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5화 (45/813)

〈 45화 〉 044 비취 호수

* * *

비취 호수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물러난 환인은 여자들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헐떡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

‘기온이……?’

이것도 여기가 미궁이라 그런가.

숨을 크게 들이마셔도 보고 팔뚝의 피부를 드러내기도 해봤지만 기온 차이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활동하기 좋은 선선한 날씨 정도?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쌍둥이 산 근방에서도 덥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

여자들은 아침저녁으로 강가에서 몸을 씻어야 할 만큼 땀을 흘렸는데 말이다.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낸 환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녹색 유인원 한 마리가 멀리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게 보인다.

‘감시겠지.’

이제 뭘 하면 될지 명령을 기다리는 여자들에게 말했다.

“조금 쉽시다. 그리고 에프니스, 저 유인원을 숲의 약탈자라고 부릅니까?”

=네에……. 행상인이나 상단이 숲을 통과할 때 경계하는 1순위가 숲의 약탈자예요. 나무도 굉장히 잘 타고 힘도 세서 말이나 쿠에 한 마리는 가뿐하게 들고 도망칠 수 있다고 해요. 그 힘으로 상단의 짐을 약탈한다고 해서 약탈자라고 불려요.=

푸드드득.

하늘에서 내려온 비상식량을 팔에 앉히고 미리 수집해놓은 곤충을 먹여주며 에프니스에게 물었다.

“저 유인원들은 피를 보는 것을 좋아합니까? 영역 의식이라던가 집단의 규모 등은 지능은 어느 정도인지? 식성은?”

=죄송해요. 거기까진 저도……. 식성은 고기나 풀이나 가리지 않고 다 먹는다는 것 같아요.=

“…….”

여전히 이쪽을 감시 중인 유인원을 바라보다가 비상식량의 부리를 살살 긁어주며 말했다.

“비상식량. ‘강’이 어디에 있지? ‘강’이다, ‘강’”

꾸엑?

“여기가 이곳 ‘강’이다. 저곳은 여기, ‘호수’다.”

땅에 대강의 비취 호수 형태와 지금 자신들이 있는 강을 그려놓고 몇 번 반복해서 물으니 비상식량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푸드득,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잠시 후 다시 내려온 비상식량이 비취 호수 그림 위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다가 발로 선 비슷한 걸 죽죽 긋는다.

꾸우!

“흠. 우리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 강이 하나 더 있군요. 목적지는 그쪽……?”

=우와, 비상식량 그림도 그릴 줄 아는 거야?!=

=밀짚색 쿠에도 사람 말을 잘 알아듣는 편이지만 비상식량이랑은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네.=

=비상식량 굉장하다.=

“……크흠.”

비상식량에게 쏠려있는 여자들의 주의를 이쪽으로 되돌린 환인은 다시 말했다.

“비취 호수 한쪽 편 시야가 닿지 않는 장소에 강이 하나 더 있나 봅니다. 일단 그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목표로 삼겠습니다.”

=네.=

=넵.=

“일단 좀 더 물러납시다.”

지금 떠올린 것이 통할지 의문이지만, 이쪽의 빈틈을 노리고 습격하지 않았다는 점을 미뤄봤을 때 시도해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뒤쪽은 숲에 가려져 자신들이 따라 움직인 강도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의 수해.

앞쪽은 산맥과 비취색 호수 그리고 유인원의 서식지.

선택지가 없다.

비상식량이 그린 강은 환인의 예상대로 산에 의해 가려진 호수 건너편에 있었다.

호수 둘레는 어림잡아 42km. 오차는 있을 수 있지만 42km보다 길면 길었지, 짧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절반이라고 해도 20km가 넘는다.

다른 강의 위치를 알아냈으니 수해로 들어가서 그쪽 산을 빙 둘러 간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너무 멀다.

‘미궁의 특수성. 더해 어떤 짐승이나 괴물이 서식 중인지 모르는 곳이다. 지켜야 할 것을 들고 제 발로 숲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수해라서 이정표인 산도 보기 힘들 거라는 건 덤이다.

결국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유인원의 영역을 관통해야 한다는 뜻.

‘무작정 밀고 들어가면 반드시 싸움이 벌어진다.’

자신 혼자면 상관없지만, 여자 중에 죽는 사람이 반드시 나올 거다.

솔직히 환인은 여자들이 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많이 변했다. 길을 알고 있다는 류히의 특수성은 사라졌고 자신의 초능력이 이 세계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게 되었다.

오히려 혼자 움직이는 게 마을에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

“…….”

하지만 여자들과 여러 가지를 주고받은 이상 환인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때까지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볼 생각이었다.

비상식량을 앞세워 한참을 헤맨 끝에 세 마리의 짐승과 두 마리의 동물을 사냥한 환인은 자신이 세 마리를 짊어지고 후이니와 엔넬에게 두 마리를 맡긴 뒤 다시 비취 호수를 찾았다.

‘점점 인간에서 벗어나는 기분이군.’

=헤엑, 헤엑.=

=후아, 하아악.=

늑대와 작은 곰을 닮은 짐승, 각각 100~120kg 정도 되는 짐승 사체를 짊어지고 오르막을 수 킬로미터나 걸은 후이니와 엔넬이 죽을 듯이 헐떡였다.

세 마리 합쳐 300kg이 넘는 것을 옮기고도 약간 숨만 거칠어진 자신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환인은 앞을 보았다.

멀찍이서 졸졸 따라다니던 유인원이 보고했는지 호숫가에는 아홉 마리의 유인원이 서 있었다.

아까보다 두 마리가 더 늘었다.

‘저게 유인원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지.’

유인원들에게 적당히 다가간 환인은 세 마리의 무스 사체를 그들 앞에 쿵, 쿵, 쿵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후이니와 엔넬이 짊어지고 온 사체도 옆에 나란히 늘어놓고 유인원들에게 손짓으로 뜻을 전한다.

이거, 너희 거다.

우리, 저기 간다.

……후!

흐어!

몸짓은 통한 거 같은데 두 마리가 불만의 뜻을 내비치듯 한 손으로 가슴을 퍽퍽 치거나 주먹으로 땅을 꿍꿍 찍는다.

‘저 두 마리는 좀 전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환인은 말없이 130kg 정도 되는 무스를 두 손으로 잡고 위로 힘껏 던졌다.

“흡!”

팔뚝이 크게 부풀면서 허리와 다리에 약간 부하가 가해졌지만, 130kg이나 되는 무스 사체가 5m 정도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리고 떨어지는 무스 사체를 창으로 힘껏 올려 쳤다.

촤아악­!

후이니가 갈아주어서 예리해진 창날에 무스가 단번에 동강 나며 식어가는 피와 내장이 터져 나와 사방을 벌겋게 물들인다.

우혹.

……후욱.

거부의 뜻을 내비친 두 마리가 찔끔하더니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다.

하얀 섬광이 번쩍였다 싶은 순간 자기들보다 덩치가 더 나가는 짐승이 반토막 나버렸다.

두 마리 입장에서는 자기 목이 달아난 기분이었다.

…….

우.

우어어.

흐우우우.

아홉 마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우어우어거리더니 뭔가 합의를 나누었는지 털의 색이 약간 허연 한 마리가 앞으로 나왔다.

허연 유인원이 우, 하며 짐승 사체를 가리키자 유인원 무리에서 다섯 마리가 환인에게 다가간다.

=어, 어어.=

후이니가 작게 우려를 나타냈지만, 환인이 묵묵히 서있는 것을 보고 자기 입을 두 손으로 막는다.

유인원들은 환인의 눈치를 보며 짐승 사체를 모두 가져갔다. 땅에 떨어진 내장도 깔끔하게 챙겼다. 그리고 교대하듯 약간 허연 유인원이 고릴라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마리 외에는 움직이지 않는 녹색 유인원들.

나이를 먹어 탈색된 듯 허연 고릴라가 환인을 지나치며 눈짓하고는 호숫가를 느긋하게 걸어간다.

환인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여자들에게 말했다.

“교섭이 잘 된것 같군요. 갑시다.”

허연 유인원은 길 안내라고 하기보다 감시역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여자들은 환인의 말에 이쪽을 묵묵히 쳐다보고 있는 숲의 약탈자들을 힐끔 하고는 황급히 뒤를 쫓아갔다.

=깜짝놀랐다아.=

=……나도.=

=은인님은 어떻게 숲의 약탈자하고 교섭한다는 생각을 하신 걸까…….=

여자들은 환인의 뒤를 따라가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이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언니.=

=그, 그러니?=

=약탈자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데요. 사람들하고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아서예요. 그런 약탈자들에게 원하는 것을 받아내신 거잖아요. 전 아직도 약탈자들이 교섭을 받아들였다는 게 이해 안 돼요.=

=에프 언니. 은인님이 무서워서가 아닐까? 그 커다란 사슴도 단숨에 허리를 동강 내셨잖아.=

=짐승이 괜히 짐승이겠어? 그런 걸 생각할 머리가 없으니까 짐승이잖아.=

=어…… 짐승이니까 힘센 사람한테 주눅 든 게 아닐까 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네.=

힘의 논리는 대다수 동물, 짐승들에게 통하는 절대 명제다.

숲의 약탈자가 비록 사람처럼 행동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짐승. 힘에 굴복했다는 후이니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느끼는 에프니스였다.

그리고 진실도 비슷했다.

유인원들은 자신들을 충분히 갈라 죽일 힘과 도구, 그리고 무리의 정신적인 지도자와 비슷한 힘을 쓰는 침입자를 무척이나 경계했다.

싸운다면 이쪽이 큰 피해를 입을 게 자명한 상황이지만 유인원들도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비취 호수의 숲은 유인원들의 터전. 숲에 조금만 들어가면 암컷과 어린 유인원들의 보금자리가 나온다.

한쪽이 힘을 쓰면 곧바로 전투가 벌어졌을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침입자들이 이쪽을 의식하며 빠르게 물러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유인원들은 침입자들이 자기들과 같은 숫자의 짐승을 잡아 와 그저 지나갈 뿐이라는 것을 어필하는 것에 집중했다.

무리의 이인자는 일종의 성의로 받아들였다. 통행세 같은 것이다.

만약 침입자가 신비로운 선조의 힘을 쓰지 않았다면 유인원들은 결코 교섭을 받아들이지 않았겠지만, 환인을 비롯한 여자들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딱히 교섭이 성공할 거라고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상 성공률은 40%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유인원들의 반응에서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일이 잘 풀렸다고 하니 여자들의 눈에 선망의 빛이 떠올랐다.

“이제부터 조용히 저 뒤를 따라갑시다. 유인원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넵.=

=네.=

대답 대신 에프니스는 여러 심경이 교차하는 복잡한 마음으로 환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하신 분이야…….’

에프니스는 마을 남자를 모두 합쳐도 눈앞의 은인에게 못 미친다고 생각했다.

그저 힘만 세면 다인 줄 아는 멍청한 또래들. 안전만 추구하는 겁쟁이 마을 어른들과 다르게 가진 힘을 자랑하지 않고 과감한 행동력이 있으며 마을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촌장보다 더 다양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

사용하는 언어와 말투는 온화하면서도 지성이 넘쳐흐른다.

혼란에 빠져있던 자신들을 단숨에 진정시키고 담담하게 이끌며 동물마저 따르게 만드는 지도력도 갖췄다. 거기에 영혼사라는 직업까지.

‘호족은 은인님 같은 사람들이 되는 거겠지…….’

평소 사람은 비슷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촌장의 말버릇을 헛소리라고 치부하던 에프니스였지만, 환인과 만나고 나서야 촌장이 옳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슬펐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신 같은 평범한 촌락 계집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괴물에게 더럽혀지기까지 했으니…….

에프니스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하루라도 더 그의 곁에 있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얀 구름이 비칠 정도로 아름다운 호수를 끼고 1시간여를 걸었을 때였다.

…꾸엉……. 꿩…….

“……?”

환인은 익숙한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을 깨닫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꿩꿩……. 꾸엉……!

소리가 점점 커진다. 틀림없다. 땅물개의 울음소리다.

땅물개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이상할 게 없다. 강을 따라 이동하던 것들이었으니 강이 이어진 이 호수가 목적지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늙은 유인원이었다.

쿠흑. 우어어!

땅물개의 울음소리가 커지고 가까워질수록 늙은 유인원의 태도가 사납게 변해간다.

휙휙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피던 늙은 유인원은 급기야 환인 일행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설마 했는데 네놈이!’처럼 배신당했다고 여기는 표정이다.

“…….”

환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일이 잘 풀리고 있었는데 이건 또 무슨 고양이 실타래 가지고 노는 꼴이란 말인가.

촤아악­!

꾸엉! 꾸엉!! 꾸엉!

꿩꿩! 꾸어어엉!!

물보라가 거칠게 뿌려지며 호수에서 다섯 마리의 땅물개가 튀어나오더니 늙은 유인원을 향해 물화살을 마구잡이로 쏘아댄다.

선명하고 뾰족한 물화살이 쏟아지니 늙은 유인원은 기겁하며 숲으로 도망치지만, 재수가 없었는지 옆구리와 허벅지에 각각 한 발씩 물화살을 맞고 나동그라졌다.

그걸 목격한 환인은 미간을 찡그리며 돌도끼를 투척해 늙은 유인원의 머리통을 쪼개버렸다.

뇌수를 뿌리며 늙은 유인원이 풀썩 쓰러지는 모습에 여자들이 히익, 짧게 비명을 지른다.

꿩꿩.

꾸엉!

유인원이 죽자 땅물개들이 뭍으로 올라와 환인에게 반가움을 표시했다. 호의가 명백한 모습에 여자들이 당황해서 눈을 깜빡인다.

=씨코터다…….=

=으, 은인님? 이게 무슨 일인가요?=

“……여러분들과 만나기 전에 우연히 도움을 준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걸 기억하고 있는 듯 하군요.”

=어머. 그러면…….=

“예. 저희가 유인원들에게 끌려가는 거라고 착각하고 도움을 준 것 같습니다.”

여자들의 시선이 죽은 유인원에게 향했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환인을 바라본다.

죽인 유인원의 사체를 땅물개들에게 던져준 환인은 유인원들이 나왔던 저 먼 곳의 숲을 보며 이제야 상황을 이해한 여자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유인원들이 공격해올 텐데 이리된 이상 한 마리라도 숫자를 줄이는 게 좋겠죠.”

=아…….=

“갑시다. 오늘은 휴식 없습니다. 최대한 숲에서 멀어지겠습니다.”

다행인 점은 다섯 마리 중 한 마리만 죽은 유인원의 사체를 물고 호수로 사라졌고, 나머지 넷은 환인을 따라 움직일 생각이라는 것.

상황이 어그러진 마당에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 생각이 없던 환인은 호의와 신뢰가 가득한 땅물개들의 머리를 한 번씩 토닥여주고 호숫가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 *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