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046 비취 호수
* * *
비취색 호수를 벗어나 골짜기 같은 곳에서 흘러내리는 강으로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콰우우우우욱……!!
쿠와아아아……!!
쿠오오오오오………!!
=꺄악.=
=히익.=
류히와 에프니스가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을 정도의 살기 어린 포효가 호수 쪽에서 연달아 들려왔다.
환인은 말없이 두 여자의 팔을 잡고 일으킨 뒤 강을 따라 나아갔다.
여럿이서 지른 함성이 아니라 단독 개체의 포효다.
저 포효만 봐도 녹색 유인원보다 훨씬 더 강할 거라는 게 짐작된다.
‘유인원들은 모두 중하위급의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유인원의 우두머리가 호브 마을의 큰 괴물들처럼 몇 배나 강하다면 지금은 피해야 한다.”
물론 그만큼 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육체만 발달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두목급 한 마리와 그 추종자들을 전부 상대할 수는 없다.
만약 우두머리가 동쪽 쌍둥이 산의 칼날 멧돼지 정도만 되어도 자신이 멀쩡하게 승리할 가능성은 10%도 되지 않는다고 계산을 끝마친 환인이다.
더욱이 여자들이 씨코타라고 부르는 땅물개들은 강 하구까지만 따라오다가 돌아가 버린 상태.
씨코타가 돌아가 버리자 여자들이 조금 불안해했지만, 환인은 애초부터 씨코타를 전력외 취급하고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좀 더 빠르게 가겠습니다.”
혹시 몰라 폭이 20m는 넘는 에메랄드빛의 강을 건넌 뒤에 젖은 몸을 말리지도 못하고 달리다시피 강을 따라 상류로 이동하고 있으니…….
=으, 은인님! 숲의 약탈자들이에요! 숫자가 많아요! 건너, 건너편 숲에서……!=
후이니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숲 위로 진한 비취색의 덩치가 튀어 올랐다가 쿠웅!! 육중한 소리를 내며 강가에 착지했다.
“…….”
폭 20m의 강을 사이에 두고 환인은 마악 모습을 드러낸 괴물을 응시했다.
키가 거의 3m에 달한다. 유인원이 아니라 숲의 거인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다.
그 덩치의 뒤로 마흔 마리에 가까운 유인원들이 적개심을 풀풀 풍기며 숲에서 걸어 나온다.
다른 녹색 유인원들은 아무래도 암컷인 듯 가슴살이 축 늘어져 있는 데다 골반이 수컷보다 1.5배가량 벌어져 있었다.
각자 나무창 다발을 들고 있는 것까지 빠르게 살핀 환인은 창을 꺼내 쥐고 창끝을 땅으로 늘어트린 뒤 두목 유인원을 말없이 주시한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강이 깊고 유속이 꽤 빠르다. 저 두목 유인원 외에는 강을 건너기 힘들 거다.
그런데 잘 보니 두목 유인원의 몸 주변에 옅은 아우라가 둘려있다. 칼날 멧돼지의 영혼이나 루아의 영혼처럼 투명한 아지랑이 같은 아우라다.
그걸 본 에프니스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깜짝 놀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가, 각성 동물…….=
‘투명한 아우라의 유무는 각성인가. 하지만 칼날 멧돼지나 육족 말사슴은…….’
환인과 눈싸움하듯이 부리부리한 눈을 깜빡이지도 않던 두목 유인원은 갑자기 이빨을 드러내더니 주먹으로 사정없이 땅을 내려치고 두들기며 울부짖는다.
크아아악!! 크아오오오오!! 우오오오오오!!!
쿵, 쿵쿵, 쿵쾅쿵쾅쿵…!!
두목 유인원이 지른 포효에 옷자락이 펄럭이고 근처의 강물이 요동치듯 출렁인다.
여자들은 겁에 질려 다리를 떨기 시작했지만, 환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담담하게 두목 유인원을 주시했다.
‘예상보다 더 강해 보이는군.’
1:1로 저 두목 유인원과 붙는다고 해도 승리를 점칠 수 없다고 느끼는 환인이었다.
후하게 매겨도 10% 안팎. 뒤의 수십 마리를 더하면 답이 없다. 하지만 깊고 빠른 강이 사이를 막고 있기에 환인은 잠자코 광분하는 두목 유인원을 응시한다.
한동안 가슴을 두드리고 땅을 내려치며 광분하던 두목 유인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차분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눈빛에는 환인을 포함한 여자들 전부를 씹어먹을 정도의 분노가 담겨있었지만 어째서일까, 환인은 두목 유인원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군.’
저 두목 유인원은 자신과 같은 부류다.
푸우욱
허연 콧김을 크게 내뿜은 두목 유인원은 갑자기 뒤를 돌아서더니 환인의 허리 굵기만 한 나무를 두 손으로 뽑은 뒤 그대로 환인에게 집어 던졌다.
쐐애애액!!
두목 유인원이 뒤돌아섰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던 환인은 수 미터짜리 생나무 미사일이 날아와도 당황하지 않고 2중첩 영혼 폭발을 일으켰다.
꽈아앙!!
무색무형의 폭발이 일어나며 생나무 미사일의 궤적을 비튼다. 나무 미사일은 환인의 옆을 스쳐 지나가 뒤편의 숲과 충돌했다.
뒤에서 나무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환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다시 두목 유인원과 환인의 눈싸움이 시작된다.
소란스러워진 것은 두목 유인원 뒤쪽의 암컷들과 환인 뒤쪽의 여자들.
웅성웅성.
수근수근.
이윽고 두목 유인원은 무리를 이끌고 숲으로 돌아갔다.
암컷 유인원들은 두목 유인원과 환인을 번갈아 보다가 하나둘 그 뒤를 따른다.
=도, 돌아갔다…….=
=아으으…….=
두목 유인원과 암컷들이 사라지자 류히와 에프니스는 물론이고 후이니와 엔넬마저도 무릎이 풀린 것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생나무가 날아오는 것을 봤을 때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여자들은 공포에 질린 심장이 쿵덕쿵덕 뛰는 것을 느끼며 굳건한 거목처럼 서있는 환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한 치 앞도 안보이는 폭우 속에서 만난 거목처럼 압도적인 안도감.
어떤 일이 있어도 저렇게 우뚝 서서 모진 비바람을 막아줄 것 같은 듬직함을 느낀 심장은 어느새 차분해졌고 여자들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류히는 다른 이유로 콩닥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환인에게 물었다.
=왜, 왜 그냥 돌아간 걸까요?=
“…….”
=강이 너무 넓어서 못 건넌 거 아닐까?=
=약탈자 우두머리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새 잊었어?=
=내가 붕어도 아니고 그걸 잊겠냐! 부하 원숭이가 못 건너는 거 아니냐는 거지! 혼자 건너오면 은인님한테 죽을 테니까!=
통째로 날아오는 나무를 쳐 날리는 거 못 봤냐고 엔넬에게 타박을 주는 후이니를 향해 에프니스가 말이 안 된다며 끼어들었다.
=약탈자들은 전부 나무창을 한 묶음씩 들고 있던 거 못 봤어? 강을 건너지 않아도 공격할 수 있었어. 48마리가 한꺼번에 창을 던졌으면 은인님 말고 우리는 모두 죽었겠지.=
=…….=
=은인님은 못 이기더라도 분풀이로 우리는 죽일 수 있었다는 뜻이야.=
=…….=
=…….=
=그냥…… 우두머리는 봐준 거야.=
=왜 봐줘? 동족을 20마리 넘게 죽였는데 복수하는 게 정상 아니야?=
=몰라. 마지막에 나무를 뽑아 던진 것도 다음에 보면 죽이겠다고 경고한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어. 나도 이해가 안 돼…….=
=나중에 뒤통수 때리려고 그러나……?=
=그런 거면 일을 두 번 하는 거잖아. 아까 왔을 때 덤비지 뭐하러.=
=음…….=
=끙….=
여자들은 이유를 몰라 끙끙거리고 있었지만, 환인은 사실에 근접한 유추를 하고 있었다.
‘설마 자식이 우두머리가 되는데 방해되는 정적을 모두 죽여서 봐준 건가. 암컷을 모두 끌고 왔던 것은 집단 내에서 자신도 할 만큼 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유인원의 습성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데서 나온 추측이었다.
처음의 28마리가 유인원 집단의 수컷 전부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가.
“……갑시다. 유인원들은 더 이상 쫓지 않을 겁니다.”
=아, 네!=
=넵!=
‘사람의 신체 스펙을 뛰어넘는 짐승이 있고 그런 짐승들도 약탈과 유린, 정치를 하는 세계라니.’
어쩌면 자신은 지옥에 떨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린 환인이었다.
비취 호수를 벗어나 강을 따라 이동한 지 이틀째.
유인원 사건 이후 전투는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하루를 온전히 이동에만 쓸 수 있었는데 비취 호수를 벗어나서일까. 기온이 반등해서 한여름과 비슷한 더위가 줄곧 이어졌다.
주변 풍경과 식생은 또 한차례 변화해 강은 폭이 5m까지 줄어들었으며 강의 좌우는 고운 모래사장이 빼곡히 메우고 있다.
백사장 너머는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과 풀이 우거져 밀림을 형성하고 있고 그 위로는 파아란 하늘이 펼쳐져 새하얀 뭉게구름이 한가로이 흘러간다.
풍경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지만 환인의 의식은 그런 평화로움에 단 1g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크러러럭!
4m를 넘는 거대한 모래색 악어가 환인을 향해 난폭하게 주둥이를 휘두르고 펄쩍 뛰며 이빨을 딱딱거린다.
그렇다고 거대 악어에게 우세한 상황은 아니다. 바이킹 퍼브 같은 곳에 장식될법한 아가리 곳곳에 도끼 자국이 찍혀있는 데다 피를 철철 흘리고 있어 볼품없게 변한 지 오래.
공격도 잘 보면 악을 쓰는 느낌이 없지 않다.
쩍!
크어억!
재차 돌도끼가 주둥이를 찍자 뼈를 포함한 주둥이 일부가 떨어져 나간다. 그 고통이 끔찍했는지 거대 악어는 주둥이를 좌우로 붕붕 흔들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훕.”
환인은 겁도 없이 물러나는 거대 악어의 주둥이 위로 뛰어올랐다.
크륵!
질겁한 악어가 재차 고개를 붕붕 흔들었지만, 환인은 이미 머리를 지나 몸통에 도달한 상태.
위기감을 느낀 거대 악어는 온몸을 뒤틀며 적을 떨쳐내려 했지만, 그럴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훌쩍 뛰어내린 환인은 창을 빠르게 내질러 훤히 드러난 악어의 배를 마구잡이로 찔렀다.
푸푸푸푸푹
크르러럭……!
주요 장기가 훼손되기라도 했는지 뭍에 올라온 생선처럼 펄떡이는 거대 악어.
환인은 그 모습을 무심하게 지켜보며 심장이 있을 거라 예상되는 곳을 끊임없이 푹푹 찌른다.
크억… 크러럭…….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큰 웅덩이를 만들 때 즈음에야 거대 악어는 숨이 끊어졌다.
이상한 세계의 악어라서 그런지 목숨도 보통 질긴 게 아니다.
‘영혼은…… 하급인가.’
모래 악어를 강령하자 체온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턱 힘이 늘어난 느낌과 폐활량이 늘어난 느낌이 든다.
창을 붕 휘둘러 피와 내장 조각 등을 털어낸 환인은 후이니와 류히가 손봐준 창을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비취 호수의 유인원을 뼈째 갈랐을 때부터 느끼던 거였지만, 어느 정도 연마된 철제 무기가 제대로 된 내구를 가졌을 때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내는지 실감한 환인이었다.
강령도 쓰지 않고 4m가 넘어가는 괴물 악어를 이토록 손쉽게 잡다니.
만약 나무창이나 곤봉을 들었다면 강령에 기술도 난사해야 했을 거다.
=꺅! 이리로 온다!=
=으에잇!=
크르렁!
=엄마!=
후이니와 엔넬은 거대 악어보다 40% 정도 더 작은 악어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호들갑에 비해서 꽤 유기적으로 연대해 악어를 몰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거대 악어가 죽자 슬금슬금 강가로 물러나더니 몸을 홱 돌려 습보??로 겅중겅중 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앗, 도망가려고 한다!=
=안돼! 잡아!=
크러렁!
꼬리를 붙잡힌 악어는 두 인랑족의 힘(+강령)을 이겨내지 못하고 끌려가다가 신경질적으로 입질을 했지만.
=이놈! 이놈!=
=에잇!=
오히려 주둥이와 머리를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그 장면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강 건너 밀림으로 시선을 주었다.
‘거대 토끼와 우연히 만났던 그 숲인 거 같은데.’
밀림의 바닥을 그득 채운 덤불은 자신을 그토록 고생시킨 밀도와 형태였다.
여태까지 이동한 방향과 거리를 생각해보면 틀림없을 거다.
‘이 강을 따라가다 보면 올조트라는 뿔비늘 고래의 대호수를 볼 가능성이 크겠군.’
차라리 그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환인이었다.
어디 있는지 모를 노란 대머리 산을 찾기 위해 정처 없이 강을 따라 움직이는 것보다, 대호수 근처에 붙어있다는 마을을 찾아 호숫가를 이동하는 쪽이 더 정확할 테니까.
작은 악어와 드잡이질을 벌이는 자매를 내버려 두고 환인은 훈제 고기 보퉁이를 살펴보는 류히와 에프니스에게 다가갔다.
=이거 상하고 있는 거죠?=
=그러네. 이리 주렴.=
=언니, 이거도요.=
=으응……. 계속 신경 썼는데도 조금씩 상하는 고기가 나오기 시작하네.=
“상태가 좋지 않나 봅니다.”
=갑자기 또 더워졌으니까요. 비취 호수 근처는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는데 여긴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날 만큼 덥네요.=
시선을 주자 입고 다니느라 늘어난 가슴 앞섶 탓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뽀얀 가슴골이 훤히 보인다.
흘러내린 땀이 그 가슴골에 고이는 것을 잠깐 쳐다본 환인은 류히가 꺼내놓은 훈제 고기를 살펴보았다.
연기가 고기에 골고루 스며들면 좋겠지만 형태가 울퉁불퉁해서 그렇지 못한데다 기온까지 오르락내리락하니 고기가 접힌 부분에 곰팡이 같은 것이 슬어있었다.
보존기간이 예상 이상으로 빠르게 줄고 있다.
=점심은 이것들 구워 먹을 거죠?=
=응. 당분간은 상할 것 같은 훈제 고기부터 구워 먹자.=
그냥 먹는다면 배탈 설사를 일으키거나 심각하면 식중독까지 걸릴 수 있지만, 재차 구우면 그런 문제는 현격히 줄어든다.
“훈제 고기는 상태가 이상하면 아끼지 말고 바로 구워 먹는 게 좋겠습니다. 훈제 고기가 바닥나면 근처에 자리 잡고 다시 만들어도 되니까요. 곰팡이가 핀 것은 버리도록 하죠.”
하지만 위험성을 부담하고 싶지 않았기에 환인은 두 여자를 설득해 곰팡이 핀 훈제 고기는 전부 땅에 파묻었다.
=잡았다~!=
후이니의 외침에 그쪽을 보니 옆구리에 철창이 깊게 박힌 악어가 배를 까뒤집고 있었다.
자매가 힘을 합쳐 깊게 찔러넣었는데 그게 우연히 심장을 찌른 것처럼 보인다.
환인은 작게 감탄했다.
색은 모래색이었지만 악어의 외형은 나일 악어와 흡사했다. 저 정도라면 암컷 성체일 텐데 그걸 10대 중반의 소녀 둘이 해치우다니.
‘확실히 사람과 종이 다르군.’
신났는지 풍차처럼 돌아가는 후이니의 늑대 꼬리를 보던 환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머리 위를 지나고 있다. 때마침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악어 고기와 상하기 직전의 훈제 고기를 꼬치처럼 불에 구워 먹는 중에 류히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비상식량인데 그렇게 먹어도 괜찮을까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동물은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꾸엑?
=아니아니 너 말구.=
환인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는 벌레를 쪼아먹던 비상식량이 돌아보자 류히가 웃으면서 손사래를 친다.
=지금 속도로 훈제 고기가 상하면 5일 안에 고기가 바닥날 거에요.=
“주위를 잘 살펴보면 먹을 수 있는 식물도 많습니다. 가끔 짐승도 발견할 수 있으니 최악의 경우 한곳에 머무르며 고기를 확보해서 다시 훈제하면 됩니다.”
=네. 은인님 말씀대로 할게요.=
식사를 마친 일행은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기로 했고, 여자들은 몸을 씻으러 강으로 향했다.
환인도 따라가며 영혼 시야로 적의 유무를 살핀다. 숲에서 갑자기 맹수가 습격해오면 제대로 지켜주기 위해서는 가까이서 경계를 서줄 필요가 있으니까.
여자들이 짐승 가죽 옷을 벗고 투명한 강물에서 목욕하는 것을 지켜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느 순간부터 날짜를 세지 않았지만, 얼추 2달 정도 지났다는 것은 알고 있다.
환인도 이제 여기서 좀 빠져나가고 싶었다. 문명을 만나서 깨끗하게 씻은 뒤 잠자리도, 먹을 것도 편히 하고 싶다.
‘이 세계에도 비누는 있겠지.’
없다면 만들어도 된다. 품질은 매우 떨어지지만 물과 동물지방, 잿가루로 제작할 수 있으니까.
식히고 응고하는 시간이 4주가량 걸리기에 여기서는 엄두도 못 냈지만, 마을에 도착하면 만들어서 쓸 수도 있을 거다.
비누에 생각이 미치자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장난치는 여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에잇!=
촤악!
=……장난치지 말고 빨리 몸이나 씻어.=
=칫. 재미없어.=
=언니, 여기 풀 묶음이요.=
=고마워. 등 좀 닦아줄래?=
=네.=
10대 중후반부터 20대 초반의 여자 4명. 신체 대사가 한창 활발할 때의 나이다.
신경 써서 가꿔도 다음 날 아침 이유 없는 뾰루지가 발생해서 속상해할 연령대인데도 놀랍도록 피부가 깨끗하다.
반짝이는 물방울이 맺힌 하얀 나신은 같은 여자라도 부러워할 정도.
관리하는 거라곤 매일 강물에 몸을 씻기만 할 뿐인데 어떻게 하면 저렇게 깨끗할까.
그러고 보면 물에 젖었는데도 머리가 기름에 엉겨 붙지 않는다.
‘서양인 중에는 며칠 머리를 감지 않아도 머리카락이 산들거리는 체질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튼, 환인과 처음 만났을 때는 저 정도가 아니었다.
미녀의 태가 나긴 했지만, 볼살은 움푹 들어갔고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데다 피부는 두드러기나 모기에 물린 듯한 부스럼이 곳곳에 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살이 오르고 피부가 깨끗해지기 시작하더니 지금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녀들의 아랫배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온기를 응시한다.
‘내가 저 기운을 흡수한 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주먹만 하던 네 명의 온기는 이제 구슬 정도 크기로 줄어들었다.
류히의 온기 덩어리는 그날 이후 한 번도 흡수하지 않았는데 여전히 확대될 기미는 없다.
환인의 시선을 느낀 걸까, 류히가 한쪽 팔로 가슴을 가리고 수줍게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든다.
어지간한 톱레벨 여배우 버금갈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이었지만, 환인은 별 감흥 없이 손을 작게 흔들어주었다.
그저 환경의 변화 때문에 저렇게 변한 건지, 아니면 자신과 관계를 맺은 덕분인지 그것도 확인해보고 싶어진 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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