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063 마을 레힐로 가는 길
* * *
율캄을 나와 길을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는 짐마차 속에서 환인은 자신의 이동 소요 시간 예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했다.
밀짚 쿠에 두 마리가 이끄는 짐마차는 시속 60km에 가까운 속도로 단단하게 다져진 초원길을 쭉쭉 나아갔던 것이다.
이 속도로 20일 일정이라면 자신은 석 달 넘게 움직여야 했으리라.
‘초행길이고 주위는 지평선밖에 보이지 않으니 그보다 더 걸렸겠지.’
짐마차가 이동하는 동안 지도와 주변을 꾸준히 비교했지만, 눈에 보이는 거라곤 지평선과 녹색 초원뿐이었다.
지표가 되어줄 것도 없으니 자신 혼자 움직였다면 백 퍼센트 길을 잃었겠지.
하늘에서 비상식량이 길잡이를 해줄 테니 끝도 없이 헤매지는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영혼사님. 여기 아침입니다.=
“고맙습니다.”
인견족 짐꾼이 건네주는 대나무이파리 비슷한 걸로 포장된 도시락을 받은 환인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것을 느끼며 이파리를 펼쳤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삼각 주먹밥이다. 율캄의 여관에서 미리 준비한 아침이라고.
평범한 주먹밥이었지만 소금간도 잘 되어있었고 밥알 속에 절인 고기가 섞여 있어 상당히 맛있었다.
환인은 아침을 먹으며 분위기로 이 행상의 서열을 파악했다.
방식은 간단하다. 도시락을 나누어준 순서, 행상 일행의 대화와 태도에서 드러나는 느낌을 읽는 것.
서열 1위는 당연히 스사다. 행상의 주인이니만큼 당연한 일이다.
서열 2위는 세 명의 호위 중 한 명인 브릴릿.
스사와 육체적으로도 깊은 관계로 보이는 표범 귀와 꼬리의 여자는 두 마리의 쿠에 중 하나에 타고 있었다.
과묵하고 말수가 적지만 눈치도 빠르고 희미한 아우라까지 있다. 스사가 굉장히 신뢰하는 것처럼 보였다.
호위2는 다른 쿠에를 타고 있는 인랑족 남자 딘테. 호위3은 짐마차에 타고 있는 같은 인랑족 남자인 휴슥.
‘특징도 별로 없고 인상도 흐릿하지만, 실력은 확실하니까 호위로 쓰는 거겠지.’
호위 2와 호위 3은 스스럼없이 웃고 툭툭 건드리며 장난 칠 정도로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 이하는 서열에 의미가 없었다.
짐꾼 세 명은 인견족 남자 둘과 여자 하나였는데 사회적 지위가 낮은지 스사는 물론이고 호위들한테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런 스사가 공손히 대하는 환인에 대해서는 거의 언터처블이었고.
아침 식사를 마친 뒤에는 한가로운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스사는 짐마차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고 짐꾼 세 명과 호위3은 짐마차 뒤쪽에서 계속 주변을 경계한다.
따로 쿠에를 타고 있는 브릴릿과 호위2는 짐마차의 좌우에서 보폭을 맞추는 중.
짐마차는…… 거짓말로도 편하다고 할 수 없는 승차감이었다.
서스펜션이 전혀 없는 데다 바퀴도 통짜 나무 바퀴다 보니 시속 60km로 달리는데 약간의 굴곡에도 마차가 튀어 오르기 일쑤였던 것이다.
오죽하면 비상식량이 쿠엣, 퀫, 꾸! 거리다가 하늘로 도망갔을까.
어젯밤 이후로 먹은 게 없다 보니 몸이 가벼워져 날 수 있게 된 비상식량을 바라보던 환인은 쿵, 마차가 다시 크게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괜히 짐을 꽁꽁 묶어놓은 게 아니었군.’
환인이 형편없는 충격흡수량에 질려서 자꾸 마차를 살펴봐서일까, 그 시선을 오해한 스사가 하하하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 마십쇼. 마차 축과 바퀴는 축성을 받아 이런 충격에는 절대로 안 부서지거든요.=
“그건 다행, 이군요.”
말하는 도중 크게 뛰는 짐마차로 인해 혀를 씹을 뻔한 환인은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결심은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원래 이렇게 요동이 심합니까?”
=어유, 안 그래요. 호족이나 성족님들이 타는 마차는 완전 부드럽죠. 우리 같은 서민들이 타는 마차는 죄다 이렇지만요.=
‘호족 전용 마차는 특수 공법이 적용된 건가, 아니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보강한 마차?’
어느 쪽이든 대량양산은 하지 못한 게 틀림없을 것이다. 비용면에서든 효율 면에서든.
‘서스펜션……이라 하기에는 너무 보잘것없고, 기회가 되면 충격 흡수 판스프링을 제작해볼까.’
복잡한 구조의 서스펜션은 구현할 재주도, 지식도 없다. 그러나 판스프링 서스펜션의 구조 원리는 간단해서 대강 기억하고 있었다.
몇 차례 시행착오를 거친다면 이것보다는 100배 나은 마차를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주머니 속에서 진주색 돌멩이와 핏빛 돌멩이를 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따스함과 서늘함을 받아들이던 환인은 유입되는 양에 살짝 혀를 찼다.
삼림형 미궁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따스함과 서늘함의 흡수량이 점차 줄어들더니 지금은 미궁에서보다 1/10 정도밖에 흡수가 안 된다.
이 정도면 자연 흡수량은 기대할 수 없는 수준.
‘하지만 밖에는 여자가 있으니…….’
환인은 온기 흡수를 목적으로 여자와 동침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여자 쪽에도 이득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근골과 외모가 바뀐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효과였지.’
그 점을 확인한 것은 마을로 돌아오고 사흘이 지났을 때였다.
평소처럼 마을을 산책하던 중 빨래터에 모인 마을 여자들의 대화를 엿들은 게 원인이었는데 류히, 에프니스, 후이니, 엔넬이 사라지기 전보다 키도 좀 더 커지고 얼굴도, 피부도 예뻐졌다는 내용이었다.
— 정말이야?
— 진짜라니까! 에프니스는 정수리가 내 눈높이였는데 오늘 보니까 나랑 눈높이가 똑같았다구!
— 류히랑 멱을 감을 때도 봤는데 피부가 엄청 깨끗해졌어. 윗가슴골에 잔뜩 나 있던 기미가 다 없어졌더라.
— 아! 그건 나도 봤어.
— ……얼굴도 예뻐진 거 같던데 내 착각이 아니지?
— 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 나두.
— 이유가 뭘까?
이유는 당사자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 은인님과 동침하면 얼굴과 몸이 예뻐지는 거예요.
— 은인님하고 자서 그래!
— 은인님의 은혜죠.
‘내게 온기를 흡수당할수록 예뻐진다니.’
덕분에 환인은 온기, 즉 훈기나 한기, 따스함이나 서늘한 기운의 정체를 대강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다.
‘온기가 많을수록 조금씩 남성적으로 변하는 거겠지.’
아무 이유 없이 남자의 온기가 여자보다 더 많은 게 아니었다.
그때 하늘에서 비상식량의 경보가 터져 나왔다.
쿠엣~! 쿠쿠쿠쿠! 쿠에엑!
요란한 비상식량의 울음소리에 사람들이 응? 하는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마차를 끌던 밀짚 쿠에들이 천천히 속도를 늦춘다.
=이 녀석들이 갑자기 왜 이러지? 로티, 루티! 달려!=
휙 철썩.
가죽 수레 끈이 허공을 때리는 소리가 났지만 쿠에 두 마리는 완전히 멈춰서서 뒤를 돌아 보며 쿠에쿠에 거렸다.
=으응??=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 스사가 혼란스러워할 때 환인이 지팡이를 쥐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비상식량이 경고해서 그럴 겁니다.”
=예?=
“적이 다가오고 있다는군요.”
=……이런.=
환인의 이야기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스사는 곧바로 다부진 표정으로 호위들과 짐꾼들에게 전투 준비를 명령했고 짐칸의 짐꾼들은 그 즉시 발치의 활과 석궁을 꺼내 들었다.
스사도 활을 꺼내 화살을 활시위에 매겼고 휴슥도 검과 방패를 착용하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왔던 브릴릿과 딘테도 표정이 바뀌며 안장에 걸어놓은 기다란 창을 꺼내쥔다.
쿠우~! 쿠우웃!
=보입니다! 남동쪽에서 접근 중인 그레니어! 수는 여섯!!=
짐칸의 프레임 위로 올라가 주변을 살피던 짐꾼3과 비상식량이 동시에 외쳤다. 스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다른 쪽은?=
=현재는 없습니다!=
=다스콘은 계속 경계하고 나머지는 남동쪽의 그레니어를 견제한다!=
예!!
전투를 앞둔 긴장감이 일행에게서 스멀스멀 번져 나온다. 그 분위기에 환인도 살짝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입꼬리를 들었다.
두 달간 매일매일 몇 번이나 싸우다가 최근 보름은 한 번도 싸우질 못했다.
지금이라면 잡견 무리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스사에게 물었다.
“그레니어는 어떤 괴물입니까?”
=개와 멧돼지를 섞은 것처럼 생겼습니다. 크기는 쿠에보다 작지만, 극히 호전적이고 흉포한데다 늘 무리로 다니기에 굉장히 위험한 마수로 손꼽힙니다.=
‘마수?’
괴물이나 짐승, 동물이 아니라 마수??라고 표현한 데에서 환인은 기대감이 좀 더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즈음 남쪽의 얕은 구릉에서 작은 먼지구름과 함께 오토바이 사이즈만한 짐승 떼가 출현했다.
생김새는 스사의 요약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지만, 환인의 머릿속에는 그보다 정확하고 짧은 단어가 존재했다.
개돼지.
전신이 멧돼지처럼 적동색의 짧은 털로 덥수룩한데 어떻게 보면 개 같고 어떻게 보면 멧돼지 같다.
작은 구릉지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레니어 떼는 이쪽을 염탐하듯 잠시 대기하다가 식욕을 억누르지 못한 돼지처럼 꾸웨에엑 울부짖으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먼저 간다!=
브릴릿은 고성과 함께 랜스 차징을 하는 기사처럼 그레니어 떼를 향해 돌진하고 딘테는 그보다 훨씬 늦게 출발한다.
뒤에서 구경만 할 생각이 없던 환인도 지팡이를 내려놓고 짐칸의 짐꾼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 창을 주시겠습니까.”
=예?! 위, 위험합니다!=
“괜찮습니다. 주십시오.”
환인이 재차 요구하자 짐꾼은 난감한 표정으로 스사와 환인을 번갈아 쳐다본다.
=창을 내어드리게. 영혼사님, 조심하십시오. 그레니어는 멧돼지만큼 저돌적이고 개만큼 영리합니다.=
“충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창을 받아든 환인은 곧바로 창날 덮개를 벗기고 최하급 강령을 펼치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저 앞에서는 브릴릿이 이미 그레니어 떼와 한차례 격돌했다. 브릴릿은 기마를 탄 기사처럼 용맹하게 창을 휘두르며 세 마리를 붙잡았고, 남은 세 마리는 브릴릿의 좌우로 피해 이쪽을 향해 돌진해온다.
우아아아악!
딘테도 호기롭게 포효를 지르며 3마리를 향해 돌진했지만, 세 마리 중 한 마리만 딘테에게 달려들었고 나머지 둘은 딘테의 좌우로 갈라져 지나치더니 짐마차를 향해 더욱 속도를 올린다.
=아차……!=
못해도 두 마리는 붙들어 맬 생각이었는지 딘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덩달아 손놀림도 어지러워지며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게 고작.
남은 그레니어 2마리는 앞을 가로막는 것도 없겠다, 짐마차를 향해 침을 질질 흘리며 거침없이 질주했다.
먹이! 먹을 거!
냄새만 맡아도 황홀할 정도로 맛있는 냄새 때문에 그레니어 두 마리는 눈이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그러던 중 그레니어 두 마리는 먹이 하나가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직후 서로 거리를 좁히며 겁도 없이 혼자 나서는 먹이를 향해 한층 속도를 높였다.
눈앞의 먹이부터 박살 낸 뒤에 더 큰 먹이를 먹자!
=영혼사님! 앞으로 나가시면 위험합니다!!=
“괜찮습니다.”
=……!=
환인은 자신을 노리고 돌진해오는 그레니어를 주시하며 시야 한구석, 브릴릿과 딘테가 그레니어와 싸우는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브릴릿의 창이 그레니어의 거죽 끝을 스치고 지나가자 가죽이 베어지며 피가 스며 나온다.
반면 딘테의 창은 그레니어의 가죽 끝만 긁는다.
‘머리의 공격반경은 들개 떼와 비슷한가. 좌우 방향 전환은 좀 느린 편이고……. 공격방식은 물어뜯기 뿐이군.’
공격 패턴은 간단하다. 쌍둥이 산 근방 분지의 들개 떼와 다를 게 없다.
이정도가 마수인가 의아함을 품으며 10m까지 접근한 그레니어 두 마리 중 한 마리, 당장이라도 물어뜯으려고 주둥이를 쩍 벌린 놈의 입안에 영혼 구슬 세 개를 쑤셔 넣고 3중첩 영혼 폭발을 일으켰다.
쿠쾅!!
“……?”
예상보다 2배 이상 강한 폭발과 함께 끼갱! 비명을 지르며 한 마리가 나가떨어지는 모습에 환인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위력이 왜 이렇게 강해졌지?
생각과 다르게 몸은 이미 움직이며 갑작스러운 폭발에 놀라 고개를 돌린 다른 한 마리를 걸음을 옮긴다.
그레니어도 정신 차리고 코앞까지 당도한 환인을 향해 사납게 달려들었다.
키아앙!!
주둥이가 쩍 벌어지며 잡식성 동물 특유의 치열이 드러난다. 그리고 환인의 묵빛 창은 그런 그레니어의 입꼬리를 크게 베고 지나갔다.
가볍게 스쳐 지나가며 창을 그었을 뿐인데 입꼬리가 쩌억 찢어지며 턱관절까지 드러난다.
크에엑!!
살점이 덜렁거릴 정도로 깊게 베인 상처에 그레니어가 사납게 고개를 털며 물러나려 했지만, 환인은 가볍게 그 거리를 좁히고 들었다.
그리고 예전보다 더 가벼워진 묵빛 창을 휘둘러 앞다리 근육을 크게 베어낸 뒤 작게 실소를 흘렸다.
‘벨비도 씨가 대체 창에 무슨 짓을 한 거지?’
날카로워도 너무 날카롭다. 별로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묵빛 창날이 가죽이나 살에 닿으면 쩍쩍 벌어진다.
그때 피피핑 작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들었다. 환인이 영혼 폭발로 거꾸러트린 그레니어를 향해서다.
화살 공격에 움찔했던 그레니어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게 아님을 눈치채고 뒷다리로 펄쩍 뛰어올라 환인을 덮친다.
한쪽 앞발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투지를 잃지 않은 공격.
위에서 아래로 덮치는 정직한 공격을 횡이동으로 가볍게 피한 환인은 시야 한구석, 그레니어의 연약한 뱃가죽을 보았고 스치듯이 가볍게 찌른 뒤 훌쩍 뛰어 물러났다.
쿵! 푸드더덕
착지의 충격에 얕게 베였던 뱃가죽이 찢어지며 온갖 내장이 허연 김과 함께 쏟아졌다.
키에엥! 케에에엑!
내장을 쏟아낸 그레니어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다.
‘이놈은 끝.’
눈에서 투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환인은 그 옆을 지나쳐 3중 영혼 폭발에 얼굴이 갈기갈기 찢어진 그레니어에게 다가갔다.
크힉! 크흐헤엑!
온몸에 화살이 얕게 박힌 그레니어가 쇳소리를 내며 신음한다.
입 안에서 강한 폭발이 일어난 탓에 혀는 끊어져 어디론가 사라졌고 목구멍도 크게 상한 듯 소리가 샌다.
눈알 두 개는 눈구멍에서 빠져나와 대롱대롱 매달려있고 주둥이 끝은 살점과 가죽이 다 날아가 뼈가 그대로 노출된 상태.
안면에서 피를 쏟으며 이쪽의 접근을 깨닫지도 못하는 모습에 환인은 그레니어의 갈비뼈 사이 틈을 푹푹푹 연거푸 찔렀다.
묵빛 창에 찔릴 때마다 움찔거리던 그레니어는 5번째 창질에 힘없이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었다.
“흐음.”
새로운 무기의 절삭력이 워낙 뛰어나 손쉽게 해치웠지만, 환인은 그레니어가 흡혈마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마수라고 하길래 칼날 멧돼지나 대검 호브 정도일까 했는데 기대보다 약해서 아쉬움의 한숨이 나왔다.
그레니어의 영혼을 회수하고 앞을 보았다.
브릴릿은 쿠에를 능숙하게 조종하며 그레니어 한 마리를 이미 침묵시켰고 두 마리를 상대로 한치의 밀림도 없는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1:3이라는 수적 열세 탓에 금방 결착을 내지 못했을 뿐이지 쿠에를 자기 몸처럼 움직이며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문제는 호위2인 딘테.
=이자식!=
키에에엑!!
딘테는 한 마리를 상대로도 쩔쩔매는 중이었다.
‘처음 기세를 빼앗겼던 게 치명적인 실수였겠지.’
거기다 기승 중인 쿠에가 주인의 동요를 느꼈는지 겁을 집어먹은 모양새다. 차라리 쿠에에서 내리는 게 활동성이 보장될 텐데.
눈에 뻔히 보이는 그레니어의 공격도 제대로 피하지 못하는 딘테의 모습에 환인이 짧게 말했다.
“가세하겠습니다.”
=영혼사님?!=
환인은 가볍게 돌도끼를 투척, 그레니어의 한쪽 눈을 날려버렸다.
왼쪽 눈알에 돌도끼가 박힌 그레니어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다가 자신의 눈을 앗아간 환인을 향해 격렬한 분노를 드러냈다.
=위험합……!=
키에아아악!!
‘점프 공격은 개과 짐승의 본능에 각인된 방식인가.’
옆으로 성큼 피하며 눈에 보이는 그레니어의 앞다리 관절을 한 번씩 긁어주고 빠진 환인은 창날을 확인하며 아직 체공 중인 그레니어의 뒤를 따른다.
쿵! 뿌직
잠시 후 육중한 소리와 함께 착지한 그레니어의 앞다리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다리 관절이 뿌직, 소리를 내며 부러져나갔다.
끄에에엥!!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던 그레니어는 환인이 다가서는 모습에 뒷다리를 마구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물러나려 애를 썼다.
딱딱 소리가 날 정도로 입질을 하기도 하지만 환인은 가벼운 찌르기로 그레니어의 남은 눈을 찢어버리고 더더욱 발광하는 그레니어의 왼쪽 눈에 박힌 돌도끼를 회수.
“…….”
돌도끼에 걸린 눈알을 털어내고 틈을 봐서 그레니어의 경추를 돌도끼로 힘껏 내려찍었다.
콱!
‘역시. 묵빛 창이 비정상적으로 날카로운 거였어.’
찍었다기보단 뭉갰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있는 힘껏 찍었지만, 가죽만 겨우 찢은 것을 보며 컥, 컥컥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르는 그레니어의 경추를 수 차례 더 가격한다.
그 결과 우직, 뼈가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전신마비에 빠진 그레니어가 바르르 떨었다.
=…….=
딘테는 혼란에 빠졌다. 저분은 영혼사 아니었어? 그런데 저 실력은 뭐지? 저거 혹시 그레니어가 아니라 그냥 집돼지였나?
환인은 쿠에 위에서 자신을 멍하니 내려다보는 딘테에게 말을 걸었다.
“딘테 씨.”
=…….=
“딘테 씨.”
=……예, 옛?!=
“도와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아직 두 마리와 싸우고 있는 브릴릿을 가리키자 딘테는 찬물을 끼얹은 모습을 보였다가 황급히 브릴릿에게 가세하러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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