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047 수해
* * *
며칠 동안 강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던 환인 일행은 좁아졌던 강의 폭이 다시 넓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좌우 밀림의 높이는 대폭 낮아져 밀림 너머의 능선도 보이기 시작했고 발길을 거부하는 듯 무성하던 덤불 또한 자취를 감추어 조금씩 숲이 되어가고 있었다.
=진짜 이상한 숲이야. 밀림이 됐다가 숲이 됐다가 다시 밀림이 됐다가…….=
=헤겔 아저씨는 매일매일 번개가 치는 미궁도 있다고 했어. 이 정도는 보통이 아닐까?=
=그럴까……. 아무튼 동물이 많이 사는 게 되게 신기하지 않아? 촌락 밖에서는 진짜 보기 힘든데.=
=숲도 짙고 산도 많고 물도 풍부하니까. 우리 촌락 주위는 누런 초원뿐이잖아. 반대쪽은 물 밖에 없고.=
=그치그치. 그러니까 우리 촌락으로 돌아가면 촌장 할아버지랑 아저씨들한테 말해서 여기로 사냥하러…….=
신나하며 말하던 후이니는 엔넬의 등짝 스매시에 크힝, 이상한 비명을 지르고는 몸을 배배 꼬았다.
=넌 사람들 다 죽일 생각이야? 여기서 우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겪고 있는지 그새 까먹었어?=
=윽……. 뼈 맞았어, 뼈…….=
=그럼 이번엔 살을 맞으면 되겠네.=
철썩!
=끼에엑! 아파! 그만 때려!=
=때려달라고 하던 헛소리 아니었어?=
철썩!!
=끄아앙!=
안 맞으려고 필사적으로 움츠리는 후이니와 그런 후이니의 팔을 잡고 다시 등을 때리는 엔넬의 모습에 류히가 긴 한숨을 내쉰다.
=저 아이들이 진짜…… 죄송해요. 은인님.=
“괜찮습니다. 조용하지 않아서 좋군요.”
환인은 자매들의 티격태격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밀림 위로 드러난 적갈색 능선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 근방에 폭우가 내리면 저 산에서 흘러들어온 빗물이 강과 합치며 범람하나 보군.’
실제로 지대는 꾸준히 높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강도 그저 한 줄기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혈관과 이어진 모세혈관처럼 본류 좌우로 짧고 가는 지류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다가 다시 본류에 합쳐지는 등, 홍수의 흔적이 여러 장소에 남아있었던 거다.
그날 오후, 계속해서 나아가던 일행은 갑작스레 몇 배나 넓어진 강줄기를 볼 수 있었다.
강의 폭만 족히 100m에 이른다. 하구도 아닌데 크게 형성된 삼각주는 종합운동장을 두어 개는 지을 수 있을 만큼 넓었고 나무와 수풀도 빼곡히 자라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삼각주 이곳저곳에 웅크린 채 일광욕 중인 도마뱀 인간들을 봤을 때 환인은 확신했다.
“저 너머에 올조트의 호수가 있겠군요.”
=어떻게 아신 건가요?=
“미궁의 밀림에서 호수와 닿아있는 강을 본 적 있습니다. 강 초입에 개구리 인간과 도마뱀 인간이 대량으로 서식하고 있더군요.”
다른 강줄기에서는 단 한 마리도 볼 수 없었다. 그런 것들이 저기 저렇게 모여있다는 것은 서식지가 호수와 이어진 강의 초입이라는 뜻.
더욱이 이곳은 먹이도 풍부하다.
가끔 찾아오는 짐승 머리, 녹색 괴물을 잡아먹고 사는 것처럼 보이던 그곳과 다르게 여긴 그냥 봐도 먹을 것이 흘러넘치고 있다.
저 멀리 강 건너편에는 영양 계열로 보이는 소 떼가 맑은 물을 마시는 중이고 그 반대쪽 강너머에서는 치타인지 표범인지 (멀어서) 구분이 되지 않는 짐승들이 주변을 눈치 보며 강물을 할짝대고 있다.
영혼 시야를 열고 물속을 보면 자신의 팔뚝만 한 생선이 느긋한 물살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게 곳곳에서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강 주변에는 정체 모를 파란색, 보라색, 은색 과일이 자라고 있고 땅에도 색계통이 연녹색인 풀뿌리가 잔뜩 있었다.
이러니 짐승과 괴물이 이토록 많이 모여드는 거겠지.
잠깐 사이 몇 마리나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며 주변 지리와 풍경이 주는 정보를 받아들이던 환인은 오른쪽으로 폭이 좁은 지류 하나가 뻗어나가는 강 너머, 낮은 언덕으로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일단 강을 건너기 위해 폭이 좁아지는 곳을 찾아야겠군요.”
삼각지를 만들어내고 있는 본류의 유속이 느리다지만 강폭이 너무 넓고 깊었다.
강을 건너는 중에 저 도마뱀 인간들이 덤벼오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게 뻔하니 헤엄쳐서 건널 수는 없다.
여자들을 이끌고 지류를 따라 대략 2km를 걸어 내려가는 동안 환인은 수많은 동물과 마주쳤다.
곰을 닮은 팔 4개의 짐승. 빨간 대머리독수리. 갈색 코끼리 같은 덩치가 거대한 것에서부터 잿빛의 호그hog. 프레리도그와 비슷한 짐승. 오카피와 육지 거북과 흡사한 파충류에 모래 악어까지.
대부분 크고 작은 집단을 이루고 있었기에 환인도 동물들과 마주칠 때마다 긴장했다.
하나둘 정도 되는 집단이라면 피해 없이 물리칠 수 있지만, 눈에 보이는 숫자만 해도 종류 가리지 않고 다 합치면 40~50마리 정도다.
만약 공격했다가 저것들이 모두 덤벼오기라도 하면…….
“…….”
그런데 다행이라고 할지, 육식동물 초식동물 할 것 없이 서로를 길가의 돌멩이 취급하며 물만 마시고 슬그머니 숲으로 사라진다. 새로이 나타나는 짐승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팔 네 개 곰처럼 환인 일행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는 것들도 있었지만, 환인도 창을 꺼내 쥐고 노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피했다.
노골적으로 다툼을 피하는 모습에 환인은 눈썹을 찡그렸다.
아프리카 건기의 물웅덩이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얼마 없는 물을 마시기 위해 모여든 짐승들은 평화 협정을 맺은 것처럼 볼일을 끝마친 뒤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그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식수는 생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육식동물이라고 마냥 초식동물의 우위에 서있는 것이 아니다.
분노한 들소나 하마, 코끼리의 반격에 목숨을 잃는 사자나 악어도 있고 표범도 열받은 얼룩말이 달려들면 놀라서 도망치곤 한다.
아무리 육식동물이라 해도 식수를 인질로 삼아 사냥터를 형성하면 분노한 초식동물 수십, 수백 마리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같은 육식동물이 견제와 기선제압, 또는 싸움을 벌일 수도 있으니까.
더욱이 큰 싸움으로 번지는 과정에서 물웅덩이마저 파괴될 수 있으니 암묵적으로 물웅덩이 근처에서는 싸움이나 사냥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상황과 다르다.
맑고 깨끗한 물은 흘러넘치고 먹을 것은 숲에 널렸다. 목숨을 위협할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데 이런 환경이 조성될 이유가…….
‘……목숨의 위협이라.’
별로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여자들을 이끌고 수심이 얕은 강을 건넌 환인은 미리 보아둔 언덕으로 향했다.
그리고 높이가 80m 정도 되는 언덕의 꼭대기에 오른 순간.
=히익.=
=……!=
=아아….=
언덕 너머, 등에 작은 산을 업은 거북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겉으로 보기에는 온화한 외형이었고 위협도,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크기가 워낙 거대해서일까. 여자들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며 짧게 신음을 흘렸다.
환인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항공모함만큼이나 거대한 거북이라니. 저런 괴물…… 아니, 괴물이라는 말이 실례일 정도의 괴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까.
물리법칙 자체를 무시하는 듯한 모습이니 끔찍하게 강할 게 틀림없겠지.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산거북은 환인 일행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뜨드드드…….
놀랍게도 그 작은 움직임에 나무가 쓰러지는듯한 소음이 난다.
“저 생물 때문에 근방에 싸움이 없었나 봅니다.”
=세, 세상에. 저희는 저런 거…… 처음 봐요…….=
“올조트는 보셨지 않습니까.”
=성수님은 아주 먼발치에서,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모습으로밖에 볼 수 없는걸요?=
산거북의 시선이 돌아가며 여자들도 정신을 차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연신 감탄사를 흘린다. 좀처럼 산거북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다.
=저분도 성수일까?=
=마수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죽이려 든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성수시겠지. 보기에도 온화해 보이고.=
‘……그럼 푸른불꽃 호랑이도 성수 계통인가.’
등껍질 자체가 산처럼 보이는 산거북을 살피던 환인은 문득 투명한 아우라가 안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프니스. 저 산거북은 아우라가 보이지 않는군요. 성수는 각성하지 않는 겁니까?”
=네? 어, 각성은 사람이나 사람을 닮은 짐승, 괴물만 한다고 행상 아저씨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칼날 멧돼지의 영혼은 아우라에 뒤덮여있었는데…….’
시골 처녀라서 가진 지식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겠지. 그렇게 여긴 환인은 산거북에서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다가 산거북의 건너편에 눈에 띄는 표식 같은 지형 하나를 발견했다.
“류히. 산거북의 뒤를 보십시오.”
=네? 음~.=
“저게 노란 대머리 산 아닙니까?”
=앗, 잠시만요. 여기서는 안 보여서.=
환인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류히는 환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맞아요! 저 산이에요! 제가 본 게 저 산이 맞아요!=
=정말!? 우와!=
산거북에게 향해있던 여자들의 관심이 단숨에 노란 대머리 산으로 쏠렸고 크게 흥분했다.
서로 얼싸안고 뿅뿅 뛰거나 연신 눈물을 닦는다.
당연하다. 꼼짝없이 숲에서 죽을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는 눈앞에 집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흥분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
“그런데 가는 길목을 산거북이 가로막고 있군요. 돌아서 가야 할 테니 시일이 더 걸리겠습니다.”
산거북은 대머리 산으로 가는 길인 숲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산거북의 좌우로 지금 일행이 서있는 언덕 같은 것이 몇 개나 겹겹이 늘어서 있는 모습.
좁은 골목길에 25t 트럭이 길을 꽉 틀어막은 모양새다.
이쪽으로 가려면 시간이 몇 배는 더 걸릴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런 거대한 생물 옆을 지나가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성수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짐승인 만큼 옆으로 작은 게 지나가면 본능적으로 밟아버릴지도 모르는 일이고.
더욱이.
“산거북의 추종자가 저 근방에 있을지도 모르니 멀리 돌아가겠습니다.”
노란 대머리 산을 향해 직선으로 가는 것보다 두 배, 어쩌면 세 배 넘게 가야 할 길이 늘어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지만, 여자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이때까지 해 온 것처럼 믿고 따를 뿐이라며 반짝이는 눈으로 환인을 쳐다볼 뿐.
“…….”
여자들의 시선을 받던 환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꽤액!
처음 만났을 때보다 무게가 2배는 족히 늘어난 듯한 비상식량이 팔뚝에 착지한다.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물었다.
“비상식량. 주변에 날짐승이 있더냐.”
꽥!
“그럼 들짐승은?”
꽥꽥꽥꽥꽥!!
“그래. 잘했다.”
비상식량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환인은 주머니에서 무당벌레 비슷한 곤충을 꺼내 비상식량에게 급여해준 뒤 다시 하늘로 날려 보냈다.
“날짐승은 없고 들짐승만 많다고 하는군요. 언덕을 위주로 조심스럽게 이동합시다.”
옆으로 누운 여자의 몸처럼 들쭉날쭉한 능선에는 짐승이나 동물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은 언덕 좌우나 사이사이 숲에 많이 숨어있다는 뜻이겠지.
능선을 따라 이동하면 짐승과 마주치는 횟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들짐승이 많다고 비상식량이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능선과 능선 사이에 있는 약 100m~400m 정도 되는 폭의 숲을 통과할 때마다 작게는 서너 마리, 많게는 열 마리 넘는 짐승들과 치고받고 싸웠다.
특히 스무 마리가 넘는 들개와 마주쳤을 때 환인은 여자 중에 죽는 사람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언니 어서 올라가!=
=아읏…!=
=그냥! 그냥 나뭇가지에 매달려! 으얍!=
=꺄악!=
후이니의 기지로 위기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류히와 에프니스를 나무 위로 집어 던진 뒤 후이니와 엔넬도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가서 들개가 뛰어오르지 못하도록 견제를 한 것이다.
좌우로 은빛 실선을 그리며 늑대 같은 들개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견제하던 환인은 여자들의 안전이 확보되자마자 3중 영혼 방패를 2개 생성해 등 뒤에 띄우고 짐승들을 향해 돌진했다.
정령을 보게 된 이후부터 환인은 영혼 구슬을 아끼지 않았다.
짐승이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면 2중첩 영혼 폭발을 날려 머리통을 박살 냈고, 목을 노리고 뛰어들면 창으로 주둥이를 갈라주거나 창날의 면으로 후려쳐 날려버렸다.
숫자에 밀려 등 뒤를 공격당해 영혼 방패가 부서질 것 같으면 바로바로 영혼 방패를 재시전했고 영혼 구슬도 쓰는 그때그때 확보했다.
특히 영혼 방패가 일 대 다수의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해주었다.
환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영혼 방패는 짐승들의 근육 움직임을 읽고 반격하는 식으로 싸우는 환인에게 두 개의 팔을 달아준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3중첩을 해야 겨우 공격 1번을 막을 정도지만, 그 정도만 되어도 보이지 않는 방패에 막혀 버둥거리는 짐승의 골통을 돌도끼로 쪼개기에는 충분했다.
덕분에 환인은 무리하지 않고 열 마리가 넘는 짐승을 전투 불능에 빠트릴 수 있었다.
크르르릉.
으르르.
“…….”
들개들은 무리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땅에 널브러져 발버둥 치거나 신음을 흘리는 모습에 으르렁 짧은 울음을 남기고 도망쳤다.
혼자였다면 후환 때문에라도 뒤쫓았겠지만, 이쪽에는 청각과 후각이 예민한 후이니와 엔넬이 있다.
푹 푸욱
깨갱! 께엑!
아직 살아있는 들개의 숨통을 끊어놓은 환인은 자신에게만 보이는 반투명 회색 판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등 뒤를 막는데 탁월하군.’
몸에서 1m 이상 떨어지지 않고 내구도도 별로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장점이 다른 단점을 무마한다.
한 장만 펼치면 종잇장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지만, 세 겹을 펼치면 그럭저럭 한 번 정도는 막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기에 등 뒤를 맡기는데 이만한 기술이 없었던 거다.
“내려오십시오. 빠르게 이동하겠습니다.”
주변에 짐승의 기척이 모이는 것을 느낀 환인은 여자들을 데리고 피 냄새가 진동하는 지역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그 후 숲에서 습격을 받을 때면 여자들은 일단 나무 위로 피신했고 환인은 쓸 수 있는 기술을 전부 활용해가며 짐승들을 학살했다.
그 덕분에 훈기의 소비가 급격하게 늘어났고 숲을 한 번 통과할 때마다 훈기의 잔량 비율이 30%까지 떨어졌기에 휴식과 이동을 병행해야만 했다.
가혹한 노동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전투를 통해 영혼 구슬 보유 갯수가 2개나 늘어 총 14개가 되었고, 더욱이 휴식 중 정신 집중을 하면 손바닥을 통해 따스함과 서늘함을 조금 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훈기와 한기의 보유량도 꾸준히 늘고 있군.’
처음 초능력을 얻었을 때는 영혼 폭발을 12번 정도 사용하면 추위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26번을 쓰고도 멀쩡하다.
물론 최하급 영혼 구슬을 썼을 경우다. 하급이나 중하급 영혼 구슬을 사용하면 기술 사용 횟수는 더 감소한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변화는 비상식량에게도 일어났다.
언덕 위에서 불침번을 서던 중 사람 크기만 한 부엉이곰owlbaer 다섯 마리의 습격을 받았을 때였다.
머리는 부엉이, 몸통은 곰을 닮은 데다 뭉툭한 깃털로 몸이 뒤덮인 짐승은 소리 없이 야영지를 습격했지만, 후이니가 습격을 미리 눈치채고 환인을 깨웠기에 피해는 없었다.
변화는 그때 일어났다. 여자들과 함께 피해 있던 비상식량이 갑자기 옅은 빛을 뿌리다가 몸집이 2배 가까이 커진 거다.
꾸엑!
=앗. 비상식량 성장했구나?=
꽥? 꽥꽥!
=한 번에 이만큼이나 자라다니…… 역시 녹색 쿠에는 평범한 색이랑 뭐가 달라도 다르네.=
“…….”
암탉 정도였던 비상식량이 단숨에 거위만큼이나 자라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환인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영혼에 관한 것은 지구에서도 가십지를 통해 꾸준히 접해봤기에 받아들이기 쉬웠지만 저건 아니다.
부피가, 질량이 한순간에 몇 배나 증가하는 것은 물리법칙의 근본을 뒤흔드는 현상이다.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고작 숨 몇 번 쉴 틈에 2배나 커진다는 게.
꾸엑.
울음소리도 변성기가 온 것처럼 약간 날카로워진 비상식량을 들어본 환인은 절반 정도 타협해서 현실로 받아들였다.
‘부피는 늘었지만, 질량은 그대로군.’
살을 한참 찌운 뒤 단번에 성장하는 방식은 갑각류에게 흔히 일어난다.
비상식량에게 일어난 현상을 탈피의 일종이라고 애써 자신을 설득하는 환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