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9화 (59/813)

〈 59화 〉 058 촌락 ­ 율캄

* * *

=은인님은 그림도 잘 그리시네요.=

=우왕.=

여자들은 환인의 그림 실력이 굉장하다는 것에 놀랐다.

실제 환인의 그림 실력은 뛰어난 게 아니었다. 그저 대상의 특징을 잘 잡고 적당히 세밀한 묘사를 통해 디테일을 살리는 것뿐.

그 정도도 대단하다고 여길 만큼 율캄이 낙후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아저씨가 붉은 영혼인가요?=

환인에게서 영특하다는 평가를 받는 에프니스가 대번에 상황을 눈치채고 심각한 어조로 묻는다.

“예. 마을에 핏불을 닮은…… 이렇게 생긴 분을 원한에 가득 찬 모습으로 노려보더군요. 아는 분입니까?”

혼재의 정체에 대해서 후이니 자매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에프니스도 상황만 짐작했을 뿐, 누군지 알지 못했는데 류히는 에프니스 못지않게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산기슭에 밭을 가지고 있던 호우란 씨예요. 10년 전쯤에 갑자기 사라져서 마을 사람들이 걱정하고 수색하던 게 기억나요.=

=아. 이분이 호우란 씨였어요? 저도 어렴풋이 생각나네요. 침착하고 성실한 아저씨여서 실종을 더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어른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요.=

“류히.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만.”

=……지금 그 아저씨의 밭을 가지고 있는 분이 은인님이 말씀하신 분이에요. 이분이요.=

류히의 손가락은 핏불테리어를 닮은 남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약 60% 정도 갖춰져 있던 가설의 나머지가 보충되며 심증이 100%가 되었다.

환인의 예상대로라면 물증도 곧 갖춰질 예정이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지 아십니까?”

관계도에 따라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할 생각이었는데 류히와 에프니스의 설명을 들은 환인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평소에도 다퉜었다니. 거기다 핏불 쪽은 생긴 것만큼이나 사납고 함부로 힘쓰길 좋아해서 반쯤 마을에서 고립되어있다면 일이 더 쉬워질 것이다.

지구의 핏불 종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인데 이 세계는 다른 걸까.

아무튼 거리낄 이유가 없어졌다. 바로 촌장에게 가려 하던 환인은 멈칫, 류히의 뒤에 서있는 두 영혼을 바라보았다.

류히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는 얼굴로 보는 두 남녀.

‘혹시…….’

잠깐 고민하다가 가죽에 그려진 두 사람의 그림을 지우고 남녀 그림을 최대한 자세히 그려서 류히에게 보여주었다.

“이 두 사람, 아는 사람입니까?”

=어…… 엄마랑 아빠……예요. 부모님 얼굴이 조금씩 생각나지 않고 있었는데……=

흔들리는 눈으로 환인의 그림을 보던 류히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은인님. 저희 부모님을 어, 어떻게 아셨어요?=

“당신의 뒤에서 당신을 사랑스럽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

뒤를 홱 돌아본 류히였지만 그녀의 눈에는 오래 살아서 익숙한 집 내부만 보일 뿐이었다.

=아…… 아아…….=

환인의 그림을 품에 안고 스르륵, 무릎을 꿇은 류히는 애간장이 녹는 것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류히의 머리를 닿지는 않지만 상냥하게 쓰다듬던 부부가 환인에게 시선을 준다.

무언가 전하고 싶은 것이 있는 눈빛.

환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날카롭지만 부드러운 인상의 늑대 남자가 벽을 뚫고 집 밖으로 나간다.

동생들의 위로를 받는 류히를 보다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나 봅니다.”

흘러내린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황급히 훔친 류히가 벌떡 일어나 환인의 뒤를 쫓는다.

늑대 남자가 안내한 곳은 집 뒤에 있는 작은 나무 아래였다.

마치 서있는 곳을 파보라는 것처럼 보여 그 뜻을 전하자 황급히 삽을 가져온 류히가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칵!

=아…….=

얼마 파내지 않아 삽 끝이 무언가 단단한 것을 찍은 소리에 삽을 내던진 류히는 손으로 흙을 조심스레 걷어내다가 가로세로 40cm 정도 되는 흙투성이 상자를 땅속에서 천천히 들어 올렸다.

세월에 부식된 듯 조금 헐은 나무 상자 안에는 몇 개의 은색 동전과 정체를 알기 어려운 자질구레한 나무 조각상 하나, 보석 원석으로 보이는 돌멩이 몇 개에 진줏빛 조개껍데기가 흙과 함께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저씨랑 아주머니가 언니들의 결혼을 대비해서 모으던 재산인가 봐요…….=

에프니스의 시무룩한 이야기에 류히는 그것을 품에 끌어안고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윽. 엄마…… 아빠……!=

“류히. 부모님이 성불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은 웃는 얼굴로 보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 어, 어디? 어디에 계신 가요?=

“바로 앞입니다. 1m 정도 앞.”

상자를 내려놓고 벌떡 일어선 류히는 소매로 얼굴의 눈물을 모두 닦은 뒤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며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성불하는 부모님에게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고, 행복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과 같은 기도다.

류히의 부모는 그런 딸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환인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뜻을 이룬 루아처럼 빛방울 몇 개만 남기고 허공에 녹아드는 것처럼 사라졌다.

남은 빛방울도 톡, 터져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환인은 류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조용히 말했다.

“가셨습니다.”

억지로 눈물을 참고 있었던 듯, 환인의 말과 동시에 다시 울음을 터트린 류히는 환인의 품에 뛰어들며 눈물을 쏟았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북받쳐 오르듯 흐르는 눈물이었다.

류히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 마을에 알려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몰래 따라왔던 마을의 아줌마 몇 명이 집 뒤편에 있었던 일을 모두 목격하곤 마을 사람들에게 죄다 알린 것이었다.

눈 밑이 퉁퉁 부은 류히도 환인이 그려준 그림과 부모님이 남긴 물건을 가지고 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기에, 직접 봤다거나 영혼사의 능력이 없는 한 알 수 없는 것을 보여주었기에 그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 류히의 부모, 뷰그셀과 류안느가 혼재였던 겁니까?=

촌장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기에 환인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몇 가지 확인차 그녀들에게 물을 것이 있어서 데려갔던 겁니다. 두 분의 영혼은 때마침 그 자리에 계셨었기에 영도해드린 것뿐입니다.”

오오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들었어? 뷰그셀 내외가 성불했대!

6년 동안 성불하지 않고 지켜봤다니, 어지간히 발목이 잡혔었나 보구먼.

딸 둘만 남겨놓고 어떻게 편히 눈을 감겠나. 나라도 그랬을걸세.

그러게 말일세. 그마저도 하나는 올조트 님의 해일에 목숨을 잃고……. 쯧쯧.

이렇게 뒤늦게나마 혼수금을 전해줄 수 있었으니 성불한 것이지. 편히 갔을게야.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자리를 뜨지 않고 모두 모여있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1년이 비슷비슷한 일투성이인 시골 마을의 생활이다.

영혼사의 방문이라는 인생 역대급 이벤트가 준비됐는데 일이 바쁘다고 가버리는 사람은 없다.

밀리고 쌓인 일? 이벤트가 끝나고 밤을 새워 해결하면 그만.

환인은 일라일 꽃으로 혼재를 증명해 영혼사로서 믿음을 절반 정도 채웠다면, 류히의 부모님을 성불시킨 것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확고한 믿음을 주게 되었다.

다음 성불은 누구 차례인지, 혼재는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해하며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에 환인은 촌장에게 귓속말했다.

누가 누구를 죽여서 누구의 밭을 빼앗은 거 같다. 무슨 무슨 이유로 원한에 찬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긴말을 할 필요도 없다.

그냥 가볍게…….

“혼재가 루킬 씨를 원독에 가득 찬 눈으로 노려보고 있습니다.”

=……!=

……라고 말해주면 촌장은 자신의 기억을 통해 갖은 살을 붙여가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자경단은 당장 루킬을 포박해라.=

=예?=

=귀가 먹었나! 얼른 루킬을 붙잡아!!=

=예, 옛!!=

촌장의 불호령에 마을의 젊은 남자들이 허둥지둥 달려가 루킬이라는 이름의 핏불 머리 남자를 붙잡는다.

=무, 무슨 일입니까!? 저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루킬은 자신을 묶으려 드는 사람들에게 저항하지만, 각성도 하지 못했고 전사도 아닌 남자가 성인 다섯을 이겨낼 수 있을 리 없다.

잠시 후 꽁꽁 묶인 루킬은 촌장 앞에 무릎 꿇려졌고 갑자기 왜 이러냐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촌장님! 제가 뭘 했다고 이러십니까!=

=자네야말로 10년 전에 무슨 짓을 한 건가!=

=……?!=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혼재가 자넬 죽일 듯이 노려보느냔 말이야!=

촌장의 복장 터질 것 같다는 감정이 담긴 외침에 루킬은 심장 한편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맛보았다.

동시에 환인을 돌아보았다.

‘설마……?’

=내가 매번 누누이 말하지 않는가! 원한을 살 행동을 하지 말라고! 영혼이 혼재가 되어 나타날 행동은 하지 말고 함께 살아가자고!! 어째서 그러겠나?! 혼재가 나타나면 영혼사님을 불러올 수 없는 우리 같은 촌락은 사라질 수밖에 없어! 우리가! 우리 조상님들이! 우리 선조 님들 전부가 몇백 년간 일궈왔던 마을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단 말일세!!=

분노와 통탄이 서린 촌장의 기백에 루킬과 마을 사람들이 얼어붙는다.

불같은 호통을 쏟아내던 촌장이 삽시간에 몇 년은 늙은 듯이 변하며 축 늘어지자 자경단이 허겁지겁 옆에서 부축한다.

=어, 어르신!=

=촌장님. 괜찮으십니까?!=

=이봐, 할렌겔! 빨리 와봐!=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황색 믹스견의 머리를 한 남자가 후다닥 달려오더니 촌장의 입에 알약 같은 것을 넣어주고 팔과 어깨, 다리를 주물러준다.

흐후, 탄식 어린 한숨을 내뱉은 촌장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한다.

=때마침 영혼사님이 아이들을 구해 마을을 방문해주셨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몇 년 내에 우리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을 거야……. 자네들도, 자네 아이들도…… 모두 죽고 말았을 걸세…….=

=…….=

=…….=

=우리 같은 무지렁이가…… 혼재를 눈치챘을 때는 늦어……. 옆 마을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생각들 해보게…….=

힘없는 촌장의 넋두리에 사람들이 침울해진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촌장에게 쏠린 틈을 타 루킬이 도주를 시도한 것도 그때였다.

=어엇!=

=저놈 도망간다!=

사람들이 눈치챘을 때는 루킬의 달리기 속도가 최대에 도달했을 때였다.

뒤늦게 자경단이 달려가지만 달리기에는 자신 있는 루킬이었다. 이대로 마을을 빠져나가만 하면 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마을 밖으로 나가는 도주 경로에 한 명이 서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빌어먹을 영혼사!

촌장에게 뭔가 귓속말을 하는 것으로 이 상황을 불러일으킨 씹어먹을 영혼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루킬은 악을 품고 그대로 영혼사를 들이받으려 했다.

체구는 여자들과 다름없이 작고 가늘고 호리호리하다. 어깨 박치기를 제대로 먹인다면 뼈가 부러져 나뒹굴겠지. 그럼 마을 사람들은 영혼사를 신경 쓰게 될 테고 자신의 추적도 소홀해질……?

마악 박치기를 먹이기 위해 태클하듯이 상체를 숙였을 때였다. 루킬은 밑에서 거무튀튀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목격했고.

뻐걱!

=크겍!=

이어진, 목이 부러지는듯한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땅을 나뒹굴었다.

환인은 자신의 초승달 차기에 목을 얻어맞고 쓰러진 루킬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약점을 노리고 차긴 했는데…….’

죽이고자 했다면 허리춤의 돌도끼로 머리통을 내려찍으면 그만이었다. 찍어달라는 듯이 스스로 머리를 갖다 댔으니 실행에 옮기기도 쉬웠고.

하지만 자신이 죽여서는 안 된다.

마을 사람을 응징하는 것은 마을 사람들 자신의 손이라야 하지, 외부인이 손을 대면 이미지가 나빠질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검도장에서 배운 몇 안 되는 발차기로 쓰러트리려 했는데 설마 돌려차기와 올려 차기까지 쓸 필요도 없었다니.

쓰러져서 게거품을 무는 루킬을 번쩍 일으켜 세워 뒤이어 도착한 자경단에게 인계하자 자경단원들의 눈빛이 어린아이들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을 외면하며 촌장에게 다가가 물었다.

“촌장님. 저 목책, 혹시 10년 전 즘에 세워진 것은 아닙니까?”

=예…… 그 정도 되었을 겁니다. 헌데 그것을 어찌……?=

약과 안마로 기운이 좀 났는지 촌장이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묻는다.

“목책 일부를 좀 치워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보게 바툴, 영혼사님을 도와드리게.=

=옙!=

환인은 바툴이라 불린 남자와 몇 명을 더 불러 붉은 영혼이 서 있던 근처를 헤집기 시작했다.

영혼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돌아다니는 것은 이미 봤다. 루아를 통해 죽은 자리와 영혼이 있는 자리가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환인은 직감에 가까운 예감으로 처음 붉은 영혼을 발견한 자리, 영혼이 서 있던 자리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건 아마도 붉은 영혼의 시체겠지.

환인은 남자들에게 강령까지 펼쳐주며 목책의 일부, 6m를 넘는 통나무 기둥을 지목했고 남자들은 성실하게 통나무 기둥을 뽑아냈다.

=우와, 갑자기 힘이 막막 나는데……?=

=영혼사님이 우리한테 뭘 하신 건가?=

그리고 작업을 돕기 위해 다가온 여자들에게 땅을 파야 할 장소를 가르쳐주었다.

수십 명의 사람이 모여드니 작업은 금방이었다.

=히이익?!=

=꺄악!=

=엄마야……!=

붉은 영혼이 서 있던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목책의 통나무 기둥, 그 아래에서 백골화된 시신 한 구가 나온 것이다.

=누, 누구 시체지?=

=그, 혼재의 시체가 아닐까? 영혼사님은 혼재가 여기 서 있었다고 하셨잖아.=

촌장은 백골을 침중한 표정으로 환인을 불렀다.

=영혼사님.=

“조금 전에 확인해보았는데 호우란이라는 분이시더군요.”

=……!=

군중들 사이에 커다란 웅성임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에라이 씹어먹을 새끼야!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개만도 못한 새끼! 친구 땅이 그렇게나 탐났냐! 어?!=

=우리 율캄의 수치 같은 놈! 죽어라 죽어!=

분노한 사람들이 끄으으, 신음을 흘리며 일어나는 루킬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루킬의 행동과 저 시체의 주인, 촌장의 행동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두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루킬을 짓밟고 때리기 시작한다.

환인은 침중한 촌장과 함께 서서 그 장면을 지켜보기만 했다.

=우리 촌락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우리는…….=

큰 한숨을 내쉰 촌장은 분노한 마을 사람들을 진정시킨 뒤 말을 이었다.

=저 후레자식을 처단하는 것은 잠시 후에 하십시다. 지금은 호우란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촌장의 지시에 따라 하얀 천을 가져와 그 위에 호우란의 뼈를 조심스레 모았다.

그 후 마을 묘지에 정중히 안치한 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마을 공터 한복판에 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루킬을 매달았다.

목을 매달아 교수형을 집행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두 손을 묶어 매단 뒤 그대로 말려 죽이는 형벌을 진행한 거다.

물론 쉽게 죽지 않도록 물을 뿌려가며 2주 밤낮으로 진행했고, 루킬은 죽기 직전 두 다리가 잘린 채 마대 자루 같은 곳에 처박힌 뒤 마을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들판에 내다 버려졌다.

그간 루킬에게 고용 당해 일꾼으로 부려지던 호우란의 아내와 아이들은 원래 자신들이 가져야 했던 밭을 되찾았다.

루킬의 집과 재산도 배상금 명목으로 호우란의 가족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호우란을 살해한 루킬의 가족은 루킬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가족으로서 그 혜택을 받고 자랐기에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마을에서 추방이라는 처분을 받았다.

루킬의 아내는 호우란의 아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남은 평생 봉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추방만은 용서해주세요……!=

한 번 마을을 추방당한 사람들은 다른 마을에 절대 정착하지 못한다. 어찌어찌하더라도 소문이 알려지면 그 마을에서 다시 추방당하게 된다.

결국 추방은 당사자 처지에서는 들판에서 죽으란 것과 다름없는 벌.

당사자들은 마을에서 내쳐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호우란의 가족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개망종이었던 루킬과 다르게 그 아내와 자식들은 성실했고 착했다.

인덕도 있었고 호우란의 가족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었지만…… 용서는 받지 못했다.

촌장은 안타까움이 드러나는 얼굴로 무릎 꿇은 루킬의 아내와 다섯 아이에게 말했다.

=자네가 착하고 어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하지만 이런 일에는 일벌백계가 필요한 법이고, 아직 혼재는 그대로라네. 벌은 집행되어야 해.=

=흑……. 그러면 저도 남편과 같은 벌을 받겠습니다. 그러니 하다못해 아이들만이라도 마을에 머물게 해주세요……. 아이들은 아무 죄가 없잖아요, 촌장님. 제발…….=

=미안하네.=

=여, 영혼사님. 영혼사님! 부탁드려요. 이 몸뚱이라도 필요하시다면 바치겠어요. 제발 아이들만은, 아이들만은!=

루킬의 가족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환인에게도 구원을 요청했지만, 환인은 율캄 마을의 일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발언을 삼가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유리샤. 미안하네.=

=아아, 아아아아…….=

그렇게 루킬의 가족도 자경단의 손에 이끌려 마을에서 사라졌고, 피에 젖은 듯하던 호우란의 영혼은 맑고 깨끗한 회색을 되찾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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