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024 수해외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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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폭은 대호수와 이어진 강줄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좁았다. 고작해야 3m 정도?
수심도 가장 깊은 곳이 허벅지 정도였고 물의 투명도와 색도 대호수와 연결된 강줄기와 비교하면 조금 탁했다. 그래도 청정 1급수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지류??를 시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자세히 살펴본다.
“…….”
개구리 인간이나 도마뱀 인간 같은 괴물은 물론 육식동물의 존재도 없었다.
저 멀리 강가에서 동물 몇 마리가 물을 마시고 있지만, 사슴을 닮은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초식동물의 골격이다.
처음 떨어졌던 밀림과 비교하면 자연스럽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을 잠시 눈에 담고 있으니 사슴을 닮은 동물이 흠칫, 환인을 쳐다보더니 곧바로 도망쳤다.
잡아먹을 방법이 없을까 생각한 순간 귀신같이 눈치채고 도망가는 모습에 환인은 작게 입맛을 다시다가 강에 접근했다.
물에서 이상한 냄새는 나지 않는다. 색도 멀리서 봤을 때는 조금 푸른색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대호수와 마찬가지로 맑고 투명하다.
강을 살펴보고 있으려니 어깨에 앉아있던 비상식량이 폴짝, 물에 뛰어들었다.
얕은 물가에서 꽥꽥거리며 날개를 퍼덕여 물을 몸에 끼얹고 머리를 푸르르 흔들며 몸에 달라붙은 흙먼지를 씻어내는 녀석을 환인은 잠시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지구에 있을 때는 절대라고 할 만큼 비누를 쓰지 않았는데 물에 손을 담근 순간 구정물이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있으니 말라비틀어진 비누 조각마저 간절할 지경이다.
다 씻었는지 물을 퍼 올리는 동작으로 마시는 녀석을 피해 조금 아래로 내려간 환인은 손과 얼굴을 씻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에 흙먼지가 깨끗이 씻겨나가는 느낌만큼은 좋았지만 다 씻고 난 후 얼굴과 손에 묻어나는 기름기 특유의 미끈거림이 참으로 끔찍했다.
대충 바짓가랑이에 손바닥을 문지른 환인은 단장을 끝내고 녹색 깃털의 색감이 더욱 선명해진 비상식량과 함께 강줄기를 따라 강 상류로 걸음을 옮겼다.
하류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지만 일단 지금 흐르는 방향만 보면 푸른불꽃 호랑이가 있는 밀림 쪽이다.
빠져나온 곳으로 다시 향할 이유가 없으니 고를 선택지는 상류뿐.
해가 뜨기 시작하자 야행성 짐승은 사라지고 주행성 짐승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저것도 짐승인가.’
문제는 짐승인지 괴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것들도 출몰한다는 것.
눈이 세 개인 늑대 크기의 개도 봤고 겉모습은 분홍색 집돼지인데 꼬리에 스파이크 클럽같이 생긴 게 달린 짐승도 봤다. 비늘 대신 모피가 달린 악어도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환인을 보자마자 흥분해서 달려들었다는 것.
비늘이 듬성듬성 몸을 뒤덮고 있는 오토바이 사이즈의 두더지를 난도질하다시피 찔러 죽인 환인은 옆머리를 타고 흐르는 땀을 소매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기가 막히는군.”
가슴 부위를 8번이나 찔렀는데도 죽지 않는 질긴 생명줄도 그렇고 눈이 없는 대신 코끝에 난 수염으로 진동을 감지하는지 환인이 있는 방향으로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앞발을 마구 휘두르는데…….
만약 개 떼를 상대하며 전투 능력이 향상되지 않았다면, 돌도끼를 던져 코를 뭉개버리지 않았다면 이기기 어려웠을 만큼 까다로운 놈이었다.
비늘두더지 뿐만 아니었다.
눈이 세 개 달린 개, 환인이 삼안견三??이라고 이름 붙인 짐승은 치타만큼이나 빨랐고 동체 시력도 좋아서 자신의 공격을 다 보고 피하는 느낌이었다.
스파이크 테일 피그는 공격력과 스태미나가 어마어마했다.
스파이크 클럽을 닮은 꼬리가 땅을 칠 때마다 땅이 움푹움푹 파여나갔는데 그런 공격을 쉬지 않고 수십 번을 이어나갔으니까.
전부 다 강함으로 따지면 녹색 괴물이나 짐승 머리 괴물을 동시에 대여섯 마리는 가볍게 상대할 수준.
독사과 같은 산에서 흘러나온 것들이 아닐까 의심하는 환인이었지만 증거는 없다.
“음.”
생각하며 잠시 기다리자 생전의 형태를 유지한 영혼이 사체에서 빠져나왔다.
또 하급의 영혼이다.
“땅 파는 기술이 생길 것 같은데.”
강을 따라 이동 중에 삼안견과 처음 마주쳤을 때 환인은 눈 세 개의 압박에 푸른표범의 영혼을 강령해서 삼안견을 죽였었다.
그때 알게 된 푸른 표범의 강령 효과는 다리 힘의 강화에 은밀 행동의 기술.
개구리 인간의 강령 효과는 수영 기술이었다. 두 꼬리 원숭이의 강령 효과는 나무타기였고 푸른 표범의 강령 효과는 은밀 행동.
모두 생물의 특징이 되는 기술이다. 그러니 거대 비늘 두더지의 기술이 무엇일지 대충이나마 짐작 가는 거다.
아무튼 비늘 두더지의 영혼을 갈무리하는 것으로 환인이 확보한 하급 영혼은 세 개.
삼안견과 스파이크 테일 피그, 그리고 비늘 두더지의 영혼이다.
‘하급 영혼 구슬의 영혼 폭발 위력도 확인하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강령 효과가 아깝다. 하급 영혼을 강령할 경우 최하급 영혼 구슬로 한 것보다 신체 강화가 더 많이 이루어졌으니까.
강령도 무작정 몸을 강화하는 게 아니었다. 강화 부위도, 강화 위력도 제각기 달랐으며 최하급과 하급의 상승 폭도 달랐다.
이를테면 짐승 머리 괴물이나 녹색 괴물은 특색이 없어서 강령을 펼치면 힘, 체력, 지구력 등이 골고루 균등하게 오른다.
개구리 인간이나 푸른 표범처럼 다리힘이 강한 영혼의 경우에는 팔다리의 힘, 근력이 좀 더 높게 오르고 그 외 지구력이나 체력 등은 상대적으로 낮게 오른다.
그간 계속 강령을 하면서 보다 정확한 수치를 알게 됐는데 최하급의 경우 균등한 강화가 이루어지면 5%에서 10% 정도 신체가 강화된다.
하급의 경우는 최대 10%에서 15% 사이.
20% 정도 강화되는 것은 하급이면서 특정 신체 부위가 강한 영혼일 경우다.
어찌 됐든 전투 능력을 더 끌어올려 주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정말 큰 도움이 되니 영혼 폭발로 구슬을 소비하는 것은 아까운 행위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하니 어쩔 수 없군.”
사용한다면 어떤 기술을 얻을 수 있을지 짐작이 가는 비늘 두더지의 영혼 구슬이겠지.
비늘 두더지의 시체를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그대로 두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고기는 몇 시간 전에 잡은 스파이크 테일 피그의 뒷다리와 갈빗대를 확보해놓았다.
이 이상 가져가도 처리할 수 없을 테니 그냥 버려둔다. 버려두면 다른 짐승들이 먹어 치울 테니까.
그리고 서른 걸음 정도 이동했을 때, 강령했던 하이에나의 강화 효과가 끝나고 탈력감이 찾아왔다.
“후우…….”
5시간 동안 3번이나 싸웠더니 진이 빠지는 느낌에 환인은 한숨을 쉬었다.
텀을 두고 강령을 썼다지만 후유증이 차곡차곡 쌓인다. 차라리 연속해서 싸우는 것이 낫지 이렇게 드문드문 싸우니 피로가 줄어들긴 커녕 가중되는 기분이다.
‘후유증이 중첩되지 않으려면 연속 강령은 피해야할 것 같군.’
그보다 강줄기를 따라 이동하고 있는 것이 잘한 행동인지 알 수 없다.
주변 풍경은 사막의 스텝steppe 기후 지역처럼 짧은 풀이 땅을 뒤덮은 가운데 듬성듬성 키 작은 나무가 서있는 형태다.
마을을 짓는 장소로 따지자면 이 장소도 나쁘지 않다. 시야가 탁 트인 덕분에 적의 습격이나 접근을 발견하기에 용이할테고 강이라는 수원도 있으니까.
그러나 바로 옆에 괴물이 득실득실한 밀림과 숲이 있고 거대 갈매기의 활동 범위일 거 같기도 한데다 식충식물의 소굴 같은 산도 있다.
제정신이라면 이런 곳에 터를 잡을 리 없지.
걸음을 옮기던 환인은 강 옆의 야트막한 언덕을 발견하곤 그곳으로 올라간다.
“…….”
언덕 꼭대기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시야가 닿는 끝까지 풍경이 비슷하다.
‘언덕 높이는 약 12m. 그러면 시야가 닿는 지평선까지 거리는 대강 12.4km인가.’
현재 시각은 정오. 마을이 있다면 사람이 만들어내는 흔적…… 예를 들면 밥을 짓거나 음식을 만들 때 발생하는 하얀 연기가 보일 텐데 주위를 모두 둘러봤지만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연기의 특성상 하늘 높이 올라가니 지평선까지 거리보다 더 멀리 있어도 보일 텐데 말이다.
이 근처에서 인기척을 찾기란 요원한 일 같다.
‘행동 방침을 변경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수해를 탈출한 지금, 사람의 흔적을 찾는 것이 목표였는데 상황이 이렇다면 장거리 이동을 염두에 두고 보존용 훈제 고기를 확보하는 것으로 바꾸는 게 좋을 듯하다.
마침 이 근방에는 짐승이 많으니 고기 입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지.
‘강의 수온은 대낮임에도 차갑기 그지없으니 단기적으로 보관도 쉬워 보이고……. 장작으로 쓸 나무도 꽤 있으니 임시 거처로 삼을만한 장소만 발견하면 곧바로 시도해도 괜찮겠어.’
훈연은 부시 크래프트 취미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얻은 기본적인 지식뿐이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훈연 방법 자체는 간단했으니까.
몇 차례 시도하며 감을 잡으면 되겠지.
강줄기를 따라 이동하며 거처로 삼을만한 곳을 찾아보는 환인이었지만, 초원 같은 곳에서 그런 장소를 찾는 것은 어려웠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지겠군.’
걷기 시작한 지 벌써 8시간째, 계획을 변경한 지 3시간째다.
상류랍시고 약한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데다 그사이 2번을 더 싸웠더니 팔다리가 무겁기 그지없다.
이런 와중에 좋은 소식은 독사과 같은 산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애초에 목적했던 100m 높이 정도 되는 산에서도 멀어졌다는 거다.
“…….”
오늘은 그냥 여기서 야영할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환인은 저 앞에 보이는 언덕까지만 가보기로 하고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목적했던 언덕에 올랐을 때.
환인은 가슴이 뻥 뚫리는 감각을 느꼈다.
앞으로는 낮은 산이 산지를 형성하고 있었고 등 뒤로는 저 멀리 지평선까지 구릉지가 펼쳐져 있었다.
때마침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가슴 속의 짜증을 모두 날려버린 것처럼 청량감을 채워준다.
잠깐 고민하던 환인은 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확인하고 손에 쥔 창대에 힘을 주며 강줄기를 따라 산지로 진입했다.
작지만 강이 흐르고 있어서일까, 산과 산이 만나는 지점에 계곡이 형성되어있었다.
계곡의 그늘에 들어서자 작게 한숨이 흘러나올 만큼 시원함이 느껴졌지만, 환인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비상식량을 날려 보내며 탐색을 부탁했다.
“비상식량. 부탁한다.”
꾸엑!
그리고 자신도 주변을 훑어보며 짐승이나 괴물의 흔적은 없는지 유심히 살폈다.
만약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 괴물의 흔적을 발견하면 바로 발길을 돌릴 생각이었다.
‘풍광은 끝내주는군.’
강폭은 10m 정도로 바깥보다 2배가량 넓었지만 수심은 그대로였다.
그런 강의 좌우로 20m 정도 자갈밭이 이루어져 있고 자갈밭 끝에는 각각 높이 20미터가량 되는 돌 절벽이 병풍처럼 서 있다.
‘오늘은 여기서 쉴까.’
계곡 바깥은 기온이 30도에 이르는데 이곳은 차가운 강물의 기운을 머금고 불어오는 바람 덕분에 무척 시원하고 쾌적했다.
이곳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싶을 정도지만 이렇게 넓은 장소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한다는 건 짐승들에게 어서 오라고 팔 벌려 환영하는 것과 다름없다.
꽥!
아쉬워하며 비상식량을 부르려던 환인은 비상식량의 행동에 눈을 가늘게 떴다.
꽥꽥!
자신이 있는 절벽 쪽에서 체공하며 꾸엑거리는 비상식량.
혹시 적이라도 본 건가 싶어 계곡 상류 쪽을 살폈지만, 평지로 이루어진데다 숲으로 들어가는 모양새인 저쪽에 다른 기척은 없다.
영혼 시야를 열어봐도 숲의 색뿐이 안 보인다.
뭘 본 건가 싶어서 고개를 들었을 때 환인은 미간에 힘을 주었다.
비상식량이 사라졌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혹시 독수리 같은 게 비상식량을 채간 건가?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에 비상식량을 크게 부르려 했을 때였다.
꽥!
넝쿨이 늘어진 절벽에서 갑자기 비상식량이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설마, 동굴?”
꽥꽥!
비상식량이 얼른 올라오라는 듯이 두 번 울고 다시 넝쿨 속으로 사라졌다.
환인도 설마 하는 마음에 절벽을 타고 비상식량이 사라진 쪽으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작게 탄성을 흘렸다.
커튼처럼 드리워진 풀줄기와 넝쿨, 나무뿌리가 안쪽으로 이어지는 깊은 동굴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잘했다.”
꽤괙!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상식량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자 비상식량도 기쁜 듯이 환인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빈다.
비상식량이 발견한 동굴의 높이는 땅에서 5m 정도.
두 꼬리 원숭이의 나무타기 기술은 이런 울퉁불퉁한 절벽쯤은 약간 가파른 경사 정도로 만들어주었기에 환인에게는 문제도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 상황에서의 안전장치가 되어줄 것이다.
땅을 기어 다니는 짐승 관점에서 5m 높이는 결코 오르지 못할 통곡의 벽일 테니까.
혹시 다른 생물의 보금자리는 아닐까 조심해서 동굴 입구를 살핀 환인은 마치 가림막처럼 입구를 막고 있는 풀줄기를 젖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는 어른이 상체를 숙여야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좁았지만, 안쪽은 예상 이상으로 넓었다.
암석으로 이루어진 동굴은 지렁이가 기어가듯 구불구불한 형태였고 높이는 약 3m, 폭은 2m였으며 안쪽에는 곰도 머무를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이 있었다.
“안쪽도 시원하군…….”
바깥 기온은 26~30도를 오가는 느낌인데 이 안쪽은 23도 정도로 선선하다.
형태만 보면 완벽하게 인위적인 동굴이다. 그런데 그런 인위적인 흔적은 전혀 없었다.
바닥이나 안쪽 공간, 벽 등을 살펴봐도 누군가가 오가며 남긴 흔적도 없다.
짐승이 살았다면 누린내나 배설물, 먹다 남은 뼈다귀 등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것도 없이 약간의 먼지만 쌓여있을 뿐, 그냥 깨끗하다.
꽥!
꽥… 꽤액…… 꽤애액…….
비상식량의 울음이 에코가 되어 울리는 것을 들으며 동굴 내부를 살피던 환인은 흡족한 마음에 작게 웃음 지었다.
햇빛이 한 점도 들지 않지만, 영혼 시야가 있어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영혼 시야가 없더라도 햇빛이 문제일까. 이런 장소라면 며칠이 아니라 몇 달, 몇 년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을 텐데.
다시 입구로 돌아간 환인은 천연 가림막을 자연스럽게 손본 뒤 안쪽으로 들어와 5평 남짓한 공간 한쪽에 식량 보따리와 무기를 내려놓고 그대로 쓰러지듯 누웠다.
우드득.
그동안 쉴 새 없이 혹사당한 척추가 비명을 지르는듯한 고통마저 달콤하다.
“후우우…….”
꾸엑.
자신의 옆구리에 달라붙는 비상식량을 끌어안은 환인은 그동안 못 자둔 잠을 보충할 기세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째깍째깍째깍…….
“…….”
시계의 바늘이 움직이는 소리에 깬 환인은 가장 먼저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상쾌한 기상을 맞이한 게 얼마 만이지.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났을 때 특유의 느낌을 만끽하던 환인은…….
“……!”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에 벌떡 일어나 황급히 사슴뿔 지팡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뱉었다.
지팡이의 뿔 부분에는 영혼 구슬 다섯 개가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다. 체감상 12시간은 스트레이트로 잔 느낌이었는데 영혼 구슬이 아직 유지되고 있다니.
시계를 확인하자 바늘이 오후 8시 10분을 가리키는 중이었다.
6시쯤에 잠들었으니 2시간 정도 잔 셈이다.
일어난 환인은 적당한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 상태에 감탄했다.
겨우 2시간을 잤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컨디션이 최상이다.
지구에 있을 때도 이만큼 깨끗한 잠을 잔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 이런 장소에서 이만큼이나 꿀잠을 자다니, 속으로 피식 웃은 환인은 동굴 안을 둘러보다가 있어야 할게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비상식량은 어디 간 거지. 자신이 잠든 사이 나가기라도 한 걸까.
환인은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괴물과 짐승하고 싸울 때도 알아서 자기 몸을 지켰을 만큼 똑똑한 녀석이다.
여기가 새 보금자리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주변을 둘러보러 나가기라도 한 거겠지.
식량 보따리에서 파란색 당근 비슷한 채소를 챙긴 환인은 창과 지팡이를 들고 동굴 입구로 나와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찌륵찌륵 희미한 벌레 소리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새소리. 그리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
아삭, 양파 식감의 파란 당근을 베어 문 환인은 입구를 완전히 가린 풀줄기를 살짝 젖혀 바깥을 살폈다.
표고가 100m도 되지 않지만 일단 산속 계곡이다. 물줄기까지 흐르고 있으니 생태계에 포함된 짐승이나 괴물은 틀림없이 존재할 터.
바깥을 예의 주시하며 신포도 맛 파란 당근을 모두 먹어 치웠을 때 비상식량이 소리 없이 동굴로 날아들어 왔다.
“무음 비행도 할 수 있었나.”
꽥.
산책을 다녀온 것처럼 아무 일 없이 돌아온 비상식량의 등을 토닥여주던 환인은 문득 비상식량이 발에 뭔가를 꼭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을 내밀자 비상식량이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다.
“짐승의 털이군. 이 색은…… 푸른 표범?”
풀줄기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비춰보며 말하자 정답이라는 듯이 꽥, 하고 우는 비상식량.
그리고 다른 발에 쥐고 있는 것도 주는데 그것은 처음 보는 털이었다. 살짝 과장 보태서 바늘이라고 할 만큼 뻣뻣하고 굵은 갈색의 털.
‘멧돼지 털이 이것과 비슷하다고 들은 거 같은데…….’
여기는 지구가 아니니 전혀 다른 생물의 털일 수도 있다.
일단 털이 굵고 긴 것만 봐도 덩치가 큰 것을 짐작한 환인은 후, 작게 웃은 뒤 비상식량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정찰까지 해오다니, 잘했다.”
꽥!
이미 낮에 한 번 마주쳤던 푸른 표범은 당연히 주행성일 테고, 강침 같은 털의 주인은 주행성일까 야행성일까.
멧돼지 같은 습성이라면 밤에도 돌아다닐 가능성도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사이 강가에 짐승이나 괴물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고 풍경 소리에 이질적인 것이 섞이는 일도 없었다.
평온한 밤의 시간이 흘러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