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054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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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인 집에 도착한 환인은 거실을 서성이며 이후 계획의 세부 일정을 생각했다.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아버지의 것이었다가 자신의 것이 된 서재에서 몇 개의 USB를 챙긴 후 얼마 안 되는 인맥 중 한 명, 꽤 유명한 언론의 사회부에서 일하고 있는 기자 친구를 불러냈다.
“야,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아니.”
기자의 스테레오라고 할 수 있는 복장으로 나타난 환인의 인맥. 몇 안 되는 친구라고 표현할 수 있는 유한성은 목에 걸고 있던 대포 카메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환인의 앞자리에 앉다가 눈을 크게 떴다.
“뭐?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눈앞의 친구는 비록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지만 허튼 말은 하지 않고 언제나 사실에 기반한 말만 한다.
지식도 얕지 않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우며 법에 어긋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 친구다.
그런 친구가 잘 지내지 못했다면 뭔가 큰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다는 말이 되며, 자신을 불렀다는 것은 그 일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 생각했을 때 유한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삼안물산의 비리를 터트리고 싶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가 내놓은 증거물은 사회부에서 몇 년간 구를 대로 구른 유한성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커다란 비리 덩어리였다.
제대로 터트린다면 꽤 튼실한 기업인 삼안물산의 근본마저 뒤흔들 수 있는 내용들.
“이건…… 이런 자료를 대체 어떻게 모은 거야? 너 인사팀 대리잖아. 대리가 이런 고급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어?”
“컴퓨터를 티타늄 합금 금고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 외에 나 나름대로 수단도 있고.”
“하긴. 넌 예전부터 비상하게 요령이 좋았지…….”
다 함께 장난치다 선생님께 걸려 혼나도 이상하게 환인만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친구들은 짜증 내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다. 선생님께 혼나고 나오면 언제 사라졌냐는 듯이 나타나서 김밥이나 떡볶이 등을 사주었으니까.
환인에 대한 선생님들의 평가도 말수는 적지만 다정다감하고 말 잘 듣고 공부도 잘하는 착한 학생이었고.
학창 시절의 친구 모습을 떠올리던 유한성은 단말기로 메모리 카드의 내용을 확인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환인은 서류 가방에서 갈색 서류 봉투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네가 해줄 것은 내가 지정한 시간에 그것을 기사화하는 일이다. 준비에 필요한 자료와 신고자에 관한 신상은 여기 적혀있어.”
“음…….”
봉투 속에는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평범한 샐러리맨의 사진과 적당한 신상이 적혀있었다.
이어진 환인의 설명에 따르면 적당한 노숙자를 한 명 골라 만들었다는 듯하다.
“너에게도 나쁜 소재는 아닐 거다.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네 이름 앞에 저널리스트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도 있겠지.”
“…….”
메모리 카드를 단말기에서 분리한 유한성은 보안이 확실한 한옥식 룸 내부를 가볍게 둘러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곤 차로 입을 축인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말대로야.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볼륨이지. 이걸 가져온 게 네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찌라시와 루머를 짜깁기한 걸로 수작 부리냐고 화를 냈을 거야.”
자신은 여태껏 이슈라고 할만한 기사를 종종 작성하긴 했지만, 독점이라고 하긴 애매한 수준이었다.
독점으로 내보낸 기사는 솔직히 말해서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이걸 독점 기사로 낸다면 환인의 말대로 자신의 커리어에 확실한 한 획이 될 게 틀림없는 건수다.
폭로 기사를 단독 취재한 기자로서 그 후의 미래를 상상할 때 유한성은 잠시지만 심장이 뜨겁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고개를 저어 머릿속에서 망상을 털어낸 유한성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걸 성공적으로 이슈화한다면 작지 않은 파장이 몰아칠 거야. 최소한 사장과 부사장을 포함한 임원들의 목이 날아가겠지. 어쩌면 물리적으로도.”
이만한 게 터지면 한두 명이 길바닥에 나앉는 게 아니다. 묻지 마 칼부림도 일어날 수 있다.
USB에 향하던 시선을 눈앞의 환인에게 옮겼다.
이 친구는 한다면 하는 녀석이었다. 비리를 터트리겠다고 말을 꺼낸 이상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해낼 것이다.
그러니까 경고를 해주어야 한다. 친구니까.
“이걸 폭로하면 대기업의 시커먼 손들이 제보자를 찾으려고 혈안이 될 거야. 들키면 네 목숨이 위험해.”
“안다.”
“알겠지. 하지만 그 위험 정도가 얼마만 한 수준인지 모르고 있는 게 틀림없어.”
메모리 카드의 내용은 이걸 어떻게 모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깊고 방대했다.
방대한 만큼 삼안물산 뿐만 아니라 삼안물산과 거래 중인 업체와 기업, 나아가 모체가 되는 그룹에도 영향을 줄 정도의 치명적인 무기로 벼려져 있었다.
기업은 ‘필요 이상’으로 기업 선행을 많이 한다.
기업은 비리를 저지른 사원을 ‘지나치게’ 처벌한다.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비리를 저지르다 발각되었을 때 대국민 사과와 함께 지금까지 해온 사회공헌을 언급해 파급력을 줄이기 위함이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 있다.
삼안 물산은 그런 사례를 고스란히 따라 하고 있었다.
수면 위에서는 온갖 착한 척을 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더러운 비리라는 비리는 모두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갑질을 바탕으로 수의 계약, 납품, 정책 수립 인허가를 통한 금품 수수와 부당한 압력, 부정 청탁, 이권 개입, 부장, 전무급 간부들의 직무 유기에 지역 토착 비리도 저지르고 있었고 불법 청탁 알선에 기업의 하청 납품 인사 비리에 분식회계, 횡령, 탈세, 하도급 비리, 정보지 폭력 등.
기업이 할 수 있는 비리란 비리는 사장과 2명의 부사장, 그리고 전무와 차장들이 합심해서 저질렀다는 증거가 모두 있으니 이게 밝혀진다면 세상의 질타와 함께 삼안물산의 주가는 폭락이 아니라 땅속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이런 부정 기업과 밀접 적으로 거래하고 있는 기업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알게 모르게 혈연과 지연, 학연으로 이어진 곳이 재계다.
재계 순위 149위라면 최상류층은 아니더라도 상류층 인사로서 어느 정도 최상류층과 교류도 맺고 몇억은 족히 들어갈 작은 상자를 주고받기도 하는 사이라는 뜻.
넝쿨째 호박이 굴러오는 것처럼 기업 범죄에 연루된 사람들이 줄줄이 딸려 나올 것이 틀림없다.
그런 금수저를 넘어 다이아몬드, 티타늄 합금 수저들이 자신들의 밭을 더럽히려는 멧돼지나 두더지를 가만히 내버려 둘까?
“너도 잘 알 거 아냐. 그치들은 천룡인이야. 자신을 거스른 잡것들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아. 온갖 방법으로 널 묻어버리려할 거라고.”
이 이야기를 누가 들으면 곤란한 것처럼 상체를 숙여 테이블에 기대며 환인 쪽으로 속삭인다.
“그자들뿐만이 아니야. 주가가 폭락해서 재산을 날린 주주들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고발자의 정체를 캐내서 보복하려 들게 틀림없어.”
“…….”
“검경이 네 편이 되어줄 거라는 생각도 버려. 공익신고자 보호법, 내부 고발자 보호법은 개소리니까. 경찰이나 검사가 태연하게 고발자의 정보를 유출하는 게 우리 사회의 민낯이란 말이야.”
유한성의 진심 섞인 충고를 묵묵히 들으며 냉수로 입술을 축인 환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고 있다. 그래서 ‘전부’ 터트리려 하는 거고.”
“……저, 전부?”
“그래.”
환인의 대꾸에 유한성은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힐끔, 메모리 카드와 그 옆의 USB에 눈길을 주었다가 무의식중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생각났다.
말수가 적어 친구가 몇 없는 환인을 셔틀로 삼으려 한 양아치 무리가 어느 날 반신불수, 식물인간이 되어 고등학교를 중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억.
그때처럼 오한이 치밀었다.
똑똑똑.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나더니 종업원이 들어와 예약 주문했던 음식을 차례대로 테이블에 차리기 시작한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끊어졌다가 종업원이 “맛있게 드세요~.” 인사를 남기고 문을 닫은 뒤 이어졌다.
“그…… 굳이 이렇게 해야 해?”
“저쪽이 먼저 날 묻으려고 한다.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리는데 사람은 오죽할까.”
“밟혔다고 상대방 목을 날려버리려는 건 너뿐이야.”
한숨을 푹 내쉰 유한성은 눈을 어둡게 빛내며 말했다.
“계획이 있겠지?”
“다른 루트로도 풀 생각이다. 여러 곳에 다양하게, 텀을 두고 차례대로.”
메모리 카드, USB 3개를 차례대로 가리키는 환인의 손짓에 유한성의 눈도 따라 움직인다.
“크나큰 사회적 이슈가 된다면 한동안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겠지.”
“그사이 넌 몸을 숨기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환인의 모습에 유한성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기 앞에 놓인 비닐장갑을 끼고 먹음직스러운 양념게장으로 손을 뻗었다.
“이런 자료를 모은 네가 허투루 행동할 리 없겠지……. 알았어. 난 뭘 터트리면 되냐?”
“네가 적당히 믿을 수 있는 언론 기자들에게 USB의 내용을 적당히 풀면 된다. 많이 퍼트리면 퍼트릴수록 좋겠지. 메모리 카드의 내용은 너만 사용하고. 사람들의 관심이 네게 쏠린다면 노숙자 신상을 제공해라.”
“그러니까 내가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거구만?”
“네가 위험한 일은 없을 거다.”
추적한다고 해도 제보자는 이미 죽었으니까.
환인은 복잡한 생각으로 얼굴이 찡그려진 유한성을 응시했다.
공신력이 있는 언론 쪽의 발언이 필요하지만 않았어도 친구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유한성이 돕지 않으면 이 자료는 화려하게 기폭하지 못한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유한성은 친구들 사이에도 의리있는 놈으로 알려져있다는 것.
사회부 기자가 된 것도 자신의 펜으로 더러운 상류층을 일부나마 정화해보겠다는 일념으로 투신한 녀석이기에 환인도 저울추를 올려 믿음을 계산한 것이다.
“정의의 기자님이시니 당연히 공익신고자 보호법을 준수하시겠지?”
환인도 수저를 들며 농담조로 말하자 유한성은 당연한거 아니냐며 크게 웃었다.
그 모습에 환인도 웃음을 그려내며 자신이 회사에서 겪은 망할 경험담을 농담조로 이야기했고, 유한성도 환인이 골탕먹은 이야기에 방금까지 나눈 대화를 모두 잊은 것처럼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들먹이며 웃고 떠들면서 식사를 이어갔다.
환인은 유한성과 만난 뒤 자잘한 소스를 제공하며 인터넷으로 인연을 맺어놓았던 기자들에게도 자료를 뿌렸다.
유별나게 정의감을 자랑하는 기자.
돈만 주면 무엇이든 기사로 올리는 기자.
재계 쪽 찌라시를 다루는 유명 유튜버를 비롯해 트위치, 아프리카, 유튜브 스트리머들에게도 뿌렸고 재계 쪽 이슈를 정부정책과 연결해 여당을 까는데 온 힘을 기울이는 우파, 좌파 BJ들에게도 골고루 사료와 자료를 뿌렸다.
기폭 역할을 해줄 유한성은 여러 차례 테스트를 통해 믿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기에 얼굴을 보이고 자료를 넘겨주었지만, 나머지는 다르다.
정체가 알려지지 않도록, 알려지더라도 시간이 걸리도록 여러 나라를 징검다리 삼아 IP를 우회한 뒤 가상 메일에 접속해 차례대로 메일이 발송되도록 해놓았다.
시작은 이틀 뒤.
자료를 받은 사람들이 자료에 의심을 품고 공개를 꺼리더라도 유한성이 먼저 불을 놓기 시작하면 질 수 없다며 덩달아 불을 놓기 시작할 것이다.
삼안 물산이라는 거인의 몸통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 환인은 천천히 주변인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신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리라고 했지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보면 그냥 적당히 여행을 떠나는 구나 하는 정도.
부모님의 유산과 보험금이 적지 않고 낭비나 사치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일하며 번 월급도 전부 저금한 환인이다.
유형자산은 십여 년간 자리를 비워도 멀쩡하도록 조처를 해놓았다.
적당히 아껴 쓰면 수십 년은 놀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전 세계에 통용되는 범국가적 은행에 저금해놓았기에 금전적으로 손볼 일도 없다.
“…….”
작은 여행 가방을 챙기던 환인은 탁자 위 작은 액자에 시선을 주었다.
환히 웃고 있는 젊은 부부. 그리고 그사이에 무표정하게 서있는 어린 시절의 자신.
금실 좋은 부부로밖에 보이지 않는 부모님의 그림자를 응시하던 환인은 액자를 분해해 사진을 따로 챙겼다.
그 후 여행에 필요한 나머지 짐을 천천히 챙긴 환인은 방을 둘러보다…… 침대 옆 서랍을 열어 손때가 조금 묻은 은색 멀티툴을 손에 쥐었다.
서바이벌 캠핑과 부시 크래프트에 관심이 많은 아버지가 1년간 꼬박 용돈을 모아 샀다는 760만 원짜리 스위스제 백금금 합금 멀티툴.
아버지의 유품을 여행용 가방에 넣으려다 생각을 바꾼 환인은 주머니에 따로 챙긴 뒤 집안을 둘러보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집이다.
자잘한 소모품은 바뀌었지만 그 외에는 바닥 깔개 하나 바뀌지 않은 덕분에 집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그것을 보는 환인은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은 구멍이 난 것처럼 텅 비어있었다.
“…….”
자신이 평범했다면 무언가 감정을 느꼈을까.
주머니 속의 멀티툴을 만지작거리던 환인은 시간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코트를 걸치며 집을 나섰다.
강하연은 집 근처 커피숍으로 자신을 불러낸 환인을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원한에 사무쳐 어떻게 해야 환인을 사회에서 매우 고통스럽게, 아주 잔인하게 묻어버릴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하루를 꼬박 보낸 강하연이었다.
그러던 중에 원수 같은 놈이 전혀 예상치 못한 호출을 해왔으니 심기가 좋을 리 없었다.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강하연이 턱을 들어 자연스럽게 환인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이 톱모델처럼 자연스럽고 예쁘기 그지없어 다른 손님들이 흘끔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에 깃든 선망을 느끼며 강하연이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용서를 빌 생각이라면 늦었어요. 아버지에게도 맞은 적이 없는 저예요. 감히 제 뺨을 때리고서는 아무 일 없길 바란 것은 아니겠죠?”
“강하연 씨. 저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맥락 없는 환인의 말에 강하연의 그린 듯한 눈썹이 찌푸려졌다.
“무슨 뜻이죠?”
“사이코패스라고 들어봤을 겁니다.”
“그게 당신이란 건가요? 지금 절 협박하는 거예요?”
강하연이 기막혀하든 말든 환인은 제 할 말만 했다.
“부모님은 남을 아프게 하면 법적인 문제를 통해 자신도 아프게 된다고 제게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남들에게 가급적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뭔가 눈앞의 남자에게 말리는 기분이 들어 말을 끊고 싶은 강하연이었지만, 억양의 고저 차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환인의 말투 때문인지 입을 열어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런데…… 제가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남들도 제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은 아니더군요.”
“…….”
“어느 날 동급생이 이유 없이 절 괴롭힌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 아버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남이 먼저 날 괴롭히면 어떻게 해요, 라고.”
무뚝뚝하고 일정한 억양의 말소리를 듣다 보니 강하연의 마음속에서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상대가 뭘 하는지 지켜봐라. 그리고 기억해둬라. 마지막으로 보복해라.”
“무…… 무슨…….”
“그렇게 말씀하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등짝을 호되게 맞으셨습니다. 아이에게 참 좋은 것을 가르친다면서 말입니다.”
그리 말하는 환인의 손에 딸칵, 아이스 아메리카노 보틀의 뚜껑이 분리된다.
강하연의 심장이 불안으로 한차례 크게 뛰었다. 보틀 뚜껑이 돌아가는 게 마치 자기 목이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감각,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동물원에 갔을 때 느낀 적이 있다.
“부모님은 7년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기에 다시는 묻지 못하게 되었지만, 저는 받은 만큼 돌려주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호랑이 우리 앞에서 호랑이의 포효를 듣고 겁을 먹었을 때의 감각.
포식자의 앞에 선 피식자의 기분.
“당신이 절 사회에서 매장하겠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다행히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이 있어 남은 평생 적당히 살아도 문제가 없을 정도니까요.”
그리 말하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어 마시는 환인의 태연한 모습에 강하연은 손끝과 발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쿵덕거리며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허리에 힘이 빠지는 감각도 더해서 밀려왔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입술이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귀에 여상하기 이를 데 없는 환인의 목소리가 아프게 파고들었다.
“강하연 씨. 미친개를 건들면 손을 물어뜯깁니다. 그러면 미친놈을 건들였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요.”
환인은 강하연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에게 받은 만큼 보복하겠습니다. 절 사회에서 매장하겠다고 말하셨으니 저는 당신을 땅속에 매장하면 적당한 등가교환이 될 것 같군요.”
“…….”
“들키지 않는다면 별일 없을 것이고 들통난다면…… 몇 년 정도 감옥에서 살다 나온 후 유유자적 살아가면 될 것 같습니다. 다행히 그만한 돈은 있으니까요.”
눈앞의 남자는 진짜다.
수많은 남자를 보아왔고 부친에게 물려받은 사람 보는 눈으로 상대가 진심을 말하는지, 연극을 하는지, 거짓말을 하는지 직감의 영역에서 알 수 있는 강하연이었다.
그런 그녀의 본능이 비명 지르듯이 외치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를 건드리면 자신은 파멸할 것이라고.
정말 정확한 본능이었다.
문제라면 한 박자 늦게 발휘되었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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