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068 마을 레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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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포드로 가는 길목에 있는 레힐 마을은 율캄을 어째서 마을이라 부르지 않고 촌락이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되는 모습이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강을 중심으로 300여 가구가 밀집되어있고 인구수도 1,000명을 넘는 데다 바위를 높게 쌓은 방벽이 둘린 마을.
대로는 넓적한 자갈을 깔아놓은 포장도로였고 주변으로 울퉁불퉁한 돌산과 넓은 논, 밭, 숲이 펼쳐진 레힐은 율캄을 기준으로 할 경우 충분히 마을이라고 불러도 될 법한 수준이었다.
‘주민들이 입고 있는 옷도 깔끔하군.’
율캄의 주민 대부분은 헤어진 부분에 천을 덧대 기운 옷을 입고 있었는데 여긴 그런 사람이 거의 없다.
집도 율캄보다 깨끗하다. 율캄은 통짜 통나무를 간단하게 손질만 해서 지은 통나무집이 대다수였지만, 레힐은 본격적으로 가공한 나무를 써서 지은 집과 간간이 석조 건축물도 있었다.
=환인 님. 그럼 저희는 물건을 팔고 오겠습니다. 방에서 편히 쉬고 계십시오.=
마을에 들어오기 전, 환인에게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부탁을 받은 스사는 자연스럽게 환인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약간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이 나는 통나무 이층집의 여관에 투숙한 환인과 스사 일행.
스사는 아직 대련의 후유증이 남은 브릴릿과 함께 곧장 단골 거래처를 찾아갔고 환인은 좀비처럼 터덜터덜 따라오는 이실리테와 함께 스사가 잡아준 객실로 들어갔다.
여관방도 환인의 기준에 현대와 다를 바 없는 풍취를 지니고 있었다.
통나무는 그저 외관을 꾸미기 위한 요소였는지, 내부는 가공된 진갈색의 나뭇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깔끔한 목조 저택 느낌이다.
약간 좁은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약 5평 남짓한 내부가 드러난다.
왼쪽 벽에는 한쪽 벽을 통째로 가공한 듯한 2층 침대가 있었다.
통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매끈하게 가공한 듯한 침대는 작은 통나무로 만든 빈티지 사다리가 윗층과 아래층을 연결해준다.
“흠.”
2층 침대인 줄 알았더니 2층은 짐을 올리는 곳이었다.
짚을 넣어 만든 매트리스가 깔끔한 천에 덮여있는 1층 침대도 확인하고 철판을 박아넣은 커다란 궤짝chest을 열어 텅 빈 내부도 확인해보고 탁자 위의 양초 랜턴도 구경한다.
쿠에? 쿠우. 꾸륵.
비상식량은 바닥의 양탄자 감촉이 마음에 드는지 양탄자 위를 서성이다가 배를 깔고 앉아서 만족스러운 울음을 흘린다.
환인도 묵빛 창을 세워두고 허리춤의 돌도끼도 풀어서 탁자 위에 올린 뒤 의자에 앉아 멀거니 서있는 이실리테를 쳐다보았다.
“…….”
=…….=
‘우리가 첫 번째 고객이었나.’
레힐 마을 입구 경비 초소와 경비대는 이실리테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도적질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나올 수 없는 반응이다.
“이실리테.”
=왜…… 예.=
환인은 반말하려다 존댓말로 바꾸는 이실리테를 잠시 응시하다가 물었다.
“왜 날 따라오는 거지?”
=그야…… 당신밖에 매달릴 사람이 없으니까…….=
“나도 너에게 씐 혼재 같은 유형은 처음 본다. 성불이나 정화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해.”
=상관없어. 혼자 목적지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보다 백배 천배 나으니까……. 죽을 때까지 당…… 영혼사님을 쫓아다닐 거야. 아니, 쫓아다닐 거에요.=
“그걸 내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나?”
지독하게 귀찮음이 느껴지는 환인의 대꾸에 순간 이실리테는 자신의 처지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자신이 비록 검전사로 각성한 직업자라지만, 눈앞의 영혼사에게 자신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다.
오히려 혼재가 들러붙은 성가시고 귀찮기 짝이 없는 짐 덩어리. 더군다나 자신은 그를 털려고 한 도적이지 않은가.
처지를 바꿔보니 자신이라도 자길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어디론가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 멱을 따여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 거다.
그냥 영혼사라고 생각했는데 어마어마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격은 덤.
자신이 아무리 신체 방어력에 자신 있다고 해도 연속된 도끼질에 당하면 살이 패이고 뼈가 꺾일 수 밖에 없다.
만약 1:1로 붙으면 나무꾼에게 도끼질 당하는 나무처럼 맥없이 목이 부러져 나갈테지.
두려움이 마음을 잠식하는 것을 느낀 이실리테는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다 내팽개치고 환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털썩, 쿵!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하라는 건 무엇이든 할 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
“시끄럽군.”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듯한 무감정한 목소리에 이실리테는 머리를 박은 채로 부르르 떨었다.
당장이라도 돌도끼가, 창끝이 자신의 목덜미를 내려찍을 것만 같은 공포.
침묵이 길어진다. 그로 인한 공포가 뇌리를 점령해가며 그녀의 이성을 조금씩 마비시키고 있을 때, 환인의 목소리가 천상의 빛처럼 내려오며 이실리테의 귀를 간지럽혔다.
“어제 말했었지. 20년은 봉사할 수 있다고.”
=네, 네! 무료로 봉사하겠습니다! 발가락도 핥으라면 핥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믿지? 넌 도적 출신이다. 네가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나.”
다시 심장이 억좨왔다. 이 질문에 대답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이 맹렬하게 경고한다.
사실 그런 생각도 해본 이실리테였다.
대충 2~3년 정도 일해주다가 야밤을 틈타 도주하는 상상.
물론 상해를 입힐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간 다시 혼재가 들러붙을지도 모르고 영혼의 저주를 받을지도 모르니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이실리테는 오래되지 않아 환인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종속 비술 계약.
그리고 일방적 종속 비술 계약.
전자의 경우가 고용주와 하인 정도의 관계성을 만들어준다면 후자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만들어준다.
둘 다 악용될 우려가 있는 5급 위험 비술이기에 절차와 시전은 모두 도시급에 존재하는 행정관에서만 행할 수 있으며 그 정보는 전 도시와 공유된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비술이기에 고고한 영혼사라면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한 이실리테는…… 고민했다.
전자를 이야기할지 후자를 이야기할지.
후자를 꺼내기에는 환인의 알 수 없는 성격도 무섭고 때때로 느껴지는 얼음같이 냉정한 목소리도 두렵다.
이용만 당하다가 정화를 받지 못하고 버림받을 가능성, 20년간 봉사해온 마지막이 처분일 가능성 등을 생각하면 몸이 저절로 떨려온다.
그렇다고 전자를 이야기했다간 후자의 정보를 알게 되었을 때 괘씸죄가 추가될 수 있고…….
이실리테는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억울하고 분통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죽어서 신의 정원에 들어가고 싶었기에 무고한 사람이나 의미 없는 살인은 정말로 피하면서 정직하게 살아왔는데 어째서!
‘어렸을 때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도둑질의 대가가 이렇게 돌아왔다는 거야? 그런 거면 정말 너무하잖아…….’
이실리테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시 행정관에서 할 수 있는 일방적 종속 비술 계약이라는 게 있어요. 그걸 하면 돼요…….=
환인은 처음 듣는 시스템에 입을 다물었다.
행정관行??, 치정을 행하는 기관인가. 거기서 하는 비술 계약? 비술이 들어간 걸 보면 마법적인 계약을 맺는 것 같은데 종속 계약이라면 노예화 비슷한 건가?
이건 스사와 이야기해볼 문제 같다.
똑똑똑.
[환인 님. 스사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십시오.”
=하하하. 환인 님 덕분에 구할 수 있었던 그레니어 모피가 비싸게 팔렸습니다! 상품도 좋은 가격에 매각했으니 오늘도 제가 한턱 쏘겠……?=
기분 좋게 환인의 방을 방문한 스사는 이실리테가 환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흐음. 자기 처지를 드디어 깨달은 건가? 머리가 아주 나쁜 건 아니군.’
스사는 환인의 표정에서 별일은 아님을 읽고 넉살 좋게 그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자자, 오늘도 제가 한턱 쏘겠습니다. 내려가시죠. 여기 여관의 식사와 춤꾼들의 무대가 무척 훌륭합니다. 늦으면 자리가 없을 겁니다.=
그렇게 짐꾼과 호위까지 데리고 환인과 함께 1층으로 내려온 스사는 그가 무언가 묻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을 읽고 눈치껏 테이블 두 개를 주문했다.
=자네들은 따로 앉는 게 편하겠지? 거기서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게. 술도 허락하지.=
=우오~! 스사 님 최고!=
=감사함다!!=
짐꾼 세 명과 호위 두 명을 따로 보낸 스사는 환인과 브릴릿하고 셋이서 테이블 하나를 차지, 여급을 불러 음식을 풍족하게 주문하기 시작했다.
환인은 그사이 디너쇼 같은 분위기가 형성된 1층 홀을 둘러보았다.
약 200평 정도 되는 넓은 공간은 수십 개의 테이블로 꽉꽉 들어차 있었고 한 쪽 벽에는 3m 정도 높이의 무대가 마련되어있었다.
늦게 오면 자리가 없을 거란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스사 일행과 환인이 자리에 앉자마자 빈 테이블이 빠르게 채워져 간다.
삽시간에 수백 명이 우글거리며 떠들썩한 백색소음을 만드는 와중에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오, 음식이 나오는군요!=
잠시 후 나오기 시작한 음식은 기대된다며 손을 비비던 스사의 행동이 이해될 만큼 맛있었다.
달콤새콤한 소스를 발라서 구운 새 요리를 메인으로 갖가지 과일, 채소 요리가 끝없이 나온다.
그뿐만 아니었다. 잠시 후에는 악단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4개의 현악기와 타악기가 약간 특이하지만 매우 흥겹고 경쾌한 음악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그렇게 완성된 뜨거운 분위기 속에 갑자기 큰 함성이 터져 나와 무대 쪽을 돌아본 순간, 환인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캉캉 춤?’
KPOP 아이돌처럼 어리고 예쁜 여자들이 무릎 위 20cm의 치마와 가슴이 크게 패여 윗가슴골이 대부분 노출된 선정적인 급사 복을 입고 캉캉과 흡사한 춤을 일사불란하게 추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들의 발이 크게 올라가며 면적이 적은 속옷이 노출될 때마다 남자들의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진다.
여급들의 격렬한 동작에 젖가슴이 옷에서 삐져나와 출렁거릴 때마다 열기가 후끈해진다.
환인은 심각한 얼굴로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을 보았다.
메인인 새 요리는 속에 과일과 야채를 채워 구운 어느 나라의 칠면조 요리와 닮았다.
이건 달걀말이와 비슷하고 저건 계란찜과 흡사하다. 샐러드야 어느 나라를 가든 있으니까 이상할 건 없지만 이건…….
‘된장? 거기다 사우어크러스트와 비슷한 절임 요리에 이건 겉절이 같은데.’
환인의 시선이 다시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는 여급들에게 향했다.
다리가 쩍쩍 벌어질 때마다 드러나는 속옷은 율캄 촌락의 처자들이 입고 있던 호박 바지 비슷한 속옷이 아니라 음부를 겨우 가리는 손바닥만 한 티팬티, 혹은 끈팬티였다.
더욱이 허벅지를 질끈 졸라매고 있는 캣 가터와 에나멜 구두처럼 붉은 광이 나는 신발.
=환인 님?=
스사의 목소리에 그를 돌아보니 우려 섞인 표정을 볼 수 있었다.
=혹시 이런 장소는 별로십니까? 마음에 안 드신다면 안쪽에 따로 룸이 있으니 거기로…….=
“아닙니다. 떠들썩하고 흥겨운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군요.”
=네…….=
“정말입니다. 단지 여기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문화를 봐서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확실히 저 무대의 유래가 어디 먼 나라의 문화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습니다. 그게 환인 님의 나라 문화였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프랑스 쪽 문화지만 말이다.
환인은 적당히 얼버무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고 양배추겉절이를 한 입 먹어보았다.
“…….”
짠맛과 약간의 새콤한 맛이 조금 다르지만, 확실히 겉절이와 비슷하다. 된장도 확실히 메주를 쒀서 만든 게 틀림없고.
우와아아아!!
또다시 함성이 터져 나와 뭔가 싶어 무대 쪽을 보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연한 녹색의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얇은 드레스 차림의 여자 한 명만 무대에 서 있었다.
=오오! 오늘이 갈루티엔의 차례였나!=
‘음? 귀가……. 그렇군. 저 여자가 플뢰 종족인가.’
잘 보니 귀가 뾰족하고 길었다. 얼굴도 작고 이목구비도 섬세한데다 가녀리기까지 하니 미인의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여자다.
잠시 후 조용해진 홀을 여자의 가성이 부드럽게 채우기 시작했다.
가사는 흔한 사랑 노래였지만 목소리가 워낙 맑고 청아한데다 옥타브도 높아 노래의 클라이맥스에서 환인은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디너쇼를 가본 적은 없지만 있다면 이런 느낌일 거 같군.’
플뢰 여자의 노래 덕분에 혼란스럽던 마음을 진정시킨 환인은 이런저런 의문을 잊고 조용히 음식을 즐겼다.
초저녁 무대가 끝나고 악사들의 곡이 작게 연주되는 가운데 환인은 스사의 감탄을 적당히 받아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갈루티엔이라고 했습니까. 목소리가 정말 아름답더군요.”
=그렇죠?! 크으~ 직업상 플뢰 분들을 몇 번 볼 수 있었는데 그분들의 목소리는 정말 꾀꼬리처럼 부드럽고 감미로웠지요. 그중에서도 갈루티엔은 독보적입니다. 가능하다면 매일 저 목소리를 듣고 싶지만…….=
갈루티엔은 한 달에 2~3번. 그마저도 내킬 때 무대에 오른다며 자신 같은 행상은 정말 운이 받쳐줘야 볼 수 있다고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스사였다.
그렇게 반주를 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중 테이블의 음식이 거의 다 사라졌을 때 환인은 이실리테가 자신의 방에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허어. 먼저 일방적 종속 비술 계약을 언급했다고요? 정말 똥줄이 타긴 했나 봅니다.=
“그게 그렇게 확실한 구속 이유가 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일방적 종속 계약은 듣기 좋게 꾸민 단어일 뿐, 실상은 노예 계약이나 다름없습니다. 한 번 계약을 맺으면 어지간해서는 파기하는 것도 어렵고요. 그래서 행정관에서 직접 관리하는 겁니다.=
종속 비술 계약 신청이 들어가면 행정관은 담당자를 뽑아 일단 상호 간에 정상적인 의사 교류가 있었는지 확인하고, 그 과정에 비술적인 간섭은 없었는지 조사하며 마지막으로 계약서를 작성한 후 양자가 계약서의 내용에 동의해야만 계약을 진행할 수 있다.
계약 진행 비용도 서민의 1년 생활비에 이를 정도인데다 비용은 선불, 중간에 계약을 취소해도 비용은 돌려주지 않는다고.
“만약 계약의 내용을 위반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의든 타의든 계약 사항을 위반하면 심각한 페널티가 떨어집니다. 가볍게는 위상력의 저주를 받아 일정 기간 능력을 쓸 수 없게 되거나, 직업을 잃고 신체 불구가 되는 일도 있습니다. 심각한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더군요.=
이것은 직업을 가진 자들의 경우고 일반인이 계약을 위반하면 그 즉시 기혈이 역류해서 사망하게 된다고 스사는 설명했다.
페널티가 생각 이상으로 심상치 않아 환인이 인상을 쓰니 스사가 얼른 덧붙였다.
=아, 이건 일반 종속 계약의 경우입니다. 일방적 종속 계약은 예를 들어 환인 님이 갑, 이실리테 씨가 을일 경우 을에게만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대신 그만큼 확인 절차가 까다롭죠.=
“그렇습니까? 그러면 괜찮겠군요.”
계약의 주체자가 일반 술사였다면 사기가 아닌가 고민했을 텐데 행정기관이 전담해서 관리한다면 믿을 수도 있고 말이다.
=만약 저 여자를 환인 님이 그냥 거두겠다고 하셨다면 저는 몇 날 며칠이고 환인 님을 따라다니며 말렸을 겁니다.=
“그랬습니까?”
=도적단을 이끌던 두목이었지 않습니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성격이 남을 태연히 속이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믿고 뒤를 맡길 수 있냐고 하면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자기 말에 자기가 고개를 끄덕이던 스사는 계단 쪽을 쓱 바라보더니 환인에게 축하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종속 계약을 한다면 사용처는 무궁무진하지요. 몸이 특히 튼튼해 보였으니 환인 님의 실력이라면 그녀를 방패로 써도 괜찮을 테고요. 아, 혹시 계약 구성 조건에 대해 생각해두신 것이 있으십니까?=
“절대 배신하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이중 삼중으로 세울 생각입니다. 그 외에는 딱히 없군요.”
스사는 물러도 너무 무른 조건에 작게나마 우려를 표시했다.
=도적 두목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의식주까지 제어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너무 조여 매면 의욕을 잃지 않겠습니까. 짐꾼으로 활용할 생각인데 의욕 없이 따라다니다 괴물을 불러들이는 등 위험을 자초하는 일은 지양하고 싶습니다.”
어느 정도 의욕은 가질 수 있도록 작은 당근 정도는 계약 사항에 넣어둘 생각이라는 이야기에 스사는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냉정한 판단을 내리시긴 하지만 영혼사님은 역시 착한 분이시라고 착각하는 스사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골수에서 기름을 뽑아내는 것처럼 악착같이 쥐어 짜내기만 할 텐데 노예의 의욕까지 생각하시다니.
사실 혼재가 붙어있는 만큼 그 점을 이용하면 섣불리 자살도 못 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스사였지만, 자신의 인상이 나빠질까 우려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실리테 씨는 무척이나 후한 주인님을 두겠군요. 하하하.=
당사자가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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