 악의적 행동 금지.’
우연히, 혹은 실수로 공격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만큼 그러한 일에 대비할 수 있도록 세부 항목도 넣고.
‘지시하는 내용은 성공 실패에 상관없이 시행하기. 세부 항목으로 최선을 다해 명령을 수행할 것…….’
그렇게 배신을 금지하는 다수의 항목과 암살을 방지하기 위한 항목, 명령 수행에 필요한(배신, 암살항목을 침범하지 않는) 권한 항목에 지시에 따르기 위한 제어 항목 등등.
총 7개 항목과 21개의 세부 항목을 작성했을 때 이실리테가 자신의 덩치보다 더 큰 가방을 등에 메고 돌아왔다.
자신의 가방보다 족히 2배? 3배? 그 정도로 더 큰 가방을 보고 환인은 약간 어이없어했다.
대체 뭘 샀길래 은화 한 장으로 저걸 다 샀단 말인가.
=여기…… 남은 돈이에요.=
“…….”
거기다 5열동화를 거스름돈으로 남겨왔다.
지구였다면 50만 원으로는 쓸만한 가방을 사는 게 고작이었을 거다. 그런데 가방도 사고 내용물도 꽉꽉 채웠다고?
대체 뭘 구매했는지 궁금해서 가방을 열었더니 내용물의 80%는 하급 건조육이었고 나머지는 놋쇠 식기와 동물 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 3개, 노숙을 대비한 망토와 갈아입을 옷가지 약간, 무기를 손질하기 위한 연마제, 숫돌 등이었다.
경험 없는 애송이 여행자도 아니니만큼 내용물을 두고 뭐라 할 것은 없겠지.
“거스름돈은 가지고 있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사도록.”
=네…….=
주춤거리며 주머니에 돈을 넣은 이실리테는 환인을 힐끔거리다가 방을 나가려 했다.
밤이 늦었다. 여긴 1인실이기도 하고 자신은 고급 여관에 묵을 돈도 없으니 근처 뒷골목에서 노숙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환인의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어딜 가는 거지?”
=……그게.=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대답을 듣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올라왔다.
“추가 요금을 냈다. 거기서 자라.”
=…….=
양탄자를 가리키는 환인의 손짓에 불길한 상상이 이실리테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렸을 때는 너무 어리고 빼빼 말라 남자들이 눈길을 주지 않았다.
성인이 막 됐을 무렵에는 검전사로 각성했기에 비록 노동력으로 용병단에서 이용당할지언정 강한 힘이 있어 성욕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난 여자치곤 운이 좋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라고 생각한 이실리테는 빠르게 체념했다.
몇 번이나 환인의 시선이 자기 아랫배를 훑는 것을 보았었다.
느끼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의 강한 시선이었다. 그걸 생각해보면 같은 방을 쓰자는 이유는 명백한 상황.
어차피 노예에 가까운 계약을 맺으면 자신의 몸은 자신 게 아니게 된다. 그리고 구질구질하게 덮쳐질 바에 이쪽이 먼저 내다 버리는 게 그녀의 성미다.
이실리테는 흉갑을 벗고 속에 걸치고 있던 누비갑옷도 벗었다.
광택 나는 가죽바지와 부츠도 벗고 순식간에 속옷 차림, 색기라곤 1도 없는 얇은 옆트임 반바지와 붕대로 가슴을 감아놓은 차림으로 환인의 앞에 섰다.
“……?”
=어차피 이 몸의 주인이 되실 테니 마음대로 해요.=
용병과 도적 생활을 오래 해서 지식만큼은 닳고 닳았던 이실리테였기에 감흥 없이 말했지만, 되돌아온 환인의 대답에는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말았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관심 없다고.”
=내, 내가 여자치곤 체격이 있다는 건 인정해!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잖아!=
여자로서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한 이실리테는 빨개진 얼굴로 가슴을 묶어놓은 붕대를 풀어 헤치며 보란 듯이 젖무덤을 내밀었다.
한국에서는 절대 흔히 볼 수 없는 수준의 가슴이 육중하게 출렁거리며 시선을 빼앗아 간다.
괜찮은 편이라고 폄하할 수준이 아니다.
자신의 인정대로 여자치곤 어깨도 넓고 팔다리에도 근육이 잡혀있지만, 그만큼 키가 크다 보니 남성스럽다기보단 단련한 몸매의 여자 같은 완성된 체형이다.
가슴도 압박붕대를 할 만큼 G컵 수준은 되었던데다 유두, 유륜에 이어 젖무덤의 모양새도 상위 5%에 들 정도.
“…….”
머리카락처럼 옅은 카푸치노 색의 유륜과 유두를 보던 환인은 탁자에 팔을 기댄 채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이 이실리테에게는 몹시 심란한 것처럼 느껴져 엉뚱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주인님…… 혹시 호모?=
“난 지극히 정상이다.”
정상이라면 왜 자신을 안지 않으려는 건가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물어보려 할 때였다.
똑똑똑똑똑, 문에서 급박한 노크 소리가 나더니 벌컥 열리며 스사가 뛰어 들어왔다.
=환인 님! 큰일났……?!=
=나가! 이 새끼야!!=
=으으악!=
스사는 여러 가지 의미로 기겁하면서 날아오는 놋쇠 그릇이나 숫돌 등을 피해 황급히 뛰어나가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환인의 능력에 같은 남자로서 존경심이 생겨났다.
아니, 암사자처럼 사납고 괄괄하기 그지없던 여자를 고작 한나절 만에 저렇게 고분고분하게 만드셨어?
자신은 브릴릿을 애인으로 삼는 데만 2년이 걸렸다. 같은 인표족의 동질감으로 열심히, 꾸준히 구애하고 공략한 덕분이다.
그런데 환인은 그런 동족 어드밴티지도 없이 반쯤 적대관계에서…….
속으로 연신 감탄하던 스사는 문득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문을 살짝 열어 그 틈으로 말을 흘려 넣었다.
=환인 님. 큰일입니다. 바깥에 마물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즉시 마을을 떠나야 합니다!=
순간 벌컥, 문이 열리며 하얀 손이 다가와 멱살을 움켜쥐었다.
위에 누비 갑옷을 걸친 이실리테에게 멱살을 잡힌 스사가 어어, 놀라 눈을 크게 치켜뜬다.
=들어와!=
=어이쿠!=
이실리테가 감정을 담아 안으로 강하게 끌어당긴 덕분에 우당탕, 양탄자 위를 구른 스사는 얼얼한 뒤통수를 어루만지면서 항의했다.
=거 너무 난폭한 거 아니오?!=
=결혼도 안한 처자의 피부를 보고도 모가지가 날아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
그리고 돌아온 더 큰 분노에 찔끔, 입을 다문 스사는 이실리테에게 불만 어린 눈빛을 보냈다.
앞모습을 본 것도 아니고 등밖에 보지 않았는데! 아니, 옆구리로 옆가슴이 살짝 보이긴 했지만서도.
……저렇게 가슴이 컸었나? 브릴릿보다 2배는 더 큰 거 같던데.
“마물의 파도라고 하셨습니까?”
엉뚱한 상상을 하던 스사는 환인의 목소리에 정신 차리고 벌떡 일어나 심각한 얼굴로 끄덕였다.
=예. 제가 잘못 판단했습니다. 율캄을 떠난 뒤에 마주친 마수들은 마수가 아니라 이형종이었습니다. 미궁이 오버플로우해서 뛰쳐나온 이형종에게 쫓겨난 놈들이 아니라 미궁에서 나온 이형종이었던 겁니다!=
=하. 어쩐지 근처에 마물들이 많더라니. 중부 지방 놈들은 얼마나 무능한 거야? 미궁이 터질 때까지 눈치도 못 채고. 머저리들인가?=
철제 가슴막이까지 착용한 이실리테의 빈정거림에 스사는 할 말 없다는 듯이 신음을 흘렸다.
=끄응. 무능한게 아니라 이 근방은 워낙 마을이나 도시 수가 적어서 어쩔 수 없소. 사방에 6급, 7급 삼림과 호수형 미궁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런 마을이 생겨난 것도 용한 마당이 아니오?=
“그 오버플로우라는 현상이 벌어지는 미궁은 정해져 있나 봅니다.”
=예. 개방된 지형의 미궁은 자연과 어우러져…… 아니아니! 이럴 때가 아닙니다! 당장 떠나야 합니다! 지금 밑에서 준비하고 있으니 환인 님도 얼른 내려오시죠!=
“알겠습니다.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환인도 벗어둔 가죽옷을 챙겨입고 흑창과 돌도끼를 챙긴 뒤 가방을 들려고 했는데 이실리테가 이미 가방을 들쳐멘 뒤였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환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배가 불러 날지 못해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비상식량을 챙겼다.
여관 밖은 마을을 떠나려는 사람들로 복잡했다. 여관이라는 특성상 잠시 머무르는 여행자들이 많았기에 벌어진 현상이다.
마을 주민들은 불안해하는 모습으로 뛰어서 자기 집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환인 님! 여깁니다!=
사람들 고성과 외침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스사의 목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이동했다.
=얼른 타시죠!=
텅 빈 짐마차는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브릴릿과 딘테도 쿠에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환인이 보조석에 오르는 사이 이실리테도 가방을 빈 짐마차에 던져놓고 짐꾼이 내미는 쿠에의 고삐를 잡았다.
=갑시다!=
여관은 대로변에 있었기에 금방 대로에 접어든 짐마차는 다른 마차들과 함께 북쪽 관문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대로로 나왔기에 쿠에에 올라탄 호위들과 이실리테도 짐마차에 바짝 따라붙어 속도를 조금씩 올릴 때였다.
퍼벙……. 쿠구궁…….
…와아아아……!!
남쪽에서 폭발음과 함께 전투의 함성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그쪽을 돌아본 환인은 돌벽 위로 화광이 충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벌써 도달한 건가!=
다른 사람들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좌우나 앞에 서 있던 마차가 갑자기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스사도 쿠에들을 재촉해 속도를 낸다.
그렇게 잠시 후, 짐마차가 활짝 열린 관문을 통과해 북문을 나섰을 때였다.
콰아앙!
육중한 소리와 함께 철로 보강해놓은 격자문이 위에서 떨어져 문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좌우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살기.
=……빌어먹을! 이놈들아, 달려라! 죽기 싫으면 달려!!=
스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고함지르며 고삐를 연신 내려친다.
쿠우~!
쿠엣!
소란 속에서 끄엉, 껑,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희미한 소리까지 들린다. 뒤를 돌아보자 마을을 둘러싼 돌벽 위로 횃불이 잔뜩 올라오고 있었다.
환인은 자신들이 시선 끌기 용 미끼로 이용당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쩐지 북문을 열어놓고 있더라니.’
마물의 파도가 밀려오면 당연히 성문을 닫아 방어를 굳건히 해야 한다. 남쪽에서 전투까지 벌어지고 있으니 더더욱.
그런데 북문은 열려있었다. 마치 얼른 탈출하라는 것처럼.
“…….”
환인은 딱히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머리가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법한 계책이었고 자신이라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이용해서 마을을 공격한 마물의 숫자를 줄이려 했을 테니까.
다만 문제라고 여긴 게, 자신들이 마을을 탈출한 무리 중에서 가장 후미라는 거였다.
컹컹컹컹!!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는 작은 구슬 수십 개가 뒤따른다.
이대로면 자신들이 희생당하고 그사이 마차들은 더욱 거리를 벌리며 도망칠 테지. 환인은 짐마차를 끌고 달리는 쿠에 두 마리에게 강령을 펼쳤다.
쿠엣~!
쿠우웃!
=오오!?=
쿠에들이 더욱 속력을 내기 시작하니 스사도 화색을 띠며 고삐를 연신 휘둘렀다. 저 앞으로 나아가던 마차가 점차 가까워진다.
속도가 더 빨라진 만큼 짐마차의 요동도 심해졌지만, 환인은 보조석 등받이를 한 손으로 짚고 침착하게 몸을 돌려 짐 하나 없이 뻥 뚫린 뒤를 지팡이로 겨누었다.
=야, 야야! 머리, 머리!=
=루다! 머리 치워! 비켜드려!=
활을 겨누고 있던 짐꾼들과 휴슥이 놀라서 짐마차 좌우에 붙는다.
환인은 영혼 시야로 환한 어둠 속, 시커먼 짐승들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쫓아오는 것을 노려보다가 영혼 구슬을 차례대로 뿌렸다.
그리고.
‘펑.’
뻐버버벙! 콰광!!
여섯 개의 구슬이 환인의 의도에 따라 지연 폭발을 일으켜 짐승 떼를 집어삼킨다.
=우와아~!=
=와하하!!=
=영혼사님 최곱니다!=
선두의 짐승들이 폭발에 휘말려 자빠지면서 장해물이 되어 뒤따라오던 다수의 짐승들 발을 묶는 모습에 짐꾼들과 호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놀고 있지 말고 활을 쏴라!=
=예압!!=
=먹어라, 자식들아!!=
그리고 한데 엉킨 짐승들 좌우로 피해서 달려오는 놈들에게 화살을 날리기 시작한다.
=쏴라! 계속 쏴!!=
짐꾼들과 호위들도 화살을 마구 쏘아대고 환인도 거기에 섞여 영혼 화살을 계속 쏘니 얼마 안 가 추적자들은 추적을 단념, 돌아가기 시작했다.
=괴물들이 더 쫓아오지 않습니다!=
=마을 쪽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저렇게 돌아간 짐승들은 다시 마을을 습격하는 데 가담하겠지만 환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서로서로 이용해 먹는 관계.’
하등 신경 쓸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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