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067 마을 레힐로 가는 길
* * *
짐꾼은 거리를 두고 계속 쫓아오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난감한 듯 머리를 벅벅 긁다가 운전석 쪽을 보며 말했다.
=스사 님. 도적 두목이 계속 쫓아오는데요.=
=으으음……. 영혼사님, 어떻게 할까요?=
“…….”
스사는 대답 없는 환인을 힐끔거리다가 목을 긁적거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영혼사라면, 그리고 자신이 파악한 환인의 성격이라면 혼재를 해결할 거로 생각했었다.
씐 당사자가 어쨌든 간에 혼재의 해방, 성불, 소멸은 영혼사의 고귀한 권리이자 의무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들러붙은 혼재를 해결해주지 않고 지나쳤다.
‘다른 의도가 있으시다는 게 타당한데 말이야. 혼재를 명목으로 조련해서 부하로 삼으시려는 걸까. 아니면…….’
=어어, 도적 두목이 점점 가까이 다가옵니다!=
=……허 참. 브릴릿, 부탁하지.=
=예.=
브릴릿은 담담하게 창을 꺼내 들고 쿠에의 속도를 살짝 늦추며 빠르게 접근하는 이실리테에게 고함쳤다.
=거기 도적 두목! 더 가까이 다가오지 마라! 접근하면 공격 의사로 간주하겠다!=
=씨발! 나 이제 도적 두목 아니라고!!=
울화통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에 브릴릿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찢어진 피부에서 흐른 피로 칠갑을 한 상태라 불쌍하기까지 한 모습이지만, 브릴릿은 얼음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이실리테를 가볍게 찔렀다.
캉! 까강!
=아 하지 마! 하지 말라고!=
=가까이 오지 마라!=
=느그 상인 놈에게 볼일 있는 거 아니니까 꺼져!=
붕!
카각!
까가강 캉!!
그저 가진 힘만으로 도적단의 우두머리를 한 게 아니라는 듯, 이실리테는 밀짚 쿠에를 수족처럼 부리며 브릴릿과 수 합을 나눈다.
‘무식한 도적이라고 생각했더니 제법……!’
‘이년… 생각보다 더 세잖아!’
둘의 실력은 타인이 보기에 막상막하였지만 실은 브릴릿이 제 실력을 내지 않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혼재가 씐 상대하고는 말도 섞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실력 차, 직업자의 등급 차이로 브릴릿의 가드를 뚫지 못한 이실리테는 이를 갈면서 한참을 후퇴, 일정 거리를 두고 짐마차의 뒤를 따랐다.
해가 떨어지며 노을이 하늘을 뒤덮기 시작할 때 일행은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짐마차의 천장 프레임에 천막을 씌우니 모닥불을 피우니 고기를 굽고 스튜를 끓이니 다들 분주하게 움직일 때 스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늘 밤만 참으시면 내일은 마을에서 편히 쉴 수 있을 겁니다.=
“이때까지 노숙도 딱히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사실이었다.
환인은 특별대우를 받아 불침번도 제외되었고 매 끼니 식사도 향신료와 조미료를 팍팍 써가며 만든 음식이 제공되었다.
잠자리의 불편함으로인한 결림이나 피로쯤은 핏빛 돌멩이를 쥐고 있다 보면 금방 풀렸기에 아무 불만이 없었다.
=역시. 영혼사님은 뛰어난 영웅이 되실 자질이 있으시군요.=
“노숙이 영웅의 자질에 연관 있는 겁니까?”
스사의 농담 같은 말에 환인이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스사도 하하하 웃는다.
=영웅이라면 자고로 밤하늘을 이불 삼고 밤바람을 자장가로 삼을 수 있어야 영웅이라 할 수 있죠. 야숙을 즐기지 못하는 자는 평범하게 성공할지언정 영웅은 될 수 없다는 게 통설이니까요!=
“왠지 사서 고생하는 직업이라고 들립니다만.”
=엇, 어떻게 아셨습니까? 영웅의 다른 이름이 바로 역마살이거든요. 큭큭큭.=
환인도 피식거리다가 열심히 야영지를 꾸리고 있는 짐꾼을 돌아보며 말했다.
“노숙에서 가장 힘든 것을 여러분들이 해주시는 데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요. 그나저나…….”
환인의 시선이 브릴릿과 대치하고 있는 이실리테를 향하자 스사도 그쪽을 바라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음. 영혼사님, 주제넘은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가 혼재를 성불시키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시겠지요.”
=예…….=
설마 자신의 질문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스사가 주눅 든 고양이 표정을 짓는다.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귀여운 외형에서 시선을 돌려 이실리테의 왼쪽 어깨에 매달려있는 혼재를 차분히 살펴본다.
“저는 아마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영혼사와 다를 겁니다.”
=……예?=
환인의 이야기가 뜻밖이었는지 스사는 물론이고 모닥불 근처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던 짐꾼들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환인을 바라본다.
“직업자는 다들 아우라를 몸에 두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니지요.”
환인은 그날 일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둠 속에서 빛의 강을 나아가던 경험. 26년간 자신이 알게 모르게 죽여온 수많은 생물의 혼이 몸을 뚫고 지나갈 때의 뜨거움.
자신도 각성했다면 아우라가 보여야 할 텐데 어째서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각성은 인간형 동물과 사람만 한다고 에프니스가 말했지만, 환인은 믿지 않았다. 자신은 둘째치더라도 칼날 멧돼지의 경우가 존재하니까.
스사는 음, 하고 작게 침음을 흘리더니 부드러워 보이는 털로 복슬복슬한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몇몇 직업자들 중에서는 아우라가 보이지 않는 직업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습니다만…… 그게 영혼사님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긴지는 장담할 수가 없군요.=
“그렇습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저 여자에게 들러붙어 있는 혼재는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정화나 성불의 가능성을 언급하기에도 조심스럽군요.”
=아. 그래서 도적들과 빨리 헤어지신 거군요.=
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재의 정화를 시도해보긴 할 겁니다. 지금 저에게는 경험이 무엇보다 필요하니까요.”
눈썹 같은 검은 줄이 일一 자로 변한 모습으로 생각에 잠기는 스사를 바라보다가 비상식량을 향해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 고기에 탐욕을 보이는 비상식량이 부담스러운지 짐꾼들이 곤란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인은 아쉬운 듯 고기를 돌아보며 뒤뚱뒤뚱 걸어와 다리 사이에 앉은 비상식량을 쓰다듬어주며 생각했다.
이실리테에게 붙어있는 혼재는 여덟, 혹은 아홉 살 정도의 여자아이였다.
말과 비슷한 귀하고 말총 꼬리를 가진 소녀는 이실리테의 어깨에 매달려있지만, 이실리테에게 그 어떤 적의도 보내지 않고 있었다.
그저 붉어져 있는 채로 이실리테의 어깨에서 간혹 주위를 둘러보기만 할 뿐.
어떤 이유로 이실리테와 함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문제라면 이것저것 캐물어봐야 하고 물어본 뒤에도 해결법이 안 나올 수 있다는 것.
그랬기에 도적들에게서 신비감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서늘하게 자리를 떴다. 물론 이실리테가 쫓아올 거라고 예상도 했고.
환인은 스사에게 이실리테를 이리 데려오라고 부탁했다. 그 부탁을 선뜻 받아들인 스사가 브릴릿, 딘테, 휴슥을 붙여서 이실리테를 연행해왔다.
=영혼사님. 공짜로 혼재를 떼어내달라고는 안 할게. 내 혼을 정화해주기만 하면 20년은 당신을 위해 무보수로 일할 수 있어.=
조바심이 나고 있었던 이실리테는 다짜고짜 환인에게 그렇게 딜을 걸었다.
환인은 잠시 이실리테를 말없이 응시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는 예의가 없군.”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살아온 꼬라지가 이따위라서 예의를 배운 적이 없거든.”
조롱이나 놀림의 뜻은 쌀 한 톨만큼도 없는 태도에 환인은 자신의 손길을 눈감고 음미하는 비상식량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널 위해 힘을 써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어째서 널 위해 골치 아픈 일을 해야 하지?”
=혼재를 정화하고 떠도는 영혼을 구제하는 게 영혼사의 의무잖아!=
“누가 의무라고 했지? 그 의무는 누가 지워주는 거지? 적어도 난 그런 의무를 짊어진 적도, 짊어져야 할 중요한 이유도, 의무를 지운 자를 만난 적도 없다.”
=……!=
“내 입장에서 너는 뜬금없이 나타나 재산을 빼앗아 가려 한 범죄자다. 영혼사니까 당연히 혼재를 정화해야 한다는 것 외에 내가 널 도와야 할 이유를 대봐라.”
=그럼 날 왜 부른 건데?!=
“그건 돌아가서 생각해보도록. 브릴릿 씨.”
=예.=
브릴릿은 격렬하게 저항하는 이실리테를 반쯤 내동댕이치다시피 밀쳐내며 멀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사가 혀를 내두른다.
=누가 도적 두목까지 한 성격 아니랄까봐 성질머리가 굉장합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도와주더라도 이쪽이 주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흐흐. 그건 그렇지요.=
저녁 식사와 비상식량의 제한 급식을 실행한 환인은 자신의 잠자리, 두꺼운 천막을 씌운 짐마차의 프레임 위쪽으로 올라와 드러누웠다.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로 늘어진 천이 해먹 역할을 해주는 게 상당히 편하다.
새벽이 되면 꽤 쌀쌀해지지만,
쿠엣.
옆구리에 비상식량이 웅크린 채 붙어있어 이것만으로도 꽤 따뜻하다.
계속 등을 쓰다듬으라고 손가락을 약하게 물고 끌어당기는 비상식량의 행동이 자못 신경질적이다.
밥을 맘껏 먹지 못하게 해서 그런 걸까.
피식 웃으면서 등을 쓸어내리다가 시야 한구석에 따로 모닥불을 피운 채 앉아있는 이실리테를 쳐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 가득한지 주둥이가 댓발은 튀어나와 있었다.
‘영혼 폭발은 그레니어의 가죽마저 찢어버리는 위력이었는데 상처가 벌써 아물고 있군.’
비록 가죽이 약한 주둥이 부분이었다지만 평범한 칼은 제대로 날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질긴 가죽이었다. 그런 영혼 폭발을 다섯 번이나 맞고 저 정도 상처로 그치다니.
‘그러고 보니 바르둘도 비슷했나.’
얼룩 늑대를 앞세워 습격해왔던 늑대 인간. 그것도 엄청난 힘과 재생력을 가진 각성 괴물이었다.
하지만 방어력은 이실리테와 비교하면 두 단계는 떨어진다.
대략적인 수치로 표시하자면 바르둘을 기준으로 바르둘이 1의 힘과 1의 재생력이라면 검전사는 1의 힘과 0.8의 방어에 0.2의 재생력이 아닐까.
문득 생각의 가지가 직업의 성장에 닿았다.
창전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브릴릿도, 10kg이 넘어갈 듯한 통짜 철로 만든 대검을 나뭇가지처럼 휘두르던 이실리테도 힘이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만약 다른 직업자들도 자신의 초능력처럼 성장한다고 하면…….
‘강해질수록 근접전은 불가능해진다.’
영혼 구슬 보유 갯수가 24개로 늘면서 새로운 능력(영혼과 약한 의사소통)과 기술의 위력이 한층 강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기술의 사용 횟수 허용 범위도 대폭 늘었다.
그 말은 다른 직업도 훈련을 거치면 성장한다는 뜻.
지금도 힘과 방어력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는데 그때가 되면 근접 전투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는 환인이었다.
‘아쉽군.’
영혼을 다루는 힘에 불만은 없다.
멀리서 화살을 쏘고 폭발을 일으키고 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지만 근접 전투만큼의 짜릿함은 없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루는 영혼의 급수가 높아지고 자신도 꾸준히 신체를 단련한다면 어느 정도 신체의 격차는 메꿀 수 있을 테니까.
꾸우!
생각하느라 손을 멈췄더니 비상식량이 부리로 손가락을 물고 손등을 쪼아대며 항의한다.
환인은 애완동물이 아니라 상전을 키우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짐꾼들이 출발 준비와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환인은 브릴릿에게 정중하게 대련 요청을 부탁했다.
몇 가지 의도가 있는 대련 요구지만, 브릴릿에게 손해는 딱히 없을 것이다.
“굳은 몸을 푸는데도 괜찮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한 수 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20분가량의 대련에서 환인은 단 한 번의 공격도 허락하지 않았고 브릴릿은 봉으로 전신 마사지를 받았다.
물론 타격은 하지 않았고 툭 건드리는 선에서 끝냈지만, 브릴릿이 받은 정신적 충격은 창으로 난도질당한 수준.
브릴릿은 환인의 요구에 처음에는 접대 대련을 할 생각이었다.
근접 직업자의 대련 상대는 근접 직업을 각성한 직업자 뿐이다. 그도 그럴 게 약간만 힘 조절을 못해도 상대방의 뼈가 부러지다 못해 산산이 조각난다.
그런데 상대가 영혼사라면?
물론 창술 훈련 조교 자격증까지 있는 브릴릿이다. 힘 조절에 부족함은 없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접대해줄 생각이었는데…….
=큿?!=
그 생각이 바뀌는 데는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브릴릿은 환인과 세 차례 무기를 교환하자마자 상대는 창술을 배운 적 없는 사람이란걸 간파했다.
파지법에서부터 자세, 족적, 동작 어느 것 하나 배운 흔적이 없었던 거다.
하지만 찌르기와 후리기, 내려치기만큼은 놀라울 만큼 자세가 곧고 정확했다.
창은 찌르기만 제대로 할 줄 알아도 80%는 배웠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쓰기 쉬운 편인 무기다. 그런 찌르기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눈앞의 생초짜는…….
‘미친!’
반사신경과 동체시력, 전투 감각이 짐승을 뛰어넘어 괴물 수준이었다.
브릴릿이 먼저 움직이고 환인이 늦게 움직였지만, 어느 순간 브릴릿의 창은 걷어내지고 환인의 창은 자신의 몸을 가볍게 건드리고 지나간다.
공격하면 미래를 보고 온 것처럼 슥 피하더니 자신도 모르던 약점을 쿡 가볍게 찌르고 되돌아간다.
아예 피하지 못할 공격을 할라치면 무릎이나 팔꿈치를 툭툭 건드려 동작에 훼방을 놓고 그렇게 발생한 빈틈을 있는 데로 쿡쿡쿡 찌르고 돌아간다.
대련이 시작하고 4분이 지났을 때 브릴릿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쉴 새 없이 움직여가며 어떻게든 한 대만이라도 건드리기 위해서 용을 썼지만…….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일관적으로 여유로웠다.
그리고 숨조차 거칠어지지 않은 환인에 비해 자신은 턱 밑까지 숨이 차올랐다는 것에 좌절했다.
‘……!’
마지막으로 환인의 발자국을 본 뒤에는 좌절이 아니라 극도의 무력감을 느끼면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발자국은 십수 미터 범위의 땅이 엉망이 될 정도로 무수하게 찍혀있었는데 환인의 발자국은 고작 1m 남짓한 범위 안에 조금씩만 찍혀있었던 것을 보고 만 것이다.
이 대련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브릴릿과 대련을 지켜보던 호위2, 호위3에 스사 뿐만이 아니었다.
=영혼사님 당신 정체가 뭐야? 인간 아니지? 뭐 인간형 이형종이 변신한 거라도 돼?=
슬그머니 다가와서 대련을 지켜보던 이실리테는 아예 정신을 놓아버렸다.
“난 평범한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이 그럴 수 있다고? 영혼사님이 평범한 사람이면 난 원숭이 미만 쓰레기겠네. 아하하하…….=
이실리테도 정규 훈련을 받아본 경험이 있기에 환인이 정식으로 창술을 배운 적이 없다는 걸 금방 눈치챘었다.
오히려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기에 대련 당사자인 브릴릿보다 환인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했다.
환인은 기술이 아니라 그냥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고.
그랬기에 더더욱 어이없었다. 오죽하면 억울해서 죽을 것만 같을까.
상대의 공격을 보고 피하는 닷지dodge.
동작을 읽고 공격 자체를 차단하는 패리parry.
봉으로 툭툭 무기 궤적을 바꿔버리며 반격하는 리포스테riposte.
방어술이라 하면 손에 꼽는 세 가지 기술을 숨 쉬듯 편안하게 펼치는 환인을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셋 중 하나만 해도 전문가를 넘어 명인 소리를 듣기에 충분한데 저 미친 영혼사는 뭔데 세 가지를 저렇게 능숙하게 다루는 거지?
아니 근데 무기는 뭐 저렇게 엉성하게 잡아? 어린애가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저 보법은 또 뭐고?
‘인생을 부정당한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서 있을 기력도 없어 퍼질러 앉아있던 이실리테는 브릴릿이 반쯤 죽은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 그녀도 비슷한 눈으로 브릴릿을 쳐다보았다.
동질감, 혹은 동병상련.
20분의 대련으로 만족할만한 사실을 깨달은 환인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이실리테를 한 번 쳐다보고 시선을 돌렸다.
의욕을 잃은 것처럼 퍼질러 앉아있는 것을 보면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먹힌 듯 하다.
‘이걸로 다음 행동이 쉬워지겠지.’
그렇게 두 여자에게 죽는 그 날까지 잊을 수 없는 패배감을 안겨준 환인은 6시간 뒤.
=도착했습니다. 저곳이 레힐 마을입니다.=
레힐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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