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029 쌍둥이 산
* * *
땅물개의 영혼이 몸에 깃들며 머릿속이 차갑게 식힌 탄산수에 들어간 것마냥 찌릿찌릿하다.
입을 열었다간 한여름 더위 속에서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탄성이 흘러나올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숨까지 멈춘다.
조용히 지팡이를 들어 올린 환인은 배를 훤히 드러낸 채 누워 자는 흡혈마 네 마리를 조준했다.
그리고 중하급 영혼 구슬 두 개와 하급 영혼 구슬 두 개를 사출.
“쾅.”
두둥 콰쾅!!
네 번의 폭발을 일으켰다.
푸히히히힝!!
푸르륵?!
이히히힝!
느닷없는 폭발음에 흡혈마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놀란 듯한 모습으로 주위를 살핀다.
‘굉장한 위력이군.’
땅물개의 강령 효과로 강화된 중하급 영혼의 영혼 폭발은 압도적이었다.
중하급 영혼 폭발의 희미한 회백색에 직격당한 두 마리는 다리가 전부 박살 나버렸고 범위에 걸쳐져 있던 한 마리도 왼쪽 앞다리와 왼쪽 뒷다리가 꺾여버렸다.
하급 영혼 폭발에 휘말린 두 마리도 다리가 하나씩 부러진 중상.
순식간에 무리의 절반이 전투 불능에 빠졌지만, 흡혈마 무리는 투지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피부가 찌릿찌릿할 정도의 살기를 발산했다.
이히히히힝!
두두두두두……!!
유독 덩치가 큰 검회색의 흡혈마가 환인을 발견, 앞다리를 번쩍 치켜들며 울음을 터트린 뒤 남은 흡혈마들과 함께 지축을 울리며 환인을 향해 돌진을 개시했다.
흉흉한 송곳니와 이빨을 드러낸 채 시뻘건 눈을 빛내는 것으로 보아 분노가 머리끝까지 오른 상태.
자신들을 공격한 환인을 물어뜯고 찢어 죽여버리겠다는 살기가 가득하다.
환인은 그게 기꺼웠다. 기동력을 살려 돌격이 아닌 사냥을 시작했다면 이쪽이 더 곤란했을 텐데.
게다가 어떤 공격을 받았는지도 신경 쓰지 않고 돌진하는 꼴이라니.
‘그걸 신경 쓴다면 짐승이 아니라 괴물이겠지.’
갈기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흡혈마들의 돌진을 응시하던 환인은 가장 선두를 향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가라.”
작은 목소리와 함께 흡혈마의 영혼 구슬로 만든 영혼 화살이 빛줄기로 변해 목표로 쇄도한다.
푸확!
강화된 중하급 영혼 화살의 위력도 놀라웠다.
희미한 회백색의 빛을 남기며 화살보다 빨리 날아간 중하급 영혼 화살이 선두의 회색 흡혈마를 가슴에서부터 항문까지 일직선으로 관통한 것이다.
‘하급과 중하급의 차이가 이 정도였나.’
즉사한 회색 흡혈마가 먼지를 일으키며 땅을 뒹굴었지만, 다른 네 마리는 동족의 시체를 훌쩍 뛰어넘으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남은 거리는 20m.
환인은 침착하게 다른 흡혈마 두 마리를 향해 하급 영혼 화살을 한 발씩 쏘았다.
씨이잇
푸헤헤헹?!
푸르륵!
중하급 영혼 화살보단 못하지만 한 발은 황토색 흡혈마의 몸통에 정확히 틀어박혔고 다른 한 발은 또 다른 흡혈마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가 갈비뼈가 드러나는 상처를 입혔다.
몸통에 영혼 화살이 꽂힌 황토색 흡혈마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다가 풀썩, 무릎을 꿇었지만, 나머지 세 마리는 더욱 속도를 올린다.
잠시 후 세 마리는 환인의 지척에 도달했지만, 환인도 흡혈마를 맞이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후욱!”
번쩍!
중하급 강령의 강화 효과를 받은 환인이 창이 시린 섬광과 얼룩 모양 흡혈마의 두꺼운 목을 가르고 지나간다.
목에서 피 분수를 뿜으며 쓰러지는 얼룩 모양 흡혈마.
직후 옆에서 튀어나온 갈색 흡혈마가 송곳 같은 이빨로 환인의 머리를 물어뜯으려 했지만, 카각 바위끼리 긁히는 소리가 허공에서 울려 퍼지며 흡혈마의 입질은 무위로 돌아갔다.
푸흐힝!?
갈비뼈가 드러나는 상처를 입은 갈색 흡혈마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적이 공격 사거리에 들어왔고 물어뜯을 수 있다는 확신 속에 공격했는데?
뜨끔!
푸히히히힝!
가슴 속을 불로 지진 듯한 고통에 앞발을 들며 비명을 지른 갈색 흡혈마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반의반도 안되는 생물이 기다란 꼬챙이를 자기 옆구리에 찔러넣고 있는 것을.
공격을 영혼 방패로 막고 창으로 갈색 흡혈마의 심장을 쑤신 환인은 등 뒤에서 오싹한 숨결을 느끼고 즉시 몸을 옆으로 날리는 동시에 영혼 방패를 재차 내세웠다.
콰곽, 콰자자작!
몸 전체를 가릴 만큼 커다란 반투명 판이 검회색 흡혈마의 박치기에 이어 몸통 들이받기에 그대로 박살 난다.
이히히히힝!!
검회색 흡혈마는 자신의 앞길을 막는 보이지 않는 벽에 격노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저 벌레 같은 놈을 짓밟아 죽였을 텐데!
이성이 분노에 잠식된 검회색 흡혈마는 로데오의 말처럼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펄쩍펄쩍 뛰며 뒷발차기를 사방에 날리고 물렸다간 뼈째 잘려 나갈 것 같은 이빨을 딱딱거리며 사방팔방 물어뜯는다.
그 사나운 기세에 겁먹을 만도 했지만, 환인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빈틈을 노려 번개같이 창을 휘둘렀다.
흡혈마의 강령 효과로 증폭된 근력이 은빛 섬광을 만들어낸다.
사신의 낫처럼 휘어진 빛이 검회색 흡혈마의 목을 가르고 지나가자 피가 푸확 뿜어져 나오더니 미쳐 날뛰던 동작이 차츰 느려져 간다.
그리고 풀썩,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는 것까지 지켜본 환인은 창을 크게 휘둘러 창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사지가 박살 나 버둥거리는 다섯 마리의 흡혈마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열 마리의 흡혈마 영혼을 거두어들인 환인은 흑곤봉으로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만 따로 뽑아서 챙겼다.
그동안 만났던 짐승은 숙련된 사냥꾼이라면 그럭저럭 잡아낼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기에 부산물은 딱히 챙기지 않았지만, 흡혈마는 다르다.
송곳니는 거의 팔뚝만 한 길이인데다 강도와 예리함도 뼈치고는 대단하다. 만약 이 세계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세계라면 수요가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땅에 널브러져 있는 열 마리의 흡혈마 시체를 응시하던 환인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계곡으로 향했다.
흡혈마는 하나같이 덩치가 컸다.
지구의 벨지안 드래프트, 더치 드래프트, 클라이즈데일 같은 중종마??馬보다 더 클 정도.
가죽을 벗겨놓으면 여러모로 쓸모 있을 텐데 무두질은 지식이 없어 아쉽기만 할 따름이었다.
‘해가 조금씩 보일 때가 됐는데 이상하게 어둡군.’
계곡으로 돌아가며 진회색으로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환인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설마.”
전투도 아닌데 강령을 쓰는 것은 아깝지만, 짐작대로라면 영혼 구슬 하나를 소비하는 건 문제도 아니다.
흡혈마의 영혼을 강령한 뒤 체력 배분을 하지 않고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바람이 거칠게 귓가를 때리는 소리를 들어가며 걸어서 1시간 거리를 9분 만에 주파한 환인은 거칠게 헐떡이며 밖에 내놓고 건조 중이던 고기를 모두 정장 코트에 담아 동굴에 몰아넣는다.
그리고 서쪽 쌍둥이 산으로 달려가 몸을 덮을 정도로 커다란 잎사귀가 자라는 군생지에 도착, 닥치는 대로 이파리를 긁어모았다.
툭, 투둑. 투두둑…….
“제길!”
굵은 빗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을 느낀 환인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파리를 한가득 품에 끌어안고 미끄러지듯이 산을 타고 내려와 아궁이 형 훈연기를 커다란 이파리로 뒤덮는다.
‘물이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기와 쌓기처럼……!’
이파리 수십 장으로 훈연기를 뒤덮은 순간이었다.
쏴아아아아
꽥? 꽷. 꾸엣!
소나기 같은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비상식량이 황급히 동굴로 피신한다.
환인은 빗속에서 절벽 가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놓은 움막 형 훈연기의 판을 가져와 지붕처럼 만들기 시작했다.
세 장의 폭넓은 판을 엇갈리게 이어 묶은 뒤 살짝 비스듬하게 경사를 넣어 세우자 빗방울이 판을 타라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파리로 덮고 지붕을 세워 훈연기가 빗방울에 직접 맞는 일을 막은 환인은 모닥불을 끄고 훈연 중이던 고기도 빼냈다.
비가 내렸으니 습기로 인해 훈연은 백 퍼센트 실패다. 박테리아와 곰팡이가 퍼지게 만들 바에 그냥 다 빼버리는 게 낫다.
“그나마 훈제가 잘 되고 있었다는 게 위안이 되는군…….”
처음 훈제를 시도한 고기와 다르게 아궁이 형 훈연기에서 훈제하고 있던 고기는 어디 특출나게 물렁물렁한 곳 없이 고르게 말라가고 있었다.
색계통도 백색이고 이상한 냄새 없이 훈제 냄새가 가득 밴 상태.
1/3쯤 훈제된 생고기를 입에 넣고 씹어본다.
‘나쁘지 않아.’
미각은 후각과 어느 정도 이어져 있다던가. 훈제 향이 훈제 맛을 낸다. 식감도 쫀득쫀득한 고기를 먹는 느낌이다.
몸은 비 때문에 푹 젖어버린 상황.
환인은 흑단창을 가져와 훈연기 주변으로 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배수로를 파기 시작했다.
돌을 가져와 제방처럼 쌓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놓고 동굴로 돌아온 환인이었지만, 하늘은 그를 돕지 않았다.
꽥. 꾸엣.
동굴 입구에 앉아 강아지와 터그 놀이를 하는 것처럼 나무막대기로 비상식량과 놀아주던 환인은 동굴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콰르르르르
크게 불어난 계곡물이 굉음을 내면서 빠르게 흐르는 것이 보인다. 근방에 내리고 있는 비가 강 상류에 모여 전부 이곳으로 흐르는 것 같다.
군데군데 소용돌이까지 형성되고 있는 게, 빠졌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워 보이는 광경이다.
“…….”
아궁이 형 훈연기는 진작에 계곡물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천재?災를 두고 성질 낼만큼 환인의 성격은 뜨겁지 않았다. 비가 그친 뒤에 다시 만들면 그만.
그보다 오히려 소나기 같은 비가 그치지 않고 5시간째 내리고 있다는 것에 놀라는 중이었다.
태풍이 올 거라는 전조가 보였다면 이해했을 텐데 어제까지만 해도 화창한 날씨였다.
‘그런데 고작 하룻밤 새 이렇게 변하다니. 이 세계의 비는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지금 상황이 위험한 건가. 땅물개들이 이동하던 것도 이걸 예상해서?’
이리저리 생각하던 환인은 범람한 강물이 절벽을 따라 차오르는 것을 보며 우려를 했다.
절벽 바깥은 구릉지형 분지다. 수위가 한도 끝도 없이 오르진 않겠지만, 그래도 동굴에 물이 들어차는 게 아닐까 걱정되긴 한다.
잠시 생각하던 환인은 좀 더 지켜보자고 생각했다.
여길 나간다고 해서 몸을 피할 장소도 없고 동굴에는 `생`고기만 수십 킬로그램이 쌓여있었다. 이걸 전부 옮길 방법도 없다.
‘다행히 식량은 충분하다.’
‘생’ 고기 수십 킬로그램은 물론 자연 건조 중이던 고기 조각도, 간간이 채집해둔 풀 쪼가리와 열매, 과일 및 야생작물도 다수 있다.
일찍 상하는 것부터 먹는다면 5일, 보존기간이 긴 견과류나 풀뿌리 등을 고려하면 열흘은 동굴에서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꾸우?
나뭇가지를 흔들어주던 환인의 손이 멈춰있자 비상식량이 ‘더 안 놀아주는 거야?’ 하듯이 고개를 갸웃한다.
환인이 나뭇가지를 다시금 흔들자 꽁지깃을 발딱 세운 비상식량이 냉큼 나뭇가지 끝을 물고 신난 것처럼 잡아당긴다.
그러다가 기습적으로 배와 옆구리를 간지럽히자 고양이처럼 발랑 넘어지더니 날개와 두 다리를 바동거리는 게, 흡사 애완동물을 키우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비상식량과 놀아준 환인은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 왼손에는 진주색 돌멩이를, 오른손에는 사슴뿔 지팡이를 쥐고 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기분 탓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하면 서늘한 기운과 따뜻한 기운이 조금 더 많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환인이었다.
한기가 강하면 기술의 위력이 강해지고 훈기가 많으면 기술을 많이 쓸 수 있게 된다고 짐작 중이다.
두 가지 기운을 많이 받아들이면 많이 받아들일수록 더 강해진다는 뜻.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시도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환인은 비가 억수로 내리는 동안 고기 상태를 종종 봐가면서 명상 훈련과 육체 단련을 병행했다.
식사 시간은 따로 정해두지 않고 영혼 시야에 고기가 상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면 동굴 안쪽에 쌓아둔 장작으로 불을 작게 피워 고기를 바로 섭취. 그리고 30분 정도 쉬었다가 배가 꺼질 때까지 육체 단련을 한다.
맨손 전신운동이라 할 수 있는 스쿼트, 버피, 플랭크 3종과 창의 찌르기 연습이다.
육체 단련 후에는 밖에서 내리는 빗물을 미리 만들어둔 나무 그릇에 담아 몸을 닦은 뒤 명상, 상할 것 같은 고기가 있다면 또 고기를 구워 먹고 휴식 후 육체 단련 그리고 명상.
이 루틴을 2일 반복하자 고기는 자연 건조 고기밖에 남지 않았다.
입구의 풀줄기 & 넝쿨 가림막. 중간에 코트와 적당한 이파리로 2차 가림막을 만들어놓은 덕분에 습기가 동굴 안쪽까지 침투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자연 건조 고기가 의외로 오래 가는 중이다.
이틀간 수십 킬로그램의 고기를 먹어가며 육체 단련에 매진했기 때문일까, 환인은 눈에 띄게 잡힌 근육과 조금씩 생기고 있는 식스팩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몸은 어떻게 된 걸까.’
상식적으로 이틀 만에 근육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문가를 대동해 말 그대로 모든 시간을 근육으로 만드는데 투자하고 먹고 싸고 자고 움직이는 것까지 관리하면 일시적으로 근섬유가 펌핑되어 근육이 생긴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이 몸은 그렇게 생긴 풍선 근육이 아니었다.
몸 어느 한 곳 뭉친 느낌 없고 물구나무서서 팔굽혀펴기도 할 수 있을 만큼 신체 밸런스와 감각이 멀쩡한 상태.
의아하긴 하지만 일단은 원인(맨손 전신운동과 단백질 과잉 섭취등)이 있었기에 결과가 나온 것이라 생각한 환인은 훈련 방식을 조금 바꾸었다.
쉽게 상하는 생고기가 바닥났다. 아직 비는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쏟아지고 있으니 식량 조절을 시작해야 할 시점.
육체 단련 쪽에 집중하던 것을 명상에 더 많이 투자한다.
설마 했는데 호우는 정말로 5일간 쏟아졌다.
손가락 굵기만 한 빗방울이 세상에 커튼을 드리운 것처럼 5일 동안 쏟아졌다.
모르긴 몰라도 분지 쪽은 물바다가 되어있지 않을까. 만약 비가 오던 첫날에 동굴을 벗어났다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맞닥트렸을 거다.
비가 그친지 2시간째.
콰르르르르……!
비가 그친 동굴 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계곡물이 폭류처럼 흐르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한다.
절벽을 내려다보니 3미터가량 불어났던 수위가 빠르게 줄고 있었다.
‘서너 시간 뒤면 예전 수위로 돌아가겠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먹구름이 용트림치는 사이사이 푸른 하늘이 보인다. 내리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물러가는 먹구름이다.
‘계곡물이 진정되면 나가서 사냥을 해야 할 텐데.’
동물이나 짐승이 남아있을지 걱정이다.
고기는 자연 건조해놓았던 것까지 오늘 아침에 다 먹어 치웠다. 숙성되다 못해 상하기 시작한 과일도.
남은 것은 보존기간이 긴 구황작물 비슷한 것과 쓴맛 나는 풀 쪼가리와 견과류 약간.
불을 피울 재료도 바닥났기 때문에 전부 생으로 먹어야하는 상황이다.
‘아니, 쌍둥이 산이 있으니까 홍수를 피해서 산으로 도망친 짐승이 있겠지.’
비록 남아있는 영혼 구슬은 하나도 없지만 5일간 단련된 신체는 최하급 영혼을 강령했을 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수준이 되었다.
이 정도면 작은 짐승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아니면 식용 식물이라도 채집하면 될 일이고.
사냥을 대비해 무기를 손질하고 진주색 돌멩이를 쥐고 명상하고 하며 시간을 보내던 환인은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많이 잦아든 것을 느끼고 동굴 밖을 내다보았다.
5일 만에 보는 햇살이 탁류가 흐르는 계곡을 비추고 있다.
“엉망진창이군.”
계곡은 부서진 나무나 쪼개진 바위와 자갈, 폭류가 실어다 나른 펄 등으로 엉망이었다.
수위는 비 오기 전과 비교해 조금 더 많은 수준.
계곡을 전체적으로 자세히 살폈다.
‘……위험은 없나.’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지만, 독충이나 독사 같은 위험 생물은 안 보인다.
무기를 챙기고 비상식량과 함께 동굴을 내려온 환인은 진한 펄 냄새를 맡으며 분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선 분지의 상황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
그러다가 채 열 걸음을 걷기 전에 멈춰서서 눈썹을 찡그렸다.
저 앞에 휘어진 나무, 급류에 반쯤 꺾인 듯 뿌리를 드러낸 나무 둥치에 알몸의 여자 시체가 걸려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자 시체를 보고 놀라 눈썹을 찡그린 것은 아니었다.
“꼬리?”
엉덩이뼈에서부터 자란 듯한 늑대 꼬리 같은 것과, 정수리에 난 짐승의 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