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030+ 쌍둥이 산
* * *
쿠르르르르…….
환인은 급류가 바위에 부딪혀 내는 소리를 들으며 여자의 시체로 다가갔다.
“…….”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꼬리뼈가 있는 부분에서 기다란 털 뭉치가 돋아나 있었다.
물에 흠뻑 젖은 그것을 만져보니 속에 뼈가 만져진다.
이 세상의 사람인가.
손목을 잡아봤지만 맥이 뛰지 않는다. 경동맥이 지나는 목 부분을 만져봐도 마찬가지.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 끌어당겨 자갈밭에 눕힌 환인은 크게 부푼 유방 사이 가슴에 손을 얹어 의무적으로 심폐소생술을 시행한다.
“……후우.”
10분가량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지만 여자가 살아나는 일은 없었다.
여자의 시체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확인해보니 가느다란 팔과 다리 곳곳에는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거나 긁힌 상처가 가득했다.
발은 특히 심각했는데 뼈가 드러날 정도로 찢어진 상처가 양발에 잔뜩 있었다.
‘알몸으로 숲을 달린 건가.’
두부에 타박상이 보이지만 이게 직접적인 죽음의 요인은 아닌 거로 보였다.
아마도 정신을 잃고 급류에 떠내려오다 바위에 부딪혔고 그대로 익사한 거겠지.
환인의 시선이 시체의 무릎과 손바닥, 팔꿈치, 등을 훑는다.
마치 맨살이 땅에 눌리고 쓸린 듯한 자국들.
해초처럼 얼굴을 뒤덮은 갈색 머리카락을 젖히자 상당한 외모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멍 자국과 터진 콧잔등, 입술.
“…….”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던 환인은 여자의 무릎을 잡고 좌우로 벌렸다.
그러자 살집 있는 대음순이 벌어지며 속에 들어있었을 점도 있는 액체가 주륵 흘러내렸다.
시체에서 멀어진 환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여자의 죽음에 화난 것은 아니었다. 면식도 없는 사람의 죽음에 슬퍼할 만큼 환인의 정신은 멀쩡하지 않았으니까.
환인의 한숨은 이 숲에 존재하는, 사람을 적대시하는 생물체의 존재를 향한 것이었다.
짐승 꼬리와 귀가 있어서 사람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사람처럼 생겼으니 사람이겠지.
환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몸뚱이의 주인으로 보이는 영혼은 역시나 안 보인다. 있었다면 아까 동굴에서 살폈을 때 발견했을 거다.
심각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죽은 여자의 시체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명백한 폭행의 흔적과 몸에 난 상처들.
한 가지 시나리오가 손쉽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포로로 잡힌 여자들. 가혹한 행위. 견디다 못해 호우가 내리는 틈에 도망치는 여자. 숲을 달리며 입은 상처들. 급류가 흐르는 강에, 혹은 절벽에 도달한 여자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대로 급류에 뛰어든다.
“…….”
팔짱을 낀 환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근처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흔적을 찾기 위해 밀림에서부터 줄곧 움직이던 환인이었지만, 찾던 자들이 같은 인류에게 적대적일 거라는 가설은 미처 세우지 못했다.
환인의 시선이 벌거벗은 여자의 몸을 다시 훑는다.
C컵은 될듯한 젖가슴. 남자 대부분이 매력으로 느낄법한 옆구리의 미약한 군살. 허벅지도 통통하다.
‘영양 상태가 좋아.’
그렇다고 신분이 높은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손과 발에 난 생활의 굳은살과 생채기는 족히 10년은 넘었을 삶의 흔적이다. 높은 신분이라면 손가락이 매끄럽다거나 특정 무기를 오래 사용하며 박힌 굳은살이 있어야지.
여자의 외모는 아무리 잘 봐줘도 20대 초중반. 외모가 뛰어난 게 의아스럽지만, 이 세계의 평균 외모가 저 정도일 가능성도 있으니…….
어쨌거나 현대사, 과거사에 여자는 지켜야 할 존재이자 귀중한 재산 취급이었다. 인구수 증가에 중요한 요소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니까.
그런데 그런 여자를 이렇게 다루다니.
의복이 없어 문명 수준을 짐작할 수 없지만, 포로나 성노예에게 의복조차 주지 않을 정도라면…….
‘가설이 너무 극단적이군.’
머리를 굴리던 환인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할 일은 아니다.
이 여자는 숲에 들어왔다가 재수 없게 회색 괴물 같은 놈들에게 붙잡혀 패악질을 당했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최악을 대비할 필요는 있다.
현재 환인이 낸 가장 최악의 가정은 이 세계의 인류가 매우 야만적이고 낙후된 문명과 사고방식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 가설대로라면 환인은 몇 달, 혹은 몇 년이든 숲에 머무르며 초능력을 기를 생각이었다.
문명에 접촉했는데 힘이 없어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떨어지는 것은 사양이니까.
실제로 지난 5일간 명상을 반복한 끝에 보유 영혼 구슬 개수가 10개에서 11개로 늘어난 참이다.
진주색 돌멩이의 효과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명상만으로 초능력이 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된 마당이니 허무맹랑한 계획은 아니다.
‘지금 확인해보아야 할 것은…….’
이 여자가 무엇에게서 도망쳤는지다.
괴물이든 사람이든 누군가에게 납치당한 후 도망친 경우라면 도망친 곳에 비슷한 신세의 여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포로가 있고, 그 포로를 탈출시켜 은혜를 입히면 문명으로 가는 길 안내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대화가 통할지 의문이지만 적어도 외모 때문에 차별받지는 않겠지.’
환인은 여자 시체를 한 번 쳐다보곤 흑단창을 가져와 땅을 파기 시작했다.
30분에 걸쳐 여자의 시체가 들어갈 만한 구덩이를 판 환인은 여자를 고이 묻어주고 나무작대기를 가져와 꽂아서 묘비도 만들어주었다.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행동 방침에 큰 도움이 될 단서를 몸으로 알려준 여인이다.
또 시체를 방치하면 부패하면서 온갖 나쁜 세균을 주변에 퍼트릴 텐데, 이 장소에서 어쩌면 몇 년을 더 지내야 할지 모르는 마당에 아무렇게나 방치할 수는 없다.
‘땅에 묻는 풍습이 없는 건 아니겠지.’
감히 우리 XX를 땅에 묻어 모욕해?! 하고 불특정 다수가 덤비는 상상을 하던 환인은 실없다고 생각하며 여자의 무덤가를 서성이는 비상식량을 부른 뒤 걸음을 옮겼다.
분지는 환인의 예상보다 더 엉망이었다.
5일간 내린 호우로 인해 땅의 면적이 80%가량 소실된 것이다.
구릉지처럼 움푹 들어간 지형은 죄다 흙탕물 혹은 탁한 호수나 저수지가 되어있었고, 높이가 꽤 높은 편이었던 구릉만 섬처럼 수면 밖으로 솟아 나온 모양새다.
그리고 그러한 섬을 잇는 바닷길 같은 통로들.
몇몇 물구덩이에는 믿을 수 없게도 악어 비슷하게 생긴 파충류가 가장자리에서 나무토막처럼 가만히 있었다.
처음에는 진짜 나무토막인 줄 알았다. 색도, 가죽 질감도 쓰러진 나무의 그것이었던 거다.
“…….”
폭이 5~10m 정도밖에 안 되는 섬 지형에서 3m 크기의 대형 나무 악어를 상대하는 상상을 해보던 환인은 고개를 저었다.
10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 땅에서 악어를 상대하는 것은 자살이나 마찬가지다.
지구의 악어도 질주 속도는 인간보다 조금 느린 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세상의 악어는 어떤지도 모른다.
더욱이 악어의 공격 습성은 안 보이는 데서 갑작스러운 습격인 만큼 저렇게 탁한 물이 가득한 장소는 악어의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
계곡 근처 높은 언덕에서 물바다가 된 분지를 바라보던 환인은 비상식량이 날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팔을 들었다.
푸드드득.
꽤괛.
간만의 비행에 흥분했는지 몸을 들썩이는 비상식량을 토닥여 진정시킨 환인은 분지에서 서식하는 짐승 그림을 땅에 그려놓고 물었다.
“어떤 놈들을 봤지?”
꽷! 꾸엣.
5일 동안 쉬는 시간에 여러 교육을 한 보람이 있어 비상식량은 흡혈마와 재규어, 낙타조 그림을 앞발로 움켜잡듯이 가리켰다.
그리고 그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꽥? 하며 고개를 갸웃갸웃한다.
‘본 게 더 있나.’
환인이 알고 있는 짐승과 괴물 그림을 차례대로 그리고 있으니 곧바로 꽥. 꽤괙하면서 개구리 인간과 도마뱀 인간 그림을 발로 팍팍 때리며 우는 비상식량이다.
알고 있는 모든 짐승의 그림을 그린 뒤에도 ‘더 없어?’하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행동에 환인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렇게나 많은 비가 쏟아졌다. 대호수가 범람했고 개구리 인간과 도마뱀 인간이 분지까지 흘러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문제는 비상식량의 반응으로 보아 환인 자신이 본 적 없는 생물도 분지에 유입되었다는 거다.
그때 환인의 시야 가장자리에서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섬과 섬을 잇는 좁은 길을 따라 신중하게 이동하던 들소 한 마리가 옆의 흙탕물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나무 악어에게 발이 물린 채 끌려들어 간다.
들소는 버둥거리며 안간힘을 다해 버티지만, 나무 악어의 힘이 대단한지 맥을 추지 못하고 물속으로 빨려들듯이 들어가 버렸다.
수면이 거칠게 튀어 오르다 잠시 후 번져 나오는 피와 함께 잠잠해진다.
“…….”
환인은 미련을 버리고 서쪽 쌍둥이 산을 향해 몸을 돌렸다.
물난리를 피해 서쪽 쌍둥이 산으로 피한 짐승이 많을 것 같아서 안전장치를 해줄 영혼 구슬 몇 개를 확보하려 했는데, 저런 곳에서 사냥할 바에 그냥 산을 오르는 게 나아 보인다.
숲이나 다름없는 쌍둥이 산 초입에 도착한 환인은 공기가 조금 이상한 것을 느꼈다.
말이 안 되는 표현이지만, 뭔가 팽팽하게 당겨진 물속을 나아가는 기분이다.
직장 면접을 위해 대기하던 대기실, 혹은 수능 시험장의 시험 시작 10분 전 분위기와 일맥상통하는 게 있다.
‘긴장감인가.’
천천히 걸어 올라가던 환인은 파사삭, 풀숲이 크게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늑대 사이즈의 산고양이가 튀어나오는 것을 목격하자마자 두 손으로 창을 움켜쥐었고.
샤아악!
스라소니를 닮은 산고양이는 그런 환인을 보자마자 하악질을 하더니 냅다 도망가버렸다.
“……!”
의아해할 틈도 없이 산고양이가 튀어나왔던 쪽에서 기척을 감지한 환인은 몸을 크게 낮추는 동시에 창을 있는 힘껏 풀숲에 찔러넣었다.
푸욱
창끝이 무언가를 찌른 느낌을 포착하자마자 번개같이 창을 회수, 세 번을 연달아 퓨퓨퓻 찌른다.
캬아아앙!
풀잎이 흩날리는 가운데 찢어지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세 번의 공격 중 두 번이 명중한 것을 느끼자마자 환인은 펄쩍 뛰듯이 뒤로 크게 물러섰고, 직후 삵 무늬를 닮은 고양이과 맹수 두 마리가 풀숲에서 뛰쳐나왔다.
도망친 산고양이보다는 작았지만 시베리아허스키보다는 큰 짐승들이 환인을 보고 흠칫 놀란다.
쫓던 놈이 반격해온 줄 알았는데 웬 이상한 놈이 나타나서 어리둥절해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이 삵 무늬 짐승들의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번쩍, 창이 섬뜩한 반원을 그리며 왼쪽 삵 무늬 짐승의 앞다리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꺄아아오옹!!
뼈가 반쯤 긁힐 정도의 절상을 앞다리에 입은 삵 무늬 짐승이 고꾸라지는 동시에 다른 한 마리가 캬아앙 포효를 지르며 점프, 환인을 덮쳤지만.
“흡!”
환인은 비슷한 타이밍에 백스텝을 밟는 동시에 삵 무늬 짐승의 턱 아랫부분을 노리고 창을 섬전같이 찔러넣었다.
비를 피해 동굴에서 머무르던 5일간 열심히 수련한 보람이 있어 짐승의 턱 아래쪽으로 창날이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진다.
케겍……!
창날이 정수리를 뚫고 튀어나온 삵 무늬 짐승의 숨이 그대로 끊어졌다.
창을 휘둘러 사체를 옆으로 팽개친 환인은 기동력을 완전히 상실한 삵 무늬 짐승에게 다가간다.
캬오오 성난 울음소리를 지르며 위협하는 삵 무늬 짐승.
환인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옆구리를 찔러 심장이 있을 것 같은 장소를 휘저었고, 짐승은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며 몸을 배배 꼬다가 축 늘어졌다.
그렇게 간단히 두 마리를 해치운 환인은 잠시 귀를 기울였다가 풀숲을 창으로 쳐서 베었다.
2m 가까이 자란 풀이 깔끔하게 쓰러지며 왼쪽 눈과 가슴에 찔린 흔적을 가진 채 죽어있는 삵 무늬 짐승이 드러난다.
쌍둥이 산에 도착한 뒤로 처음 보는 짐승들인데 예상보다 훨씬 쉽게 사냥했다.
‘최하급 영혼의 짐승들인가.’
아니면 육체 단련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것일까.
생각하는 사이 사체에서 모습을 드러낸 영혼은 최하급이었다.
역시 최하급 영혼이라 약한 거였다고 생각하며 영혼을 구슬로 갈무리한 환인은 운무에 일부가 가려진 산을 올려다보았다.
왠지 서쪽 쌍둥이 산의 세력 구도가 무너져 무법지대가 된 느낌이다.
처음 도망치던 스라소니 닮은 산고양이가 스펙상 삵 무늬 짐승보다 뛰어나 보이던데 실상은 1:3으로 쫓기는 입장이었으니까.
그게 산 전체에 긴장감이 팽배한 이유 같다고 생각하며 환인은 한층 조심스럽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흡!?”
환인은 머리 위에서 들린 바람 가르는 소리에 짊어지고 있던 짐승 사체를 놓는 것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퍽!
캬아아앙!
창대에 묵직한 느낌이 밀려오는 것과 동시에 목을 얻어맞은 재규어가 울부짖으며 나동그라진다.
환인은 식은땀이 쫙 솟는 것을 느꼈다.
하늘에서 경보기 역할을 해주던 비상식량이 꽥꽥 울기에 전후좌우만 경계하고 있었는데 설마 나무 위에서 떨어질 줄이야.
이곳의 재규어는 나무와 흡사한 갈색이어서 발견하는 것이 늦었다.
푸욱
케엑.
창대에 목을 얻어맞아 반신 마비가 왔는지 어기적허우적거리는 재규어의 숨통을 끊은 환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재규어의 영혼을 갈무리했다.
이걸로 11개의 영혼을 모두 확보했다.
11개 중 8개가 최하급이고 하급은 푸른 표범(은밀 행동)과 야크(체력 위주 신체 강화), 재규어(각력 증가) 뿐이었지만, 11시간 유지되는 영혼 구슬을 11개 확보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한 환인이었다.
“비상식량. 경계 감시 잘 부탁한다.”
꽸!
환인은 풀줄기로 만든 끈을 재규어의 뒷다리에 묶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 단검으로 배를 갈라 내장을 모두 긁어낸 뒤 목 주변을 길게 잘라 피가 줄줄 흘러나오게 조치해놓는다.
여기까지 짊어지고 오던 뿔 없는 회색 숫사슴 같은 짐승의 사체 또한 재규어와 똑같이 손질했다.
두 마리를 합치면 고기만 50kg은 넘게 나올 것 같은데, 둘 다 몇 안 되는 무채색 계통의 순수한 백색 고기인지라 버리기 아깝다.
‘쓴 매운맛 더덕 뿌리도 확보했으니.’
일단 계곡 동굴까지 가져가기만 하면 거기서 5kg은 앉은 자리에서 구워 먹을 수 있을 거다.
오랜만에 매운맛을 맛볼 생각을 하자 입가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떠오르는 환인이었다.
“…….”
그게 어색한 듯 입가를 매만지던 환인은 두 마리의 사체에서 피가 거의 다 빠진 것을 확인하고 덩굴로 사체를 칭칭 감은 뒤 질질 끌면서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