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019 수해강줄기
* * *
끼이이이루루루
전투기 사이즈의 갈매기 같은 생명체가 좌우 길이 12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날개를 펼친 채 대 호숫가의 절벽 근처를 지나간다.
쐐애애액!
“…….”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정말 전투기가 지나가는 것 같은 소음이 뒤따르는 것을 들으며 환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조류의 시력을 너무 과소평가 한 건가. 설마 점으로밖에 안 보이는 거리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날아오다니.
처음에는 그저 위치를 이동하는가 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바뀌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점에 불과하던 것들이 점점 크기를 키워가더니 급기야 무력 시위를 하듯이 절벽 근처를 비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끼루루르르릿
쒸아아아악!!
재차 지나가는 거대 갈매기 괴물을 보곤 절벽에서 좀 더 떨어진다. 이제 절벽 근처라고 하기에도 먼 위치인데도 거대 갈매기 괴물이 지나갈 때마다 소음에 몸이 진동하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비상식량이 불러들였나 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동족을 납치당했다는 분노 때문인가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어찌 됐든 비상식량이 떠나갔을테니까.
하지만 비상식량은 신나할지언정 환인의 어깨에 딱 붙어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환인은 고민했다.
‘이렇게 목표로 포착된 상황이면 강줄기로 가는 것은 무리다. 숲을 나서자마자 사냥당할 텐데…….’
그렇다고 해서 여기가 안전하다는 뜻도 아니다.
덩치가 덩치이니만큼 숲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겠지만, 녹색 괴물이 영혼을 부리고 도마뱀 인간이 투명화를 쓰는 세상이다.
저렇게 날다가 느닷없이 깃털 미사일을 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꽥. 꽤괙.
“조용히 해라.”
신난 것처럼 몸을 들썩이며 꽥꽥 우는 비상식량의 부리를 툭 건드린 환인은 재차 파공성,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를 남기며 지나가는 갈매기 괴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놈들은 비스듬하게 날아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어서 비교적 색과 모습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는데, 크기를 제외하고 모습은 갈매기와 매우 흡사했다.
등이나 날개 위쪽은 바다처럼 푸른색. 배나 날개 아래쪽은 구름처럼 하얀색을 띠고 있었는데 저런 색 분포가 뜻하는 것은 하나.
천적에게서 몸을 지키기 위한 보호색, 혹은 위장색이다.
그 점이 잘 이해되지 않는 환인이었다.
저만한 덩치에 저런 속도를 낼 수 있고 노란색의 두 다리는 작은 나무 기둥만 한데다 날카로운 부리는 불곰마저도 쉽게 찢어발길 것 같은 흉기다.
그런데 위장색이 필요하다고?
끼이이루루루룩!!
“미친!”
생각을 이어가던 환인은 높게 두텁게 자란 나무 사이로 갈매기 괴물 한 마리가 자신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오는 것을 목격, 기겁해서 숲 안쪽으로 달음박질쳤다.
쿠과과광! 콰과광, 꽈광! 콰지지직!
그리고 뒤쫓아오는 숲이 부서지는 소리, 땅의 흔들림.
환인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무식하게 돌진해오다니! 새대가리라는 단어는 과학이었나?!
끼루루룩! 끼루룩!!
콰과광! 쿠궁, 쿠콰광!
숲에 충돌하다 못해 나무 십여 그루를 박살 내며 들어온 갈매기 괴물이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발버둥 친다.
쿠크리처럼 날렵한 날개가 휘둘러질 때마다 나무가 부서지고 땅이 폭발하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지며 숲을 시끄럽게 만들지만, 쓰러지고 반쯤 부러진 나무에 깔려 더 이상 못 들어오는 갈매기 괴물의 모습에 환인은 잠시 멈추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름 4m~15m 정도로 굵기가 제각각인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란 밀림이다.
아무리 괴물이라 해도 저만한 덩치로 이런 밀림을 더는 파고들 수는 없겠지.
끼루루루! 끼룩!
박살 나고 부러진 수많은 나무에 깔려 버둥거리는 거대 갈매기 괴물을 차분히 응시하던 환인은 계속해서 대호수와 멀어져갔다.
나무에 깔려 발광하는데도 상처가 나긴 커녕 깃털 한 장 손상되지 않은 괴물이다.
저런 괴물의 영혼은 어떤 강령 효과를 가지고 있을까 궁금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저런 괴물에게 덤비는 것은 자살행위.
‘이러든 저러든 강을 건너긴 해야 할 텐데…… 이 기회에 그냥 강 하류로 내려갈까.’
차라리 차분하게 근방의 지도를 작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하던 환인은 문득 주위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포식자에게 노려지고 있는 듯한 긴장감이 이러할까.
심장이 꾸욱, 옥죄이는 감각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환인은.
흐로로로로롱??!!
“……!!”
하마터면 가슴을 움켜쥐고 주저앉을 뻔했다.
집채만 한 바위 근처에서 들었던 정체불명의 포효 소리. 가슴이 진탕되고 오한이 일다 못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리게 만들던 그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큭, 소리 없는 비명을 토해낸 환인이 소리가 들려온 반대로 뛰려던 찰나였다.
흐르르르…….
몸을 돌린 순간 시야 전부를 가린 괴수의 모습에 환인의 두 다리는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푸른 불길에 휩싸인 커다란 짐승 한 마리가 환인의 지척에서 불길이 깃든 숨결을 흘린다.
후웅 열기를 품은 바람이 환인을 치고 지나가며 머리를, 옷자락을 나부끼게 만든다.
환인은 코끼리만큼이나 거대한 흰색의 고양잇과 맹수의 자태에 할 말을 잃었다.
흩날리는 백색 장모??에 금색의 줄무늬.
길게 자라난 어금니는 검치호보다 몇 배는 더 길다. 작은 나무 기둥만 한 네 다리와 어깨에서는 푸른 불길이 회오리처럼 휘감은 채 사납게 일렁인다.
보고만 있어도 무릎이 풀릴 것 같은 괴수는 자신의 앞에 선 환인을 잠깐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더니.
쾅
“큽!”
갑자기 사라졌다.
쾅, 소리의 벽이 부서진 듯한 굉음과 충격파에 뒤로 한참을 나가떨어진 환인은 어지러움을 꾹 참고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흐르로로로!
끼르르아아악!!
쿠콰과과광! 꽈과광, 쿠구구구구……!!
전투기 사이즈의 갈매기와 코끼리 사이즈의 괴수가 벌이는 혈투를 볼 수 있었다.
푸른 불꽃의 호랑이가 앞발을 휘두르면 수 미터 두께의 나무들이 굉음과 함께 산산이 조각난다.
갈매기 괴물이 날개를 휘두를 때마다 칼날 같은 바람에 나무가 깍둑썰기한 것처럼 잘게 토막 쳐진다.
문자 그대로 괴수 대격돌.
두 마리가 한데 뭉쳐 뒹굴면 아름드리만 한 거목이 수수깡처럼 부러져나갔고 각각의 공격이 빗나갈 때마다 상수리나무 굵기만 한 나무가 터져서 산산이 흩날리는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꽥!
그때 비상식량이 도망가지 않고 뭐하냐는 듯이 환인의 정수리를 콱 쪼고는 푸드득 날아올랐다.
그 고통에 퍼뜩 정신을 차린 환인도 두 괴물을 뒤로하고 전력 질주로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끼르롸라라……!!
흐로로로로……!!
쿠구궁, 두둥, 쿠과과과과…….
멀어질수록 두 괴물의 포효와 굉음이 점차 작아지지만, 환인은 안심하지 못했다.
입술을 꾹 깨문 환인은 짐승 머리 괴물의 질 낮은 강령 효과까지 받아 가며 폐가 찢어져라 달렸다.
“후욱. 후욱.”
주위의 나무와 수풀, 덤불이 순식간에 다가왔다가 옆으로 스쳐 빠르게 지나간다.
몸이 내 것 같지 않은 기묘한 감각 속에서 전력으로 달려 나가던 환인은 진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널브러진 시체 하나를 목격하곤 눈을 크게 뜨며 달리기를 멈추었다.
거대하고 뾰족한 한 쌍의 왕관같은 사슴뿔.
사슴과 말을 섞은 듯한 신비한 초록빛 외형에 다리가 여섯 개인 생물.
기린만큼이나 거대한 생물이 배가 다 헤집어져 있고 목덜미도 절반 이상 뜯겨나가 죽어있는 모습에 얼마 전, 자신의 앞에 나타났던 동물의 영혼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설마 여기는…….”
푸른 불꽃 호랑이의 앞마당인가?
그때 환인의 시선이 나무 한 그루의 몸통에 틀어박혔다.
‘저 발톱 자국은……!’
틀림없다.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밀림에 떨어지고 첫날 밤, 나무뿌리 구덩이 속에서 보았던 샛노란 눈알.
영역을 표시한 것처럼 거대한 나무 기둥에 새겨져 있던 똑같이 거대한 발톱 자국.
그리고 집채만 한 바위 근처에서 들었던 정체불명의 짐승이 지르던 포효.
그때 본 눈알은 샛노란 색이었다. 하지만 저 푸른 불꽃 호랑이의 눈은 청백색의 불꽃을 내뿜듯 푸르게 빛났다.
하지만 집채만 한 바위 근처에서 들었던 짐승의 포효와 저 푸른 불꽃 호랑이의 포효는 똑같았다.
그렇다면 저…… 푸른 불꽃 호랑이는 그때 그 짐승과 다른 놈인가?
저런 비슷한 놈이 이 밀림에 몇 마리나 있다는 뜻?
의문을 파헤칠수록 의문이 크기를 더 키운다.
방금 저 푸른 불꽃 호랑이의 속도는 자신이 보지 못할 정도였다.
소닉붐이 발생할 정도라면 수백 미터쯤은 고작 몇 초 만에 주파할 정도의 속도.
그러면 그때 자신이 녹색 괴물을 제물로 바친 게 무색할 만큼, 푸른 불꽃 호랑이가 마음먹었다면 자신도 사냥했을 거라는 뜻인데 어째서 놔둔 걸까.
나 따위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짓밟을 수 있는 존재라서?
너무 놀라면 오히려 침착해진다더니 먹먹함에 두서없이 엉키고 있던 사고가 차분하게 가라앉고 긴장과 흥분으로 금세 거칠어졌던 숨결이 안정된다.
말사슴의 시체를 뒤로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한 환인은 차분해진 머리로 상황이 그렇게 최악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드러난 정황이 그렇다.
이 근방을 돌아다니며 마주친 녹색 괴물이나 짐승 머리 괴물의 숫자만 40여 마리에 이른다.
푸른 불꽃 호랑이의 영역 의식이 확고했다면 이 근방에는 작은 동물을 제외한 생명체는 존재하지도 못했을 터.
무엇보다 푸른 불꽃 호랑이는 자신을 무시하고 갈매기 괴물을 덮치지 않았던가.
말사슴 괴물이 죽은 것은 푸른 불꽃 호랑이에게 도전했다가 패했다고 보는 쪽이 더 설득력이 높다.
그게 아니라면…….
‘이 근방이 푸른 불꽃 호랑이의 테리토리가 된 건가.’
자신이 말사슴 영혼을 본 그날 푸른 불꽃 호랑이가 말사슴을 죽이고 이곳을 자신의 영역으로 접수했다면 이 모든 게 설명된다.
그리고 저 푸른 불꽃 호랑이가 영역 개념이 희박하다는 설보다, 새로이 영역을 확보했다는 쪽의 가설이 더욱 타당하다.
인생이 이렇게 꼬일 수가 있나.
새삼 처지를 자각한 환인은 입매를 비틀어 냉소를 짓다가 저 앞에서 노란 열매가 달린 높은 나무를 발견, 눈을 빛냈다.
아니나 다를까 아득히 높은 나무 위에서 두 꼬리 원숭이들이 고개만 빼꼼 내밀어 이쪽을 구경 중이다.
저만치 앞서 날아가고 있는 비상식량에게 휘익 휘파람을 불어 신호를 보냈다.
꽥?
“비상식량, ‘저거’ 잡아!”
…꼬액!!
환인이 두 꼬리 원숭이를 손가락질하며 말한 뜻을 즉시 이해한 비상식량은 거의 직각에 가까운 상승 비행을 펼쳐 나뭇가지 위에 모여있던 두 꼬리 원숭이들을 덮쳤다.
끼야악!?
꺄악, 꺄아악!
끼이잇!
보금자리가 들쑤셔진 바퀴벌레 떼처럼 사방으로 도망가는 두 꼬리 원숭이들.
그중 한 마리의 목덜미와 팔을 움켜쥔 비상식량에게 환인이 소리쳤다.
“앞으로 ‘던져’!”
꽤액!
끼이익!
그리고 떨어지는 두 꼬리 원숭이를 향해 달려가다가 공중에서 캐치.
우득.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달리며 원숭이의 목을 180도 돌려 분질러 죽였다.
20초 정도 원숭이의 시체를 옆구리에 낀 채 달리고 있으니 혀를 빼물고 죽은 원숭이의 몸에서 희끄무레한 영혼이 빠져나온다.
환인은 영혼을 곧장 끌어들여 몸에 씌웠다.
“후우우욱……!”
강령이 이루어지자 심장이 빠르게 펌프질하며 혈류를 가속하니 두 다리가 더욱 빨리 움직이며 달리기 속도 또한 체감상 몇 배나 빨라진다.
‘원숭이 시체는…….’
살면서 자연스레 갈고 닦인 직감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팽개쳤다간 뭔가 큰 문제가 생긴다고 말이다.
직감이 이렇게 경고를 보내는 일은 1년에 몇 안 되는데 그 몇 번을 무시하면 꼭 좋지 않은 일이 생겼었다.
넘어져 뼈가 부러지거나, 팔았던 주식이 급등하거나, 매수한 코인이 떡락하거나.
달리기에 조금 걸리적거리지만 강령 효과 덕분에 부담되지는 않아 어깨에 맨 짐승 가죽 봇짐에 대충 욱여넣고 두 다리에 더더욱 힘을 줘서 땅을 박찬다.
동시에 나무 타기의 지식이 머릿속에 떠올라 시선이 머리 위를 자연스럽게 훑었지만, 20여 미터 상공에 만들어져있는 나뭇가지의 길은 두 꼬리 원숭이면 몰라도 환인의 몸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크릉?
으르르릉!
키헥!?
키익!?
키요오오!
그러던 중 네 마리의 짐승 머리 괴물과 세 마리의 녹색 괴물이 대치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피하긴 늦었다.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더욱 시간 낭비를 할 상황.
환인은 머릿속으로 상황을 재현해보다가 될 거 같다는 생각에 속도를 살짝 늦추며 두 무리 사이로 난입.
크엑?
키힉?!
컹컹! 아르르를!
월월월!!
흠칫 놀라고 경계하는 일곱 마리의 괴물을 상대로 창을 번개같이 휘두르고 찔러 불과 일곱 번의 공격으로 네 마리를 죽이고 세 마리를 쓰러트렸다.
킥, 키힉…….
끄르르르…….
‘두 꼬리 원숭이의 강령 효과가 있다지만 이렇게나 수월하게 죽이다니.’
불과 숨 몇 번 내쉴 시간에 벌어진 일이고 더욱이 한 손으로만 해내서 신체 변화의 체감이 극심하다.
세 마리가 쓰러졌다지만 가슴이나 배, 다리를 움켜쥐고 있었기에 추적당할 염려를 놓고 다시 달려 나가려는데…….
우으오오오……!!!
섬찟한 포효와 함께 대량의 기파??가 해일처럼 밀려와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기파에 휘말린 나무와 수풀, 덤불이 비명을 지르며 흔들린다.
푸스스스…!
깨애앵!
키야으으…….
비명을 지르고 발작을 일으키는 괴물들처럼 환인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에 다리가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심적 충격 때문인지 강령까지 풀린 상황이다.
이를 악물고 억지로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굳었던 다리가 풀리는 느낌에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러나 흘러가는 상황은 환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머리 위로 벼락이 한 줄기 지나갔다고 느낀 순간 어마어마한 광풍이 몰아쳤고, 환인이 눈을 떴을 땐 눈앞에 푸른 불꽃 호랑이 괴물이 태산처럼 우뚝 서 있었던 것이었다.
“…….”
쫓아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었는데.
시퍼렇게 불타는 커다란 눈동자와 마주한 환인은 헛웃음을 흘렸다.
코끼리 같은 거대한 덩치보다, 몸을 휘감고 있는 위압적인 푸른 불길보다, 갈매기 괴물의 피로 의심되는 선혈이 곳곳에 묻어있는 몸보다 이글거리는 푸른 눈동자에서 느끼는 압박감이 더 크다.
괴물들의 피가 묻은 창극이 흔들린다. 손이, 몸이 거부할 수 없는 포식자 앞에서 잘게 떨린다.
“……후우.”
내 목숨은 여기까진가.
처음 밀림에 떨어진 뒤 걸어왔던 행적을 떠올려보았지만 지금 상황을 피할 길은 없었다.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진작에 죽었을 테니까.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다.
그렇게 받아들이자 몸의 떨림은 멈췄다.
위압 당하긴 했지만, 겁을 먹거나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진 것도 아니었기에 환인은 몸을 곧게 폈고 창을 겨눈 뒤 푸른 불꽃 호랑이 괴물을 응시했다.
‘멋지군.’
네 다리로 우뚝 선 기세는 태산처럼 단단해 보였고 꼿꼿이 세운 머리와 자세는 그 어떤 더러움이나 비열함이 느껴지지 않는 곧은 프라이드가 느껴질 정도였다.
영혼 시야로 보이는 푸른 불꽃 호랑이의 색계통은 그 모습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청백색.
솔직히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멋진 생명체다.
꾸에엑! 꽤액!
잠시 잊고 있던 비상식량이 퍼덕거리며 날아와 푸른 불꽃 호랑이와 환인의 사이에 끼어든다.
멍청하긴. 그냥 도망갈 것이지 뭐하러 돌아왔단 말인가.
환인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는 도망치라는 심정에 창끝으로 비상식량을 슬슬 밀어냈지만, 비상식량은 떠날 생각은커녕 급기야 푸른 불꽃 호랑이 머리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꽥꽥 울어댄다.
“…….”
멍청한 게 아니라 겁대가리가 없었던 건가.
비상식량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잠시 기막혀하는데 그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환인을 응시하던 푸른 불꽃 호랑이는 비상식량을 훑더니.
쉬익 탁.
뀍!
백호의 그것 같은 긴 꼬리를 가볍게 휘둘러 비상식량을 쳐냈다.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이쪽으로 빙글빙글 떨어지는 비상식량을 황급히 받아낸 환인은 죽은 게 아니라 단지 기절했을 뿐이라는 것에 자신도 모르게 안도했고.
흐르르…….
푸른 불꽃 호랑이의 시선이 옆구리의 두 꼬리 원숭이 시체에 닿았다고 느꼈을 땐 긴장감에 몸이 굳어버렸다.
직감이 경고한 것은 이 상황이었나.
푸른 불꽃 호랑이의 시선은 계속 움직여 창과 돌도끼, 곤봉에 덕지덕지 묻은 괴물의 흔적에도, 서서히 더러워져 가는 정장 코트의 겉에 묻은 괴물의 피도 훑고 지나간다.
마지막으로 사슴뿔 지팡이의 뿔에 맺힌 여섯의 영혼 구슬에도 시선을 주었다고 느낀 순간.
푸른 불꽃 호랑이는 고개를 내리더니 지근거리에서 환인을 노려보았다.
숨결마저 느껴지는 거리에서 살기나 공포보다는 이 이상 숲을 더럽히지 말라는 경고 같은 것을 더 강하게 느낀 환인이었다.
더럽히지 말라니, 무엇을?
동물을 죽이지 말라는 뜻인가? 아니면 숲의 자원을 채집하지 말라는 거?
환인이 약간의 혼란에 빠져있을 때 푸른 불꽃 호랑이는 고고한 시선으로 강 쪽을 응시하더니 스윽 곁을 스쳐 지나가 반대편 숲으로 사라졌다.
“…….”
푸른 불꽃 호랑이의 우아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환인은 푸른 불길이 나무에 가려져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풀썩, 땅에 주저앉았다.
폭주하는 덤프트럭을 간발의 차이로 피한 느낌이다.
뒤늦게 심장이 방망이로 때리는 것처럼 쿵쾅거리고 식은땀이 온몸에서 쏟아진다.
타고난 성정으로 이성은 어떻게 유지했지만, 육체는 압도적인 포식자의 영향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숨을 몰아쉬던 환인은 전투 불능에 빠졌던 괴물 세 마리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는 것을 보다가 일어서서 강 하류를 향해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푸른 불꽃 호랑이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하나는 확실했다.
이 밀림에서 계속 머무르다간 죽는다는 것.
이번에는 넘어가 주었지만 다음번에도 넘어갈 거라는 보장이 없다.
강 건너편도 푸른 불꽃 호랑이의 영역일 수 있고 아니면 비슷한 다른 생명체의 영역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벗어나긴 해야 한다.
더는 미적거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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