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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51화 (51/813)

〈 51화 〉 050 황색 능선

* * *

환인 일행은 혹시 모를 얼룩 늑대의 추격을 우려해 능선을 따라 저 멀리 작게 보이는 노란 대머리 산을 향해 쉼 없이 이동했다.

하지만 괴물이나 짐승의 습격은 예상대로 없었다.

산거북이 움직였더니 이동 경로는 물론 근처에 서식 중이던 동물과 짐승이 죄다 도망간 형태였다.

휘이이잉­

밤이 찾아오니 기온이 내려가며 강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강을 따라 이동 중일 때는 밤이 되어도 춥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지대가 높아서일까, 환인은 기온이 큰 폭으로 떨어진 것을 느꼈다.

여자들도 드러난 팔을 연신 쓰다듬는 것이 꽤 추위를 느끼는 모습이다.

그때 엔넬이 고개를 들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환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은인님. 근처에 곰 굴이 있는 것 같아요. 불어오는 바람에 곰 냄새가 나요.=

“오늘은 거기서 쉬는 게 좋겠군요. 그곳으로 안내해주시겠습니까.”

=네. 이쪽이에요.=

토굴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능선 한쪽, 크게 구불거리는 지형의 안쪽이었는데 위에서도 바깥에서도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장소였다.

=안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려. 곰 굴 맞아?=

=냄새는 곰 냄새가 맞은데…….=

후이니와 엔넬의 이야기를 들은 환인은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가 토굴 안쪽을 살폈다.

깊이는 대강 15m 정도로 그리 깊지 않았다. 그런데 곰의 덩치가 꽤 나가는지 천장 높이가 2m는 된다.

“곰 굴이 맞나봅니다.”

환인은 토굴 한편,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뼈다귀가 쌓여있는 것을 보며 말했다.

토굴의 주인은 산거북 때문에 토굴을 버리고 도망친 거겠지.

그나저나 동물 노린내와 뼈다귀에서 나는 악취가 섞여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냄새가 난다.

=바로 정리할게요!=

류히가 동생들과 함께 냄새의 주요 원인을 치우는 사이 환인은 능선 근처의 숲 가장자리까지 다가가서 밤새 불을 피울 장작을 모아왔다.

움직일 때마다 늑대 인간에게 걷어차인 복부가 욱신거렸지만, 오히려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환인이었다.

피부가 괴사 중이라거나 그러면 아예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을 테니까.

장작 한 더미를 가지고 돌아오자 토굴이 말끔해졌다. 여기저기 보이던 곰 털이라던가 뼈다귀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깨끗해졌군요.”

=전부 긁어모아서 땅에 파묻었어요. 여기에 모닥불을 피우면 냄새도 어느 정도 사라질 거예요.=

냄새의 주요 원인이 사라져서일까, 냄새가 아주 안 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참을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불을 피우면 냄새가 더 사라질 거라니.

불을 안 피울 수가 없다.

불을 피울 준비를 하고 파이어 스틸로 불씨를 일으키자 노란 불길이 금방 일어난다.

=신기한 물건이네요. 부싯돌도 아니면서 부싯돌보다 불티가 더 많이 쏟아지구요.=

옆에서 지켜보던 에프니스는 파이어스틸과 멀티툴이 못내 신기한 듯 중얼거리다가 환인이 자리를 비켜주자 보퉁이에서 훈제 고기를 꺼내 불에 굽기 시작했다.

=은인님. 옷… 고쳐드릴까요?=

“할 수 있겠습니까?”

=네. 마을 처녀들이 시집갈 때 입는 결혼복을 다듬질하거나 길쌈도 하고 삯바느질도 자주 했어요.=

류히의 이야기를 듣고 옷을 벗던 환인은 문득 소통 방식에 의문이 들었다.

그녀가 입에 담은 길쌈이나 다듬질, 삯바느질이라는 단어는 이를테면 한국에서만 쓰인 전문 일상용어라고 할 수 있다. 외국이라면 옷감을 만들다make cloth, 옷을 짜다weaving 정도가 될테지.

생각해보면 여자들이 하는 말에 영어나 외래어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에 의문이 깊어진다.

=아악.=

마지막 셔츠를 벗자 류히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녀를 쳐다보자 파리해진 안색으로 자신의 복부를 가리키는 모습에 환인은 고개를 숙였다.

“…….”

늑대 인간에게 걷어차인 복부에 위험해 보일 정도로 까만 멍이 들어있었다.

자신이 봐도 눈썹이 찡그려지는데 여자인 류히는 어떨까. 비명을 지른 게 이해되는 환인이었다.

=어떡해……. 많이 아프세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이었는데 류히는 에프니스에게 물을 끓이라고 하더니 후이니와 엔넬을 데리고 급한 모습으로 토굴을 나섰다.

“…….”

시선을 느낀 그가 에프니스를 돌아보자 눈을 크게 뜬 에프니스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나무 그릇을 꺼낸 뒤 물을 붓고 모닥불 위에 단단히 고정한다.

환인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단단한 복부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바닥 감촉도 느껴지고 손바닥이 닿은 부분도 약간 욱신거린다.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다는 뜻이다.

보통 멍은 빨간색 ­ 파란색 ­ 보라색 ­ 갈색 순으로 변해가다가 천천히 사라진다. 모세혈관에서 빠져나온 피, 그 속의 적혈구 상태에 따라 멍의 색도 달라지는 거다.

멍의 상태를 살피던 환인은 멍의 가장자리가 보라색을 띠는 것을 발견했다.

복부에 큰 충격을 받아 모세혈관이 넓은 범위에 터져서 복부 전체가 까맣게 됐지만, 멍의 가장자리가 푸른색이 아니라 짙은 보라색이다. 멍이 서서히 치유되는 단계다.

보통은 이 정도가 되려면 멍이 들고 족히 사나흘은 지나야 한다. 그런데 몇 시간 만에 이런 상태가 됐다는 것은…….

‘핏빛 돌멩이는 재생과 관련이 있는 건가.’

지금까지 쭉 쥐고 있던 핏빛 돌멩이를 진지한 눈으로 응시했다.

늙은 땅물개가 주고 간 진주색 돌멩이의 효과는 땅물개들의 능력에 걸맞은 공격 기술의 강화였다.

핏빛 돌멩이를 흘리고 간 늑대 인간은 재생력이 특출났으니 그 힘 일부가 이 돌멩이에 깃들어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의문이다.

늑대 인간의 재생력은 4cm나 베인 자리도 금세 아무는 정도였다. 그만한 재생력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힘이 깃들었으면 이 정도 멍은 순식간에 사라져야 할 텐데…….

‘효과는 한참 떨어지는군.’

핏빛 돌멩이의 메추리알 크기였다. 달걀보다 조금 작은 진주색 돌멩이의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크기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면 대충 이해되는 부분이다.

동생들을 이끌고 나갔던 류히는 잠시 후 부들 같은 식물과 투명한 이파리를 잔뜩 가지고 들어왔다.

=은인님. 누워주세요. 찜질해드릴게요.=

“고맙습니다.”

해준다는 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어 류히가 깔아준 짐승 가죽 위에 드러눕는다.

류히는 곧바로 부들 줄기 같은 것을 땅에 탁탁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짙은 갈색 소시지 같은 식물이 허연 털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손가락 굵기에 두 개 정도 길이에서 그 수십 배는 되는 양의 털이 튀어나왔지만 부족하다는 듯이 몇 개를 더 두들겨서 털 같은 것을 더 많이 뽑아낸다.

=엔넬. 냐셀 이파리를 데쳐주렴.=

=네.=

‘라이스 페이퍼도 아니고.’

비쳐 보일 듯 얇은 이파리는 물에 들어갔다 나오자 더욱 투명해지며 흐늘흐늘해졌다.

그사이 덮고 자도 될 만큼 털을 모은 류히는 곧바로 허연 김이 피어오르는 나무 그릇 속에 담가서 뜨거운 물을 먹인 뒤 두 손으로 꾹 짠 다음 환인의 배에 올리기 시작했다.

‘뜸인가 찜질인가.’

회색 덩어리를 배의 멍 위에 곱게 편 류히는 데친 이파리를 그 위에 덮는다.

복부가 뜨뜻해지며 욱신 찌릿하던 통증이 가신다. 여기에 핏빛 돌멩이의 따끈따끈한 느낌까지 더해지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배 근육이 이완되며 한결 숨쉬기 편해졌다.

‘금방울 꽃 말린 건 안 써도 되겠군.’

=은인님. 이것 좀 드세요.=

에프니스가 잘 구운 훈제 고기를 가져와 공손히 내민다.

=은인님, 찜질 바꿀게요.=

환인은 두 미소녀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휴식을 취했다.

미소녀들의 간호를 받으며 이러고 있으니 호사스러운 휴식처럼 느껴졌다.

토굴의 주인은 밤이 지나고 새벽이 다가올 때 즈음 돌아왔다.

불법침입자가 있을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주인은 때마침 불침번을 서고 있던 환인에게 걸렸고(돌아올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생긴 것은 말레이 곰을 닮았지만 덩치는 코디악 베어였던 토굴의 주인은 환인의 창날에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버렸다.

말레이 코디악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체급과 체격의 차이로 환인도 다소 고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토굴의 주인은 이미 큰 싸움을 거치고 왔는지 몸 곳곳에 물어뜯기고 할퀴어진 상처가 가득했다.

체력마저 떨어진 상태였기에 정령을 불러들여 강령을 펼친 뒤 맹공을 퍼부어 5분도 걸리지 않아 말레이 코디악의 머리통을 쪼갤 수 있었다.

‘중하급 영혼이군.’

흡혈마와 같은 등급이라지만, 덩치도 그렇고 쌍둥이 산 인근 분지의 흡혈마보다 강하면 강했지 절대 약하지 않았다.

등급은 개체의 강함과 관계가 없는 건가.

말레이 코디악의 영혼은 자신이 환인에게 죽었다는 것을 잊은 듯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다 환인에게 강령 되었다.

“흠.”

말레이 코디악의 영혼도 신체 능력 강화 위주의 효과였다. 근력과 체력이 40% 가까이 증가한 게 느껴진다.

환인은 근육이 불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여자들의 손에 천천히 가죽이 분리되어가는 말레이 코디악의 사체를 쳐다보았다.

쌍둥이 산을 떠난 뒤 환인은 처음 보는 짐승이나 동물의 영혼은 거두자마자 바로 강령을 펼치기 시작했다.

기술이나 특수 능력을 먼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초능력이 성장하며 영혼 구슬의 제약이 크게 줄어들어 일부러 영혼 구슬을 키핑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러니 종족별 영혼의 정보 수집을 우선하는 게 효율과 위기 대처 측면에서 좋다.

그런데 쌍둥이 산을 떠난 이후로 기술이나 특수 능력을 가진 영혼은 거의 만나지 못했다.

‘그곳에 사는 짐승들이 특별한 거겠지.’

정황에 따르면 자신이 처음 발을 내디뎠던 밀림은 미궁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 근방에 서식하는 짐승이나 동물이 미궁의 외곽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의 짐승과 당연히 달라야 하지 않을까.

모닥불 옆에 웅크린 채 자는 비상식량을 쳐다보았다.

‘비상식량도 거기서 만났었지. 그곳과 이곳의 동식물이 다르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으으으응~!=

=좀 더 힘내!=

=으이이이이~!=

선 키가 환인의 2배에 가까운 덩치인 말레이 코디악의 가죽을 벗기려 애쓰는 여자들을 보다가 환인이 1/5정도 벗겨진 거죽 끝을 잡고 힘을 주어 잡아당기자…….

쯔저저저적­

살점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가죽이 훌렁 벗겨진다.

=우와!=

=대단해…….=

중하급 영혼의 근력 강화 효과를 받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걸 모르는 여자들은 그저 환인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볼 뿐이다.

=얘들아. 고기가 열에 상하기 전에 얼른 손질해야지.=

쌍둥이 산에서 만들어둔 훈제 고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엄청난 양의 고기가 생겼다.

류히는 다시 한번 훈제 고기를 보충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환인은 받아들였다.

마침 해도 뜨지 않아 살 떨리게 추운 날씨. 고기를 말리기 좋았기에 여자들은 곰 고기를 포 뜨기 시작했고 환인도 멀티툴 나이프로 그 작업을 도왔다.

“상처 입은 부위는 버립시다.”

=네? 하지만 그러면 고기가 많이 줄어들 텐데…….=

“다른 동물에게 공격받은 부위입니다. 어떤 병균이 묻어있을지 모르는 데 말리는 건 좋지 못한 생각 같군요.”

여자들은 환인의 말에 그런가? 하며 상처 입은 부위는 따로 잘라 모았다.

물론 환인은 그런 질병, 병균에 대한 지식은 없다시피 하다.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한 이유는 영혼 시야에 상처 입은 부위가 적색, 혹은 황색으로 보였기에 적당한 단어를 이어붙인 것일 뿐.

=은인님. 그럼 이 고기는 다 버릴까요?=

척 봐도 50kg은 되어 보이는 고기의 산이다.

고기를 잘라 널어놓는 작업에서 빠진 에프니스가 못내 아까운 듯 묻는다.

“일단 구워서 확인해봅시다.”

=네. 바로 구울게요.=

“음……. 좀 더 굽는 게 좋아 보입니다.”

=여기서 더요?=

“예. 바짝 구워야 할 것 같습니다.”

=더 구우면 질겨서 먹기 힘들 텐데…….=

=나랑 엔넬은 먹을 수 있어!=

류히가 대나무 같은 것을 4등분으로 쪼개 격자판을 만드는 족족 고기를 널고 있던 후이니가 소리친다.

인랑족이라고 턱힘도 늑대와 비슷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환인은 영혼 시야로 고기 상태를 보며 옆에서 계속 참견했다.

“먹기 힘들더라도 바짝 굽는 게 안전합니다.”

“그쪽이 덜 익혀졌습니다.”

“거기, 타고 있습니다.”

=네, 네.=

어차피 버리려 한 고기였고 환인의 이야기는 이상하게 설득력이 높게 느껴져 군말 없이 순순히 고기를 바짝 익히는 에프니스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고기의 영혼색이 완전한 백색이 된 것을 보고 적당히 잘라서 입에 넣자 먼저 노린내가 입안에 확 퍼진다.

그리고 찾아온 고무를 씹는듯한 식감.

강인한 턱 힘으로(최하급 강령을 펼쳤다), 튼튼한 어금니로 고기를 억지로 씹어 삼킨 환인은 턱이 얼얼함을 느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의 기준에 이건 고기가 아니라 음식물 쓰레기다.

고기 한 조각을 맛보려던 에프니스가 환인의 표정을 보고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괜찮군요.”

=안 괜찮으신 것 같은데…….=

“먹어도 안전하다는 말입니다.”

=앗, 네.=

류히도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고기를 씹다가 충치에 걸린 것처럼 뺨을 감싸 쥐며 인상을 썼다.

비상식량도 바짝 익힌 곰 고기를 들이대면 퍼덕퍼덕 홰를 치며 ‘이거 치워!’하듯이 부리질을 했기에 결과적으로 후이니와 엔넬이 전부 먹어 치우게 되었다.

=우아, 이거 씹는 맛 굉장해. 엔넬, 엄청 맛있지?=

=응. 이빨이 간지럽던 게 다 사라졌어.=

“…….”

노린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인랑족은 겉만 인간이고 속은 늑대가 들어있는 게 아닐까 생각되는 반응이었다.

눈대중으로도 300kg 이상의 고기가 나왔기에 그걸 전부 훈제하는데 이틀을 더 머무른 환인 일행은 그 후 큰 위험에 처하는 일 없이 노란 대머리 산을 향해 순조롭게 나아갔다.

무리지은 짐승들이 간간히 습격해왔지만 별 어려움 없이 퇴치했다.

눈에 확 띄는 능선을 걷고 있었지만 하늘에서 비상식량이 줄곧 경계 감시를 해주었기에 습격에 대비할 수 있었고, 여자들도 이제 어느 정도 몸을 지키는 게 가능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지킨다고 해도 강령을 받은 네 명이 방어에 치중하고, 그사이 환인이 짐승을 빠르게 쓸어버리는 식이었지만 말이다.

=대머리 산이 도무지 가까워지질 않네.=

노란 대머리 산을 향해 나아간 지 4일째, 엔넬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러게. 우리가 올조트의 호수에서 이렇게 많이 떠내려왔었나?=

=미궁의 숲에서 헤매느라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갔을 수도 있잖아. 호브한테 끌려간 거리도 있고…….=

=…….=

안 좋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여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환인은 여자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왼손의 핏빛 돌멩이만 만지작거리며 딴생각을 했다.

4일간 핏빛 돌멩이를 시험해보고 알게 된 효능은 그저 피로 해소와 자연 회복력을 조금 높여주는 정도였다.

‘크기에 따라 효과도 차이 난다면 정말 아쉬운 일이군.’

진주색 돌멩이를 뱉고 간 땅물개는 족히 수십 년은 살았을 법한 모습이었다.

늑대 인간은 노회한 느낌보다 힘과 신체 능력으로 밀어붙이는, 전성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으니 젊은 개체가 아니었을까.

체내에 보관하는 것, 두 개의 크기가 각각 다르다는 것, 보유 개체의 연령이 크게 차이 난다는 것.

이것들을 종합해보면 돌멩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크기가 커지며 효과도 좋아진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피로 해소와 자연 회복을 올려준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유용한 돌멩이다.

이동하다 마주친 짐승 떼와 싸우고 난 뒤에는 피로가 진득하게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하루에 두 번 싸우고 나면 살짝 근육통이 생길 정도.

그 때문에 다음날 격심한 근육통이 찾아오지 않도록 매일 아침저녁으로 근육을 풀고 훈련하는 게 일과가 됐었다.

문제는 이런 훈련도 피로도를 높이는 원인 중 하나라는 것.

그런데 핏빛 돌멩이를 얻은 뒤로 그런 피로가 대폭 감소했다.

어지간한 싸움은 끝내고 걷다 보면 회복된다. 조금 격렬하게 싸우고 난 뒤라도 대충 훈련하고 자도 다음 날 몸이 쌩쌩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환인은 배를 만져보았다.

복부를 뒤덮은 피멍은 이제 옅은 노란색으로 흔적만 남은 상태. 꾹 눌러도 아픔도 안 느껴지고 피부가 당긴다거나 하지도 않는다.

짧아도 한 달, 길면 몇 달은 걸릴 멍의 치유를 4일 정도로 줄여주는 자연 회복 효과다.

활동 가능 한계뿐만 아니라 회복력도 상당히 올려주니 어찌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핏빛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며 상념을 이어가고 있을 때 엔넬과 후이니가 좌우에서 팔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은인님. 물 냄새가 나요.=

=물소리도 들려요!=

“근처에 강이 있나 보군요. 식수를 보충하겠습니다.”

상념을 끊은 환인은 후이니와 엔넬 자매를 앞세워 숲으로 움직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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