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041 쌍둥이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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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의 동굴로 돌아와 요양을 시작한 지 나흘이 지났다.
그동안 열심히 몸을 풀고 적당한 운동을 병행한 덕분에 근육통과 관절통도 완벽하게 나았고, 한기와 훈기의 비율도 10:8 정도가 되어 호브 마을을 공격하기 전과 비슷한 컨디션을 되찾았다.
물론 시간을 전부 몸의 컨디션을 되돌리는 데만 쓴 것은 아니었다.
이튿날부터는 하루 두 번, 몸풀기 겸 녹색 최하급 영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사냥을 나섰다.
그리고 확신한 것은, 아주 옅은 색을 띠는 최하급 영혼은 영혼이 아니라는 거였다.
‘정령이라고 해야 할까.’
그건 어디에나 있었다.
물속에서는 연한 물빛을 띠는 영혼이 있었고 하늘에는 푸른 하늘의 색이 옅게 스며든 영혼이 있었으며 숲에는 연한 녹색의 영혼이, 황야에는 연한 황색을 띠는 영혼이 있었다.
영혼을 발견한 자리에서 비상식량에게 동물 사체를 찾아보라 시켰지만, 10분이 지나도록 찾지 못했으니 영혼이라는 가설은 무의미하겠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정령이라고도 하니 딱히 정령이라고 하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편의를 위해 자연의 영혼은 정령이라고 부르기로 한 환인은 그 즉시 기술의 테스트에 들어갔고, 정령 구슬로 쓴 기술은 영혼 구슬로 쓴 기술과 위력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령은 이미 확인해봤고.’
그다음으로 확인한 것은 지팡이의 유무, 진주색 돌멩이의 유무로 인한 기술 위력의 차이였다.
지팡이 없이도 영혼과 정령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되면서 영혼 폭발과 영혼 화살, 영혼 방패도 쓸 수 있게 되었기에 준비가 끝나는 대로 실험을 개시했고, 나온 결과에 약간의 아쉬움을 내비쳤다.
‘강령의 강화 효과는 같다. 그러나 기술의 위력과 내구는 지팡이를 들었을 때가 더 강하군.’
사슴뿔 지팡이 + 진주색 돌멩이 > 사슴뿔 지팡이 = 진주색 돌멩이 > 맨손의 공식이 나온 것이다.
“흐음.”
영혼 구슬 최대 보유 개수가 12개에 도달했을 때 능력의 성장이 이루어졌다.
그 말은 영혼 구슬 보유량이 늘어날수록 초능력도 강해진다는 뜻.
그럼 다음 성장은 몇 개일 때 이루어지는 걸까.
‘훈련을 열심히 해야겠어.’
능력의 검증을 하면서도 환인은 시간이 나면 후이니와 엔넬을 데리고 짐승을 두 마리씩 잡아 왔다.
그 이상도 잡을 수 있었지만, 이제 영혼 구슬을 확보해놓을 필요가 없어진데다 자매가 ‘다 먹지도 못하는데 다 죽이면 생태계가 망가진다’며 울상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괴물은 그런 거 없이 보이는 족족 다 잡아 죽여야 한다던가.
그렇게 잡아 온 짐승은 여자들의 손에 가죽과 고기로 분리되고, 고기는 에프니스가 훈제로 만들었으며 가죽은 후이니와 엔넬이 무두질해서 다듬었다.
무두질을 (할 수 있는 만큼) 끝낸 가죽은 류히가 재단하고 기워서 옷과 신발로 만들었는데.
‘굉장한 손놀림이군.’
엄지 굵기만 한 뼈를 갈아서 바늘로 만들고 가늘게 자른 가죽을 꼬아서 끈으로 만드는 것은 환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아무튼, 여자들은 맞춘 것처럼 특기를 나눠 가지고 있었기에 나흘 동안 동굴을 떠날 준비는 차곡차곡 이루어졌다.
대장장이 집안의 딸이라서 무두질을 할 줄 알고, 조금이지만 무기도 수리할 수 있는 후이니와 엔넬.
마을 잡화점의 딸인데다 책을 좋아해서 여러 가지 잡다한 것을 알고 있는 에프니스. 훈제도 잡화점에서 팔 보존 식량을 만들며 배운 기술이라고.
마지막으로 손재주가 좋아서 뭐든 간단히 만들어내는 류히.
각자 자신 있는 분야에서 훈제 고기를 만들고 무기를 손질하고 무두질을 하고 옷을 만들고 음식을 만드는 여자들이었지만 환인이 보기에 가장 많은 일을 하는 것은 류히였다.
뼈대만 남아있던 아궁이형 훈연기를 복원한 것은 류히였다.
풀줄기와 이파리로 즉석에서 통발을 만들어 송사리와 적당히 큰 물고기를 잡아낸 것도 류히였다.
진흙을 빚어서 시중에 판매해도 될 것 같은 토기 냄비로 만든 것도 류히였고 환인의 영역이 된 쌍둥이 산 초입에서 야생 향신료를 채집해온 것도 류희와 에프니스 였다.
잡은 고기, 생선 및 향신료로 맛있는 스튜를 포함해 채집한 산나물로 각종 요리를 만들어낸 것도.
짐승 가죽으로 옷과 신발도 만든 사람도.
훈제 고기를 담을 나무 보퉁이와 보퉁이를 씌울 가죽 커버.
물론 물통으로 역할이 바뀐 나무 술병을 담을 짐보따리.
밤의 차가운 이슬을 피할 가죽 망토까지.
출발 준비를 위해 필요한 대다수의 물건을 거의 다 류히가 만든 것이다.
가죽 망토를 꼼꼼하게 만들고 있는 류히를 보며 환인이 감탄했다.
“굉장히 다재다능하시군요.”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배운 기술이지만요…….=
그렇게 말하며 가죽을 이어붙이는 류히의 얼굴은 어찌 표현할 길 없는 슬픔이 묻어났다.
후이니에게 몰래 듣기로 유일한 혈육인 누이가 한 명 있었는데 그 동굴을 탈출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두 언니는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어요. 류히 언니가 안살림을 책임지고 루아 언니는 바깥 살림을 책임지는 식이었는데…….=
더 말을 잇지 않았지만 시무룩해진 후이니는 루아가 죽었을 거라고 믿고 있는 눈치였다.
시선을 돌린 환인은 가죽을 바느질 중인 류히를 바라보았다.
구석기시대 문명인처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류히의 옆모습은…….
‘그 여자와 비슷한데.’
급류에 떠내려온 여자의 시체, 그 몸뚱이의 주인인 여자 영혼과 매우 닮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문득 부자연스러움을 느낀 환인은 그게 무엇 때문인지 금세 눈치챘다.
분명히 여자 영혼의 부탁을 받아서 구하러 왔었다고 했는데 아무도 기억 못 하고 있는 모습.
기억을 못 하는 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서 못 들은 것으로 치부하고 언급하지 않는 건지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환인은 고민했다.
자신이 묻은 여자가 류히의 누이라는 루아가 틀림없다.
요점은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게 둘 것인지, 아니면 하나뿐인 혈육이 죽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알려줄 것인지다.
‘이런 선택지는 곤욕스럽기 짝이 없군.’
자신의 사고가 일반적인 사람과 기준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정답이 없는 상황이 제일 내키지 않았다.
환인 입장에서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류히가 의욕적으로 자신을 이 망할 숲을 벗어나 문명으로 안내해주는 것뿐.
슬픔에 잠긴다면 안내라는 처음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나중에 알린다고 하면…….
‘마을에 도착한 뒤 사실을 알리면 오히려 원망받을 수 있겠지. 마을을 떠나기 전에 알려주면 이용당했다고 여겨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이고.’
인간관계에서 호의란 중요하다.
쌓인 원한 관계가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환인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
어쩔 수 없이 가장 리스크가 적을 것이라 판단되는 선택지를 고른 환인은 여자들이 모두 모였을 때 루아라고 추정되는 여자의 외모를 설명한 뒤에 물었다.
아는 여자냐고.
=…….=
설명을 들은 류히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는 것을 본 환인은 자신의 확신이 맞았다고 생각하며 여자를 묻은 곳으로 모두를 데려가 보여주었다.
“여기에 그 여성을 묻어주었습니다.”
무덤을 보고 굳어있던 류히는 정신이 나간 여자처럼 서둘러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위에 쌓인 돌멩이를 치우기 시작하니 세 명도 달라붙어서 돌멩이를 걷어낸다.
이어서 얕은 봉분을 만들고 있는 흙을 밀어내다시피 하며 치우던 류히는 어느 순간 흙을 뚫고 드러난 창백한 손을 보고 주저앉았다.
=아, 아아.=
‘땅속은 서늘한데다 습기가 별로 없어서 아직 부패하지 않았나 보군.’
다른 세 명도 놀라 손을 멈췄기에 환인이 나서서 흙 속에 묻혀있던 시체를 바깥으로 끌어냈다.
=루아야……. 으흑… 무사히 도망쳤길, 살아있길 빌었는데…… 아아… 아아아아…….=
싸늘하게 식어 주검이 된 누이를 끌어안은 류히는 애간장이 닳아 없어지는 것처럼 구슬피 울면서 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친지를 잃었다는 고통을 한 번 겪어보기도 했고, 감성이 메마른 환인이라도 그 감정은 이해할 수 있었기에 류히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3시간가량 애도하며 누이를 보내준 류히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누이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정도 가지런히 잘라 자신의 머리카락 몇 올로 묶어서 품에 챙겼다.
그 후 홀로 땅을 파헤친 류히는 누이를 다시 곱게 눕히고 넓은 잎을 따로 챙겨와 얼굴을 덮어준 뒤 그 위에 곱게 가려낸 흙을 덮어준다.
“얼굴에 잎을 덮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게…… 안 좋은 것을 더 보지 말고, 미련이 남은 세상에 눈길을 주지 말고 편히 짐승신님의 세상으로 떠나가라는 축원의 의식이에요.=
“머리카락을 챙긴 것은?”
=마을 공동묘지에 있는 언니 부모님의 묘에 같이 넣어두려는 거예요. 시체를 거기까지 옮길 수는 없으니까요…….=
책을 많이 읽어 잡학이 뛰어난 에프니스의 설명이었다.
혼자의 힘으로 루아의 무덤을 재차 완성한 류히는 흙투성이가 된 몸으로 환인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은인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누이 되는 분도 자신의 부탁이 이루어져서 마음 편히 성불하셨을 겁니다.”
=네……?=
오래 울어서 눈 주변이 팅팅 부은 얼굴의 류히가 이해 못 한 얼굴로 환인을 바라본다.
환인은 어떻게 자신이 당신들을 찾을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누이의 죽음을 받아들인 류히가 생각보다 이성적이었고, 이 이야기를 해주면 그녀가 안정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여자들이 깜짝 놀란다.
=어?! 으, 은인님 영혼사셨어요?!!=
귀를 짜랑짜랑 울리는 후이니의 고함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풀면서 물었다.
“영혼사가 무엇입니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안식으로 이끌고 평온을 내려주는 굉장한 분이에요!!=
“……에프니스, 좀 더 자세한 설명 부탁합니다.”
=네? 네네. 영혼사님들은 죽은 사람들하고 소통이 가능한 분들이세요. 후이니 말대로 안식과 평온을 내려주어서 혼재로 변하는 일을 미리 방지할 수 있는 분들이시거든요.=
“그게 중요한 겁니까? 비꼬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몰라서 묻는 겁니다.”
=네에? 어, 저기…… 혼재가 되면 육체도 영혼도 더럽혀지잖아요. 더러워진 몸으로 신님들의 정원에는 들어갈 수 없으니까…….=
이 당연한 것을 왜 모르시지? 하는 얼굴의 에프니스 덕분에 환인은 장례 예법에 관련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현대까지만 해도 장의사와 풍수지리사, 무덤지기는 사람들에게 있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직업의 인간이었다.
선조의 혼이 가문을 돌보아주기 위해서는 풍수가 좋은 무덤터에 적합한 장례 절차, 그리고 무덤의 관리가 필수요소라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오죽하면 삼년상처럼 몇 년간 상복을 입고 무덤가에서 지내는 풍습이 있었을까.
‘사기꾼이 아니라 정말 영혼을 다루는 직업이 있다면…… 저럴 만도 하군.’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 고맙다고 하자 류히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며 환인의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듯 허리를 꾸벅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은인님, 정말 감사합니다! 루아를 안식과 평온으로 이끌어주시다니……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흐윽…….=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아…….=
여자들이 모두 감동하고 감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속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이었다.
고작 몇 마디 멘트로 모두의 호감도가 최대치까지 올라간 게 눈에 보인다.
숲을 탈출할 동안 전폭적인 협조는 물론이고 마을에 돌아가면 마을 전체의 환영도 기대할 수 있겠지.
그후 환인은 원인 불명의 전송 사고로 이 근처에 전송되었으며, 그 때문에 이곳의 문화나 풍습을 전혀 모른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영혼사님이 모르는 게 많으셨구나!=
=후이니!=
무례한 행동이라고 여겼는지 류히가 후이니를 혼내려 하는 것을 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사실이니까요.”
=죄송해요. 착한 애인데 생각한 것을 바로 입에 담는 버릇이라서…… 몇 번이나 혼나도 고치질 못하네요.=
=히힛.=
=칭찬 아니야.=
=……히잉.=
=후이니. 이리 와서 앉아보렴. 너는 정말…… 마을 어른들이 몇 번이나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바로바로 말하는 것을 고치라고 하지 않았니. 우리 목숨의 은인이시고 대단하신 영혼사님께 그런……! 그런데 너는 결국……!=
후이니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류히의 모습은 친족의 죽음을 그 짧은 시간에 완전히 털어낸 것으로 보여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죽은 누이를 끌어안은 채 몇 시간 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모습에 그냥 숨기는 게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을 정도였으니.
물론 유일한 혈육이 죽었다. 누이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슬픔에 잠길 수 있겠지만, 의욕을 모두 잃는다거나 삶의 의지가 없어 자살을 시도한다거나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원주민들이 영혼사라는 직업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알게 된 게 큰 성과군.’
여자들의 이야기만 들어보면 그녀들의 출신 마을은 어업과 농업을 병행하는 인구수 300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다.
300명도 어린아이와 노인을 다 합친 숫자. 그 정도 규모면 작은 시골 마을 수준이다.
그런 시골 어른들의 민간신앙 의존치를 생각해본다면 그녀들이 말한 영혼사라는 직업의 중요성은 절대 낮을 수가 없다.
이 능력이라면 어딜 가도 굶어 죽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금화의 출처나 사용처를 찾는 데도 도움이 될지 모르고.
순금인지 금화가 대검 괴물과 싸우는 통에 아주 미약하게 우그러진 게 신경 쓰이지만…….
작게 고개를 저어 걱정을 털어낸 환인은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 에프니스에게 물었다.
“훈제 고기는 얼마나 완성됐습니까.”
=이제 20일 치 정도 만들었어요. 식용식물도 채취하고 동물도 사냥하면서 나아간다면 한 달은 넘게 먹을 수 있는 양이에요.=
“다들 옷과 신발도 입었고 무기도 적당히 수리했으니…… 이제 출발해도 되겠군요.”
=네.=
이제부터 마을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기쁜지 에프니스가 밀짚색의 풍성한 꼬리를 좌우로 살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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