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059 촌락 율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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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 촌락 율캄
다른 영혼들처럼 맑은 회색으로 돌아온 호우란의 영혼은 환인에게 깊게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한을 풀어주면 혼재 상태에서 해방되는 건가.’
이걸 보면 영혼이 사고를 못 한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사고를 할 수 있다면 대화도 나눌 수 있는 게 당연한 일.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이유는 내 능력이 부족해서겠지.’
호우란의 영혼은 자기 가족을 애정과 연민이 깃든 눈으로 바라보다 빛무리를 안개처럼 퍼트리며 천천히 사라져갔다.
잠시 후 시선을 돌린 환인은 기도를 올리고 있는 호우란의 가족들을 보며 말했다.
“가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혼사님. 죽은 그이의 한을 풀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혼사님!=
=감사해요!=
“제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눈물을 감추며 감사의 뜻을 표하는 유리사와 아이들에게 적당한 겸양을 하던 환인은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혼재 하나를 해소하는 데 드는 노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이번 사건 같은 경우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해소하기 쉬웠지만, 좀 규모가 큰 마을이라거나 도시 같은 경우라면 온갖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혀 생각만 해도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전혀 상관없는 일에 이만한 시간과 노력을 퍼붓기에는 수지가 안 맞는 거다.
=영혼사님께 사례를 드리고 싶어요. 이걸 받아주세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유리사는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폐와 보석 원석 등으로 답례하긴 했지만, 2주나 되는 시간을 부어가며 해소한 것 치고 썩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적 노동의 대가라고 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영혼사라는 건 숨기고 다닐까. 아니면 혼재를 못 본 척 지나가거나 아예 혼재를 강제로 성불시키는 방법을 찾던가…….’
환인이 율캄에서 2주간 지내며 얻은 소득 중 가장 큰 것을 고르라면 영혼 구슬의 보유 개수 증가였다.
영혼 구슬의 보유 개수가 16개에서 24개로 8개나 증가한 것이다.
갑자기 이렇게 보유 개수가 늘어난 이유에는 여자들의 아랫배에 맺힌 온기와 관련이 있었다.
온기는 단순히 소모한 훈기를 보충해줄 뿐만 아니라 영혼 구슬의 보유 개수와도 관계가 있었다.
그걸 알게 된 것은 마을에 도착하고 이틀 뒤였다. 루킬의 형벌이 한창 집행되는 중에 후이니와 엔넬 자매를 함께 안았었는데 그때 영혼 구슬 보유 개수가 늘었음을 알게 된 거다.
‘그녀들을 안기 시작한 이후로 이상하게 영혼 구슬의 증가 속도가 빠르다 했더니 이런 비밀이 있었나.’
초능력을 쓰면 초능력이 성장한다.
여자의 자궁에 맺힌 온기를 흡수해도 초능력이 성장한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 밤 마을의 여자들이 환인에게 안기고 싶어서 다가오던 시기였다.
환인은 다음날부터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는 여자들을 제외하고 매일 밤 두세 명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12일 동안 30명이 넘는 여자들에게 온기를 흡수한 결과 영혼 구슬의 보유개수를 24개까지 늘릴 수 있었다.
여기서 환인은 자신의 초능력이 한 단계 더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성장과 함께 얻은 능력은 애매모호했다.
영혼에게 좀 더 다양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능력.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영혼과 약간이지만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영혼이 하는 말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적어도 환인이 하는 말은 영혼들이 다 알아듣게 된 것이다.
아무튼, 큰 관점에서 보자면 여자들을 손쉽게 품을 수 있던 것도 영혼사 활동을 통해 얻은 소득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환인은 이것을 혼재의 성불과 정화 활동하고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어차피 능력 있는 외부인이 마을을 찾아오면 마을의 여자들이 하룻밤을 위해 접근한다.
자신이 영혼사가 아니었더라도 전투 능력을 인정받았으니 여자들이 다가왔을 거란 뜻이다.
실제로 영혼사로서 능력이 알려지기 전, 환영 인사가 벌어졌던 그 날 밤에도 여자가 몇 명 찾아왔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환인은 새로 얻은 능력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영혼과 의사소통을 주고받았다.
언어로서 복잡한 대화를 나누는 게 이쪽이 말을 하면 저쪽은 손짓과 발짓으로 뜻을 전했지만, 그 정도로도 영혼들이 바라는 것은 대부분 이루어줄 수 있었다.
영혼은 바라는 것을 이루고 성불했으며 마을 사람들은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
환인은 마을 사람들의 더 큰 존경을 받게 되었고, 사람의 영혼은 해당 영혼의 동의가 있어야 영혼을 구슬화 할 수 있다는 지식을 얻었다.
별 메리트가 없는 정보였고 보상이었다.
사람의 영혼 구슬이라 해서 기술의 위력이 크게 오른다거나 효과가 증가하는 일은 없었고 마을 사람들의 존경은 이제 더 얻어봤자 쓸모라곤 없었으니까.
“흠…….”
환인은 침대에 누운 채 왼팔에 맺힌 24개의 영혼 구슬을 보다가 창밖의 푸른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마을을 떠날 때가 됐군.’
2주간 정말 열심히 여자들을 안고 온기를 흡수했다.
환인의 머릿속에 그날의 일들이 흘러간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삼림형 미궁에서 류히와 에프니스, 후이니와 엔넬을 안으며 환인은 이 세상의 여자들이 설마 다 미녀인 건 아닐까 추측했었는데 그 추측은 사실이었다.
나이 지긋한 노파는 곱게 늙었다고 할 정도였으며 중년 여성도 재벌가 사모님들처럼 매력이 넘쳐흘렀다.
젊은 여자들은 아이돌이나 배우를 해도 될 만큼 미색이 출중했고 어린아이들도 아역배우만큼이나 깜찍했다.
사람과 똑같은 귀에 더해 머리 위에 짐승의 귀가 2개 더 있었으며 그 짐승에 해당하는 꼬리도 있었지만, 취향의 폭이 넓은 환인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그건 여자들 뿐, 남자는 전부 스킨 워커skin walker였다.
머리는 짐승이지만 몸은 사람인, 피부 대신 가죽이 있는 스킨 워커.
처음 율캄에 도착했을 때 환인은 많이 놀랐었다. 남자와 여자가 저렇게 종으로서 완전히 달라 보이는데 후손을 볼 수 있는 건가, 하고 말이다.
“…….”
그리고 남자도 여자들처럼 심장과 아랫배 쪽에 온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환인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능력을 키우는데 남자가 필요하다면 깔끔하게 능력을 포기할 사람이 환인이었으니까.
“그럴 바에 죽고 말지.”
담담하게 중얼거린 환인은 창밖에서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쿠엣!
“왔나.”
쿠엑. 쿠엣.
변성기가 끝났는지 목소리가 맑아진 비상식량이 폴짝, 침대 위로 뛰어와서 환인의 품에 들어와 아양을 떤다.
비상식량의 선명한 녹색 등깃털을 쓰다듬던 환인은 비상식량을 두 손으로 들어보았다.
‘또 무거워진 거 같은데.’
이 정도면 10kg에 육박할 정도다. 덩치는 거위만 하면서 몸무게는 그 3배라니.
조만간 또 성장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비상식량과 잠시 놀아주던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도끼를 챙겨 들고 방을 나섰다.
아무튼 2주간 여자들을 열심히 안은 덕분에 이제 마을에 온기를 가진 여성은 임자 있는 여자들 뿐이었다.
여자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생각이 없는 환인이었기에 율캄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는 셈.
1층으로 내려가자 거실에서 산더미 같은 산나물과 야채를 다듬던 촌장의 딸들이 발딱 일어나는 것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집을 나섰다.
=앗, 은인님!=
마침 문 앞에 보러 가려 했던 인물이 서 있었다.
인랑족인 후이니가 강아지처럼 히히 웃으며 답삭, 품에 안겨왔다. 그런 늑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어쩐 일입니까.”
=아빠가 창을 완성했다고 은인님을 모셔오랬어요!=
“잘됐군요. 저도 마침 찾아가려 했는데 말입니다.”
팔짱을 껴온 후이니와 낮은 돌담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기분 좋게 다가온다.
마을에서 지낸 2주는 매우 편하고 쾌적했다.
혼재 사건 이후 촌장은 환인을 더욱 극진히 대접했고 촌장의 아내들과 아이들도 환인의 수발을 드는 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환인에게 공경 깃든 시선을 보냄과 동시에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가장 먼저 가져와 바쳤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안주할 생각은 없다.
이 신기한 세상을 좀 더 살펴보고 또 흥분되는 싸움을 할 대상을 찾고 싶다. 가진 초능력도 더 키워보고 싶고 루크랑 말고 존재한다는 다른 4대 종족도 보고 싶다.
“…….”
그리고 나를 이 세계로 끌어들인 금화의 주인도 찾아야지.
깡 캉! 깡 캉!
철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 용광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후끈한 열기로 가득 찬 마을 유일의 대장간에 들어서자 근엄한 회색 늑대 머리의 사내가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영혼사님.=
“예. 후이니에게 창이 완성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후이니의 부친, 벨비도는 대장간의 안쪽에 마련된 방으로 환인을 안내했다.
10일 전에 방문했을 때 본 풍경과 한치도 다를 바 없는 10평 정도 되는 작업실. 그 가운데 탁자에 창날까지 묵빛으로 빛나는 검은 창 한 자루가 눕혀져 있었다.
자신의 창을 들어 확인해본 환인은 작게 감탄했다.
자신이 대충 날붙이를 묶어 쓰던 때나 후이니가 날붙이를 붙여준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창이다.
검은 창대와 완벽하게 붙어있는 길쭉한 물방울 모양의 묵빛 날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살짝 설렌다.
영혼사로서 환인보다 자식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으로서 더 고마움을 느낀 벨비도는 어떤 방식으로든 환인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대장장이라고 해도 작은 마을에서 농기구나 만들던 사람에게 딱히 뭔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없는 환인이었다.
후이니가 칼날 멧돼지의 어금니를 보여주며 이걸로 아빠가 멋진 창을 만들어줄 거라고 하지 않았다면 평소처럼 사양했을 테지만,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쓰던 창을 맡겼던 건데…….
“훌륭하군요. 무척 마음에 듭니다.”
창 자체의 무게, 무게 중심, 형태, 무엇하나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
울퉁불퉁하던 창대가 곱게 다듬어졌지만, 고급 벨벳을 잡은 것처럼 부드러운 특유의 촉감은 사라지지 않았고 생나무를 그대로 창대로 가공한 것처럼 미묘하게 남은 굴곡이 무척 마음에 든다.
창을 붕붕붕 휘두르다 번개같이 찌르기를 해보니 이전에 쓰던 창과 다르게 목표 조준을 위한 힘이 거의 들지 않았다.
‘이게 진짜 무게 중심이군.’
덕분에 전에 쓰던 창은 무게 중심이 앞에 있는 창이 아니라 단순한 쓰레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번 쇠를 베어보시겠습니까? 뒤뜰에 절삭력 확인을 위해 세워놓은 강철 허수아비가 있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벨비도와 함께 뒤뜰로 나온 환인은 강철봉을 박아넣은 허수아비 앞에 섰고. 창대를 두 손으로 쥔 환인은 살짝 숨을 들이마시다가 있는 힘껏 창을 힘껏 휘둘렀다.
스걱
검은빛이 한차례 번뜩인 순간 허수아비가 반으로 갈라져 쓰러진다.
=우와~.=
=허어.=
부녀는 그저 감탄만 할 뿐이었다. 쉭 바람을 가르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는데 밀짚 허수아비 안쪽의 강철봉까지 잘리다니.
마찬가지로 환인도 놀라고 있었다.
강철을 후려쳤지만, 미약한 절삭감 밖에 손에 전달되지 않았다. 이만한 절삭력이라면 그 뛰어난 재생력의 바르둘도 손쉽게 썰어버릴 수 있겠지.
“대단합니다. 창의 개조를 부탁드리지 않았다면 크게 후회할 뻔했습니다.”
=아닙니다. 무기를 다루시는 영혼사님의 실력이 우수해섭니다. 인근 마을의 대장간에서 기술을 연마하며 나름 창잡이라 으스대던 전사들을 보았지만, 영혼사님만큼 깔끔하게 창을 휘두르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아빠도 참. 은인님이 삼림형 미궁에서 죽인 괴물이랑 짐승만 수백 마리라구! 실력은 당연히 대단하지!=
딸의 자랑에 벨비도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허허 웃었다.
감히 넘볼 수 없는 분을 사모하다가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길쭉한 물방울 모양의 창날을 감상하던 환인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신기하군요. 칼날 멧돼지 성수의 어금니는 상아색이었는데 묵빛으로 변하다니.”
=가공을 끝낼 때까지는 상아색이 유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창대에 결합한 순간 색이 스며들듯 번지더니 이렇게 되더군요.=
“성수의 이빨이어서 그럴까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모릅니다. 다만 검은 나무 특유의 효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강철보다 단단하면서 유연하고 강인한 나무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이 나무가 미궁 특산품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만 밖에서 이러한 나무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렇군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저야말로 마음에 들어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우선…….=
칼날 멧돼지의 어금니는 검은 나무 못지않은 강도를 자랑했다. 그 대검 괴물의 맹공에도 마지막 어금니는 끝까지 버텨냈으니까.
그렇다고 부러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뼈는 아니지만 뼈와 비슷한 특성상 연마하면 할수록 날이 짧아지고 수명 또한 감소한다는 것, 그리고 심에 금이 갈 경우 무기로서 기능은 더 이상 바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성은 강철보다 뛰어나지만, 재활용성은 강철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전투를 치를 때마다 날의 상태를 반드시 점검하시고 혹여 날에 금이 갔을 경우 일찍 폐기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멧돼지 성수님이 대검 괴물과 싸운 것도 가공하지 않은 통짜 어금니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얇게 가공한 이상 길게 쓰기는 어렵다는 말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도리토 씨도 영혼사님께 드릴 물건을 완성한듯했습니다. 시간 되시면 한 번 방문해주시지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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