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2화 (62/813)

〈 62화 〉 061 촌락 ­ 율캄

* * *

환인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지구의 치타가 스사와 같은 성격이라면 폭풍 번식을 했을 거라고.

지구의 치타는 극도로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하며 겁쟁이라고 알려져 있다.

오죽하면 짝짓기조차 못 해서 1급 멸종 위기종 리스트에 올라가 있을까.

하지만 스사는 치타의 머리를 하고 있음에도 사회성이 매우 뛰어났다. 리트리버종과 함께 자란 치타처럼 말이다.

‘루킬­호우란 사건도 그렇고 외형은 지구의 동물과 매우 흡사하지만, 전혀 다른 종이라고 봐야겠지.’

양념을 발라 먹음직스럽게 구운 고기파이. 후추를 가득 뿌려 노릇노릇하게 구운 생선구이. 녹색과 빨간색과 하얀색이 선명해서 입맛을 돋우는 야채 샐러드에 고기와 갖은 채소가 둥둥 떠다니는 스튜. 카다몬과 잣을 넣어 구운 빵에다 설탕이 가득 묻어있는 말린 과일. 마지막으로 기포가 부글부글 끓는 샛노란 알콜 음료까지.

상이 부러지도록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환인은 회사 생활을 통해 익힌 화술로 자신이 원하는 주제로 대화를 이끌었다.

그리고 원하는 이야기, 스사가 여러 도시와 마을과 촌락을 돌아다니며 상행을 했다는 경험담이 나왔을 때 마침 잘됐다는 기색을 일부러 드러내며 물었다.

“그러면 많은 화폐도 접하셨겠군요.”

=물론입니다. 현재는 화폐의 가치가 통일되었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다들 쓰던 화폐가 달랐습니다.=

현재는 4대 종족 국가 모두 철­동­은­금­홍 화폐를 통합 화폐로 쓰고 있지만, 그때는 루크랑 종족 국가 라드세아에서 쓰이는 화폐만 수십 종이었다고.

=행상하며 과거 고대 제국 시절의 카라잘 주화에 저 먼 종족연합 주도시의 금속패, 우리 루크랑 주도시가 경화 이전에 쓰던 동패, 도전, 포화도 보았고 도량형이 도입된 사비 족의 청동 화폐도 보았습니다. 가짓수로 보자면 족히 100여 개가 넘지요.=

그러면서 많은 화폐를 볼수록 뛰어난 상인이라는 철칙에 따라 20년간 상로를 뚫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 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속과 마음이 편한 행상길이었다며 웃는 스사였다.

=뭐어 덕분에 이 친구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으니 불만은 전혀 없습니다. 이걸로 남부럽지 않은 재산도 모았고요.=

스사가 그리 말할 정도로 호위 세 명 중 한 명은 투명한 아우라를 흘리고 있었고 나머지 두 명도 상당히 날카로운 기운을 품은 실력자로 보였다.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값비싼 가치는 인맥과 좋은 인연이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오. 그거 마음에 확 와닿는 이야기군요. 확실히 100금화보다 마음 통하는 훌륭한 친구가 더 소중하더군요. 그녀가 아니었다면 저는 몇 번이나 죽었을 테니까요.=

그러면서 아우라를 흘리는 치타 귀에 치타 꼬리 여전사의 어깨를 두드린다.

하나의 주제가 끝나는 분위기에 음식도 다들 배부르게 먹은 상황. 환인은 지금이라고 생각하며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 스사 씨라면 이걸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음?=

스사는 환인이 보여준 금화에 눈을 살짝 크게 뜨고는 놀란 투로 말했다.

=종족연합 주도시의 전용 금속 패군요. 잠시 보여주시겠습니까?=

“예.”

금화를 넘겨받은 스사는 킁킁, 냄새를 맡았다가 웁, 토할 것처럼 목울대를 꿀렁였다.

=어, 엄청난 냄새군요. 다수의 괴물과 짐승의 피 냄새가 섞인 거 같습니다……?=

“미궁에서 덤벼오는 것들을 잡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주머니에 넣어두고 싸웠다지만 옷에 쏟은 피가 적지 않은 편이다. 애초에 싸우면서 피가 안 묻을 수도 없는 일이고.

대답을 들은 스사는 물론이고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호위들의 시선도 저절로 서쪽을 향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나온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어흠. 잠시만…….=

실태를 깨닫고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 스사는 금화를 탁자에 조심스레 올려놓고 허리춤의 작은 가방에서 천평칭???과 주사위 크기 정도의 청색 큐브 열 몇 개를 꺼내놓았다.

“……?”

주먹 두 개를 이어붙인 듯한 작은 가방에서 그보다 몇 배나 더 큰 천칭이 나오다니?

환인은 한순간 자신이 헛것을 보았나 했다.

의문은 접어두고 진지한 얼굴로 천칭의 한쪽에는 금화를 올리고 반대쪽 천칭에 주사위 크기의 청색 큐브를 하나씩 올리는 스사의 행동을 지켜본다.

‘밀도가 턱없이 낮은 물질인가.’

3개의 청색 큐브가 올라갔는데도 500원짜리 크기 금화 쪽이 훨씬 무겁다고 표시되는 것을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릴 때였다.

5개의 온전한 큐브와 그보다 1/3 크기의 큐브 2개가 올라가고 나서야 좌우 균형이 맞아떨어졌다.

=5와 2/3이라니, 상당한 위상결정순도군요. 연합주도화폐청에서 제작한 금속 패가 아닌 것 같습니다.=

청색 큐브는 이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특수물질인가. 그게 위상결정이라는 것일 테고 금화에 그 성분이 함유되어있다는 뜻이면…….

‘복제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겠군. 그 외에 다른 요소가 더 있는 것 같은데.’

환인은 제반 사항을 대강 이해하고 스사에게 다시 질문했다.

“그렇다면 어디서 제작했을까요.”

=기준에서 2/3이나 더할 정도면 연합주도의 상위 계층에서만 유통되는 특상급 금속패라고 봐야 할 겁니다. 아시겠지만 비준 금화의 위상결정순도는 무조건 5등위로 맞추니까요. 제작은 어렵지 않은 편이라 주도의 고등기술부서나 그와 비등한 단체라면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만한 단체나 부서가 한둘이 아니라 딱 짚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일단은 종족연합 주도시……에서 만들어진 것은 확실하겠습니다.”

=그렇죠. 제작하기 쉽다지만 비준 금화도 있고 타종족 주도의 금화를 일부러 순도 높여 제작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

종족연합 주도시라는 곳이 어디 있는지, 그곳은 어떤 곳인지, 여기서 가는 방법도 궁금하지만, 환인은 궁금증을 억눌렀다.

“처음 보는 금화여서 그 소재가 궁금했는데 덕분에 궁금증이 해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유~ 별말씀을요. 이 정도면 어지간한 상인들은 다 알고 있는 건데요 뭐. 그나저나 미궁에서 습득하신 겁니까?=

“예. 우연히.”

=운이 좋으셨군요! 5와 2/3의 위상결정순도라면 가치가 1.7금화에 육박할 텐데!=

너스레를 떨며 환인에게 금화를 돌려준 스사는 씩 웃으며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제게 보여주신 게 잘한 겁니다. 다른 곳에서는 어지간하면 내보이지 않으시는 게 좋아요. 영혼사님께서는 잘 모르시는 듯 한데 통상적인 가치보다 특수 거래용이라는 희소성 때문에 노림 받을 수 있거든요.=

“새겨듣겠습니다.”

일부러 쓴웃음을 보여주며 금화를 챙긴 환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이 이상한 세계로 끌어들인 집단이다. 범상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지만 설마 사회 상위 계층이었다니…….

현대인이라면 대다수가 가지고 있을 사회 지도층, 고위층에 대한 불신이 이쪽 세계에도 똑같이 적용되며 경계심이 한층 높아지는 환인이었다.

그보다 금화에 특이한 힘 같은 건 없는 건가? 아니면 스사는 그걸 못 느끼는 부류?

‘정보와 상식이 더 필요해.’

그동안 촌장에게서 조금씩 배웠다지만, 환인의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식사를 마친 뒤 스사 일행과 헤어진 환인은 비상식량과 함께 수평선밖에 보이지 않는 언덕으로 이동했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에 조용한 곳으로 자릴 옮긴 거다.

쿠엣. 쿠에­

환인은 주변을 거위처럼 뒤뚱뒤뚱 걷는 비상식량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비상식량, 날아.”

쿠에? 꾸우!

퍼드덕. 푸드드드득.

“……이러다 돼지가 되겠군. 먹이를 줄여야 하나.”

날개를 퍼덕이기만 할 뿐 날아오를 기미가 없는 비상식량의 모습에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비상식량이 깜짝 놀라며 퍼더덕, 퍼더더덕 홰를 치면서 달리기 시작한다.

열심히 날갯짓을 하니 조금 뜨긴 하는데…… 저건 비행이 아니라 활강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쿠엑! 쿠에엣!

“…….”

활강하며 언덕을 내려갔던 비상식량이 돌아와서는 어떠냐는 듯이 흥흥거리는 모습에 환인은 살짝 기가 막혔다.

아무거나 다 잘 먹는 잡식성이고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은 것을 먹어도 수명이 수십 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스사와 식사하며 비상식량이 달라는 대로 먹을 것을 다 줬는데…….

자신의 말을 용케 다 이해하는 비상식량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환인은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풀밭에 주저앉았다.

똑똑하다 해도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짐승이다. 식욕을 자제하지 못한다면 옆에서 자신이 도와주면 될 일.

펄럭.

산들바람을 맞으며 지도를 펼치고 스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저희는 이틀 뒤 율캄을 떠나 성도로 복귀할 예정입니다. 중간에 세 곳의 촌락과 마을, 소도시를 거치는 코스죠.

— 일정은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20일 내외가 될 겁니다.

? 혹시 근방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로 향하실 생각이시라면 저희와 함께 가시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 될 겁니다.

— 이 지역에서 10년간 행상을 해와서 지리와 괴물 서식지에 빠삭하거든요. 하하.

그러면서 혹시 잡화점에서 지도를 샀냐고 속삭이듯 물어왔는데, 그 지도는 자신이 판 물건이라며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마을이 몇 군데 있다고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

이 세계에서는 마을의 규모를 대강 다섯으로 나눈다는 걸 촌장과 대화에서 이미 습득해놓았다.

한국 행정구역 규모상 면? 정도에 해당하는 촌락. 인구 1000 이하는 모두 촌락으로 부른다. 율캄도 여기에 해당한다.

읍?에 해당하는 마을. 인구수 1000을 넘어서면 그때부터 마을이 된다.

그리고 시市에 해당하는 소도시小?市, 그 위로 중도시中?市와 성도??.

마지막으로 주도??.

소도시의 규모는 천차만별이다 그저 돌벽을 세워 마을을 감싼 뒤 호족이 거주하면 소도시라고 하는 이도 있고 인구 5만에 성과 함께 성벽도 있어야 소도시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중도시는 인구가 최소 20만 이상이어야 하며 지구의 시市와 비슷한 규모다.

성도급은 특별시 정도의 규모이며 주도는 해당 종족의 수도??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해당 종족의 왕이 사는 주도는 세계에 단 네 곳뿐이다. 성도는 그보다 7~9배 정도 많고 중도는 40~70배, 소도시는 최소 2,000개가 넘을 것으로 보인다.

마을이나 읍은 셀 수 없이 많다고 하는 걸 보면 이 세계의 총인구는 적어도 지구의 중세보다 많을 것이다.

목탄으로 대충 그린 듯한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선으로 그린 길과 두 줄 선으로 그린 강. 산도 등고선을 그려놓은 게 아니라 그냥 덩그러니 기호만 그려놓았고 그 사이사이 마을과 촌락, 소도시가 적당히 그려져 있는 볼품없는 지도다.

‘스사 일행과 이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기도 하고 영혼사라서인지 원하는 것도 있는 눈치였다. 물론 자신도 스사에게 얻고자 하는 게 있으니 이해관계가 성립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을 함부로 믿어도 될까 의문이 드는 환인이었다.

원래 세상에서도 타인을 믿지 못해 인간관계로 맺어진 대상의 약점을 수집해놓던 환인이다. 여기라고 남들을 쉽게 믿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해도 장단점이 확실한 선택지다.

스사 일행이 환인의 시선에 도덕적으로 보인다고 하지만, 스사는 자신이 한국 시세로 환산했을 때 몇억이나 되는 금화를 소유 중이라는걸 알고 있다.

돈에 눈이 돌아간 스사 일행이 배신할 일말의 가능성은 있는 셈.

더욱이 여긴 초자연적인 능력이 실재하는 세상이다. 자신도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위험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보편적인 상식 수준을 얻을 때까지는 자신의 출신은 최대한 숨긴다고 결정을 내린 상황이지만 상식이 부족하니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인터넷도, 컴퓨터도 없을 만큼 낙후된 세상이다.

자신이 다른 세계 출신이라는 게 알려지면 인체 실험 정도는 가볍게 벌어지지 않을까.

‘그런 불안을 감수하고 함께 행동한다 치면 보편적인 상식을 더 빠르게 흡수할 수 있다.’

더욱이 호위를 셋이나 데리고 다닐 정도면 촌락이나 마을 사이에 괴물이 서식할 가능성이 크다.

같이 움직인다면 혼자서 미지의 적과 일 대 다수로 싸우는 일도 없을 테고 더욱이 적을 만나면 대략적인 정보를 얻을 수도 있겠지.

미궁 밖에 서식하는 괴물이나 짐승의 평균적인 강함도 알 수 있을 테고.

“…….”

고민이 깊어진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환인은 몸을 일으키면서 중얼거렸다.

“소도시는 반드시 방문해야 해.”

양쪽 다 목숨의 위협이라는 저울추가 올라간 상황. 그리고 의심받지 않고 종족연합 주도시로 향하려면 상식을 쌓아야 한다.

이 세계의 치안이라던가 인적 등록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너무 큰 도시는 곤란하고 소도시가 가장 적절하다.

환인은 결정을 내렸다.

=저희와 함께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부족하지만 창과 축복을 조금 쓸 수 있으니 마냥 짐은 되지 않을 겁니다.”

=어이쿠, 6급 미궁에서 힘없는 아가씨 네 명을 데리고 탈출하신 분을 아무도 약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안 그래?=

동의를 구하는 스사의 모습에 호위와 짐꾼들이 격하게 공감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스사는 기쁜 듯이 웃으며 환인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공손히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저도 소도시 웨이포드까지 가는 길,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스사 행상인과 함께 움직이기로 한 이유는 간단했다.

목숨 걸고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 사람을 경계하는 쪽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홀로 밀림과 평원, 강과 산을 건너는 쪽이나 스사 일행과 함께 다니는 쪽이나 똑같이 경계해야 한다면 덜 위험한 쪽을 선택하는 게 좋으니까.

어차피 처음 밀림에 떨어졌을 때는 선잠을 자면서 한 달 가까이 버텼었다. 스사 일행과 다니는 것도 그 연장이라고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다.

그날 저녁, 환인은 촌장 가족들과 함께한 식사 시간에 이틀 뒤 율캄을 떠나겠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심정 같아서는 영혼사님께서 1년이고 머무셨으면 좋겠습니다. 허허허.=

“저도 율캄이 제 고향처럼 느껴져 떠나기가 매우 아쉽습니다.”

물론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은 거짓말이다. 환인의 머릿속에 율캄은 총인구 150명 남짓한 작은 촌락이라는 이미지밖에 없다.

글귀를 조금 더 추가하자면 네 명 아가씨가 살고 있고 사람들이 비교적 순박한 촌락 정도.

작별을 아쉬워하는 촌장이 아껴놓았다던 비장의 담금주를 꺼내왔는데, 그 향이 지구의 유명 와인과 향도 맛도 매우 비슷해 환인는 약간이지만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구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어서 넣어둘 수 있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유무도 아니고 술 문화였다.

첫날 환영식 때 마신 술은 나쁘지 않았다. 여관에서 파는 맥주도 한국 맥주보다는 훌륭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지구에서 단골 바도 있을 만큼 술을 즐기는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부족한 게 사실.

물론 율캄은 인구가 200도 안 되는 작은 촌락이니 술 문화가 뛰어나지 않는 것은 이해한다. 큰 도시라면 고급술도 당연히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설마 이만한 고급 와인을 접하다니.

도시에서는 얼마나 훌륭한 술을 접할 수 있을지 기대감이 샘솟는 시간이었다.

밤에는 놀랍게도 촌장 집의 첫째 딸이 처음 찾아왔다.

2주간 이래저래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더니 이틀 뒤에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정을 내린 모양새였다.

“약혼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약혼일 뿐이지 결혼한 것은 아니니까요…….=

“괜찮습니까?”

만약 이걸로 아이가 생기거나 하면 결혼은 불가능해지지 않느냐는 뜻이었는데 촌장의 첫째 딸은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아이가 생긴다면 그대로 키울 것이고, 아니면 결혼을 하겠다는 뜻.

강한 수컷의 씨를 원하는 암컷의 본능이 발휘된 것처럼 보여 짐승 같다고 생각했지만, 환인은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할 이유가 없다.

“…….”

그 뒤 그녀와 살을 섞으며 온기를 흡수할 수 있는 만큼 흡수한 환인은 다섯 번 정도 열락을 느끼다가 실신한 첫째 딸을 보다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환인은 달빛이 들어오는 창가에 서서 바람이 땀을 식히는 것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나와 이 세계의 여자들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날 확률이 있긴 한가.’

생김새는 비슷해도 종이 다른 경우 임신은 불가능하다는 게 보편적인 학설이다.

물론 타이곤이나 라이거처럼 희소한 확률도 있긴 하지만 그쪽은 고양이과라는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자신은 지구의 인간이다. 하지만 여긴 지구가 아니고 여자들도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상식적으로 회임이 불가능한 게 정상인데…….

‘여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니 장담할 수 없군.’

어차피 되든 안 되든 환인은 신경 쓸 생각이 없었다. 그러는 게 하룻밤의 조건이자 암묵적인 계약이기도 했으니까.

열어놓은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것을 느끼던 환인은 촌장의 첫째 딸 옆에 누우며 눈을 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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