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6화 (66/813)

〈 66화 〉 065 마을 ­ 레힐로 가는 길

* * *

“이상하군요.”

=예? 뭐가 이상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갑작스러운 환인의 이야기에 스사가 고개를 기우뚱했다.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고 구름은 높으며 하늘은 푸르르다. 밀짚 쿠에들의 컨디션도 절호조에 짐마차도 문제없고 짐승의 습격은 오히려 약간의 부수입이 되어주었다.

아무 문제 없이 평화로운 여정인데 이상하다니?

문득 스사는 환인이 하늘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도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별 거 없는데?’

먹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다.

“비상식량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저런 모습은 처음 봅니다.”

=……오. 확실히 허둥지둥하는 느낌이군요.=

오는 길에 짐승의 습격이 있을 때마다 비상식량이 미리 경고해주었다. 덕분에 대응이 쉬웠기에 희귀 쿠에는 역시 영특하다고 생각하던 스사였다.

그런 비상식량이 저렇게 혼란스러워 한다면…….

=브릴릿!=

스사는 짐마차의 속도를 절반으로 늦추면서 조금 앞서 나아가던 브릴릿을 소리쳐 불렀다.

=아무래도 근방에 불한당들이 매복 중인 거 같아. 정찰을 부탁하지.=

=딘테와 선행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기를 챙겨 들게.=

스사의 지시에 일행이 척척 움직이는 가운데 환인은 약간 복잡미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강도가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비상식량의 혼란이 말이 된다.

비상식량은 여태까지 선량한 사람들만 보아왔다. 싸움도 전부 짐승이나 괴물하고만 했는데 이제 와서 사람과 싸운다니 혼란스러워할 법도 하다.

문제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

마치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러야 하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지는 않는다. 그저 사람을 죽이고 나면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그것을 우려할 뿐.

팔짱을 낀 환인은 흠, 작게 숨을 내뱉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사회적으로 죽이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도덕심의 차이?

군대를 포함, 대학까지 학창 시절을 보낼 때 환인은 여러 번 인간의 악의를 경험해보았다.

그중에는 환인의 기준에도 한참을 벗어난 금품갈취와 폭행, 정도를 넘은 집단 괴롭힘도 있었다.

처음 두 번은 당해주었지만 세 번은 환인도 참지 않았다.

집단 괴롭힘 가해자들의 신상 및 가족 정보와 그때까지 해왔던 짓, 악행을 수집한 환인은 거기에 살을 좀 더 덧붙여 완전한 악당으로 가공한 뒤 가해자의 부모 직장, 가해자의 형제자매가 다니는 학교, 학원은 물론 가해자 일가의 생활권 내에 무차별로 유포했었다.

물론 가해자의 집에 물리적인 테러도 서슴지 않았다.

CCTV나 블랙박스 등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혹시 행적이 밟히더라도 자신이 아닌 다른 피해자들의 행동인 척 꾸민 것은 당연한 일.

완벽하게 흔적을 숨기고 폭죽놀이 수준의 자그마한 사제폭탄도 배달했으며 사람이 있을 때 돌멩이로 집의 유리창을 깨버리거나 죽은 동물의 사체를 택배인 척 자신이 직접 배달하기도 했다.

사제 화염병도 던질까 했지만 경찰 수사가 집요해질 거란 예상에 화염병 투척은 보류.

이러한 괴롭힘에 가해자 부모는 경찰에 수사도 의뢰해보고 해결사도 고용해보는 등 나름대로 수단을 강구했지만 효과는 보지 못한 채 지리멸렬하다가 결국 멀리 이사를 하고 말았다.

이사갔다고 해서 환인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 날 때마다 이사를 한 장소에서도 보복행위를 이어갔었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가해자 집안은 풍비박산, 가해자도 어느 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확인 결과 사실이었고 환인도 그때를 기점으로 보복을 중단했다.

— 아버지, 어머니. 이런 일이 있었어요.

아들의 고백에 사정을 뒤늦게 알게 된 그의 부모는 환인을 크게 질책하거나 꾸지람을 하는 대신 무척이나 슬퍼했다.

그리고 환인을 데리고 사람 적고 풍경 좋은 시골로 여행을 떠나 환인에게 사람의 도리라던가 도덕심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설명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환인의 행동도 자살 사주에 포함되는 엄연한 살인이자 범죄 행위임을 인식시켰다. 그 후 경찰을 찾아가서 환인의 범죄 사실을 알리고 환인의 부모도 그 책임을 지려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경찰은 그 사건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환인의 나이가 어리기도 했고 외모도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 않게 생겼기도 했으며 그간 학창 생활이 이런 범죄와 관련이 없을 만큼 깨끗하고 선생들에게도 신뢰받는 학생이었고…….

하여튼 여러 가지 이유에 더해 환인의 완벽한 흔적 감추기로 결국 불기소처분을 받은 것이다.

사실 비슷한 이유로, 또는 정반대의 처지에서 경찰을 찾는 가족은 적지 않은 편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허위사실에 기반한 신고였기에 환인도 그 연장선으로 취급받은 것을 환인과 그의 부모는 몰랐다.

아무튼 그 일을 기점으로 환인은 보복할 때면 더욱 은밀하고 조용하게 일을 진행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

“…….”

살인의 허용 여부와 방식으로 잠시 고민하던 환인은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세계에서 벌이는 살인은 모두 보복의 범주에 넣기로 말이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먼저 악행이라 할만한 짓은 저지르지 않을 테지만, 강도들의 습격에까지 부모님이 말씀하신 자비심에 따를 생각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복잡미묘한 심정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에 어떻게 될지 환인 자신도 모르는 일인 만큼 일이 벌어진 뒤에 다시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것.

그즈음 쿠에를 타고 선행 정찰을 나갔던 브릴릿과 딘테가 돌아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도적단입니다. 숫자는 20명 남짓, 6명은 활을, 나머지는 창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직업자도 3명이 보였습니다. 통과하려면 통행세를 내라고 주장했습니다.=

=수배서에 등록되지 않은 도적이었습니다. 정규 훈련을 받은 것처럼 절도 있는 태도였고, 예상으로는 타지역에서 쫓기듯 흘러들어온 자들 같습니다.=

환인은 둘의 대화에서 아우라를 지닌 자를 직업자라고 부른다는 걸 눈치챘다.

‘직업이라…… 내가 영혼사라고 불리는 것도 관련되어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아우라가 없고…….’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받던 스사는 환인을 돌아보며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영혼사님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리더는 스사 씨입니다. 그리고 아는 것이 적은 제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닌 듯 하군요.”

=으음…… 그러면 이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스사는 자신이 생각해둔 바를 자세히 설명하며 환인의 협조를 요청했고, 합리적이라 생각한 환인은 고개를 끄덕여 그 제안을 수락했다.

=도적놈들의 믿음과 신앙이 부족해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 상황이면 난전이 벌어질 테니 오히려 피해를 줄일 수 있겠지요.”

=말씀대로입니다.=

천천히 도적단을 향해 나아가던 중 환인은 비상식량을 불러들였다.

비상식량의 울음에 쿠에들이 멈춰서는 일없도록, 그리고 눈먼 화살에 맞는 일이 없도록.

날아오르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짐칸에 비상식량을 밀어 넣은 환인은 밀짚 쿠에를 몰아서 가까이 다가온 브릴릿을 보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먼저 말하길 기다렸는지 브릴릿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혼사님. 도적들과 전투가 벌어지면 직업자들 중 근접 무기를 든 놈과는 무기를 맞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

=영혼사님의 무술 실력은 저보다 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술이란 그보다 더 큰 힘으로 무력화되기 쉽습니다. 영혼사님께서는 각성과 직업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충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 강한 힘이라는 건…… 그렇게나 힘의 차이가 납니까?”

잠시 앞을 본 브릴릿은 빠르게 설명했다.

=근접 계열 직업을 얻는 순간 신체 능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주술, 도술, 법술 계통 직업을 얻으면 위상력이 많이 증가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더니 짐칸의 휴슥에게 손짓해 성인 팔뚝 굵기의 짧은 철봉을 받고는 큰 힘 들이지 않고 가볍게 구부러트린다.

“……!”

다시 곧게 펴서 휴슥에게 넘겨준 브릴릿이 말했다.

=제 직업은 창전사입니다. 아시겠지요?=

“……예.”

환인은 적지 않게 놀랐다.

지구에도 지름 10cm의 철봉을 구부러트릴 수 있는 사람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근육이 우락부락한 마초들이고 구부러트리는데도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힘을 쓰지, 브릴릿처럼 호리호리한 몸매로 엿가락 부러트리듯 구부러트리지는 못한다.

기왕 밝혀진 거, 환인은 휴슥에게 방금 그 철봉을 받아서 힘을 줘보았다.

“…….”

미세하게 휘어지지만, 그 정도뿐이다.

이번에는 최하급 강령을 하고 흡, 힘을 주자 끼기긱 소리가 나면서 그제야 휘어지기 시작한다.

눈이 휘둥그레진 휴슥에게 휘어진 철봉을 넘겨주고 앞서가고 있는 브릴릿의 등에 시선을 주었다.

‘근접 직업자와 신체 차이가 크군.’

환인은 직업에 관해 다른 궁금증이 생겨났다.

창전사라는 것은 자칭일까, 아니면 명백한 하나의 직업으로 분류되는 걸까.

‘내가 영혼을 다루는 것처럼 창을 쥐고 있을 때 특별한 힘을 쓰는 건가?’

그렇다면 평범한 창으로 그레니어의 가죽에 상처를 입힌 게 이해된다. 그럼 그 효과는 사용 중인 무기의 예리도 증가? 아니면 적의 방어를 일부 무시하는 방식?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브릴릿이 말했던 도적 떼가 보이기 시작했다.

폭 5m 정도 되는 자연히 생겨난 길을 가로막고 있는 12명의 남녀 무리. 그리고 좌우 풀숲에서 활을 조준하고 있는 8명.

남자는 개와 고양잇과 짐승 머리가 섞여 있었다. 사자, 호랑이, 퓨마, 늑대, 코요태, 여우, 너구리 등등.

여자들은 가죽 투구 등을 쓰고 있어서 종을 알 수 없다.

브릴릿이 말한 직업자가 누구일까 살펴보려 했지만, 그럴 것도 없었다.

길을 막고 있는 쪽의 가장 앞에 있는 여자와 그 뒤에 두 명이 몸에 옅은 아우라를 두르고 있었던 거다.

더욱이 직업자라는 인간은 가죽 갑옷만 입은 다른 도적에 비해 혼자 철을 두드려 만든 듯한 판금 가슴막이를 착용 중이었고…….

“…….”

특히 선두의 여자는 자기 키만 한 양손검을 한 손으로 어깨에 가볍게 걸치고 있었다.

분위기상 도적단의 두목인 듯한 모습.

저러니 브릴릿이 직접 부딪치지 말라고 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환인은 여자의 어깨에 들러붙은 것을 보곤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흐름이 스사 씨를 돕는군.’

어느덧 도적 떼와 거리가 20m까지 줄어 짐마차가 멈춰서자 브릴릿과 딘테가 창을 꺼내 들고 마차의 좌우를 지키는 포지션을 잡는다.

풀숲에 서 있던 도적들이 화살을 겨누자 짐칸에 있던 짐꾼 셋과 휴슥도 활과 석궁을 꺼내 도적들에게 겨누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누군가 실수로라도 활을 쏘거나 무기를 휘두르면 당장에 전투가 벌어질 분위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의 여자는 태연한 기색으로 대검을 땅에 쿵! 소리 나게 찍으며 말했다.

=도망가지 않다니, 잘 생각했어. 도망가봤자 우리 별동대가 추격했을 테니까.=

=짐작하고 있었소. 이렇게 대놓고 길을 막고 있다는 뜻은 뒷배나 백업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니.=

=이야~ 머리가 꽤 돌아가는 상인님이잖아?=

=이 정도도 못해서야 행상 일은 그만둬야지. 그대가 도적단의 우두머리요?=

=맞아. 내 이름은 이실리테. 이실리테 도적단의 리더야.=

=도적이 남부 초원의 대영웅 이름을 쓰다니, 위르트 8급 호족이 당신을 찢어 죽이려 들 거요.=

=맞아. 하지만 그네들은 남부에 있고 나는 중부에 있지.=

스사와 도적 우두머리의 신경전을 들으면서 환인은 이실리테라고 자칭한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여자들에 비해 아랫배는 물론 심장의 온기도 거의 두 배 가까이 크다. 그래서일까, 도적 우두머리도 이 세계의 보편적인 여자와 모습이 상당히 차이 났다.

환인이 이때까지 본 여자는 율캄 마을의 약 120명이 전부다.

그녀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호리호리하고 가녀린 체형이었다. 외모도 밭일하느라 흙먼지가 묻어도 예쁘다는 생각이 드는 수준이다. 몸매도 슬렌더나 글래머같은 스타일의 차이, 노화로 인해 살집이 늘어나는 예는 있어도 대부분 여성스러운 굴곡이었고.

하지만 눈앞의 도적 우두머리는 여러 가지 의미로 보이시한 느낌이었다.

다른 여자들보다 조금 더 큰 키에 꽤 다부진 체격. 그리고 가슴을 압박하는 부류의 갑옷에 얼굴선이 조금 굵어 머리를 짧게 치고 남성복을 입으면 선이 가느다란 남자, 혹은 보이시한 여자로 볼 수 있는 미모다.

‘역시 온기가 많을수록 외모가 남성적으로 변하는 거군.’

각성의 유무는 온기 보유량과 상관이 없어 보였다. 브릴릿은 평균적이었으니까.

환인이 이실리테라는 도적 두목과 다른 도적들을 살펴보는 사이 약 10분에 걸친 신경전에서 패배한 것은 도적 우두머리 쪽이었다.

혓바닥에 감춘 날로 툭툭 주고받던 도적 우두머리가 ‘말로는 못 당하겠군’ 같이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10kg은 가뿐히 넘어갈 듯한 대검을 한 손으로 들고 휘저으며 협박한다.

=저 쿠에 기병한테도 말했지만, 우리가 바라는 건 많지 않아. 소지품과 짐마차의 짐 3할에 밀짚 쿠에 한 마리만 내놓으면 솜털 하나 건드리지 않고 보내줄게.=

=행상인의 쿠에는 목숨보다 소중한 거요. 거기다 짐까지 내놓으라니, 과한 요구라고 생각하지 않소?=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딱히 과한 건 아니잖아? 살아있으면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다고. 글고 이런 촌락과 마을을 오가는 행상이니까 거래 계약을 맺은 상품도 없을 거 아냐.=

있더라도 상거래 계약품은 건드리지 않는 융통성이 있다고 말하는 도적 우두머리였다.

환인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짐을 받은 도적단이 약속을 지킬 것인가는 제쳐두고, 도적단을 상대할 힘이 없다면 3할의 짐과 소지금을 내놓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이성적이고 현명한 선택이니까.

=나도 이실리테라는 이름에 자부심이 있어. 한 번 내뱉은 말은 꼭 지켜.=

그러니 짐의 일부를 통행세로 내놓고 가던가, 아니면 여기서 자신들과 싸우든가 선택하라는 뜻이다.

스사는 그 말을 한 도적 우두머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알 듯 말 듯 한 웃음을 지으면서 물었다.

=미안하지만 우리 행렬에 잠시 합류하신 귀하신 분이 계셔서 말이오. 내 짐이야 내놓으면 그만인데, 그쪽 요구대로라면 그분의 소지품도 포함되지 않겠소? 그렇게는 힘들겠는데.=

=흐음~?=

도적 우두머리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보았지만 환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검회색 후드를 푹 눌러쓴데다 팔짱을 끼고 다리도 꼰 채 앉아있는 환인의 모습에 이채를 띈 도적 우두머리는 씩 입매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거기 귀하신 손님. 잠시 후드 좀 벗어보지?=

“그 대가는 싸지 않은 데. 지불할 용의가 있나.”

나지막한 환인의 목소리에 도적 우두머리, 이실리테는 한기를 느끼고 얼굴을 굳혔다.

여태껏 손에 적지 않은 피를 묻힌 이실리테다. 그 경험에 미루어보아 목소리가 저렇게나 무감정한 부류는 둘 중 하나였다.

덜 완성된 피에 미친 살인귀거나…….

‘완성된 피에 미친 영웅이거나.’

침을 표시 나지 않게 삼킨 이실리테가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흐응. 그 귀하신 분이 이런 볼품없는 도적년에게 받고 싶은 게 있으시단 말이야? 혹시 속살 맛이라도 보고 싶으신가?=

아랫배를 툭툭 치며 킥킥 웃으니 도적 떼들 사이에서도 작은 웃음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어쩌지. 이런 도적년이라 해도 정절은 있어서 곤란한데.=

“원한을 받는 여자를 품는 취미는 없으니 사양하지.”

=……?=

뜬금없는 이야기에 이실리테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 스사가 놀란 얼굴로 환인을 보며 물었다.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예. 머지않아 죽겠군요. 저 여자도, 저 여자를 따르는 자들도.”

환인의 대답을 들은 스사가 ‘히야아~’ 하는 표정으로 이실리테를 보다가 큭큭 웃기 시작한다.

가뜩이나 환인의 존재가 신경을 긁고 있는데 행상인 놈마저 저러니 심기가 팍 상한 이실리테는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면서 대검으로 땅을 내려쳤다.

쿵­!

=무슨 개수작이야! 짐을 토해내기 싫다면 이 자리에서 모두……!=

이실리테의 고성에 도적들이 무기를 치켜세우려 하니 스사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린다.

=워워, 진정하시오. 진정. 싸우고자 하면 이쪽도 얼마든지 싸우겠지만, 보아하니 그쪽도 성술사가 없는듯한데 사상자가 발생하면 피차 곤란하지 않겠소? 이야기만 잘 되면 얼마든지 짐을 내려놓을 테니 진정들 하시오.=

저 얄미운 면상을 당장이라도 후려치고 싶은 이실리테였지만, 이제 막 이 지역을 장악하려 하는데 결손 인원이 발생하면 곤란한 것도 사실이라 꾹 눌러 참았다.

‘망할.’

상인놈과 신경전을 벌이면서 여러모로 머리를 굴려봤지만, 저 상인놈의 호위가 제대로다.

자신과 비슷한 아우라량을 보이는 저 쿠에 기병 년은 물론이고 무직자인 쿠에 기병 놈도 간단해 보이지 않고 짐칸의 네 놈도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석궁을 겨누고 있어 매우 성가시다.

정면에서 붙으면 틀림없이 뒈지는 놈이 나온다.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봐?’

잠깐 고민한 이실리테였지만, 이어진 이야기에 그냥 돌격시켜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나저나 당신들은 정말 괜찮겠소? 혼재의 저주를 받는 여자를 두목으로 삼고 있는 거 말이요.=

=무— 슨 개소리야!!=

=어허, 개소리라니 그 무슨 망발을! 영혼사님께 함부로 지껄이다간 영혼에게 저주받는 것도 모르시오?!=

스사의 호통에 도적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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