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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32화 (32/813)

〈 32화 〉 032+ 초승달 바위산

* * *

푸른 표범의 영혼 강령으로 익힌 은밀 행동 수칙에 따라 소리 없이 숲을 나아가던 환인은 곤란한 마음에 적당한 나무 뒤에 숨었다.

‘갈색 괴물이 상상 이상으로 많다.’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7마리를 죽였다.

슬슬 저녁을 넘어 밤이 다가오는 시각. 녹색 괴물의 습성이라면 행동이 뜸해져야 할 텐데 움직임이 더 활발해지고 있다.

‘갈색 괴물은 야행성인가.’

끼끼끼.

끼르르르.

끼겍! 끼겍!

숲이 자기들 안방인 양 시끄럽게 떠들며 움직이던 갈색 괴물 세 마리는 환인이 숨어있던 나무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푹, 푸푹.

끄…….

끽.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머리와 가슴이 창에 꿰뚫려 사망했다.

“…….”

이상하다. 아무리 홈그라운드라지만 이렇게나 방심할 수 있는 건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제집처럼 활보하는 걸까. 아니면…….

작은 마귀같이 생긴 갈색 괴물의 시체를 응시하던 환인은 강령으로 소비한 영혼 구슬 하나를 거두어들이고 암살자처럼 조용히 이동을 개시한다.

이런저런 위험 요소를 고려한다면 돌아갔다가 낮에 다시 찾아오는 쪽이 안전하다.

‘하지만 이미 10마리를 죽였다. 동족이 열이나 사라졌으니 소란이 일어날 게 틀림없어.’

정상적인 생물이라면 주변 경계를 강화하겠지. 환인은 그전에 소굴의 규모를 확인한 다음 해결방안을 모색해볼 생각이었다.

위쪽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비상식량과 눈을 마주친 환인은 다시 조용히 숲을 나아갔다.

푸른 표범의 은밀 기술은 알고 보면 별것 아니었다.

스치거나 밟아서 소리가 날 것 같은 사물의 지식이 전부였으니까.

어느 것에 닿으면 소리가 나지 않고 어떻게 밟으면 조용히 움직일 수 있는지, 그 지식이 숙달된 지금 환인은 어둠 속을 움직이는 한 마리의 검은 퓨마나 다름없었다.

머리카락은 물론 찢어지고 헤지기 시작하는 코트와 정장 바지도 어둠에 물든 듯한 색.

얼굴에 흙을 바르고 소리 없이 움직이던 환인은 아예 갈색 괴물을 눈에 띄는 대로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푹, 서걱.

끼륵.

께르르르…….

수십 차례 실전을 거치며 단련한 환인의 전투 본능은 괴물의 빈틈과 약점을 읽으며 목과 배, 팔다리를 수월하게 베어낸다.

갈색 괴물의 신체 능력은 녹색 괴물과 비슷했기에 그때보다 강해진 지금의 환인에게 적수는 되지 않았다.

비상식량의 도움을 받아 가며 2시간 동안 11마리의 갈색 괴물을 더 죽인 환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번에 죽인 두 마리의 갈색 괴물을 응시했다.

‘영혼 보충만 충분하다면 20마리…… 30마리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듯 한데.’

등 뒤를 영혼 방패로 지키면서 히트 & 런을 반복하면 못할 것도 없다.

소굴에 영혼을 다루는 놈이 있다고 해도 대응법은 이미 환인의 머릿속에 정립된 상태.

무엇보다 숲에 들어온 뒤 3시간 동안 21마리를 죽였다. 이 정도면 소굴에 큰 타격을 준 게 아닐까.

‘소굴 주변을 배회하며 무리의 규모를 계속 깎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한동안 초승달 바위산을 향해 나아가던 환인은 비상식량이 돌아와 흥분한 듯이 꾸, 꾸, 작게 우는 것을 듣고 눈을 빛냈다.

“괴물을 찾은 거냐.”

꾹! 꾸우. 꾸­

“잘했다.”

방향을 가리키듯 한쪽을 보며 꾹꾹 거리는 비상식량을 칭찬한 환인은 방금 갓 파낸 지렁이 두 마리를 먹이로 준 뒤 지금까지보다 더욱 조심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는 지독한 냄새가 앞쪽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것을 눈치챘다.

비 온 뒤의 한여름 축사보다 몇 배는 더 심한 악취.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러닝셔츠로 만든 붕대를 얼굴에 감아 코와 입을 감쌌지만…….

“…….”

냄새를 전혀 막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신경질적으로 풀어낸다.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조금씩 숨 쉬며 악취가 나는 쪽으로 나아가던 환인은 냄새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 진저리치면서 진행 방향을 수정했다.

그의 후각을 괴롭히는 냄새는 갈색 괴물들이 버린 분뇨 구덩이에서 나는 냄새였던 거다.

족히 수십 평은 될법한 커다란 구덩이를 둘러 가던 환인은 분뇨를 버리러 온 갈색 괴물과 마주쳤다.

끽?

어둠 속에서 환인을 발견한 갈색 괴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춤거린다.

쩍!

돌도끼로 갈색 괴물의 머리통을 내려찍은 환인은 분노를 담아 괴물의 시체를 수십 평은 될 법한 분뇨 구덩이로 걷어찼다.

똥오줌이 담긴 그릇과 한데 얽히며 철퍽, 분뇨 속에 파묻힌 갈색 괴물을 뒤로하고 신중하게 움직인다.

……….

바람결에 소음이 실려 온다. 잠시 후에는 빼곡한 침엽수 사이로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까지 포착했다.

‘소굴이 가깝다.’

그보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야행성인 주제에 소굴에 불을 켜서 광원을 확보한다고? 갈색 괴물들은 나뭇잎에 가려져 달빛도 닿지 않는 숲을 맘껏 활개 칠 정도로 밤눈이 밝았는데?

의아해하면서 반쯤 숙인 자세로 불그스름한 빛을 향해 나아가던 환인은 잠시 후 수십 마리의 갈색 괴물이 만들어내는 소음의 진원지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끼고 포복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끼기기기­

꺄갹, 꺅.

꺄르르르­

갈색 괴물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선명하게 귀를 파고든다.

눈 앞의,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풀숲 너머가 갈색 괴물의 소굴임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일부의 풀만 살짝 젖혔다.

‘넓군…….’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소굴의 형태에 환인은 침음을 삼켰다.

엉성하지만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나뭇가지로 지붕을 올린, 갈색 괴물의 덩치에 맞춘 나무 오두막 다섯 채가 시야를 가린다.

일렁이는 횃불에 붉게 물든 오두막 너머로 크고 뾰족한 고분 같은 언덕도 보인다.

거리는 체감상 환인 자신이 숨은 장소에서 200m는 되는 듯하다.

‘저 앞의 오두막과 고분 사이의 거리감을 생각하면…….’

여긴 갈색 괴물의 소굴den이 아니라 마을village다.

환인은 긴장을 유지하며 천천히 물러났다.

어떤 생물이든 집단을 형성하면 그 집단에서 특출난 개체가 나오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영혼을 다루던 그 녹색 괴물처럼 정신적인 면에서 우월한 개체가 있다면 육체적으로 발달한 개체도 있겠지.

자신이 자리 잡은 계곡 동굴과 직선거리로 수십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곤 하지만, 강줄기를 따라 이동하면 곧장 발각되는 위치다.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갈색 괴물의 마을에서 멀어진 환인은 높은 곳에서 갈색 괴물 마을을 살펴볼 생각으로 빙 둘러 언덕을 향했다.

“…….”

높이가 수십 미터는 되는 언덕이라 보초가 있지 않을까 했지만 웬걸, 작은 동물 한 마리도 없다.

끼르르륵­!

끼요오옷!

꺄꺄꺄­

괴물들이 저리 소란을 피우는데 있을 리가 없지.

언덕 꼭대기에 오른 환인은 엎드린 채 훤히 보이는 마을을 살폈다.

갈색 괴물의 마을은 언덕 앞 공터를 중심으로 한 반원 형태였다.

촌락이라면 추장 같은 존재의 오두막을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기 마련인데 갈색 괴물의 마을은 마치 눈사람 같은 형태였다.

언덕이 머리, 마을이 몸통인 눈사람.

영혼 시야를 열고 오두막과 오두막 사이를 오가는 청록색계통의 갈색 괴물의 숫자를 대강 파악한다.

‘오두막은 37채인가. 보이는 갈색 괴물만 쉰 마리가 넘는…… 응?’

끼에에엑­!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언덕 앞 공터. 온몸에 울긋불긋한 염료를 바른 세 마리 갈색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이상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는 북 비슷한 악기까지 가져와 둥둥둥 두드린다.

이상한 춤과 기분 나쁜 북소리에 불쾌한 기분이 엄습하는 것을 느낀 환인은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뭘 하려는 걸까. 상황만 보면 꼭 식인종이 산제물을 바치기 직전 같은…….

이 소란에 모여든 갈색 괴물들이 너도나도 두꺼운 나뭇가지를 가져와 공터 한복판에 쌓아나간다.

충분히 나뭇가지가 쌓인 듯, 한 마리가 횃불로 불을 지르자 작은 캠프파이어 수준으로 불길이 일어나고, 온몸에 분장 같은 것을 한 세 마리 괴물 중 한 마리가 초록색의 이파리 묶음을 가져와 불길 속으로 집어 던졌다.

“…….”

보기에도 해로운 황색 연기가 풀풀 피어오른다. 그러자 불 가에 모여있던 갈색 괴물 수십 마리가 마약 파티를 하는 것처럼 단체로 괴상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 걸까.

환인이 숨어있는 언덕 아래 동굴, 거기서 4명의 벌거벗은 여자가 갈색 괴물의 손에 끌려 나왔다.

전부 머리에 짐승의 귀가 달려있고 엉덩이에도 짐승의 꼬리가 붙은, 여기까지 길 안내를 해주었던 여자 영혼과 흡사하게 생긴 사람들이다.

불가에 몰아넣어 진 여자들은 서로 바짝 붙어 오들오들 떨기만 한다.

몇몇 갈색 괴물이 나뭇가지로 몸을 찌르자 여자들은 그때마다 움찔, 흠칫 떨면서 눈물을 흘린다.

……! ……!!

……!!

………!

몇몇 여자가 화난 얼굴로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은데 다른 소음에 뒤덮여 들리지 않는다.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갈색 괴물들은 끽끽 웃으며 너도나도 나무 작대기로 여자들을 찌르며 가지고 논다.

“…….”

환인의 시선은 둘이나 세 가지 색으로 분장한 갈색 괴물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놈들이 주술사 같은 놈들인가.’

물론 지구의 밀림 오지에 사는 원주민들의 주술사 같은 게 아닐 거다.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봐야겠지. 그런 게 세 마리에…….

‘괴물이 더 모여드는군.’

공터를 거의 절반이나 메운 갈색 괴물 군집.

족히 수백 마리는 되어 보인다.

영혼 폭발과 영혼 화살, 영혼 방패가 있고 영혼을 계속 수급할 수 있어도 훈기의 용량 때문에 사용 횟수는 정해져 있다.

“…….”

승산을 셈해보던 환인은 나설 생각을 접고 공터에서 벌어지는 일을 계속 지켜본다.

공터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불 가에 모여있던 여자들의 상태도 조금 이상해졌다. 불빛에 물든 색이 아니라 열이 오른 것처럼 몸이 불그스름해졌고 서로 몸을 기대 지탱하며 다리를 떤다.

‘녹색 이파리는 마약 같은 거였나.’

마치 약에 취한 것 같은 표정. 여자들이 하나둘 주저앉기 시작하니 갈색 괴물들이 더 크게 웃고 떠들며 소란을 일으킨다.

“……!”

그때 환인은 더욱 몸을 낮추고 숨을 죽였다.

언덕 아래에서 일곱 마리가 더 나왔는데 그중 다섯 마리가 유별나게 컸던 거다.

흡사 갈색 괴물을 서너 배 확대한 것 같은 모습.

키는 환인 자신과 비슷할 정도에 덩치는 환인의 두 배. 군살과 근육이 뭉쳐져 근육 돼지라고 할 법한 체격이다.

환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저것 한 마리가 회색 괴물과 비슷한 힘을 지니고 있다면 혼자서 갈색 괴물 마을을 터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부 나무 오두막이니 불을 지른다면 소탕은 쉽겠지만…….’

여긴 죄다 숲이다. 마을에 불을 지르면 환인 자신도 거기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아아악­!

꺄아아아……!

예상했던 장면이 벌어진다.

덩치 큰 갈색 괴물 다섯 마리가 연기에 취한 여자를 하나씩 붙잡고 교미를 시작한 것이다.

황색 연기에 최음성분도 섞였는지 여자들은 순식간에 땀투성이가 되어 큰 갈색 괴물에게 유린당하기 시작했고 남은 두 명은 몸에 울긋불긋 염료를 칠한 다섯 마리 작은 괴물에게 난폭하게 휘둘러진다.

“…….”

그 광경을 지켜보던 환인은 지독한 불쾌감에 휩싸였다.

회사의 정신 나간 후배가 잡숴보라며 들이밀던 NTR 장르의 에로 책과 다른 의미의 불쾌감.

마치 개나 돼지 같은 동물에게 강제로 당하고 있는 여자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환인은 주위가 조용해질 때까지 언덕 위에서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큰 괴물들이 여자를 희롱할 때 다른 갈색 괴물들은 동족 암컷들과 붙어먹었다.

그 후 여자들이 잡아먹히는 게 아닌가 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약 두 시간 가량 난교 파티가 벌어진 뒤에는 다른 곳에서 사냥해왔는지 괴물들은 동물과 짐승 몇 마리를 불구덩이에 집어 던져 구워 먹은 거다.

당연하게도 고기는 덩치 큰 괴물과 염료를 바른 괴물들에게 절반 이상 돌아갔고 나머지는 수백 마리의 갈색 괴물들이 아귀처럼 다투면서 뜯어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고기를 먹은 것은 수백 마리의 괴물 중 채 1/3도 되지 않았다.

힘이 약하고 어린 괴물은 고기 잔치에 끼이지도 못한 거다.

희롱과 포식이 끝나고 갈색 괴물의 정액으로 범벅이 된 여자들은 질질 끌려 언덕 아래 동굴로 사라졌다.

공터에 모인 괴물들도 축제가 끝난 것처럼 하나둘 오두막으로 돌아간다.

그 후 3시간.

새벽의 군청색에 휩싸인 갈색 괴물의 마을이 조용해졌을 때 환인은 소리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저 마을을 부술 방법은 하나뿐이다.’

갈색 괴물 마을에서 어느 정도 떨어졌을 때 환인은 강령을 쓰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최하급 영혼 구슬은 갈색 괴물의 영혼으로 리필한 덕에 시간이 넉넉하지만, 하급 구슬인 푸른 표범과 야크의 영혼은 유지 시간이 2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광란의 시간을 지켜보며 세운 계획을 실행하려면 하급 영혼 구슬은 필수다.

꽥꽥!

“……!”

나무와 숲, 바닥의 형태를 유심히 기억하며 달려 나가던 환인은 비상식량의 신호를 듣고 방향 전환, 얼마간 나아간 뒤 스파이크 테일 피그 한 마리가 주둥이로 나무뿌리를 파헤치는 것을 발견하고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흡!”

아직 끝나지 않은 강령 효과의 힘으로 돌도끼를 스파이크 테일 피그의 머리에 투척한다.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돌도끼는 스파이크 피그 테일의 옆머리에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깊게 틀어박혔다.

쩍­

꾸이이익­!!

갑작스러운 극통에 발광하기 시작한 스파이크 테일 피그.

사납게 휘둘러지는 가시 꼬리를 피해 오른쪽 뒷다리에 깊은 상처를 내자 발악이 더욱 심해진다.

가장 무서운 질주를 봉쇄한 이상 더 조심해야 할 일은 없다.

재차 휘둘러지는 가시 꼬리를 창으로 쳐내 잘라버린 환인은 앞다리마저 베어 넘어트린 뒤 망설임 없이 버둥거리는 스파이크 테일 피그의 눈에 창을 찔러넣어 죽였다.

"좋아."

무한에 가까운 스태미나를 주는 영혼을 회수한 환인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방향에는 동쪽 쌍둥이 산이 우뚝 서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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